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왕조와 무고한 백성들은 7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수탈과 온갖 고통을 다 겪었다. 개국 200년 만에 들이닥친 임진왜란 발발의 내막은 명재상 유성룡이 전쟁이 끝난 후에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에서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懲毖錄‘이란 이름은 시경(詩經)의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에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임진왜란을 회고하고 반성하여 뒷날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졌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과 어릴적 친구로 임진왜란 당시 파당정치의 희생양이 된 이순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하지만 그도 정치를 하는 입장에서 또 자신이 동인의 분파격인 남인의 당수로써 이순신 만을 두둔 할 수만은 없었다.
‘징비록’에는 그런 솔직한 예기와 함께 당시 임진왜란을 둘러싼 뒷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데, 임진왜란의 발발직전의 상황을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장면에서 엿 볼 수 있다.
조선왕조는 일본과 수교를 한지 200여 년 동안 서로 간에 사신을 보내 경조의 예절을 지켰으나, 훗날 점점 멀어져 사신을 보내지 않게 되었다.
이 당시 일본은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일본제후들을 평정하여 국왕이 되었다. 그는 무력으로 일본 국내의 66주를 통일한 뒤 마침내 외국을 침략할 뜻을 품었다. 그래서 “우리 사신은 자주 조선에 가는데, 조선사신은 자주 오지 않으니 이것은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귤강광(다치바나 야스히로)을 조선에 보내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는데, 그 서신의 언사가 거만해서 “이제 천하가 짐의 한 줌안에 들어올 것이다”라는 말까지 있었다.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돌아갈 때 조선 조정에서는 다만 그 서장에만 답하고, 수로는 모른다는 핑계로 사신을 보내지 않았는데, 사신이 돌아가서 사실대로 보고하니, 풍신수길은 크게 노하여 귤강광과 그 일족을 다 죽였다. 그리고 대마도주 평의지를 보내어 다시 통신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조선에서는 수로에 익숙지 못하다는 핑계로 통신하기를 거절했고, 계속해서 통신에 대한 의론이 결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유성룡을 비롯한 신하들이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보답하도록 하고 또 그들의 동정도 살펴보고 오는 것이 잘못된 계책은 아닐 것입니다”라고 선조(14대 宣祖)에게 아뢰어 그제야 비로소 조정의 의론이 결정되었다.
이때 황윤길과 김성일이 각각 정사와 부사가 되어 평의지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1591년 봄 통신사는 일본에서 돌아왔다. 황윤길이 부산으로 돌아오자 일본의 정세를 시급히 보고하며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복명할 때, 임금께서 불러 보시고 물으시니 황윤길은 그전의 말대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김성일은 “신은 그러한 정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라며 “황윤길이 민심을 동요시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의 말은 황윤길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묻자 “나 역시 어찌 왜적이 끝내 동병치 않을 것이라고 단언 하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놀라 당황 할 것이므로 이를 해명했을 뿐입니다.”라고 둘러댔다.
오늘날의 우리의 현실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국익보다 당파싸움과 이익에 더 몰두하다 일본에게 ‘백색국가’제외결정을 당한 것은 여야모두가 공동의 책임을 저야 한다. 임진왜란(1592.)과 한일합방(1910.)을 당한 모든 원인은 우리의 단합된 힘과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만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힘이 있다.
장로신문 2019년 8월 24일 시론에서
김상태장로(한국장로문인회 상임고문, 면목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