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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 반대에도 ‘쉬운 책 만들어 백성들 교화’…그림풀이 덧붙인 ‘삼강행실도’ 까지 만들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표를 ≪훈민정음≫ 해례본 어제 서문인 창제취지문에서 명명백백하게 밝혀 놓았다. 곧 문자(한문)를 몰라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글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편안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내용을 믿지 않거나 곡해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양반들을 위한 한자음 발음 기호로 만들었다는 엉뚱한 주장이 나돌 정도다.
세종의 주장을 입증할 자료가 넘치는데도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 창제 동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차근차근 살펴보자. 가장 명백한 증거는 《삼강행실도》 언해본이다. 한문으로 된 책을 백성에게 쉽게 설명하려다 보니 만화를 그렸고, 만화로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 한문을 번역해 붙였다. 이는 성종 때 간행은 되었으나, 훈민정음으로 언해한 것은 세종 때일 것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에는 우리말을 표현할 문자가 없어 한자를 빌려 적었다. 입으로는 한국말을 쓰고, 글을 쓸 때는 한자를 쓰는 이중 언어생활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입으로는 “난 책을 좋아해.”라고 말하면서, 글로는 ‘我愛書(난-좋아해-책을)’이라고 쓰니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나마 양반 사대부들은 한자를 배울 기회가 많지만, 일반 백성들은 한자를 배울 기회마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쉬은 글을 배워, 억울함 없도록
표현하고 싶은 뜻이 있어도 한자를 몰라 소통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넘쳐났다. 또한 죄를 지은 사람들의 자세한 사정을 적은 문서들이 한자나 이두로 작성되어 있어 죄인을 다스리는 관리들이 이를 잘못 이해해 그릇된 판결을 내리는 경우도 많았다. 세종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던 세종은 백성들에게 책을 통해 성현의 가르침과 삶의 지혜, 올바른 생활 태도 등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런데 한자로 된 책은 사대부들만 읽을 수 있으니 소용이 없었다. 결국 누구나 하루아침에 배워 쓸 수 있는 쉬운 글자를 만들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우리말을 자유롭게 적을 수 있는 훈민정음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삼강행실도》 언해본 효자도 2ㄴ-3ㄱ.
양향이라는 딸이 아버지의 목숨을 건진 효심을 기려주기 위해 홍문을 세워 주었다는 이야기로 만화 그림이 먼저 나오고 한문 원문, 만화 위에 언해를 배치해 누구나 알기 쉽게 편집했다. @국립한글박물관(2023), ≪삼강행실도언해≫ 22-23쪽.
그렇다면 세종은 언제부터 훈민정음 창제를 고민했을까? 답은 임금의 정치 행위를 낱낱이 기록한 《세종실록》에 있다. 훈민정음 창제 17년 전인 1426년, 그러니까 세종이 임금이 된 지 8년이 되던 해였다. 10월 27일 자 기록에 세종이 “사람과 법은 함께하는 것(人法竝用‧인법병용)”임을 강조하며, 법률문이 복잡한 한자와 이두로 되어 있어 문신들조차 알기 어렵고 배우는 학생들은 더욱 어려움을 지적했다고 쓰여 있다. 법률문과 같은 꼭 필요한 정보의 소통 문제를 고민한 것이다. 기존 문자의 문제와 효율성에 대한 세종의 구체적인 고민이 드러난 첫 공식 기록이다.
만화책을 펴낸 최초의 임금
이런 고민은 훈민정음 창제 11년 전인 1432년 11월 7일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세종이 신하들에게 주요 법조문을 우리 식 한자체인 이두문으로 번역한 뒤 반포하여 무지한 백성들이 죄를 짓지 않을 방법을 의논한 것이다. 이에 세종의 최측근 신하 중 한 사람인 허조가 “백성들이 문자(이두문)를 알면 부작용이 커진다.”라며 반대했다. 그런데도 세종은 법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며 옛 기록에서 백성들에게 가르친 사례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두 사건에서는 읽기 문제만 언급했지만, 세종은 더 나아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의 표현 문제로까지 발전시켰다. 1444년의 최만리 외 6인의 언문 상소는 이와 관련한 세종의 말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
사형 집행에 대한 법 판결문을 이두문자로 쓴다면, 글의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이제 그 말을 언문으로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
《세종실록》 1444년(세종 26년) 2월 20일
글자에 대한 세종의 고민과 새로운 글자를 창제하고자 하는 동기는 1446년 9월 상한에 완성된 《훈민정음》 해례본 어제세종 서문에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나라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글 모르는 백성이 말하려는 것이 있어도 끝내 제 뜻을 능히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더욱 구체적인 동기가 된 사건도 있다. 훈민정음 창제 15년 전인 1428년에 진주에 사는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세종은 백성의 교화를 위해 《효행록》이란 책(한문)을 펴낼 것을 집현전에 지시했다. 도덕 윤리는 일벌백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니 책을 통해 근본적으로 교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6년 뒤인 1434년에 드디어 그림풀이를 덧붙인 책 《삼강행실》의 제작이 끝났다. 세종은 인쇄한 책을 널리 배포해 한자를 모르는 어린아이와 민가의 여성들까지도 그 내용을 알게 하도록 지시했다. 그해 11월에는 종친과 신하들은 물론, 여러 도에도 책을 내려 보냈다.
이러한 고민 역시 훈민정음 창제 후 최만리가 올린 언문 상소로 인한 논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사관은 세종이 언문 상소의 핵심 인물인 정창손에게 직접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세종실록》 1444년(세종 26년) 2월 20일
이에 대해 정창손은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라고 반박하며 책과 문자의 효용성을 매우 낮게 평가했다. 한문으로 된 책을 읽으며 성인의 도를 깨우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사대부 학자로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세종은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렬한 선비로다.”라고 조금 과격한 말로 꾸짖었다. 웬만하면 벌하지 않는 세종의 정치 스타일로 볼 때 그 당시 크게 화를 냈음이 분명하다.
일관된 훈민정음 창제 동기
결국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통해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했던 세종의 의지와 정책은 그가 승하한 뒤 펴낸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까지 수록되었다. 세종의 유지를 받든 세조와 성종, 최항 등이 《경국대전》 편찬에 직접 매달린 결과다.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 사족의 가장·부로(노인) 혹은 교수·훈도(조선 시대 서울과 지방의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한 정9품종의 교관) 등으로 하여금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가르쳐 이해하게 하고, 만약 대의(大義)에 능통하고 몸가짐과 행실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서울은 한성부가, 지방은 관찰사가 왕에게 보고하여 상을 준다.
《경국대전》 권 3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1년 전인 1442년에 《용비어천가》를 짓고자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자료 수집을 명했다. 이 또한 노래를 문자로 적어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에 맞닿아 있어 책을 통한 교화 문제와 이어진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표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세종의 가상 독백체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입으로 하는 말과 쓰는 글말(한문)이 달라도 아주 다르다. 한문과 이두문은 똑똑한 양반(문신)들조차 어렵다. 더욱이 양반들만이 조선의 백성은 아니다. 백성은 하늘이다. 백성이 중심이 되는 민본의 나라를 만들자. 그런 나라를 위해서는 중요한 정보와 지식을 가르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책이 중요하다.
그런데 양반이 아닌 백성들은 한자를 읽을 줄 모른다. 그들이 책을 보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한자와 이두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쉬운 글자를 만드는 것. 서당에 다닐 수 없는 백성조차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자. 그런 글자는 말소리의 이치를 반영한 소리글자밖에 없다. 소리글자로는 인도의 산스크리트 글자와 몽골의 파스파 글자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들은 부족하다. 그리하여 이미 일상생활에서는 죽은 글자가 되지 않았는가. 게다가 섬세하게 발달한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도 없다. 이왕 만드는 소리글자라면 자연의 소리를 모두 적을 수 있는 바른 소리글자를 만들자. 바로 ‘정음’이다. 정음의 이치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말소리가 나오는 실체를 관찰해서 그 원리를 반영하면 최고의 글자가 될 것이다.
집현전 학사들에게 연구해서 만들도록 할까? 그건 불가능하다. 나의 의도를 이해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이해했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한자 기득권 때문에 반대할 것이다. 우선 바른 소리글자를 만들고 나서 나의 뜻에 동의하는 학사들과 조용히 후속 연구를 진행하자. 실제로 새 글자를 보면 그리 많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자를 배우는 데 매우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세종은 비밀 연구 끝에 28자를 창제한 뒤 1443년 12월 어느 날 조용히 그 사실을 알렸다. 당시 상황으로는 거창하게 알리기 어려워 집현전 일부 학사들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알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명확한 날짜를 알 수 없었던 사관들은 그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날인 12월 30일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 이 글자는 옛 전서체를 닮았으되,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지며, 이 셋을 합쳐야 글자(음절)가 이루어진다. 무릇 중국 한자나 우리나라 말이나 모두 능히 쓸 수 있으니, 글자가 비록 간결하지만 요점을 잘 드러내고, 요리조리 끝없이 바꾸어 쓸 수 있어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컫는다.
《세종실록》 1443년(세종 25년) 12월 30일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주요 사건 흐름도.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사관들은 훈민정음의 실체와 가치를 간결하지만 차분하게 기록하여 역사에 남겼다. 지금까지의 역사 흐름을 정리한 것이 위의 흐름도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이 글은 2023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최초 복간본의 필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를 대중용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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