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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하는 질문)
1. 메노나이트 교회가 일반 교회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요? 2. 성소가 없다면 성일(거룩한 날)도 없는 것인가요? 3. 그렇다면 성직도 없는 것인가요? 4 그렇게 모두가 제사장이라면 목회자는 왜 필요할까요? 5. 어떤 자격 갖춘 사람이 어떻게 교회의 목회자로 세워지나요? 6. 그렇다면 목회자의 권위란 무엇인가요? 7. 교회의 멤버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요? 8. 목회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9. 그렇다면 멤버의 구체적인 역할은 무엇인가요? 10. 헌금이나 십일조는 해야 하는 것인가요? 11. 일반 교회와 다른 점이 많네요. 왜 그렇게 다른 것이지요? 12. 의사결정(Decision Making)은 어떻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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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하는 질문에 대한 교회의 답변)
1. 메노나이트 교회가 일반 교회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요?
신앙고백에 대해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보다 교회에 대한 생각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이며, 특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따르겠다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건물은 모이는 장소일 뿐, 신성한 곳이 아닙니다.구약에서 그런 것처럼, 성전과 성소 등 특별한 장소를 구별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합니다.
2. 성소가 없다면 성일(거룩한 날)도 없는 것인가요?
예, 모든 날이 거룩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안식일을 평일과 특별히 다르게 보내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신 이유도, 안식일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참 뜻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주일 중에 하루를 안식일로 구별한 이유는 나머지 6일을 평일로 덜 거룩하게 여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 매일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이 되도록, 안식일에는 쉼과 새로운 동기부여의 기회로 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런 동기부여를 위한 예배와 모임은 일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형제 자매들의 선택에 따라 더 자주, 혹은 날마다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3. 그렇다면 성직도 없는 것인가요?
교회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이라면, 모든 사람이 성직자입니다.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역자(제사장)입니다.성직과 속직, 성직자와 평신도 등의 구별도 없습니다.
4. 그렇게 모두가 제사장이라면 목회자는 왜 필요할까요?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 가정에서 모였던 교회들마다 목회자가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임의 규모가 커지면서, 역할 분담을 통한 효과적인 운영을 위해, 집사나 목사 등의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세워졌겠지요. 세워지는 목회자는 특별한 성직자가 아닙니다. 다른 형제 자매들이 세상에서 각자의 직업과 역할을 통해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면, 목회자는 교회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교회의 일도 함께 나눌 수 있기에 메노나이트 교회에는 전임 목회자가 없는 교회도 많습니다.그렇기에 세워지는 목회자는 그 필요의 크기에 따라 part time, half time, full time 등으로 일하며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일반 교회 목회자는 다른 직업을 갖지 않게 되어 있지요.
5. 어떤자격 갖춘 사람이 어떻게 교회 목회자로 세워지나요? 목회자의 자격은 신학교나 교단에서 주지 않습니다.신학공부 여부와 관계없이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세워질 사람을 가장 잘 알고 가장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신학교 교수도,교단본부도 아닙니다.교회를 이루는 형제 자매들이 가장 잘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신학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더 좋은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경력이 많다고 좋은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형제 자매들을 통해 인정 받고 세워지는 사람이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일반 교회에서는 신학과정을 마치고 교단에서 인정한 자격이 있는 사람만 목회자가 될 수 있지요.
6. 그렇다면 목회자의 권위란 무엇인가요?
진정한 권위는 지위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주장해서 갖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얻게 되는 것이며, 대가를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스스로 권위가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권위는 아무 영향력이 없습니다.메노나이트 교회 목회자의 권위는 사람들과 관계없이 하늘에서 직접 부여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형제 자매들에 의해 인정 받고 부여되는 것이며, 그만큼 존중됩니다. 곧 목회직은 형제 자매들이 그 권위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중단됩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지 않더라도 교단에서 안수 받은 목사라는 신분은 계속되지요.
7. 교회의 멤버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요?
함께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예배나 모임에는 누구나 환영 받고, 목회적 돌봄과 양육도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성경적인 교회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크리스천으로서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멤버십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선언하는 것이고 또한 서로에게 신실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지요. 믿음의 고백을 통해 세례를 받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메노나이트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멤버가 되겠다고 자원할 수 있지요. 메노나이트는 빨리 멤버가 되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진지하게 생각한 후, 자원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정하고, 또한 이미 멤버가 된 형제 자매들과 서로 돌보고 세우는 관계에 충실하겠다는 약속에 의해 멤버가 됩니다.일반 교회는 누구든지 원하면 바로 멤버가 될 수 있지요.멤버가 된다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Chuch is the only society in the world that exists for the benefit of its non members.)
8. 목회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모임이 형제 자매들의 참여를 통해 잘 이루어지도록 돕고, 또한 새로 참여하는 가정과 사람들을 돌보고 세우는 일을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일과 성도들의 가정을 돌보는 일을 주로 하지만, 그것도 목회자가 독점하지 않습니다.그런 일도 은사가 있고 세워진 형제 자매들과 함께 동역합니다.말씀을 전하는 것(설교)과 축복의 기도를 하는 것(축도)도 결코 목회자만의 일로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일반 교회에서는 '설교권'과 '축도권'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설교와 축도는 목회자만이 할 수 있게 되어 있지요.
9. 그렇다면 멤버의 구체적인 역할은 무엇인가요? 멤버들은 상호간의 돌봄과 조언을 주고받고, 재정적인 헌금과 예배 참여와 기도를 통해 회중이 세운 목표와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교회"와 언약의 관계를 세웁니다. 멤버들은 회중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한 의사결정에 참여합니다. 멤버는 회중 조직 내의 직분을 갖고 또한 회중을 대표하도록 세워지기도 하지요. 교회들의 연합 모임 등에 참석할 때, 반드시 목회자(pastor)나 의장(chair person)이 교회의 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 회중을 통해 다른 사람이 대표로 세워져 파송되기도 하지요.
10. 헌금이나 십일조는 해야 하는 것인가요?
하나님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에,우리의 자원이 필요한 것이지요.교회를 통해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재정과 은사와 시간 등)을 제공합니다. 헌금에 십일조라는 규정도 없습니다.십분의 일만이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고 우리는 청지기입니다.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십일조라는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헌금하지 않았고,함께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일에 기쁨으로 자원하여 헌금했지요. 교회를 이루고 교회를 통해 주님의 일을 함께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에게 맡겨진 자원을 드리는 것이지요.
11. 일반교회와 다른 점이 많네요. 왜 그렇게 다른 것이지요?
이런 모든 차이는 교회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일반 교회들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성소나 안식일, 제사장직의 구별을 강조하고 그 전통에 여전히 기반을 두고 있다면, 메노나이트 교회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초대교회의 실천에 더 중요한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12. 의사결정(Decision Making)은 어떻게 하나요?
리더나 특정 소수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다수결로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교회의 사업계획과 결정에 관련한 모임에서의 의사결정은 멤버 각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충분한 토의와 설득의 과정을 통해 가능한 한 합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개요
메노파라는 이름은 온건한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시작한 일을
강화하고 조직화한 네덜란드 사제 메노 시몬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메노 시몬스). 오늘날 메노파는 세계 여러 나라에 퍼져 있으며, 대부분 미국과 캐나다에 집중되어 있다.
종교개혁의 기원
메노파의
기원은 여러 재세례파 집단 가운데 특히 스위스 형제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형제단은 종교개혁 신학자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국가 교회의
요구에 따르지 않아 곧 박해를 받을 상황이었던 1525년 1월 21일 최초로 교회를 구성했다. 츠빙글리가 제시한 요구사항은 재세례파 지도자
콘라트 그레벨, 펠릭스 만츠 등이 성서 연구를 바탕으로 의문을 제기한 유아세례문제였지만 실제 쟁점은 교회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재세례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主)이며, 그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참된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은 국가 행정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서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가 직접 인도한다고 했다. 스위스
형제단은 곧 박해를 받고 유럽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이들의 교리적 입장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고, 이 운동은 한동안 커갔다.
메노파는 16세기 재세례파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 두 운동은 서로 다르다. 1536년 재세례파 운동에 가담한 네덜란드 사제 메노 시몬스는 북유럽에 흩어져 있는 재세례파교도들을 모아 생동감 넘치는 교회를 구성했으며, 이 집단은 그의 이름(메노)을 따서 불렸다. 메노 시몬스가 이끈 모임은 1530년 멜키오르 호프만이 스트라스부르에서 조직한 재세례파와 관련된 또 하나의 집단과 비슷했다. 처음에 그는 스위스 형제단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농민전쟁(1525) 때 토마스 뮌처(1490경~1525) 같은 급진 재세례파적이고 혁명적인 지도자들이 이끈 농민군이 패배하고, 스위스 및 독일 남부의 재세례파 초기 지도자들이 죽자 시몬스는 유럽의 온건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시작해놓은 일을 강화하고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전통으로 기본적인 신앙과 교리를 확정한 2세대 지도자들을 대표한다.
또 하나의 재세례파 운동이 독일 중부에서 한스 후트(1527 죽음), 한스 뎅크(1500경~27), 초기 평신도 신학자 필그람 마르페크(1492경~1556)의 인도로 발전했다. 그밖에 야콥 후터(1536 죽음)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후터파 형제단으로 알려진 또다른 재세례파 운동도 있었다. 후터파는 공동생활과 선교열정으로 곧 유명해졌는데, 이것은 다른 모든 재세례파 집단이 지리적·사회적으로 유럽인들의 삶의 본류에서 물러나 상대적으로 신체적인 안전을 누리게 된 후에도 17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7~19세기의 발전
1574년
네덜란드에서 마지막 순교자가 있은 뒤 메노파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정치적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폴란드 북부에 해당하는 비수아
강 유역으로 이주해 큰 공동체를 이루고 발전했다. 1700년 네덜란드에 있는 메노파 교회의 세례교인 수는 16만 명이었다. 메노파교도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법률상 극히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이들은 상업에 눈을 돌려 부유해졌고 도시화되었다. 신앙문제에서는 인간 향상의 희망이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 달렸다고 본 17~18세기 지식운동인 계몽주의를 따랐고,
예술가·저술가·사회사업 후원자들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교인 수는 점차 줄어 1837년에는 약 1만 5,300명이었다.
스위스에서 메노파교도들은 18세기까지 계속된 박해를 피해 독일 남부, 알자스, 네덜란드,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스위스의 메노파 주교가 교도의 성서적 생활방식을 보존하기 위해 메노파를 떠나 암만파 교회를 세움으로써 큰 분열이 일어났다(1693~97). 17~20세기 스위스, 독일 남부, 알자스의 메노파교도들 대부분은 거의 폐쇄적인 농업공동체를 이루고 단순한 농경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개인적인 신앙체험과 변화를 강조했으며, 루터교에 바탕을 둔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788년 메노파교도의 긴 행렬이 폴란드 북부 비수아 삼각주(프로이센)를 떠나 우크라이나에 정착했는데, 이들은 이곳에서 농토를 받았고 군대징집을 면제받았다. 1835년에는 72개 마을에 약 1,600가구가 20만㏊가량 되는 토지를 받고 정착했다. 1860년 러시아에서는 소규모 메노파 집단이 신앙각성 체험을 한 뒤 교도들에게 더욱 엄격한 훈련을 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메노파 형제교회(Mennonite Brethren Church)를 세웠고, 그 일부는 1870년대에 병역면제권을 박탈당하자 러시아로부터 탈출한 메노파교도 대열에 합세했다. 이 이민들 가운데 다수가 미국 북부 중서부에 정착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12만 명이 넘는 메노파 러시아 정착민들이 종교·교육·사회·경제·정치를 자율적으로 통제하는 자치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러시아에 있던 모든 메노파 공동체들은 제2차 세계대전중에 파괴되었거나, 1945년 직후 소련 정부가 해체했다. 오늘날 메노파교도들은 러시아인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있다. 1663년부터 메노파교도들은 선조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경제적인 기회와 모험을 찾아서, 특히 유럽의 군국주의를 피해 북아메리카로 이주했다. 19세기말까지 북아메리카에 정착한 대부분의 메노파교도들은 농촌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농사를 지었다. 언어는 독일어를 썼는데, 독일어는 종교적인 상징이기도 했고, 자기들끼리만 독일어를 사용함으로써 외부 세계와 접촉하지 않으려 했다. 이들의 주요관심은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양심과 전통에 따라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1775년 이들은 펜실베이니아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낭독했다. "우리의 원칙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든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다해왔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고 해를 입히는 일에 도움을 주거나 가담할 자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1783년 영국 랭커스터 주의 메노파교도들은 굶주린 영국 군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남북전쟁 동안 메노파교도들은 다른 사람을 대리입대시키거나 북부의 경우 300달러, 남부의 경우 500달러를 내고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입대해 전쟁에 가담한 교도들은 대개 출교당했다. 1850년 이후 메노파는 언어를 독일어에서 영어로 바꾸고, 주일학교와
복음주의 예배 같은 새로운 제도와 의식을 채택했는데, 이와 같은 외부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분열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유럽에서
건너온 몇몇 분파들도 있었다. 이 여러 분 파 가운데 가장 큰 집단은 '옛 메노파 교회'(Old Mennonite Church)이며, 그 다음이
'메노파 교회 총회'(General Conference Mennonite Church), '메노파 형제단'(Mennonite Brethren),
'옛 암만파'(Old Order Amish)이다. 가장 철저한 집단은 '후터파 형제암만'(Hutterian Brethren)으로서 이들은 아직도
공동체를 이루고 재산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비교적 작은 이 집단은 북아메리카 대평원 북부에 집중해 있다.
재세례파와 메노파의 사상은 종교와 세상을 분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16세기에 심한 박해를 받은
충격 때문에 재세례파는 살아 남기 위해서 사회로부터 멀어지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메노파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메노파는 외적으로는 은둔을 통해, 내적으로는 엄격한 집단규율을 통해 강한 문화적 응집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세상과의 격리로 인해 검소·근면·경건·상호부조 등과 같은 소종파적인 미덕을 가지게 되었지만 분열도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는 주변의 사회·교육·경제 문제에 깊이 개입해 이 종파의 삶과 사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자기 교단 역사에 대한
연구와 사회학적 분석, 다른 집단과의 신학적 교류 등을 통해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추구했다.
메노파는 삼위일체론자들(성부·성자·성령의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고, 성서(특히 신약과 예수의
가르침)를 삶과 신앙의 최종권위로 인정하며, 초대 교회의 형태를 모범으로 삼는다. 신앙고백과 관련해 세례를 중요시하며, 성찬에 대한 상징적 이해를 강조한다. 일부 메노파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에 근거해 세족식(洗足式)을 행한다.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맹세하지 않으며, 군 입대를 거부하며,
교회훈련을 대체로 인정하지만 이를 보편적으로 시행하지는 않는다(→
평화주의)
메노파의 예배는 설교
중심이다. 복음선포를 중심으로 간략하고 매우 엄숙한 의식이 거행된다. 그러나 20세기말에는 다른 교단들에서처럼 실험적인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대부분의 메노파 교회들은 여러 협의회로 조직되어 있으며, 그중 7개가 북아메리카에 있다. 암만파, 후터파 형제단, 그밖의 몇몇
보수적인 메노파 교회들은 협의회를 구성하지 않았다. 1925년 이래 5년마다 친교와 연구, 감화를 위해 메노파 세계대회가 열렸지만 각 교회에
대해 구속력이 있는 결정은 내리지 않았다.
메노파는 사랑과 무저항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나타내려 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사회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1725년 네덜란드 메노파가 세운 '국내 및 국제 긴급구제위원회'(An emergency relief committee for
national and international aid)는 오늘날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1920년 북아메리카 메노파도 같은 목적으로, 러시아의
기근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메노파 중앙위원회'(MCC)를 설립했다. 20세기에는 메노파 이민이 끊이지 않았는데, 주로 러시아에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볼리비아, 멕시코, 영국령, 온두라스)로 이주했다.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이민들과
선교사들은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오세아니아·인도 그리고 아시아 여러 지역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20세기에 북아메리카 메노파는 고등교육을 새롭게 강조해 메노파 교단의 대학교들과 신학교들을 지원했고,
중학교와 성서학교들도 계속 운영했다. 메노파 및 비메노파 역사가들의 연구로 초기 재세례파의 신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다. 이를 통해
교회생활을 쇄신하기 위한 새로운 통찰이 생겼으나, 현대 메노파의 신조나 의식이 16세기 재세례파의 이상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도 부각되었다. 또한
자신들의 역사를 재발견함으로써 도시에서 사회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증언, 예배, 제자 훈련, 복음 전도가
일상용어가 되었으며, 메노파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세상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증언과 예배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암만파, 후터파
출처 : 브리태니카 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