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그로버(Jan Groover, 1943~2012)의 동시대적인 조형언어
글: 김영태 / 사진문화비평, 현대사진포럼대표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19세기에 여러 연구자들이 발명한 사진술photography은 회화적 재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즉 좀 더 손쉽고 간편하게 회화이미지를 생산하기 위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시절부터 연구되었던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가 재현한 이미지를 영구히 정착 할 수 있는 물질을 찾아 낸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예술사진미학이 19세기 당시의 아카데미회화에 미학적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세기모더니즘사진가들은 사진만의 독자적인 미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회화의 그늘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사진가들이 선호하는 빛의 선택, 화면구성방식, 미학적인 용어 등이 그것을 일깨워준다. 풍경사진, 정물사진, 인물사진 등 전통적인 사진의 여러 분야에서 회화의 영향력을 발견 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사진가들이 회화에서 미적인 영감을 제공받았다.
특히 1960년대에 사진과 개념미술이 만나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표현매체로 수용하면서 사진과 미술의 경계는 무의미해졌다. 또한 사진이 현대미술의 중요한 매체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 후 1970년대 후반에는 포스트모더니즘작가들이 자신의 세계관 및 미적인 감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진을 선택하면서 동시대예술에서는 장르간의 경계가 무너졌다.
얀 그로버는 회화를 공부하였지만 흑백사진과 컬러사진을 사용했다. 일상적인 생활용품을 정물의 대상으로 선택하여 조형적으로 재현한 결과물을 선보였다. 또한 야생적인 콜라주작업도 했다. 작가의 예술적 영감의 뿌리는 회화이다. 작가는 주방용품이나 과일 등을 표현대상으로 선택하여 재구성했다. 전통적인 회화가 다루었던 정물화를 기반으로 현대성을 부여한 결과물이다. 또한 도로를 지나는 여러 트럭의 일부를 카메라앵글에 담은 이후에 콜라주기법으로 재구성하기도 했다.
작가의 정물사진은 흑백으로 재현한 경우에는 고전적으로 느껴지고 컬러사진은 중후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컬러는 감각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작가는 사진을 표현매체로 선택하였지만 미적인 주관 및 미학의 근원은 회화이다. 사진의 미학적인 특성과 작가의 미감이 효과적으로 어우러져서 시대성을 반영하는 결과물로 변주된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사진매체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수용하여 당대의 시각문화를 선도하는 결과물이 되었다.
동시대적인예술은 20세기초반부터 더 이상 현실과 유리된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현실을 기반으로 생산된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대세이다. 또 다른 축에서는 미술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남다르게 현실을 해석해서 시각화하는 작가도 있고 동시대적인 조형감각을 드러내는 작가도 있다. 전자는 보는 이의 감성 보다는 이성에 좀 더 호소하는 작업이고 후자는 보는 이의 감성을 현혹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사진을 비롯한 모든 동시대적인 시각예술은 유효적절하게 감성 및 이성을 모두 자극하여 작업의 완성도를 견지堅持한다.
얀 그루버는 자신의 미적인 감각 및 미술적인 상상력을 시각화하기 위해서 사진을 표현매체로 선택했다. 전통적인모더니즘사진가들처럼 매체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감 및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수단으로 사진을 수용했다.
1980년대 이후 동시대작가들도 사진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미학뿐 아니라 작업을 실현하는 방식에서도 혼합매체적인 결과물을 보여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결과물의 외관이 사실적이기도 하고 리얼리티가 완전히 제거된 결과물도 있다. 작가의 표현 의도나 표현방식에 따라서 다양한 외관을 드러내는 결과물이 생산되고 있다.
이와 같은 동시대작업의 출발점에 얀 그로버의 작업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전통적인 회화의 미감을 기반으로 사진의 특성을 이용해서 조형적인 이미지를 생산한 결과물이다. 사회적인화두는 배제된 조형적인 결과물이지만 표현방식, 대상의 선택, 컬러 등이 동시대적인감각을 주도하기 때문에 미학적인당위성을 확보했다. 동시대시각예술이 사회적인화두를 다루는 작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시각적인 쾌락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조형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