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렌프타하 화강암 반신상
메렌프타하 무덤(KV8)의 석관 복원
메렌프타하의 미라
메렌프타하의 고분 벽화(KV 8) 오른쪽에 태양신 라와 호루스의 합체 신 라호라크티가 보인다.
타우오소레트(투스레트)여왕
타우오소레트(투스레트) 여왕의 분묘(KV14) 벽화 중 동굴의 서
고대 이집트 11. 메렌프타하에서 19왕조 최후의 왕 타우오소레트(투스레트)까지
고대 이집트 관련 책을 읽다가 부닥치는 난감한 점 중에서 하나가 바로 연대이리라. 어쩜 책들마다 죄다 다른지.......단순히 1~2년이 아니고 적게는 10년 많게는 50년 정도 차이가 나더라. 무척 당혹스러웠다. 역사적 추이에 혼선이 생기지 않도록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있다면.......
물론 그럴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이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그럴싸한 변명(?)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7세기 이전의 고대 이집트 왕조 연대기의 대부분이 추정치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유인즉, 당연한 얘기일 테지만 고대 이집트 왕가가 서기력을 알 턱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왕실 서기들은 ‘왕 즉위 몇 년’이라는 식으로 파피루스 문서에 남겼을 뿐이며, 이러한 ‘재위 몇 년’도 더러는 모호하고 더러는 왜곡된 부분도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할 순 없다는 것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나나 여러분들이나 역사를 왜곡한 파라오들을 이미 봐왔다. “여자 주제에!!” 라며 하트셉수트(제 18왕조 5대)에 관한 기록이라면 몽땅 삭제한 의붓아들 투트모시스 3세(제 18왕조 6대), 이단아 아케나텐(제 18왕조 10대)의 유산은 물론이려니와 일족(一族) 자체를 왕명표에서 멸한 호렘헤브(제 18왕조 최후의 왕), 그리고 왕실의 면면한 적통을 위해 하트셉수트와 아케나텐같은 돌연변이를 아비도스의 장제전 명부에서 과감히 뺀 세티 1세(제 19왕조 2대) 등등.......어쩌다보니 자연스레 지난 시간의 주인공들을 되짚어 보게 되었는데, 과연 몇 명이나 생각나시는지.^^ 프톨레마이오스 2세 치하, 헬리오폴리스 신관 마네토의 이집트사(전 3권, 부전(不傳))에 기록되어 있었다던 총 30왕조 561명의 파라오의 이름을 다 외우진 못하더라도, 이집트 고대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왕들만이라도 조그마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보자. 그만큼 고대 이집트가 우리들에게 간절히 다가올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기록 자체가 인위적으로 꾸며졌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재위 기간 외의 다양한 내용들, 이를테면 나일강의 범람, 작물 수확량, 천체의 운행, 외국과의 교역을 고려해서 근사치로 추정한다.
서두는 이만하면 되었고,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련다. 자그마치 5명의 주인공이 등장할 텐데 부담 전혀 갖지 마시길. 그도 그럴 것이 첫 번째 주인공인 람세스 2세의 13번째 아들 메렌프타하가 그나마 중요한 인물이고, 나머지는 재위기간이 10년도 채 안 되는 왕조 말기의 허약한 인물 군상들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인물사도 클래식 음악과도 같아서 많이 들어봤단 건 그만큼 중요하단 걸 테고 별로 못 들어봤단 건 그만큼 덜 중요하단 말이리라. 자 그럼 망조(亡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메렌프타하는 하마터면 왕좌에 오르지 못할 뻔 했다. 평균 수명 35~38세인 그 당시에, 아흔 살 가까이 (혹은 넘어) 살았다는 람세스 2세의 지독한(?) 장수 때문이었다. (람세스 2세의 재위기는 무려 67년인데, 이는 90여년 왕 노릇을 했다는(믿거나 말거나) 6왕조 페피 2세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장기집권이다.)
어쨌든 메렌프타하가 왕위에 올랐을 땐 이미 그는 60세가 넘는 고령이었으리라. 그의 재위 기간은 10여년 정도 되는데,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내야 했다. 그 즈음 해양민족들(키프로스 등등 지중해 섬에서 출몰한 목축업자 농부 출신의 해적들)이 서부 사막지대의 리비아 유목민족들과 연합하여 비옥한 이집트로 자주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전직 군 총사령관이었던 그는 예순이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 근본도 없는(?) 침입자들을 격퇴했다. 아래는 테베(현재의 룩소르)에 있는 그의 장제전에 있는 전승비의 기록이다.
“당연한 승리였고, 모든 나라가 그의 정복을 인정했다. 우리의 주군은 적들을 때려눕혔도다! 황소 메렌프타하시여, 그대의 위용은 영원히 칭송받으리라.”
그러나 승리의 쾌거는 잠시뿐이었다. 해양민족과 리비아족들이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침입했고 그들과의 교전이 길어지면서 국가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메렌프타하는 그들과 싸우랴 한편으로 테베에 있는 신전 재산을 지키랴 정신이 없었다. 그 고령의 할아버지가 말이다. 그도 선대왕 람세스 2세처럼 건축을 지어 그 자신을 자자손손 전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외세의 침략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럴 짬이 있어야지.......그가 남긴 흔적은 전술한 전승비와 카르나크 제 7탑문의 마당 담벼락 그리고 왕들의 계곡에 있는 암굴묘(KV8)이 전부다. 특히 이 암굴묘는 아름답기는 하나 왕들의 계곡에 있는 무덤치고는 작은 편에 속한다. 더욱이 급조한 흔적이 보이는데, 묘를 구성하는 석재의 대부분이 테베 서안 콤 엘헤탄에 위치한 아멘호테프 3세(18왕조 9대)의 장제전에서 반출(搬出)된 것이었다.
메렌프타하의 암굴묘에서 특기할 점은 묘실 벽에 <동굴의 서(Book of Caverns)>가 처음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동굴의 서는 <사자(死者)의 서>를 의미하는데, 명계의 심판에서 무죄 판정을 받아 갈대가 무성한 낙원에 이르기까지 사자가 취해야 할 주문과 행동거지를 담은 일종의 지침서로 보면 된다. 사자의 서에는 동굴의 서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18왕조 6대 투트모시스 3세와 7대 아멘호테프 2세의 묘에 있는 <암두아트의 서(Amduat)>, 18왕조 최후의 왕 호렘헤브의 암굴묘와 19왕조 3대 람세스 2세의 정실 네페르타리의 왕비묘에 있는 <문의 서(Book of Gate)>, 19왕조 2대 세티 1세의 무덤에 그려진 <라의 기도>와 <죽음의 서>, 20왕조 2대 람세스 3세의 왕묘에서 볼 수 있는 <대지의 서(Book of the Earth)>, 그리고 3대 람세스 4세의 고분에 추가된 <하늘의 서> 등........이 모든 기록물들은 사자의 서의 또 다른 이름, 즉 “자매품”인 것이다.
원래 메렌프타하의 석관은 총 4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다. 가장 안쪽 석관에 메렌프타하의 시신이 누워 있었는데, 이후 3개의 석관이 도굴자의 손아귀에 무참히 파괴되었고 1개의 석관만이 온전하게 남았었는데, 이마저도 나중에 21왕조 2대 푸스센네스 1세가 자신의 관으로 쓰려고 훔치는 바람에 메렌프타하는 “영원한 침실”을 몽땅 잃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의 미라만큼은 무사할 수 있었다. 도굴꾼의 검은 손이 닿기 전에 선대 아멘호테프 2세(18왕조 7대, KV35)의 분묘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미라는 좀 유별나다. 보통의 미라는 돼지족발 색에 가까운데 그의 미라는 아주 새하얀 것이 꼭 익사한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왜 그럴까? 성서 고고학자와 이집트 학자의 추측은 이렇다. 람세스 2세 말기에서 메렌프타하에 이르는 시기에 바로 모세의 출애굽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빠져나갈 때 애굽 그러니까 이집트의 파라오 정예부대가 이들을 바짝 뒤쫓았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 자리에 메렌프타하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가 탄 배가 돌풍에 뒤집히는 바람에 그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정말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그에게 사실여부에 대해 물어 볼 수도 없고.......여하튼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을 가면 메렌프타하의 새하얀 미라를 볼 수 있다니, 언제 기회가 되시면 꼭 보시라. 아버지 람세스 2세를 빼닮은 매부리코가 유독 눈길을 끈다.
메렌프타하가 죽은 뒤 아멘메세 세티 2세 시프타하가 왕위를 잇고, 여왕 타우오소레트를 끝으로 19왕조는 막을 내리는데, 어찌 보면 19왕조의 번영이 람세스 2세 때문이라면 몰락 역시도 람세스 2세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람세스 2세가 너무나 많은 자녀들을 남겨 둔 나머지 왕실엔 권력투쟁의 기미가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메렌프타하 이후 권력암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메렌프타하의 아들 세티 2세의 왕위를 람세스 2세의 또 다른 손자 아멘메세가 넘보고 이를 가로챘다. 그러나 아멘메세의 치세는 3년 후 종료되었고 왕좌는 원래의 각본대로 세티 2세에게 돌아갔다. 그의 재위기간도 6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뒤를 시프타하가 계승하는데,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의 계모 그러니까 선대왕 세티 2세의 아내 이자 훗날 19왕조 마지막 파라오 자리에 오르는 타우오소레트가 수렴청정하게 된다. 참고로 시프타하의 미라는 1898년 제3대 이집트 유물국 국장을 지낸 빅토르 로제에 의해 아멘호테프 2세의 납골당에서 발견된다.
그나마 중요한 인물이 이제부터 소개할 여왕 타우오소레트인데, 무한한 야망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재위기간은 2년이 전부다. 아, 물론 철부지 시프타를 대신하여 실권을 틀어 쥔 기간을 합산한다면야 총 8년이 되겠지.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녀는 이집트 제 1의 실세로 군림했다. 시리아 출신의 아주 교활한 바이 재상의 서포트를 받으며 말이다. 타우오소레트는 여왕치고는 드물게 시리아 팔레스타인 원정을 나갔고 의붓아들 시프타하의 장제전을 가로챘으며 고대인치고 드물게 장수의 행복을 누리는 등등 (한 65세 정도?) 적어도 지상에서의 운은 비교적 좋았다.
자, 이리하여 19왕조, 한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 다음 시간엔 신왕국 마지막 20왕조, 창시자 세크나크트, 마지막 중흥기(中興期)의 왕 람세스 3세, 이후 혼돈의 시기 람세스 4세~11세까지 살펴보겠다.
첫댓글 이집트역사 다이제스트 읽고
다시 좀더 디테일한 글 읽으니
역사의 속내를 보게 되는 듯,
계속되는 글 재밌게 보게 되네요~^^
글쓰느라,애썼어요.토닥토닥 ㅋㅋ
ㅎㅎㅎㅎㅎ이번 이야긴 걍 평이하게 풀어나갔어요. 매사에 힘을 주면 되려 자연스럽지 못하니 느슨하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