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수인 오패부와 장작림이 손을 잡았습니다. 이는 풍옥상을 잡기 위함으로, 풍옥상은 그들의 속셈을 눈치채고 이를 분열 시키기 위해 본인은 자리에서 물러나고 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남아있는 풍옥상의 국민군을, 장작림과 오패부는 완전히 일소하기 위해 어색한 동맹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작림은 군사 문제를 오패부에 맡겼고, 오패부는 이를 자신의 군략을 과시할 기회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판세입니다.
즉 이제 오패부는 (풍옥상이 없는)국민군과 한번 제대로 붙어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남구(南口)라는 곳에서의 싸움이 중요했습니다. 남구는 북경 서북부에 위치하며 경수선 선상에 놓여 있고, 산이 무척 높고 많은데다 용관과 팔달령이 있어 천연의 병풍이었습니다. 찰합이 지역으로 가려면 꼭 통과해야 했고, 국민군은 여기서 특별히 진지를 구축하고 장벽을 설치해 공격과 수비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북경과 거리도 멀지 않아 북경에 위협을 줄 수 있고 말입니다. 여하간에 국민군과 겨루려면 남구에서 격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풍옥상이 떠난 국민군의 총사령관은 장지강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장가구(張之江) 지역에 진을 치고 힘을 길러 찰압이, 수원, 섬서, 감숙성 등을 노리고 있었는데, 특히 섬서에 들어가 서북 지역과 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지도는 이전 글에서 장작림의 최대 판도를 설명하면서 쓴 지도입니다. 손전방에게 밀려 다시 올라오긴 하지만요. 그런데 여기서 장작림은 남쪽으로 쭉쭉 내려갔었는데, 어째서 내륙으로 가지 않았는가? 하면 물론 내륙에서 얻을것이 없다는게 가장 크고, 또 다른 세력도 있었습니다. 산서성에는 염석산(閻錫山)이라는 군벌이 뿌리를 내리고 제왕처럼 버티고 있었습니다. 염석산 역시 매우 유명한 군벌 중에 하나입니다. 염석산의 기조는 계속해서 고립주의를 하는것으로, 훗날 관동군과 장제스의 국민당,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날뛸 때에도 '산서성 먼로주의' 라는 괴이한 논리로 계속해서 산서에서 왕처럼 버텼습니다. 염석산이 산서를 잃은것은 무려 1949년 3월이나 되서였고, 공산당에게 쫒겨난 것입니다.
염석산의 모습
그런 염석산에게 고민이 있었는데, 근처에 풍옥상의 부대가 산서를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나 다름없었고, 국민군이 시도때도 없이 자신을 먹어 치우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염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장작림, 오패부와 삼각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시대 군벌들은 삼각 동맹 참 좋아합니다.
우려대로 국민군은 5월 18일, 염석산을 향해서 진군을 개시했습니다. 21일 염석산은 현장에 출동해 전투를 독려했지만, 장작림과 오패부가 입을 씻은듯 가만히 있는지라 큰 낭패를 보았습니다. 국민군은 서부 지역에서는 이렇게 염석산과 싸우고, 동부 지역에서는 장종창 등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섬서성에서도 전역이 벌어지고 있고 3개 방면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사실 무모한 일입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슬슬 장작림과 오패부는 군대를 움직였고, 남구의 동쪽, 북쪽, 남쪽을 공격하면서 자리를 잡고 삼면에서 포위하는 형국으로 군사 행동을 했습니다. 오패부는 남쪽에서 진격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허풍을 떨었습니다.
"열흘 내에 남구를 점령할 것이며, 20일 내에 점령을 마칠 것이다. 어떤 사람이던지 먼저 함락시키는 자는 바로 찰합이 도통을 시켜줄 테다."
그런식으로 전투를 독려했는데, 오패부의 군사들이 대부분 국민군 출신이 꽤 되서 국민군과 만나면 바로 항복해버리는 통에 20일 동안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광동의 북벌군이 출동했다는 것입니다.
북벌에 나서는 장제스(蔣介石)
북벌군의 출동으로 난리가 벌어지면서, 호북성에서는 오패부에게 연락을 취해 무한으로 와서 북벌군을 상대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오패부는 남쪽으로 가서 북벌군과 싸우고, 국민군 문제는 이제 봉군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이를 장작림이 만류했습니다. 장작림은 본래 오패부가 선두에 서서 출진하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던 심산이었는데, 오패부가 떠난다면 봉군의 부담이 커질것이라고 판단, 오패부는 남구에 계속 남겨두고 봉군의 일부를 보내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사태가 급해지기도 했고 10만여 병력을 동원하고 장종창, 장학량등이 현장에서 독려하며 격렬하게 공격한 끝에 결국 남구는 함락되었습니다. 풍옥상의 국민군은 저 멀리 감숙성까지 일단 피했으나 그 뒤를 쫒아가진 않았습니다. 일단 이렇게 국민군을 쫒아내며 북방의 위협은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장작림은 참전 장병들을 위로하고 봉군의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런데 논공행상을 하는데, 오패부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골리면서 괴롭혀댔습니다.
이를테면, 오패부는 상금으로 2만원을 내놓았습니다. 오패부의 형세가 지금 그리 넉넉하진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장작림은 이 자리에서 무려 20만원을 덜컥 내려놓았습니다. 오패부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겨버리려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구 공략 도중에 공을 세운 봉군의 인사들에게 오패부가 직함을 수여했는데 그것도 거절했습니다. 오패부는 장종창, 장학량 등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당연히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장학량이 뜻밖의 반응을 하면서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 진위군이 군사를 일으켜 반역자를 토벌한 것은 모두 장작림 진위 상장군의 명에 따라 출병한 것이다. 중앙에 상벌 대권이 있다고 하나 우리는 오직 상장군의 명만 따를 뿐이다."
공식적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런식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정말 축하하는거냐? 욕을 하는 거냐? 이럴 돈이 있으면 다친 병사들이나 구하라지!"
그리고 연회가 벌어지는데 모든 봉군의 장령들이 참가를 거절했습니다. 오패부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권위를 보이려고 했는데, 봉군에서 저런 식으로 나오자 오히려 자신의 자존심만 뭉개지는 추태를 보여버린 것입니다. 장과 오의 동맹은 실상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중국 내에 있는 군사 실력들은 대략 크게 여섯가지로 정리가 됩니다.
첫번째는 광동의 민국 혁명군입니다. 쑨원 서거 후 1925년 6월 25일 중국 공산당 영도 하에 국민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가 열렸습니다. 회의에서 민국 정부를 위한 대원수부를 만들 결정이 내려졌고, 군대에 대한 개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왕정위가 국민정부의 주석과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았습니다. 광동 각 계파의 군대가 하나로 모였으며, 장제스는 군사위원회 위원 8명 중 한명으로 선출되어 국민혁명군 제1군 군단장 및,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두번째는 풍옥상의 국민군입니다. 풍옥상은 국민군을 내버려두고 모스크바로 가서 3개월만 머물었는데, 이 과정 동안 중국 유학생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아 감동했으며 소련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공산주의에 약간 관심이 생겼던 그는 이 자리에서 세계 최고의 사회주의 국가의 모습을 보고 많은 느낌을 얻었으며, 레닌의 부인과도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남구의 함락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환했습니다. 돌아오기전, 그는 국민당에 가입했습니다.
돌아온 풍옥상은 궁벽한 위치에 몰려있었지만, "쑨원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국민혁명을 진행하고 삼민주의 실천에 노력한다" 면서 국민군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대소의 건의에 따라 "감숙성을 지키고 섬서성을 원조하며, 산서성과 연합하고 하남성을 도모한다." 는 나름의 방책을 세웠습니다. 감숙과 섬서로 진격하면서, 북벌군과 호응하기로 했습니다.
세번째는 장작림의 봉천 군벌입니다. 그들은 남구에서 국민군을 격퇴했으며, 세력은 동북의 3성과 북경, 천진, 직예와 산동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네번째는 오패부의 직계 군벌입니다. 이들의 근거지는 호북으로, 하남과 직예의 보정, 대명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벌군의 공격에 바로 얻어맞게 됩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는 손전방의 세력으로, 이쪽도 직계는 직계입니다. 거점은 남경이며, 강소와 절강, 복건과 안휘, 강서의 5개성을 관할하는 큰 세력이었습니다. 국민혁명군은 북벌을 하면서 각개격파 전술을 써서, 오패부는 공격하면서 손전방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손전방은 한동안 사태를 관망했습니다.
마지막이 산서의 염석산 세력입니다. 이쪽도 직계 군벌이긴 하지만 다른곳과는 별개로 관망과 고립을 내세우며 사태를 지켜보면서, 산서의 왕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못한 자질구레한 군벌들은 현 시점에선 큰 의미가 없고, 이들이 현재 중국 내의 가장 유력한 군사 실력자들입니다. 1926년 7월 국민혁명군의 북벌이 시작되면서 정세가 크게 요동을 치는데, 앞서 말했다 시피 북벌군은 손전방은 내버려 두고 오패부 부터 두들겨 패기 시작합니다. 손전방은 5개 성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겠다며 오패부를 전혀 지원해주지 않았고, 북벌군의 공세에 바로 직면하게 된 오패부는 기진맥진해서 손전방에 구원을 계속해서 청했습니다.
하지만 손전방은 여전히 가만히 있었는데, 오패부가 자기와는 상의도 없이 봉군과 멋대로 연합하고 풍옥상 군대를 치는데 힘을 기울이고 하던게 못마땅했다는 겁니다. 결국 손전방이 손을 놓고 있는동안 오패부는 한구에서 패전하여 빠르게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북벌군이 노리는 대상은 오패부 뿐만이 아니라 손전방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패부는 어쨰서 봉군에게 구원 요청을 하지 않고 손전방만 바라보고 있었나? 그것은 장작림의 본성이 도둑놈이나 다름없다는걸 가장 잘아는 사람이 오패부이기 때문입니다. 오패부가 패전했을때, 장작림은 군사 회의를 열었는데 오준승, 장작상 등 원로들은 지지 기반이나 잘 지키고 백성들을 보호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장종창 등은 오패부를 구원하는 척 하면서, 그 명분으로 남하해서 오패부의 지지 기반인 직예와 하남을 먹어버리자고 주장했습니다.
장작림이 어떤 쪽에 동의했을지는 굳이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패부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장작림의 남하를 반대했습니다. 자기에겐 아직도 10만의 병력이 있고 자력으로 무한 등을 탈환할 수 있으니, 무기나 잘 지원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봉군의 수군 전력을 이용해서 남중국해를 빙 돌아 광저우를 직접 때리자고 요청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말을 들을 장작림도 아니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식으로 오히려 봉군은 장종창등의 지휘로 진격해서 오패부의 중요한 근거지인 보정 지역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보정에서 머물고 있던 조곤은 덕분에 집도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고, 오패부는 자기가 곧 무한을 회복할테니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닥달해서 아주 잠시나마 진격을 멈추게 하긴 했지만, 오래가지 못할것은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북벌군이 파죽지세로 올라오고 있는데, 힘을 합쳐도 이길까 말까한 군벌들은 그 와중에도 자기네 이익을 위해서 몸을 불사르고 있었습니다. 판세가 어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첫댓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분열은 주변국의 행운이지만 도의적으로는 엄청난 참극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