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이책의 저자가 쓴 ‘가족주의는 야만이다’라는 책을 읽다가 어려운 이론이 계속 등장하는 데에 질려서 읽다가 손을 놓아버린 적이 있다. 이 책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가족 현실을 얘기하면서 남의 나라 이론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론 적용을 하지 않고 우리 사회 현실을 풀어낼 때는 쏙쏙 이해가 되었지만, 들어보지도 못한 서구 학자들 이름과 어려운 이론이 수시로 등장해서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 왜 우리 현실을 우리언어, 우리이론으로 풀어내지 못하고 그 들어보지도 못했던 서양 학자들이 생산해 놓은 이론으로 풀어내야 할까. 사람의 머릿속까지 어떻게든 하나하나 분석해 증명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서양철학으로 문제를 풀어가다 보니 책이 더 어렵게 읽힌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저자들의 이름은 주로 문학 작품을 인용할 때 등장했고, 그 작품들을 설명하는 이론은 불행하게도 우리가 창조해낸 이론이 아니었다. 이런 불만을 누군가에게 얘기했더니 인간사를 접근하는 문제는 다 똑같은 거라나... 내가 보기엔 ‘자기창조’가 없는 학문 풍토이기에 남이 만들어 놓은 이론을 끌어다 쓰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더 먼저 든다. 서구는 이론을 창출해내고, 한국은 그걸 가져다 쓰고... 한국은 언제쯤 한국 사람들 시각으로 현실을 들여다보며 한국 현실에 맞게 한국 걸 창출해서 써먹을 수 있을까... 이 점만 빼고 보면, 이 책은 정말 굉장한 책이다.
구성애 씨의 성교육을 비판한 내용이 와닿았고(굳이 서구 학자들 이론을 개입시키지 않아도 구성애 씨의 성교육내용은 허점투성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프로이트에 관한 해석 역시 기존의 시각과 달라서 좋았고(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남성학문으로 만들어놓은 사람이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언어에 대한 접근시도 또한 흥미로웠다. 나 역시 한국말 호칭체계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고민하다 보니 언어 문제가 시급하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그런데, 한국말은 여성 언어의 부재 문제 이전에 타언어가 가지고 있지 않은 핸디캡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바로, 자기가 사용해야할 언어가 ‘나이’를 기준으로 규정된다는 사실. 한나라의 말은 그 나라 국민 모두가 쓰는 말인데 그런 말이 특정부류(연장자)에게 유리하도록 특권이 부여되어 있다. 한국 사람들은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내눈엔, 한글은 훌륭한 문자일지 모르지만, 나이 개입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의 언어를 제한하는 한국말은 인간적인 말이 아니다. ‘나이’가 개입되는 말이다보니 한국말은 자연히 상하를 구별하는 호칭체계가 발달했고 그 와중에 여성언어의 부재까지 얽혀 문제가 더 심각하다. 한국말을 정의하는 데는 ‘나이’를 빼놓을 수 없지만, 만약 한국말에서 이 나이를 거두어낸다면 개인을 개인으로 규정하는 말로 바뀔 수밖에 없을테고, 그 과정에서 여성 언어 부재 문제 또한 손을 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말 호칭체계를 들여다보면 ‘관계’는 있는데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정체불투명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제나 ‘나이’가 개입되어 개인을 개인으로 만나지 못하고, ‘(상하)관계’로만 파악하다 보니 끊임없이 쪼개고, 찢고해서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을 때까지 쪼개서 관계를 드러내는 호칭만이 발달했다. 이렇게 ‘개인’이 없는 데다 성차별 언어까지 감수해야하는 여자들은 이중의 차별을 겪고 있다. 그런데, 개인도 정의되어 있지 않은데, 성차별 언어가 개선되길 바라는 건 순서가 잘못된 거 아닐까? 이런 뒤죽박죽 현실을 잘 드러내주는 현상이 하나 있다. 연상연하 커플이라고 할 때 연상연하는 왜 남자보다 여자가 나이가 더 많은 경우에만 사용될까라는 의문은 차라리 초딩버젼이다. 이보다 더 코미디는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는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 먹힌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남자가 더 어린 연인 사이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너’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에서는 나이가 무시되면 왜 불쾌해할까? 우리는 우리의 시각이 아닌 서구의 이론으로 우리 현실을 보기에 모두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성차별’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게 아닐까?
‘삼촌’이라는 호칭을 보자. 아빠나 엄마의 남동생이나 형/오빠는 "삼촌"이라고 부른다. 그것도 엄마의 남동생이나 형/오빠는 삼촌 앞에 ‘외’자가 들어간다. 아빠쪽은 그냥 삼촌이지 ‘내삼촌’이 아니다. 아빠의 여동생이나 누나는 "고모"라고 부른다. 엄마의 여동생이나 언니는 "이모"라고 부른다. 고모랑 이모는 나랑 몇 촌 사이일까? ‘삼촌’은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지 호칭이 아니다. 부를 때 쓰는 말과 관계를 가르킬 때 쓰는 말이 일관되게 자리잡혀 있지 않고 섞여서 쓰이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누이'라는 말은 남자가 여자를 부르거나 가르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여자가 여자를 부르거나 가르킬 때 쓰이는 말이 아니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의 여동생이나 누나를 타인에게 지칭할 때조차도 남자가 정해준 호칭(시누이)을 쓴다. 그런데, 당사자를 부를 때는 ‘아가씨’나 ‘형님’이라고 한다. 왜 ‘시누이들’이라는 말은 성립하는데 남편의 남자형제들을 뭉뚱그려 부르는 말은 없는걸까? ‘누이’가 나이를 개입시켜 언니나 여동생 가리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일 거다. ‘시누이’에 해당하는 남편이 아내의 언니와 여동생을 부르는 말은 뭘까? 처형, 처제는 시누이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아가씨’, ‘형님’에 해당하는 말이다. 사정이 이런데 왜 여자들은 ‘아가씨’, ‘형님’, ‘시누이’라는 말을 정리하지 못할까? 난 이런 호칭만 생각하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쏙 들어간다.(새언니가 나를 '아가씨'라고 부를 때 지금이 양반상놈하는 시대도 아닌데 내가 졸지에 아가씨가 되는 게 못마땅하다. 거기다 작은 올케가 '형님'이라고 불러제끼면 난 그저 “엽기”라는 생각만 든다. 나 역시 결혼으로 이 대열에 끼일 걸 생각하면 소름만 끼친다. 아직은 내가 수행하는 상황이 아니고 당하는, 그래서 반만 몸담고 있는 현실이지만, 가끔 남자들 앞에서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 무슨 또라이 취급하며 굉장히 피곤한 여자라는 반응이 되돌아온다. 그래서 말인데... 한국어학자들이야 거의가 남자들이라서 그렇다지만, 여성단체들은 왜 이런 문제는 안 건드리는 거냐고요오. )
동생의 아내는 시누이에게 ‘형님’이라고 부르고, 오빠의 아내는 시누이에게 ‘아가씨’라고 부른다. 왜 동생의 아내는 시누이에게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고 ‘형님’이라고 불러야할까? 동생의 아내는 시누이에게도 ‘형님’이라고 부르지만, 오빠의 아내(동생의 아내 입장에서 볼 때 시아주버니의 아내)에게도 ‘형님’이라고 부른다. 시누이와 오빠의 아내는 동생의 아내한테 왜 같은 호칭으로 불릴까? 동생의 아내, 나, 오빠의 아내 이 세 여자의 정체성은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는다. 오빠의 아내는 ‘새언니’라고 부른다. 오빠와 새언니가 부부 사이가 아닌 남매 사이가 된 건가? 오빠의 아내는 새언니이면서 왜 동생의 아내는 ‘새동생’이라고 안 할까? 무엇보다, 왜 여자끼리인데도 남자들 호칭인 ‘형님’이라는 말을 써야할까?
자매(姉妹)는 여자 입장에서 여자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다. 자는 한자로 ‘윗누이자’를 쓰고 매는 ‘아랫누이매’를 쓴다. 여자가 여자를 가르킬 때 ‘누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이걸 보면 한국어에서는 ‘여성’은 아직 정의되지 않은, 생명력이 없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정체불명의 존재다.
남편쪽 식구들, 그 중에서도 아들과 관계된 식구들은 큰아빠, 큰엄마, 작은아빠, 작은엄마라는 족보를 낳지만, 아내쪽 식구들은 외삼촌, 외숙모, 이모, 이모부라는 족보를 낳는다. 엄마의 남자형제들과 그 아내들은 나에겐 큰아빠, 작은아빠, 큰엄마, 작은엄마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아버지쪽 형제들과 그 아내들만 큰아빠, 작은아빠, 큰엄마, 작은엄마가 된다. 왜 아빠쪽에만 이런 호칭이 성립할까? 남자의 가족은 아직 확대가족이라는 반증 아닐까? 호주제가 폐지되면 이런 호칭들이 어떻게 정리될 것이며 서로를 어떻게 부를지 무척 궁금하다. 그런데, 아직 여성단체에서 이에 관한 소식은 감감무소식이다.
여자들은 이런 가족 안에서의 호칭문제도 풀지 못하면서 왜 직업과 관련된 성차별 언어만을 건드릴까?
형은, 언니는, 오빠는, 누나는 동생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동생은 형, 언니, 오빠, 누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코드로 접근하자면, 이것만큼 비인간적인 잣대가 없다. 개인을 개인으로 보지 못하다 보니 가족밖을 넘어서도 모두가 형이 되고, 언니가 되고, 오빠가 되고, 누나가 된다. 상하구분으로 집안에서부터 개인의 존재가 부정당하다보니 집안을 넘어 밖에서도 개인이 부정되는 상황까지 낳은 것이다. 집안에서부터 형, 언니, 오빠, 누나 이런 ‘관계’를 접고 개인 대 개인으로 파악해 같은 눈높이의 호칭으로 부를 수 있을 때 밖에서도 개인과 개인이 만날 수 있고, 나아가 의사/여의사, 기자/여기자... 이런 직업적 성차별 언어문제까지 건드릴 수 있을 거라 본다.
첫댓글 ㅋㅋㅋ 쌤!! 우리도 이름을 불러도 되는 사이인가요? 드~윽~재~!!!! ㅋㅋㅋ
ㅋㅋㅋ
느무 길어서 읽다가 말았습니다. --;
집 밖에서도 모두가 형이 되고 오빠가 되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라는 독자의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개인이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우리 사회구조는 분명히 근친상간의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