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 도順道
눈물 흘린 떡국
꽤 이른 설날 아침 눈을 번쩍 뜨니 천정은 누렇고 주위는 무겁게 침묵중이다. 휑뎅그렁하게 머릿속은 텅 비었는데 정신은 맨송맨송하다. 뱃속이 느글거린다. 어제 저녁 세모에 모인 지인들과 세상사 이러쿵저러쿵 종잘거리며 빨강뚜껑 소주로 과음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정을 한참이나 응시하다 고개를 돌리니 벽에 걸린 가족사진이 오늘따라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타계하신 부모님, 곁을 떠나 먼 이국에서 삶에 열심인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그들의 가솔들이다. 하여, 나는 이른바 흔히 말하는 독거노인이 이미 되어 버린 것이다. 주민센타에 신고한지가 까마득한데 엊그제서야 실태조사차 방문했다고 출입문에 메모 한 장 달랑 붙여놓은 게 전부다. 국가를 선진국으로 이끈 역군들이요 공로자들이라고 떠들썩하게 흔들어 대며 각종 언로에 풀어낸 선전들은 풍성하지만 알맹이가 없다. 허상들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만은 새해 첫날 아침 신년원단新年元旦이 아니던가? 뱃속에선 얼큰해서 시원한 라면 국물이 시방 당장 필요하다고 칭얼대지만, 머릿속에선 허구한 날 라면인생인데, 새해 첫날 아침조차 라면이라니! 궁상맞다는 생각이 앞선다. 당장 급한 생리적 현실보다 이성적 판단이 앞섰다.
나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언제 써먹자는 하눌타리냐’ 는 생각으로 냉동실에 처박아 뒀던 떡국 감을 꺼내 비비고 사골곰탕국물과 함께 양은솥에 붓고 가스 불을 켰다.
고전에 의하면, ‘떡국이란 떡국 감을 미리 물에 불려서 펄펄 끓는 장국에 익힌 순수한 국[羹,갱]을 의미하고, 천지만물의 부활과 신생을 뜻하는 중요한 설날 의식과 풍물 중에 청결한 흰떡과 단순한 장국으로 절기식을 삼았다’고 했나니, 이는 먼 옛날부터 순수하게 이어져 내려온 제전의 흔적이리라.
성급한 마음에 꽁꽁 언 떡국 감을 불리지도 않고 진국탕수와 함께 했으니, ‘약한 불에 서서히 풀어가며 끓여보자’ 는 자취 30여 년 경력인 나의 어설픈 생각이었다. ‘땡땡하게 언 떡국 감이 풀리면서 끓어 완성 될 때까진 시간 꽤나 걸리겠지 잉~’ 라고 생각하면서 그렁성저렁성 시간을 보냈다.
책이 어지럽게 쌓여있는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았다. ‘이메일도 검토해봐야 하고, 여기저기 카페에도 들어가 봐야 할 텐 데’ 하는 생각으로 빈둥거리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호흡하기가 힘들어져 눈을 퍼뜩 떴다. 방안이 온통 연기로 가득했다. 후다닥 급히 탕실로 나가보니, 아뿔사! 냄비가 시뻘겋게 달궈져 내용물이 타들어가고 있질 않은가.
신발장 곁에 돌부처처럼 항상 세워둔 빨간 소화기를 전광석화처럼 재빠르게 집어 들고 난생 처음 소방실습을 하기 시작했다. 수습은 그럭저럭 해 냈지만, 안타까움에 서글픔과 분원忿怨이 몽땅 가슴 맨 밑바닥으로부터 북받쳐 오르더니 메말랐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부옇게 이글거렸다.
“왜, 내가 이래야 하는 거지, 무엇을 위해?” 가슴팍이 먹먹해졌다. 벌써부터 안경을 썼으니 눈[目]병자요, 보청기를 귀에 꽂고 살아야하니 귀[耳]병자요, 틀니를 끼고서야 음식을 먹게되니 이[齒]병자가 아니던가. 오늘은 냄새조차 코로 못 맡았으니, 코를 더해 코[鼻]병자가 되어 이목구비耳目口鼻 중 성한 것 하나도 없구나. 형체만 온전할 뿐, 이를 어이해야 할꼬? 이러저러하다 결국엔 生이 귀진歸眞하는 것일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사멸死滅하지도 않을 텐데,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해야 하나?
창문을 비롯해서 문이라고 생각나는 것들은 모두다 활짝 열어 제쳐 놓았다. 온 집안에 가득 찬 매캐한 연기를 속히 빼내야 했기 때문이다. 천정에 혹처럼 붙어있는 화재감지기가 작동이라도 해서 동네방네 알려지면 이로울 게 하나도 없어서다. 시방 세상에 독거노인이라고 드러내봐야 어느 누가 긍정적으로 이해 해주겠는가? 오히려 외면하고 불쾌하게 여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렇잖아도 섣달그믐께 한파가 기승을 부린 통에 시큰거리던 무릎이 더욱 찌근거렸는데,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놨으니, 섣달 찬 공기에 더욱 시큰거리는 무릎을 당장 보온대로 감고 온몸을 덥혀야만 했다. 나도 이젠 인내의 한계점에 이른 것일까? 다시금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러덩 누어버렸다. 이른 아침부터 설쳐 댔으니 전신이 나른해지면서 눈꺼풀이 무거워져서다.
또 깜박 잠이 들었던가보다. 비몽사몽 꿈속을 헤매는 중에 머리맡 휴대폰 벨소리와 도어벨 소리에 벌떡 일어나보니 같은 서울 동네에 사는 동생네 부부가 조카 녀석을 앞세워 설날 방문 중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신의 직장’이라고들 말하는 공기업에 합격하고 첫 나들이를 한 조카 녀석을 보게 되는 감회가 남달랐다. “형님, 집안이 왜 이리 썰렁하죠? 이 추운 날씨에 문마다 활짝 열어 놓으시고” 라고 말하며 창문들을 닫는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할 수 밖에.
막걸리 두어 잔 오가는 사이 어느새 차례상처럼 차려졌다. 그렇게도 쉽게 완성된 떡국이 하얀 그릇에 담겨져 상위에 올랐다.
모두 둘러앉아 간단한 하례를 하고 떡국을 한 술 떠 입에 넣으려니 갑자기 만감이 눈앞에 어른거리더니만 코끝이 찡 하고 또 그 주책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