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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맑은 물 흐르는 곳 (나들목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들풀처럼
'좌파전선' 불행 끝 행복 시작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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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앙투안 슈바르츠 (Antoine Schwartz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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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인 유럽은 없다>(Raison d'agir·파리·2009)의 공저자.
이번 대선에서 장뤼크 멜랑숑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은 개표 결과(11.1%)에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만큼 기대가 높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뿔뿔이 흩어져 있던 세력들이 연합해 치른 선거에서 400만 표 가까이 득표한 것은 썩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좌파전선은 벌써부터 차기 정부(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좌파 출신으로 17년 만에 결선투표에서 승리했다)의 경제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프랑스의 오브는 우파 강세 지역으로 유명하다. 주도인 트루아의 민선 시장은 현재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에서 재정경제부 장관을 맡고 있다. 섬유산업이 철수하기 전까지는 노동운동이 활발했지만, 오늘날은 노동회관이 쇼핑센터로 변모할 만큼 상황이 바뀌었다. 이 건물을 보존하기 위한 단체까지 결성했던 공산주의자들에겐 '경악할 일'이었다. 이 지역의 좌파전선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는 지역 노동자 투쟁의 전통을 계승해온 프랑스 공산당(PCF)이다. 좌파전선 활동가들은 아나톨 프랑스 거리에 위치한 공산당 신문 <라 데페슈 드 로브> 편집부 사무실에 모여 회의를 열거나 전단지를 배부받는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좌파전선 결성은 각 조직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점진적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공산당 지역위원장 장피에르 코른뱅이 설명한다. "이 연합이 하루아침에 결성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2007년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았다. 새로운 것을 고안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새로운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파리, 마르세유, 툴루즈에 운집한 대규모 군중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좌파전선의 장뤼크 멜랑숑 후보는 지난 3월 18일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 모여 붉은 깃발을 흔들어대며 그의 출마를 지지하는 대규모 인파 앞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동안 모두 어디에 계셨습니까? 보고 싶었습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났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열린 회합에 놀라울 만큼 다양한 면면이 모여들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 비정규직 노동자와 공무원, 수많은 단체를 거치며 단련된 열성 활동가, 노조원과 운동가들이 눈에 띄었다. 독일 좌파당 혹은 포르투갈 좌파 블록과 비슷하게, 프랑스 좌파전선은 사회당의 왼쪽에 분열된 채 흩어져 있던 세력을 하나로 재규합하려는 목적에서 탄생했다.
이런 시도가 처음은 아니다. 이들의 역사 자체가 그것의 연속이었다. 다양한 동맹과 통합 시도를 통해 이들은 사회당의 헤게모니에 대항하고 사회 변혁 프로젝트를 추진할 세력을 형성하려 애써왔다. 공산당 출신(1987년 탈당)의 피에르 쥐캥은 1988년 대선 후보로 출마했을 때, 트로츠키주의자와 통합사회당(PSU) 등 다양한 세력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1993년 출범한 장피에르 슈벤망의 시민운동당(MDC)은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1차 걸프전쟁에 반대하는 사회당 당원, 공산당 개혁파, 페미니스트, 일부 급진 좌파의 지지를 받았다.
프랑수아 미테랑 정권이 막을 내리고, 1995년 11~12월 전개된 사회운동을 계기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지식인 사회와 현장에 확산돼갔다. 그러나 급진 좌파들은 노조나 단체 내에서 중심세력을 형성하지 못했고, 제도권 정치와 지나치게 거리를 두었다.(1) 공산당은 사회당·녹색당과 함께 '복수 좌파'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반면, 극좌파는 사민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정권에 참여하기보다는 사회적 투쟁을 지속해나가는 길을 택했다. 반자유주의를 주창하는 좌파 세력은 고용·퇴직연금·교육 등과 관련한 사회운동이 진행될 때마다 함께 힘을 모았지만 선거 때만 되면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그 결과 전체 득표수는 높지만 표가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2005년 유럽헌법안 반대 투쟁은 좌파 통합의 움직임에 큰 전환점이 됐다. 적록 세력이 연합해서 만든 대안당(Les Alternatifs)의 마티외 콜로강이 그때를 회고한다. "여러 단체들이 힘을 합쳐 수개월 동안 일상 속으로 들어가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우리는 거대 언론사들의 비난 표적이 됐다." 생디칼리스트(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 지상주의 신봉자), 대안세계화주의자,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단체 활동가, 환경단체, 사회당 개혁파가 하나가 되어 투쟁을 벌였고 마침내 승리했다. 2005년 5월 29일 국민투표에서 전체 54.67%가 반대표를 던졌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인상적인 사건으로 정치세력 간의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콜로강은 이 일을 계기로 "프랑스 국민의 일부가 체제 변혁에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됐다"고 말한다.
이듬해 연대 경험의 정치적 지속을 위한 위원회들이 결성됐다. 노동자투쟁당(LO)과 '혁명적 공산주의 연맹'(LCR)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 움직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공산당 지도부는 참여를 결정했다. 그러나 2007년 대선에 내보낼 공동 후보를 선정하는 문제가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득표율은 올리비에 브장스노(LCR) 4.08%, 마리조르주 뷔페(PCF) 1.93%, 아를레트 라기예(LO) 1.33%, 조제 보베(위원회 연합후보) 1.32%였다. 2002년 대선 때 트로츠키주의자와 공산당을 합친 득표율 13.8%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사르코지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비판적 좌파는 무릎을 꿇었다. 분열의 대가는 컸다.
마리조르주 뷔페는 "유권자는 그들에게 더 이상 희망을 주지 못하는 집권 좌파와 미래 없는 비판적 좌파 사이에서 선택지를 찾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좌파 연합으로 가는 여정에서 2008년은 결정적인 해였다. 2009년 2월 자진 해산한 LCR는 반자본주의신당(NPA)이라는 더 광범위한 조직으로 거듭났다. 다른 한편으로, 2008년 11월 사회당에서 장뤼크 멜랑숑을 중심으로 유럽헌법안 반대 투쟁에 나섰던 세력들이 좌파당(PG)을 결성했다. 그 뒤 다양한 경향이 모인 이 당은 좌파 세력을 재구성하는 일에 착수한다.
2009년 3월 '진정한 좌파 정치를 실현하려는 모든 세력을 하나로 결집한다'는 목표 아래 좌파전선이 결성됐다. 좌파전선은 초반에는 공산당(이미 폭넓은 민선의원과 당원 조직을 보유하고 있었음), 좌파당, 그리고 LCR에서 갈라져 나온 통합좌파(GU)로 구성된 선거 연합 형태를 띠었다. 2009년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출범한 선거 연합은 이듬해 지방선거를 함께 치렀고, 지역별로 다양한 전략을 적용하며 2011년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함께했다. 마침내 2012년 대선 전략에 대해서도 합의를 이루었다. 공산당은 대통령 후보 자리를 양보하는 대신 총선 지역구 공천을 상당수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연합은 2011년 9월 뤼마니테 축제(Fête de l'Humanité)에서 발표한 '공동 프로그램'을 근거로 결성됐다. 이 프로그램은 1981년 발표된 사회당과 공산당의 '공동 강령'처럼 소책자로 인쇄돼 대량으로 배포됐다.(2) 마리조르주 뷔페는 "연합 결성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른다. 이번에도 쉽지 않았지만 우리는 해냈다"고 말한다. 그 뒤 소규모 단체들도 속속 참여 의사를 밝혔다.(3)
언론의 집중포화를 뚫고 나갈 능력을 갖춘 대선 후보를 찾는 게 관건이었다. 공동후보로 추대된 장뤼크 멜랑숑은 사회당 상원의원을 거쳐 리오넬 조스팽 정부에서 직업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유럽의원을 맡고 있는 관록 있는 정치인이다. 그는 신자유주의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스타 언론인들에게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는 인물로 잘 알려졌다. 그의 발언은 경제적 권력관계에 대한 내용에 집중된다. 그는 '잘나가는 사람들'에 대항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권력자'에 대항해 '인민'을 대변하는 일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좌파의 다양한 관심(연대·박애·평등)과 공화국, 프랑스혁명의 가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종합'하기 위한 사회적 서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좌파전선이 이만큼 추동력을 발휘할 수 있던 것은 구성 조직들이 보유한 기존 동원력과 현장 활동 능력 덕분이기도 하다. 오브 지역을 예로 들면, 활동가들은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온 터라 소통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퇴직교사로 좌파당 지역위원장을 맡고 있는 미레유 브루예가 말한다. "우리는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면서 의견을 조정한다." 이들 중에는 NPA 출신도 있다. 생디칼리스트인 드니 캉통은 "NPA가 실패한 그 지점에서 좌파전선은 성공했다"고 말한다. "NPA는 닫힌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활동가들을 규합했지만, 좌파전선은 열린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정당들을 규합하고 있다."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시민들의 참여도 줄을 이었다. 젊은 전산 기술자 알랭 무스티에는 처음엔 환경문제에 관심 갖기 시작해 이곳까지 오게 됐다. 그는 "이런 정책들은 지금껏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브의 '역동적인 좌파전선을 위한 시민연합'에 가입했다. 이 단체 덕분에 활동가가 아닌 시민들도 좌파전선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전통적 선전 방식(벽보·전단)에 덧붙여 혁신적인 방법이 도입됐다. 사회의 각 영역들을 연결한 다양한 '전선'이 결성됐다. 공장 폐쇄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결성한 '투쟁전선'이 한 예다. 이 모든 활동은 미리부터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언론의 각본, 가능성의 영역을 제한하는 '전문가들'의 개입을 저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멜랑숑 후보 선거대책본부 책임자인 프랑수아 들라피에르가 설명한다.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단지 니콜라 사르코지의 재선을 막아야 한다는 목표를 넘어서 공적 토론의 장에 제6공화국 건설, 금융 통제, 수입 상한제, 생태주의적 경제계획 등의 주제를 부과하기 위해 노력했다."
좌파전선은 불가피한 것처럼 제시되는 경제적 선택을 재정치화하기 위해 '권력을 쟁취하라', '저항' 등 전투적인 구호를 들고 나왔다. 마리조르주 뷔페는 "지난 30년간 권력은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해왔다. 이제 이런 무책임한 말에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한다. 좌파전선의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공공지출 확대, 임금 인상(최저임금 1700유로), EU가 강요하는 틀과의 구조적 단절 등이 눈에 띈다. 이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들이 제출된 것은 아니지만 "리스본 조약을 넘어설 것"을 주장하며 "EU 지침에 대한 불복종"을 촉구하고 있다. 좌파전선은 '정치적 자발성'을 깃발로 내걸었다. 지난 시절 집권 좌파가 내려놓은 그 깃발을 수거한 건 2007년 대선 후보로 나선 사르코지였다. 들라피에르는 "우리에겐 라틴아메리카가 중요한 모범이다"라고 말한다. 좌파전선은 권력을 잡지 않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반대로 시민봉기를 추동하기 위해 권력을 잡는 게 목적이다.
좌파전선은 자신을 구성하는 개별 관점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단순한 연합 이상을 지향한다. 이런 구심력의 원천은 활동가들이 추구하는 연합 전략뿐 아니라 멜랑숑 개인의 힘에서도 찾을 수 있다. NPA를 나와 좌파전선에 합류한 사회학자 라즈믹 케슈얀이 설명한다. "현 정세에서는 긴축에 반대하는 단일 전선을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 정당·단체·노조가 서로의 차이를 유지하며 다양한 영역에서 싸움을 이끌어나가야 한다. 이런 일은 시간이 걸린다. 공동의 경험 속에서 배워가며 전진해야 한다."
거대한 혼란의 시기에 이 운동은 어떤 정치적 역할을 수행해나갈 것인가? 국민전선(FN)이 우파의 재구성에 하나의 벡터로 등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좌파전선은 좌파 재구성을 주도하고 나섰다. 멜랑숑은 대선에서 승리한 사회당이 불가피하게 좌파전선의 정책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예상한다. 멜랑숑은 지난 4월 19일 <레제코>에 "프랑수아 올랑드는 내 방법론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선언했다. "금융계는 예전에 사르코지를 공격했듯이 올랑드를 공격할 것이다. 이때 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저항할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1) Stathis Kouvélakis, '급진좌파의 실패와 재구성', <Mouvements>, 파리, n°69,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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