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기생충인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덕분에 지금 극장가에서는 『기생충』의 반응이 뜨겁다. 이런 기회를 통해 어벤져스나 엑스맨 시리즈와 같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과도하게 쏠린 대중의 관심이 조금이라도 분산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기생충』에 대한 논의도 활발했으면 좋겠다. 좋은 영화가 넘치지만 거론조차 되지 않은 채 사장되는 영화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다양한 좋은 영화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좋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은 박찬욱 감독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장르영화의 거장이다. 그들의 영화를 보면 장인의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영화적 완성도가 뛰어난 그들보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주의 감독들이 가진 개성에 더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다.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홍상수 감독과 김기덕 감독이 그들인데, 이들 감독의 삶과 영화는 논란거리가 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특수성에 기인하고 이것을 날카롭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탐구의 대상이 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봉준호 감독의 사회적 관심이 결코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영화를 통해 한국사회의 모순을 다양하게 조명해 왔다. 그의 영화에는 사회적 파토스가 넘치며 『살인의 추억』 『마더』와 같이 관객을 끝내 불편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그의 영화는 대단히 지적이고 미학적이지만, 한편 사회파 감독의 강렬한 목소리와는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그것이 장르영화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흔한 결론과 타협하고 싶어 하지 않는 감독의 철학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기생충』도 마찬가지다. 기생충은 영화를 양식적으로 그리스 비극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봉테일이라는 명성답게 공간의 전체 배치와 세부 구조, 그리고 소품들은 세 가족을 상중하의 계급 칸으로 나눠진 타이타닉호에 태운 것 같다. 화려하지만 위태하게 비극의 파국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그는 흡사 장자에 나오는 소백정이 소의 모든 부위를 훤히 알고 세밀하게 잘라 이용하듯 영화적 공간의 모든 부위를 세부적으로 자르고 배치하여 연결한다. 그가 4차원적으로 펼쳐놓은 공간의 향연은 그만의 독특한 공간 꼴라주이며 모자이크가 되고 있다. 그 안에서 각 층에 있는 페르소나들이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다가 몰락한다. 피라미드 사회의 계급이라는 환경 안에서 보편적인 인간이란 과연 존재하며 인간의 존엄성은 유지가능한지 묻는 것 같다.
봉준호 감독에게 가족은 불가능한 현실에서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마지막 보루다. 현실사회에서 공동체는 이미 해체된 지 오래다. 오직 최소공동체로서 가족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살아가는 대저택의 주인 박사장 가족과, 피라미드의 최하층에서 살아가는 반지하집의 기택가족과, 현실에서 아예 말소된 지하에서 살아가는 문광 가족의 비극을 통해 작가는 우리 사회의 치부를 망치로 강타한다. 그들 가족은 서로를 지키기에 얼마나 무력한가?
내가 주목하는 것은 문광 가족의 등장이다. 철저히 말소된 채 사회에서 지워진 문광의 남편 근세의 등장은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다. 우리 사회의 가려진 치부가 유령처럼 등장하기 때문이다. 근세를 보고 기절하는 막내 다송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회의 유령을 충격적으로 대면하게 된다. 인식되지 않았지만 현존했던 진실과의 대면은 기괴한 고통이다. 아이러니다. 이 의외적 존재가 바로 감독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소통이 불가능한 모스부호를 가지고. 결국 감독은 우리사회에 담론도 해결책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다른 한편 영화를 보며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박사장 내외와 다송이가 보이는 냄새에 대한 혐오 장면이다. 그들이 잘 이용하지 않지만 일반인이 많이 이용하는 지하철 특유의 냄새로 묘사되는 냄새에 대해 그들은 반사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낸다. 그 순간 관객인 나는 나의 냄새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났던 노인 냄새와 행려자들에게 났던 부랑자 냄새에 대한 거북한 기억이 떠올랐다. 나 또한 누군가를 혐오하고 있고, 또 누군가의 혐오 대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섬뜩했다.
감독은 냄새에 대한 과민한 거부반응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하고 있다. 당신도 인간이며 인간을 혐오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것이 계급적 차별을 은폐하고 있다고. 냄새에 대한 본능적 혐오를 통해 한 인간을 다른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구분하고 제거할 수 있음을. 냄새가 계급이었다.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다. 선을 쉽게 넘는 냄새가 오히려 넘을 수 없는 벽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암울하고 전망 없는 현실을 폭로하는데 봉준호 감독은 영화적 사명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괴물』이나 『옥자』에서처럼 운동권 학생과 단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 영화는 대안 없이 암울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반지하의 백수 하층민인 기택 가족은 박사장 가족의 과외교사, 운전기사, 가정부가 됨으로써 생존의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생존 기회를 잃은 문광 가족인 지하생활자 근세가 등장하면서 없던 지하의 공간이 개방되고 하층민끼리의 이전투구 속에 함께 몰락하게 된다. 이보다 더 끔찍한 현실 인식이 있을까? 기생만이 살 길이라니. 공생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박사장은 기택 가족이나 문광 가족에게 모두 은인일 뿐이다. 계급사회가 완전히 고착된 중세의 모습이다.
1970년대 산업화 기간에 발표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기생충』을 비교해 보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도 상류층과 하류층 가족의 대비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치부가 『기생충』처럼 은폐되어 있지 않다. 상류층의 아들인 윤호가 운동권 가정교사인 지섭을 만나 그의 영향을 받아 하층민의 비참한 실상에 눈뜨는 이야기와 비교해보면 이 영화의 특징이 더 부각된다. 운동권 대학생 대신 스펙 쌓기에 내몰린 과외교사와 하층민의 고통에 전혀 관심이 없는 다혜, 다송의 설정이 가진 단적인 차이가 21세기 신자유주의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도 초기자본주의사회의 약육강식 시장자본주의와 사회 혁명 이데올로기가 경합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자유주의의 후기자본주의사회로서 혁명이 불가능한 계급사회가 도래했다. 사회에는 인간의 존엄성이니 평등이니 하는 사회적 정치적 의식이 사라졌다. 대신 경제적 생존만이 유일의 과제가 되어버렸다. 봉준호 감독이 묘사하는 기생충 사회는 무능해진 대중의 자화상인 셈이다. 그리하여 공생 불능의 기생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가 인간성을 상실한 채 빈자의 빈자에 대한 투쟁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오직 기생의 기회를 획득하기 위해서.
하지만 기생이라는 말은 얼마나 자조적인가? 우리는 뱃속부터 이 말에 대해 저항감을 가지고 있다. 마치 박사장 가족이 하층민의 냄새를 혐오하듯이, 인간을 기생충으로 전락하게 하는 현실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자조와 혐오는 다르다. 극중에서 언제나 계획 없음의 무계획을 계획으로 삼아 살며 자조하던 백수가장 기택이 박사장의 혐오에 대한 혐오로 박사장을 살해하는 장면은 어쩌면 가장 원초적인 반항이자 항거의 상징일 것이다. 그것은 ‘나는 기생충이 아니다’라는 외침이다.
그렇다. 이 영화에 사회적 메시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바로 기생충이기를 거부하라는 메시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말은 어떤가? 기택 역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삭제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감독은 냉정하게 꿈을 몽상이라고 비웃으며 뼈아픈 각성을 남긴다.
우선 고통에 대한 공감과 통찰이 필요하다. 기생이 아닌 공생사회로 가기 위해.
그러나 나는 다시 섬뜩하게 자각한다. 혁명의 담론이 왕성하던 19,20세기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에 기생하여 잉여노동을 착취하던 기생충이 아니었던가? 현대 금융자본주의시대 거대금융자본가들은 전지구적 잉여노동을 빨아들이고 있고, 도시 금융자본가들은 세입자들의 잉여노동을 빨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누가 기생충인가? 봉준호 감독의 사고에 오히려 소시민적 순응주의가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