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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발에 쥐잡는’ 경우는 우리 속담이고, '쥐가 앞발로 소의 뺨을 친다'는 정반대의 속담은 서양의 것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도,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도 있다. 세상사 모든 일이 한결 같지가 않다는 뜻이리라. 결론적으로 뭐라고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 늘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기도 하기에 적어 남기고자 한다.
Seaman(船員)을 직업으로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6개월의 육상좌학과 반년의 원양(遠洋)실습을 마친 후 명실공히 첫 직업전선에 뛰어 든 것이 비운의 한일호였다. 이 내용은 신항해일지 [3_꿀꿀이 죽 - 일명 잡탕(雜湯)]에서 자세히 밝혔다.
여기서부터 제2의 삶이 계속 이어졌다. 이미 가정도 가졌고 첫 애도 태어났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앞질러 가장(家長)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이 덧씌워진 셈이다. 1970년 11월부터였다.
고생고생해서 실습한 Long Line선(延繩船)과는 전연 다른 Trawler선(曳引網)의 Second Office(2등항해사)로서 시작한 것이 '동방 51호'였다. 당시는 대부분의 중고(中古) 어선을 일본에서 수입했다. 키멤버로 구성된 인수팀이 일본 혼슈(本州)의 북동부에 있는 센다이(仙台)로 건너갔다. 이 부근은 일본의 우수한 원양 어업 기지였던 센다이(仙台)를 비롯하여 게센누마(気仙沼市), 이시노마키(石巻) 등이 있었기에 팔려고 내놓은 중고선이 많이 있었다.
300톤급 원양트롤어선, 강O훈 선장에 최O윤 Chief Office(1등항해사)에 키가 작았던 김O술 Chief Engineer(기관장), 박O민 First Engineer(1등기관사) 등 필수요원들이 인수를 위해 일본으로 갔다.
우선 선박을 인수하여 한국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고는 통관(通關)하고 국적변경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작업선으로 탈바꿈 한 다음 조업장으로 항하는 순서였다.
나는 일본 仙台(센다이)에서의 인수팀에는 가지 않고 부산에 남아 나머지 선원구성과 해도(海圖) 준비 등 기타 필요한 일들을 하기로 했다. 채용할 선원들의 이력서를 받고 면접하고 건강검진을 받게 하는 등 입항하면 바로 승선, 일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선주인 ㈜동방원양이 부산이 아닌 강원도 묵호(지금의 동해시)에 수산물 가공공장과 기지(基地)가 있었기에 구성한 선원들을 인솔하여 강원도 묵호항에서 승선했다. 정확한 일짜는 기록이 없어 모르겠으나 11월 중에 첫 출항을 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한마디로 정신이 없었다. 마치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보냈다.
먼저 이런 작업선에 대한 유경험자가 적었다는 것이었다. 선장도 항해사들도 국내선에서 경험을 가졌다고 하지만 비슷한 구조(構造)라도 선박이나 장비들의 크기에 따라 여러 가지 기술적 문제가 뒤따랐다. 국내의 소형어선을 경험한 선원을 우선 채용했어도 작업의 성질상 차이가 있었다. 거기다 첫 항차에는 어획물을 냉동(冷凍)이 아닌 냉장(冷藏), 즉 얼음을 채워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주로 단기간의 조업을 하는 국내연안선 방식이었기에 원양선과는 시설부터 달랐기에 애로를 겪었다. 더구나 나는 요즘 말로 ‘왕초보’였다.
북양(北洋)의 겨울 해상(海床)이나 기후가 어떤지도 모른 체 그냥 주워들은 것과 해도상으로 짐작만 하면서 부딛쳤다. 모르는 놈이 용감하다더니…. .
경황없이 이렇게 시작한 첫 항차인지라 무사히 마치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자세한 일기를 남기지 못했다.
출어(出漁)에 바쁜 회사의 방침에 따라 쫓기다 싶이 출항했고, 용케 어장을 찾았지만 조업(操業) 역시 뒤죽박죽이었다. 어장(漁場)부터 낯선데다 저인망어선의 가장 중요한 해저(海底)의 저질(底質)이 어떤지도 깜깜했다. 그저 부근에서 조업중인 일본선박이나 한국선에게 겨우 주어들은 것이 고작이었고 눈치만 보며 따라 다녔다. 어장(漁場)에서 위치, 저질 등에 대한 정보는 각 선박 고유의 기밀상황이었다.
양망하면 어망(漁網)이 찢어지고 고기는 하나도 없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선원 몇 사람이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그래도 간혹 한번씩 어망 가득히 끌려오는 명태(明太) 더미는 신기하기까지 했고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판국에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진 것이었다. 당시 선교(船橋) 항해일지(Log Book)에는 정확한 일시와 위치 등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었겠지만 내 일기에는 적혀있지 않아 지금 생각하면 천려일실(千慮一失)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어두운 밤이었음은 분명하다. 하기야 겨울철 고위도 지방의 낮은 노루꼬리만큼이나 짧으니 일부러 챙기지 않으면 가늠하기 어렵다.
양망(揚網) 작업 중 어망(漁網:그물)이 Screw(추진기) 즉 프로펠러에 감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절망적인 타격을 준 사건이었다. Variable Pitch Propeller(가변피치프로펠러)식인 선박인데, Bridge(선교) 계기판이 표시하는 각도와 실지 Screw의 각도가 1도 정도 차이가 났는데, 선교의 계기가 0도일 때 실지는 -1도. 즉 선체가 뒤로 후진한다는 사실을 몰랐었기에 양망하고 있는 중에 0도(정지상태)에 맞춘 것이 실지는 선체가 후진하여 결국 선미에 달려 있던 어망(그물)이 프로펠러에 걸리고 만 것이었다.
양상(洋上)에서 선박의 스쿠류에 이물질이 걸려 기관이 돌아가지 않는 다는 것은 치명적인 사고이며 대 사건이다. 자동차로 치면 네 바퀴가 부서진 것이고, 사람이라면 두 다리가 잘린 것과 같은 상황이다. 요지부동이다. 그냥 물결치는 데로 흘러갈 뿐이다.
* Variable Pitch Propeller(가변피치프로펠러) : 프로펠러 날개의 각도를 자유롭게 변화시켜 원하는 위치에 기계적으로 고정할 수 있는 프로펠러를 말한다. 주기관(主機關)의 회전방향과 속도를 일정하게 한 체 선교에서 날개 각도만을 원격으로 조정함으로써 전진과 후진, 정지, 선속(船速)을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다. 이는 예인선이나 트롤선과 같이 프로펠러 하중(荷重)변화가 큰 선박이나 역회전이 불가능한 선박에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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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위에서 달리던 자동차가 고장이 나면 뒷 트렁크를 열고 전후방에 표시판을 두고 사람은 도로밖으로 나가 관계기관이나 보험사에 연락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망망대해에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 뿐이다. 현재 이 선박은 '자체 동력기능'이 없다는 표시로 낮에는 타선(他船) 잘 보이는 돛대에 검은색 둥근 공 하나 달고 밤이면 규정에 맞는 전등을 켜두고는 자체에서 해결하는 수 밖에 없다. 그 외에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해결되지 못했을 경우 내 자신도 선박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육상으로 Come back 할 마음을 갖기 이전에 상황에 따라선 북해(北海)의 차디찬 바다에서 물고기 밥으로 생(生)을 마감했을런지도 모른다.
인상(人相)이 좀 험악해 선장이 처음엔 승선시키기를 꺼렸었던 김O태군이 다행히 잠수(潛水 : 머구리)경험이 있다고 했다. 경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치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 날밤 김 군의 생명을 건 잠수활동이 선박과 우리 승조원 모두의 생명을 구한 은인(恩人)이었다. 그날 밤의 고생은 잊을 수 없다.
우선 수중(水中)의 선박 상태부터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실무진인 두 항해사와 갑판장이 모여 상의를 하고 김 군에게 잠수작업 가능여부를 재확인했다. 잠수장비는 필수품이었으니 직접 챙겨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장비에 이상은 없었다. 일본제품이었기에 질(質), 성능(性能)도 좋은 편이었다.
요즘 영상들에서 보는 오리발을 신고 산소통을 짊어지고 호흡기를 입에 물고 물방울을 내뿜으며 유유히 헤엄치는 수중작업을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머리에 쓰는 잠망경(潛望鏡)만 해도 한 사람이 겨우 들 수 있는 무게의 유기(鍮器)제품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해수온도가 낮 아 수중작업 시간이 아주 짧다는 것이었다.
잠수복 차림
일단 내려가 상황을 보고 다시 대책을 세우자고 하고 내려보냈다. 불과 2-3분간이었지만 불안과 상상(想像)이 얽힌 길고 긴 시간이었다. 몇 가닥의 와이어로프(wire rope)와 그에 붙은 그물이 감겼으나 벗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보고였다. 희망이 보였다.
몇 개조로 나눠 일을 분담했다. 기관부원 일부가 갑판상에서 용접기 등 필요한 장비를 설치하여 응급대비를 하게 하고, 반쪽 드럼통에 계속 물을 끓이는 팀, 몇 개의 칼과 쇠톱날을 교대로 갈아 대는 팀, 펌프를 젓는 팀, 바다 속과 연결된 줄을 잡고 당겼다 늘였다 하며 조절하는 팀 등을 정하였다. 이 줄도 여러 개였다. 잠수부의 생명(生命)줄인 공기주입선, 상호 의사(意思) 전달용, 작업도구를 달아 내리고 올리는 줄 등등이다. 그 줄들은 김O태 한 사람을 위한 줄이 아니었다. 전 선원의 생명선(生命線)이었다.
머구리(잠수) 도구들
내가 맡은 일은 현장의 실행 책임이었다. 콧물과 눈물(淚)과 눈(雪)물이 뒤섞이어 앞이 보이질 않았다. 낮은 해수온도 탓에 3분 이상 잠수(潛水)하지 못했기에 곧 올라와 뜨거운 물에 손과 발을 담궈 녹이고 따끈한 물 한잔을 마시게 한 후 차가운 수온으로 마비된 손의 감각이 되돌아 오면 다시 잠수케했다. 작업시간 2-3분을 위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시간이 거의 1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반복을 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위도(緯度) 50도 북해(北海)의 겨울 눈바람은 차가웠고, 해수(海水)는 영하 2도로 더욱 따갑게 고무방수복과 두꺼운 방한작업복을 뚫고 속살까지 파고들었다. 갑판상의 작업선원들도 손 · 발가락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무심한 갈매기는 또 어찌 그리 많이 모여들었던지… .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그날 밤 바람과 파도(波濤)가 없었기에 작업이 가능했다는 것이었다. 평상시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강풍이 일고 따라서 파도가 미쳐 날뛰던 그곳, 그 시간에 어째서 조용했던가는 지금도 의문이다. 아마도 신(神)도 몰랐을 거라는 생각이다.
인간은 누구나 종교적이라고 어느 교수님이 말씀하셨지만 그렇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하느님, 부처님 아니면 조상님의 덕분이었을 것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다. 신(神)의 가호(加護)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천운(天運)이라고 표현했었다. 그래서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란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Wire Rope는 쇠톱으로 반쯤 자른 후에 갑판 위의 Winch(권양기)로 양쪽에서 잡아당기기로 했다. 윈치의 핸들은 갑판장이 잡았고 양쪽에 노련한 선원이 각각 줄을 감았다. 그 순간의 긴장감은 정말 간절한 기구(祈求)였다.
배 밑 수중에서 줄을 흔들면 계속 감기로 되어 있었기에 조심조심 낮은 속력으로 감았다. 양쪽 쇠줄에 양력(揚力)이 생기고 얼마 안 있어 툭! 하고 쇠줄이 터지는 소리와 더불어 터진 줄 부스러기가 올라왔을 때는 모두가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바로 살았다는 절규였다.
“감사합니다. 살았습니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고 두 손이 모아졌다.
마지막 확인차 김 군을 다시 내려보냈다. 기관장이 혹시라도 프로펠러에 상처가 없는지도 보라고 했다. 곧 올라온 김 군이 아무 이상 없고 모두 풀렸다고 했다. 다시 한 번 박수가 났고 곧 기관실에 있던 기관사가 기관시동(始動)을 걸었다. 힘차게 돌았다. 완벽했다. 그제서야 진짜 감사의 눈물과 안도의 한숨이 났다.
일이 끝났음을 보고 하자 “참말로 다 됐나? 정말이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선장실에 있던 강 선장의 눈에 비친 눈물과 더불어 환하게 빛나던 얼굴은 잊을 수 없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이었던 것이다.
김O태! 그는 고향이 포항으로 내가 이력서를 보고 면담 한 후 채용한 사람이다. 인상이 마치 옛날 영화에서 단종(端宗)을 목졸라 죽인 영화배우 ?석근을 조금 닮아 야간 험악했기에 회사 직원들도 염려했지만 심성(心性)이 무던하고 성실해 보였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힘이 좋고 말이 적으며 성실했지만 곰처럼 우직함도 있었다.
한 번은 면도칼을 들고 내 방을 두드렸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내게 “2항사님, 여기 쫌 째 주이소”했다. 한쪽 관자노리가 속으로 곪아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부위가 그런지라 고통이 심했을 것 같았다. “마취없이 되겠나?” 했더니 “참아 볼랍니더” 했다. 이것은 내 자신이 경험해 본적이 있기게 두 말없이 해보자고 했다.
어릴 때 피부가 남달리 물러서 상처가 나거나 모기에 물리면 꼭 염증으로 발전, 아버님의 친구이신 ‘박O규 약국’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몇 차례있었다. 속이 곪아 벌겋게 부어올라 통증은 있어도 살갗에는 감각이 없었다. 약사 어른이 놋숟가락을 상처 위에 얹고 “차갑나?”고 물으셨다. "언지에(아니예)" 했다. 고개를 끄덕이시곤 알콜솜으로 문지러신 다음, “저쪽을 봐라” 하시고는 사정없이 칼로 쫙 그어버렸다. 누른 피고름이 쏟아졌다. 그러고는 소위 ‘아카징키(마큐로크롬)과 하얀 가루약이 전부였던 기억이다.
그대로 했다. 방에 있던 작은 유리병을 상처 부위에 대고 찹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했다. “알았다” 하고는 “저쪽 봐라”하고 고갤 돌린 사이에 사정없이 불에 달군 면도칼로 그었다. 예상대도 붉은 피고름이 왈칵 쏟아졌다. 시원하다고 했다. 그 다음은 아카찡키와 알콜 소독뿐이었지만 잘 아물었던 것이다.
이 사고를 해결해낸 김 군의 활동은 그를 본선의 지보적 존재로 만들었고, 험악하다던 얼굴에다 대고 뽀뽀를 하는 동료선원들도 생겨났다. 한참 뒤 그의 결혼식에 선장이 개인적으로 재봉틀 한 대를 예물로 사 준 것을 보면 사고 당시 얼마만큼 감동이 컸었다는 것을 엿 볼 수 있었다.
사진 속 원안이 나.
첫댓글 험상 궂게 생긴 포항이 고향인 김용태님. 고맙심더.
덕분에 우리 늑점이님이 황천가지 않게 해 주셔서리.^^
전(全) 선원의 생명을 구해 주셨으니 그 은덕으로 오래오래 잘 살낍니더.
이 분과 지금도 교류가 있겠네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벌어지는 사고 수습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