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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8일 주일 메세지 Asan UBF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말씀 누가복음 9:46-62
요절 누가복음 9: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합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사람들은 천국을 ‘물리적 시공간 환경 조건의 최상급으로의 변화’로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천국을 천국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망각합니다.
‘세상이 바뀌기만 하면 정말 행복할텐데…’ 말하지만, 사실은 세상은 이미 바뀌어 있고 바뀌지 않는 딱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은 하나도 바뀌지 않은 채 다른 사람만 바꾸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오늘날도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천국에 합당한 사람, 천국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Asan UBF
1.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내면성
46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십자가와 고난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 중에는 여전히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누가 크냐? 누가 서열이 높으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쟁의 이유는 두 가지로 보입니다. 첫째는, 메시야왕국에 대한 잘못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로마를 몰아내고 통일 다윗왕국과 같이 예수님이 임금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 때 누가 총리가 될 것인가? 누가 장관으로 입각할것이며 누가 비서실장이 되어 실세로 떠오를 것인가? 제자들은 지금 그런 문제로 인하여 논란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위대성을 사람이 가진 지위와 권세로 보았습니다. 곧 큰 지위와 권세를 획득할 때가 오고 있으므로 더 높은 지위, 더 높은 권세를 확보 하기 위하여 싸웠습니다.
둘째는, 동료들을 경쟁상대로 보았습니다. 권세와 지위를 지향하면 필연적으로 경쟁이 있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경쟁상대에 포함됩니다. 내가 높아져야 겠고 내가 유명해져야 겠고 내가 더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신경쓰입니다. 아버지 헤롯은 자기 아내를 죽였습니다. 자기 아들들도 죽였습니다. 그는 갓 태어난 아기들까지 죽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명예에 집착했던 사울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전쟁을 패전의 위기에서 구해낸 다윗을 향해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로되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는 노래 구절에 그만 확 돌았습니다. 그날 이후 사울은 미친 사람의 강한 집착으로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Asan UBF
제자들은 예수 안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고 땅위에서 부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하여 끊임없이 갈등하고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권세와 지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피곤하고 소모적인 경쟁을 일삼습니다. 조직의 권력, 사람의 사랑과 인정, 이런 것을 얻고자 할 때 화평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는 저 멀리로 멀어집니다.
47,4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예수님의 말씀에서 어린아이는 긍정적인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부담스러운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는 가지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움켜 쥐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중심입니다. 어린아이는 절제, 인내가 없습니다. 아이들의 고집과 집착이 종료되는 때는 강력한 꾸지람 이후 입니다. 누가 큰 자인가?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서로 다툴 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어린 아이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잘 알았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과 행동이 먼저 앞서는 사람, 늘 앙칼맞고 욕심이 많은 사람, 속으로 항상 딴 생각하는 사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늘 이기적인 사람, 말만 하면 계산부터 하고 안된다고 하는 사람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뚜렷한 약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결코 그 약점을 고치지도 못하고 변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며 서로를 향해 어린 아이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보다는 낫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와 같은 동료들을 영접할 대상으로 여기라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큰 자’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Asan UBF
두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자라 하십니다. 겸손한 사람을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지 않고 장점을 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신상에 대하여 예민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이야기 해주면 잘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원하지 않는 결과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는 것은 넓은 포용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작은 자가 큰 자라는 것은 깊은 이해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관용과 이해의 인격과 내면성이 위대함의 척도입니다. 천국은 먹을 것이 많아서 천국이 아니라 서로 품어주고 포용해주어서 누가 와도 화목하기 때문에 천국인 것입니다. 천국은 최고급 대리석 바닥에 최상급 조명으로 빛나고 번쩍 거려서 천국이 아니라 겸손과 이해로 서로를 감싸주고 서로 존중하기 때문에 평안과 행복이 넘쳐서 천국인 것입니다.
Asan UBF
제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지위 때문에 아내를 죽이고 아들을 죽이고 아기들 까지 마구 죽인 헤롯을 저주하면서도 정작 자기자신은 권력과 지위를 끊임없이 갈구 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앞에서 높아지기를 원하다가 망한 사울왕의 이야기도 알고 똑 같은 행태를 보이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한심하다고 하면서도 자기들도 똑 같이 동료들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인격과 본성을 가지고 만약 천국에 간다면, 바로 이 사람들이 천국의 옥의 티가 될 것이 분명 하였습니다.
천국에 합당한 사람, 예수 안에서 위대한 사람은 직업, 지위, 업적이 아니라 인격과 내면입니다. 어떤 사람도 포용하고 어떤 사람도 이해해 주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천국을 내면에 맛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큰 자인가 가장 좋은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 자신을 땅끝까지 낮추셨습니다. 한 아기의 몸을 입고 지극히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마굿간에서 나시고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죄인들을 모두 영접하셨습니다. 나환자의 몸에는 손을 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율법을 어기며 다가온 병든 여인들을 책망 하지 않으셨습니다. 손 마른자나 중풍병자나 귀신이 들려 소리지르는 자나 영접하시고 그들을 고치고 섬기셨습니다. 비난받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유대인이나 사마리아 사람이나 갈릴리 사람이나 이방사람이나 영접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나온 자들을 크게 칭찬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결단을 못하고 주저하는 사람이나 순종치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가는 사람조차도 안타까운 눈으로 끝까지 사랑해주셨습니다. 연약한 베드로도 감당하시고, 예수님을 파는 유다까지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결국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죄인중의 하나가 되어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Asan UBF
십자가는 로마시대 가장 중한 죄인이 받는 형벌로 십자가에 죄 없는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겸손의 절정이요 지극한 낮아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까지 십자가 아래서 조롱하는 자들을 위하여 ‘저들을 사하여 주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며 품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을 만유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세우셨습니다. 만왕의 왕 주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들이 다 예수님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지부장목자였다는 사실이나 박사, 교수였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관용과 겸손의 내면성을 가졌는지 여부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돈 얼마나 많았는지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섬겼는지가 중요 합니다.
49절에서 56절은 요한과 다른 제자들의 편협함과 교만함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들입니다.
49,50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어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금하였습니다.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12제자 그룹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요한은 나와 다르면 다른 사람을 영접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이 떠나가는데도 이를 기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람을 못살게하는 악한 영이 떠나가는 것보다도 자기들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이 싫어서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는 것을 금하게 한 것은 편협하고 교만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다른 모임이나 다른 모임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 편협한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51절에서 5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결단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를 통해서 내려가시고자 하시고 그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습니다. 한 사마리아 촌에 들어갔는데 그 동네가 예수님과 그 일행들을 배척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해서 무조건적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런 편견과 선입견으로 예수님일행을 대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요한과 야고보가 이렇게 말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요한과 야고보에게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권세를 주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분을 내고 직접 심판하고자 나서는 바탕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편협하고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촌으로 가셨습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땅에 오셔서 어떤 사람에게도 친히 원수갚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자들까지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권세와 명예를 위하여 외적 싸움과 경쟁에 힘쓰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외적인 권력과 부를 욕심내지 말고 내적인 겸손을 배워 나가는 데에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면 이런 내면성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누구나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떤 사람도 영접하고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곳에 천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큰 자라 인정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Asan UBF
2.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자세
5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좋은 것인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생명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어려운 영혼들을 돕고 그들이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으며 영생과 희락과 평강을 무궁히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것보다는 지금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에 더 마음이 끌린 것 같습니다. 곧 차기 대권을 접수할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말씀하십니다. 5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장차 영광을 얻으십니다. 또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와 총명과 사랑이 풍성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고난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반드시 고난과 희생도 뒤따릅니다. 승리와 영광이 있고, 희락과 평안이 있으나 고난과 희생도 감당하여야 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공허한 무지개를 좇는 것이 아님을 알고 십자가와 고난에 대해서 분명한 각오와 자세를 가지고 따라야 합니다.
Asan UBF
59절을 보십시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 하시자 자기로 먼저 가서 부친의 장례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그에게 말씀하십니까? 6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이는 예수님를 따르는 자가 가장 우선시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부친의 장례식은 사람이 세상에서 해야 할 많은 일 중에 우선순위가 매우 높은 행사입니다. 인간이라면 부친장례식은 반드시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장례를 치르는 일은 율법을 배우는 일보다도 더 중요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시체를 만져서는 안되는 제사장들도 자기 가족이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지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유대인들은 연고자가 없이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 주는 일이 하나님의 보상을 받는 선행의 극치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부친의 장례식이란 것은 최고로 중요한 일이고 절대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이 일보다도 더 우선시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전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 어떤 세상의 의무나 행사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최우선의 순서와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Asan UBF
성경에는 이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30년 후,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로마군에게 학살 당할 때 가족과 자손들과 함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럽게 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죽어서는 무저갱에서 춥고 어두운 가운데 심판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선택이 중요합니다. 결정적일 때,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결정적인 선택을 올바로 하게 해주는 것이 가치관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가 영적인 가치관이 있어서 올바른 선택을 하였다면 그는 가족들과 함께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페트라로 피신하여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지금은 낙원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과 함께 영광과 복락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요즘 스마트 자동차가 나와서 이제 어떤 회사 스마트카는 몇 백만킬로를 사고없이 시험주행하고 있습니다. 이 스마트 자동차는 이미 예전에도 가능했습니다. ‘저절로 가는 차!’ 스님이 타고 가는 차가 저절로 가는 차가 아니고 혼자서 주행할 수 있는 자동차는 20년 전 30년 전에도 가능했습니다. 그 시대의 저절로 가는 차도 주행하고 서고 문 열고 가능했습니다. 다만, 돌발 상황에서 선택하는 기능이 없었습니다. 진정한 스마트 자동차가 될 수 없었습니다. Asan UBF
우리 인생이 옛날의 자율주행차처럼 그냥 쭈욱 살아나가기만 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중요한 선택의 때를 맞이합니다. 그 결정적인 때 어리석은 선택, 죽음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려면 올바른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가치관이 분명해야 결정적일 때 올바른 선택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영적인 가치관은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어 생명으로 끌어 올려 줄 것입니다.
61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정중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은 했지만, 막상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하니 두고온 가족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는 가서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꼭 나누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62절을 보십시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는데 그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올바른 가치관은 견고하게 유지시켜야 합니다. 한 번 좋은 선택을 했다고 해서 완성이 아닙니다. 올바른 가치관이 다른 잡스러운 가치관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게 좋은 것 같아서 가기는 가는데, 뭔가 손해 보는 것 같고, 나만 죽는 것 같고… 이런 유혹이 있습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세워서 예수님과 함께 출발했다면 도중에 흔들리거나 오염되지 않도록 영적인 가치관을 견고하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Asan UBF
2부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가치관입니다. 세속적 가치에 훨씬 우선하는 영적 가치관을 가쳐야 합니다. 그 가치관을 견고하게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포용과 이해의 인격과 내면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세상의 가치와 다른 영적 가치를 분명히 아는 사람입니다. 가치관과 인격은 그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 인생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성경 말씀을 잘 공부하여 영적 가치관을 분명하게 세우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을 깊이 공부하여 예수님을 잘 배워서 우리의 인격과 내면이 예수님을 잘 닮아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Asan UBF
Asan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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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단국대 치과병원 앞에 장미가든이네요
이번주 모친을 모시고 갔었는데, 예전만큼 화려하지 않아서 서운했어요
사진을 멋지게 찍어 올려주셨네요~^^
말씀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