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으로 일군 세계 최초의 기아차,
프라이드 국산 최초의 승용차 브리사 단종 이후 위기를 맞은 기아는 ‘원박스카’
봉고로 승부수를 던져 기사회생했다. 1986년, 정부의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가 풀리면서 기아산업은 다시 승용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1990년 사명을 ‘기아자동차’로 바꿨고, 네 가지 카드를 차례차례 꺼내들었다.
프라이드와 콩코드, 스포티지, 세피아 등 차세대 승용차 라인업이다.
프라이드
1987년 기아와 포드, 마쓰다 등 3개 자동차 제조사가 새로운 소형차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주인공은 기아 최초의 해치백, 프라이드. 합작 프로젝트가 낳은 글로벌 전략 소형차로, 세 회사의 장점을 모아 개발
비용은 줄이되 시너지는 극대화했다. 마쓰다는 설계를 맡고, 생산은 기아, 판매는 포드가 책임졌다.
기아에겐 봉고 뒤를 잇는 새 주역이었다. 3개 회사는 각자 전략적으로 업무를 분담했다.
가령 소형차 제조기술 뛰어난 마쓰다가 ‘DA’ 플랫폼과 직렬 4기통 엔진을 개발했다.
포드는 전 세계에 걸친 판매조직을 갖췄다. 대량생산 능력도 가장 뛰어났는데, 문제는 비용이었다.
기아가 이 판에 낄 수 있었던 배경이다.
프라이드 신문 광고
물론 브리사와 봉고 사례를 통해 우수한 제조 실력을 인정받은 결과였기도 했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포드로서는 미 정부의 ‘일본차 대미수출 자율규제’를 피할 묘안이기도 했다. 덕분에 기아는 포드에 페스티바란
이름으로 이 차를 공급했다. 합작 프로젝트의 결실은 알찼다. 차체는 현대차 엑셀보다 200㎏ 이상 가벼웠다.
그 결과 1.3L 엔진을 얹고도 대관령 고갯마루를 거뜬히 넘었다. 공인연비도 수동 기준 17㎞/L로 뛰어났다.
또한, ‘DA’ 플랫폼은 강성이 제법 높았다.
마쓰다는 이 골격으로 데미오 등을 만들며 16년 동안 활용했고, 포드는 토러스의 V6 3.0L 가솔린 엔진을 얹고
0→시속 100㎞ 가속을 4초대에 끊는 핫 해치를 만들었을 정도다.
뛰어난 차체 강성과 작은 몸집 덕분에 굽잇길에서 운전하는 재미가 기대 이상 쏠쏠했으니까.
프라이드
기아차의 첫 중형세단, 콩코드
프라이드 홀로 경쟁사에 대항할 순 없었다. 이미 현대와 대우는 중‧대형 세단 앞세워 국내 승용차 시장을 양분했다.
기아는 세단 라인업을 보강키 위해 마쓰다에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기아가 점찍은 차종은 마쓰다 626(카펠라).
1970년부터 마쓰다가 생산한 중형세단으로, 포드는 이 차를 텔레스타란 이름으로 판매한 바 있다.
기아는 3세대 마쓰다 626을 라이선스 생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다만 안팎 디자인을 소폭 다듬었다.
그 결실이 콩코드로, 국내 최초의 앞바퀴 굴림(FF) 세단이었다.
뒷바퀴 굴림(FR) 방식인 현대 쏘나타, 대우 로얄 프린스와 뚜렷이 차별화했다.
콩코드
차체 길이와 너비, 높이는 각각 4,550×1,705×1,405㎜로 브리사보단 크되 경쟁 중형세단보단 작았다.
콩코드는 직렬 4기통 2.0L 가솔린 SOHC 엔진으로 5단 수동 또는 4단 자동변속기와 맞물려 최고출력 99마력을 냈다.
국내 중형차 최초로 전자제어식 연료분사 시스템을 갖춰 높은 효율을 뽐냈다.
이듬해 1.8L 가솔린 및 LPG 엔진을 더해 1988년 서울올림픽에 투입할 택시에 얹었고, 2.0L 디젤 엔진을 마련해 중형
디젤차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프라이드처럼 탄탄한 섀시도 콩코드의 매력을 높이는 데 한 몫 했다.
또한, 앞뒤에 맥퍼슨 스트럿 서스펜션을 넣어 쏘나타보다 주행성능이 뛰어났다. 콩코드는 경주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1991년엔 길이를 늘이고, 2.0L DOHC 엔진을 얹은 뉴 콩코드를 선보였다.
그러나 경쟁차보다 작은 차체 때문에 쏘나타와 로얄 프린스의 판매량을 넘진 못 했다.
콩코드 후기형
콩코드 광고
국내 최초의 소형 SUV, 스포티지
페스티바(프라이드)의 성공 이후 포드는 두 번째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SUV는 트럭 섀시에 차체 얹은 사륜구동차가 대세였다.
반면 포드가 준비하던 코드네임 ‘UW-52’는 오늘날 인기 뜨거운 소형 SUV였다.
포드의 뛰어난 상품기획력을 엿볼 단서였다. 포드는 기아에게 “연간 15만 대 생산해 10만 대를 공급해 달라”했다.
연간 생산대수가 20만 대도 안 됐던 기아에겐 솔깃한 제안이었다. 조건이 붙었다. 포드는 기아의 지분 50%를 요구했다.
기아는 발끈하자 포드는 공장을 별도 법인화한 뒤 그 주식 절반을 달라고 했다. 결국 합작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스포티지
기아는 청사진으로나마 엿본 소형 SUV를 직접 개발하기로 마음먹는다. 코드네임 ‘NB-7’의 스포티지 프로젝트다.
기아는 1991년 도쿄모터쇼에서 스포티지 콘셉트카를 선보였다.
세계 최초의 승용형 SUV로, 기아는 양산에 앞서 파리-다카르 랠리에 출전시켜 완주에 성공했다.
다카르랠리에 출전한 스포티지
스포티지는 1993년 정식 데뷔했다. 토요타 RAV4(1994년)와 혼다 CR-V(1995년), 랜드로버 프리랜더(1997년)가 나왔다.
정작 포드는 2000년에서 이스케이프로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스포티지는 강력한 험로주행 실력만큼 남다른 안전성도
지녔다. 세계 최초로 챙긴 무릎 에어백이 대표적이다.
보디 온 프레임 방식을 쓰되 뒤 차축에 판스프링 대신 코일 스프링을 끼웠다.
또한, 지상고를 낮춰 승하차가 편했고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었다.
2002년 단종할 때까지 국내에서 약 9만 대, 해외에서 약 45만 대가 팔리며 기아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
스포티지 컨버터블
기아의 첫 독자개발 승용차, 세피아
콩코드와 캐피탈 이후 기아는 새로운 세단 개발에 나섰다.
밑바탕으로는 마쓰다 323을 골랐다. 위기감을 느낀 마쓰다가 공급을 거절하면서 결국 기아는 ‘홀로서기’에 나섰다.
스포티지의 개발 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를 바탕 삼아 처음부터 온전히 자체적으로 설계하기로 결정했다.
총 개발비용은 5,300억 원. 세피아 프로젝트가 싹튼 순간이었다.
세피아
세피아란 이름은 ‘Style Economy Power Hi-tech Ideal Auto’의 앞 글자를 따서 지었다.
안팎 디자인은 물론 골격까지 기아가 개발했다. 1992년 나온 첫 모델엔 마쓰다의 직렬 4기통 1.5L 가솔린 엔진,
1997년 선보인 세피아Ⅱ엔 기아가 독자 개발한 1.8L 가솔린 T8D 을 얹었다.
당시 세피아의 라이벌은 현대 엘란트라와 대우 에스페로였다.
‘기술의 기아’답게 세피아는 동급에서 주행성능이 가장 뛰어났다.
고회전까지 맹렬히 돌릴 수 있는 1.5L 엔진과 튼튼한 차체 강성이 매력이었다.
일례로, 1995년엔 1세대 카레이서 박정룡이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 호주 대회에 세피아로 출전해
비개조부문 우승을 차지했다. 시장 반응 또한 폭발적이었다. 출시 후 12개월 만에 10만 대 판매를 달성했다.
캐피탈로 겪은 부진을 완벽히 씻어낸 셈이다.
특히 뉴 세피아는 최고출력 139마력을 뿜었고, 최고속도는 시속 196㎞로 국내 시장에서 ‘동급최강’이었다.
아쉽게도 양산까진 이르지 못했지만, 기아는 도쿄모터쇼에 세피아 컨버터블까지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세피아 후기형
1997년엔 2세대 세피아를 앞세워 현대 아반떼, 대우 누비라 등과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이처럼 1980~1990년대의 기아는 열정적이었다.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 등 숱한 위기를 ‘기술’로 극복하며 국내 자동차 산업을 이끌었다.
1995년엔 ‘기아의 역작’ 중형차 크레도스를 선보이며 소형-준중형-중형-SUV-미니밴 등의 탄탄한 승용 라인업을 갖췄다.
크레도스 개발로 맺은 로터스와 인연은 엘란 생산, 로버와 엔진 공동개발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