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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얼 부르지
박솔뫼
2011년 작가세계 가을호
자음과모음
그럼 무얼 부르지
2014 2 03
해나를 만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버클리인데 버클리 대학 인근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모임에 간 적이 있다. 해나는 그 모임에서 만났다. 그 모임은 한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한국어를 배우는 모임으로 한국어가 익숙지 않은 교포들이 주로 많았다. 한국어-영어가 섞이는 모임이라 유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도 몇 있었다. 그때 나는 여행 중이었는데 카페에서 한국어로 된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이런 모임이 있는데 나오지 않겠느냐고 권해서 나가게 되었다.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이제 가물가물하다. 읽고 있던 책은 기억하는데 친구에게서 빌린 잘 팔리는 프랑스 소설 작가의 소설이었다. 그 옆에는 바닥을 드러낸 카푸치노가 있었다.
버클리 대학 근처에 있는 테이블이 넓은 카페, 목요일 오후 8시였다. 그날의 밤공기가 가볍고 건조했다는 것이 기억난다. 모임은 대체로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날의 순서인 사람이 자신이 발표하고 싶은 것들을 발표하고 거기 있는 단어들을 영어는 한국어로 한국어는 영어로 설명해주는 식이었다. 그날은 해나의 차례였다. 해나는 어머니는 한국인이었지만 아버지는 미국인이었다. 어머니는 1년 전에 돌아가셨고 그 이후 아버지는 시애틀 출신의 미국인 여자와 재혼했다. 그래서 너는 지금 부모와 함께 사니? 아니. 아빠와 아빠의 아내는 엘에이에 살아. 나는 버클리에서 혼자 살고. 처음 본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언제 미국에 왔고 그리고 어머니는……, 하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설명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해나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이야기를 마친 해나는 고개를 돌려 지난주엔 이런 걸 발표했지 그리고 이런 일이 있었지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알려주려 했다. 사람들은 아 맞아 그거 웃겼지 대답했다.
해나는 가방에서 스테이플러가 박힌 프린트물을 꺼내 사람들에게 건넸다. May, 18th에 관한 자료라고 했다. 아 5·18이 May eighteenth구나 당연한 것을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그래? 거기는 내 고향인데 말했다. 해나는 정말이야? 감탄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왜 놀라워하는 거지 감탄하는 거지 어째서 눈을 크게 뜨는 거지 생각하다 웃으며 그래 나는 거기서 태어났어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던 그때는 5월이었다. 장소는 버클리 인근 카페로 예상치도 못한 곳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3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을 듣게 되는 장소로는 말이다. 나는 한국인들은 정말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면 죽는다고 생각하니? 설사 산소 부족이 이유라고 생각하는 거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가벼운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어쨌거나 거기서 듣는 오월의 이야기는 마치 아일랜드의 피의 일요일이라거나 칠레의 피노체트가 저지른 일과 억압받았던 그곳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명백하고 비교적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처럼 들렸다. 마치 영어가 사건에 객관을 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해나가 가져온 프린트물은 5·18재단에서 만든 영어로 된 자료와 “뉴욕타임즈”에 실린 기사를 편집한 것이었다.
자료를 나눠 받은 사람들은 이제 읽을 차례라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익숙하게 돌아가며 한 문단씩 읽었다. 빽빽한 글씨로 된 A4 용지가 서너 장쯤 되었는데 의외로 금세 다 읽을 수 있었다.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는 소리가 들렸고 몇이 일어나 음료를 가져왔다. 그때 내 맞은편에 있던 머리 긴 여자애는 커다란 밀크셰이크를 시켰고 나는 카푸치노를 시켰다. 낮은 잔의 카푸치노의 맞은편에는 기다란 유리잔의 밀크셰이크가 있었다. 모두들 마시고 해나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제자리에 앉은 것을 보고 해나는 설명하고 그러니까 이때 한국은 하고 시작하는 이야기들. 그런 것들은 말했다. 그 이야기는 틀리지 않았지만 한국어로 듣는 것과 영어로 듣는 것 사이에는 몇 개의 장막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장막은 나에게만 있는 것으로 해나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자료를 보았다. 흰 종이에 빽빽한 글씨와 몇 개의 사진, 뭉개진 얼굴의 남자와 트럭 위에서 깃발을 흔드는 젊은 남자 무릎 꿇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군인 그런 사진 들이었다.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누군가 광주가 어디 있는 도시냐고 물었고 해나는 한국의 지도를 그렸다. 형태를 그렸다고 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해나는 간단히 그린 한국의 지도에서 광주를 짚었다. 해나는 광주가 어디인지 정확히 짚을 수 있었다. 여기, 서울의 남쪽 부산의 서쪽. 아,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온 대학생이 massacre의 뜻을 물었다. 이거 무슨 뜻이지? 계속 나오는데 모르겠네. 누군가 쉽게 설명했다. 잔인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 한국어로는 뭐니? massacre, 학살하다. 대학생은 각주를 달 듯 massacre에 줄을 긋고 그 밑에 적었다. 학살하다.
해나와는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끝이 났다. 뭔가 좀더 다른 이야기들이 나왔던 것도 같은데 기억나는 것이 없다. 아마 다음 차례는 누구였지? 아 나 그날 일이 있어. 아 그래? 그럼 내가 먼저 할게. 어디서 보지? 네가 정해서 메일 보내. 알았어.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헤어질 때 해나는 나에게 종이 몇 장을 건넸다. 시가 있었다. 이걸 읽고 싶었는데 못 읽었어. 나는 종이를 받아 들고 숙소로 되돌아왔다. 숙소는 차이나타운을 지나야 나왔다. 그때 밤의 색은 푸른색이었고 거리는 푸른색 아래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을 때 어떤 중년 백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중년 백인 남자는 내게 중국인이니 대만인이니 일본인이니 묻고 같이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그 이름이 나오면 반응해야지 하고 고개를 끄덕일 준비를 했으나 끄덕일 수 없었다. 이 사람을 따라가 술을 마시고 무엇을 시키든 시키는 대로 해버려야지 누군가 내 안에서 속삭였다. 그런 마음으로 기다려도 고개를 끄덕일 차례는 오지 않았다. 나는 대답할 순간을 놓쳤다.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대답 없이 신호등을 건넜다. 멈춰 서 있는 그 남자를 지나쳐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종이를 펼쳤다. 그 시는 김남주의 ‘학살2’였다.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타이핑된 그 시는 외국 사람의 시 같았다. 60년대 후반 멕시코나 칠레의 대학에 군인들이 들어섰을 때 그것을 숨죽이며 지켜본 누군가가 쓴 것 같았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 누군가 그 누군가가 쓴 것 같았다. 게르니카에 대한 글 같았다. 1947년의 타이베이에 대한 글 같았다. 밤의 골목에서 누군가 얻어맞는 시였다. 누가 때렸다고 하는 시. 누군가가 때리고 누군가는 맞고 죽이는 사람이 있으며 죽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우는 사람은 아주 많다. 그런 시였다.
다음 장에는 누군가가 눌러쓴 것 같은 글씨가 보였다. 어떤 글이었는데, 그러니까 선언문이었다. 민주주의 수호 이런 말이 보였다. 복사된 선언문 위에 해나의 덧붙인 설명이 있었다. 단기 ####년은 19**으로 바뀌어 있었다.
해나를 다시 만난 것은 3년 후인데 그 사이 나는 일본의 교토로 여행을 갔다 온다.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그 사이 여행은 그것이 전부였고 또 다른 하나는 광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그곳에서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을 만난 것은 교토 시조 가와라마치 근처에 있던 바였다. 버클리 대학 근처 카페와 교토의 시조 역 근처 바, 둘 중 어느 곳이 더 의외이려나. 30여 년 전에, 내가 태어난 도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불현듯 듣는 것으로 말이다. 역시나 바에서 만난 이 사람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커다란 덩치에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안경을 썼고 짙은 청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떤 표정 같은 것은 기억이 난다. 눈의 주름 같은 것도 함께. 어쩌면 그 사람은 내게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말해주었대도 내가 부른 적이 없어 기억할 수 없거나. 그 사람은 바의 주인이었고 바에는 나뿐이었고 한동안 나뿐이었다. 나는 생맥주를 마셨고 그 사람은 커다란 냄비에 니혼슈를 데워 마셨다. 나는 끓는 냄비를 바라보며 붉어지는 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끓는 냄비를 바라보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끓고 있는 술이 정말로 알코올 용액 그 자체로 느껴졌다. 맥주는 이렇게 차가운데 데운 술은 몹시 뜨거우니 그것을 마시는 사람의 얼굴도 어쩐지 뜨거워 보여.
“너는 어디서 왔는데?”
“한국.”
“한국 어디?”
“어딘지 말해도 모를걸요?”
“어딘데?”
“광주. 서울의 남쪽. 부산의 서쪽.”
“아.”
그 사람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니혼슈 옆에서 끓고 있던 무를 건졌다. 장 안에서 달걀과 함께 끓고 있던 무. 무는 장과 함께 오랫동안 끓였기 때문에 짙은 갈색이었다. 정말로 짙은 갈색이었기 때문에 앞서 말한 ‘장과 함께 오랫동안 끓였기 때문에’를 ‘장과 함께 오랫동안 끓여져야만 했기에’라거나 ‘장과 함께 오랫동안 끓여져버렸기 때문에’, ‘장과 함께 끓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짙은 갈색을 설명하려면 말이다. 그 사람은 건진 무를 작은 접시에 담아서 내게 주었다. 자기 앞으로도 하나 놓았다.
“거기 어딘지 알아.”
“정말?”
“내 친구는 ‘코슈 시티’라는 노래도 만들었어. 이렇게 쓰는 거지?”
바 테이블에 놓여 있던 티슈 한 장에 볼펜으로 光州 City 하고 썼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노래냐고 묻자 그때 군인들이 이 도시로 와 사람들을 많이 죽인 그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아, 나는 짧게 반응하고 다시 맥주를 마셨다. 光州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 제주도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술을 넘기며 말했다. 술을 한 모금 넘기며 사람들이 많이 죽은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은 주방에서 나와 뒤편의 테이블 밑에 쌓인 책들을 뒤지더니 어딘가 구석에 꽂혀 있던 사진집을 하나 들고 왔다. 교토의 거리였고 노천 카페였다. 누군가가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펴서 읽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젊은 남자였다. 신문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가 트럭에 실려 가고 있는 장면이 크게 실려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는 정장을 입고 있었고 회사원처럼 보였다. 나는 그 페이지를 오래 보았고 그때 누군가가 바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이듬해 봄에 해나를 다시 만났다. 처음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이후로 해나는 가끔 메일을 보내왔다. 어떨 때는 영어였지만 대체로 한국어로 쓴 메일이었다. 안녕, 잘 지내지? 이런 말들도 가끔 어색하게 느껴졌다. 해나의 한국어가 아주 어색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 스윽 읽으면 한국어 덩어리들이 각각 뭉쳐져 화면에 점점이 찍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나름대로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보낸 사람을 특이한 어린애처럼 보이게 했다. 조금 편협한 이야기기는 하지만.
해나는 서울에 있는 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 주에 광주에 갈 거야. 네가 광주에 있다면 만나고 싶어. 나는 지금 서울에 있다고 답장했다. 하지만 다음 주에 갈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럼 만나자. 연락해. 안녕. 내 답장도 어쩐지 우글거리는 한글의 덩어리 같아 보였다. 어디선가 떼어 와서 컴퓨터 화면에 붙여놓은 조합들. 하나로 뭉쳐지지 않는 작은 덩어리들.
해나와 나의 목적은 도청 앞에서 열리기로 한 광주 시향의 말러 교향곡 2번 5악장 ‘부활’의 연주를 듣는 것이었다. 그해는 80년 5월 광주에서 30년이 지난 해였다. 기념할 만한 해였기 때문에 그런 연주가 야외에서 열리는 것이었다. 해나는 그 전날 광주에 미리 도착해 망월동 묘역에 들를 것이라고 했다. 나는 몇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나중에 물어봐야지 생각하다 말았다. 해나를 만난 곳은 충장로에 있는 우체국 앞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만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본 해나는 머리가 짧아져 있었고 검은 옷을 입어서인지 차분해 보였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짧게 포옹을 했다. 우리가 보기로 한 연주는 비가 와서 취소가 되었대. 해나는 말했고 나는 아쉽기도 했지만 그럼 이제 몇 년 전 한 번 본 게 다인 해나와 무얼 해야 할지 약간 당황스러웠다. 어쩌지? 묻자, 글쎄 밥을 먹을까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은 비가 올 듯 말 듯 한 날씨였지만 밤공기는 습하지 않고 상쾌했다. 우리는 근처 중국집으로 가 잡채밥을 먹고 나와 잠시 걸었다.
광주는 조용했고 딱히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특별히 소리 내어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의외로 이곳에서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날은 큰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했지만 다른 때는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개는. 우리는 도청을 향해 걷다가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다가 아 비네 비다라고 낮게 말을 하다 손바닥을 위로 향해 허공에 내밀었다. 빗방울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손바닥을 털면서 걸었다. 비는 곧 그쳤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만 특별히 공개된 구도청 안을 걸었다. 1층에서는 당시 오월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20대 남성 둘이 나란히 서서 당시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두 남자는 손을 나란히 붙인 채 얌전히 서서 보고 있었다. 나란히 서 있는 나란한 흰색 셔츠 나란한 두 사람이었다. 그 뒤로는 50대로 보이는 일본 남자 한 명이 또 다른 20대 남성과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20대 남성은 한국인으로 보였는데 통역을 해주고 있는 듯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해나와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복도. 어두운 복도. 회색 무거운 회색 복도. 시멘트 건물, 벗겨진 페인트 그 둘의 냄새. 이 회색 복도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정말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를 해줄지도 모른다. 이제까지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말이다. 밖을 보았다. 비가 다시 올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다 도청을 나왔다.
다시 충장로로 돌아온 나와 해나는 구시청 쪽으로 갔다. 구도청을 지나 구시청 쪽으로 크지도 않은 구도심 안을 걷기만 했다. 구도청 구시청 구도심 모든 보지 못한 과거의 거리를 긴 시간을 아는 사람처럼 부르며 걸었다. 늘어선 술집들 중 가장 조용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맥주를 시켰고 주인은 곧 맥주와 유리잔을 가져다주었다. 성능이 좋아 보이는 오디오가 바의 왼편에 있었고 그 주위로 음반들이 늘어서 있는 바였다. 해나는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고개를 돌려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흘러나오던 음악은 보사노바나 가벼운 재즈였을 것이다. 해나는 서울에 있는 어학당 선생님 이야기를 했고 지난주엔 이런 걸 하며 놀았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맥주를 한 병씩 더 주문했고 맥주를 가지고 온 주인에게 해나는 지금 나오는 음악 다 좋아요 하고 웃으며 말했다. 주인은 재즈를 좋아하시느냐고 물었다. 둘은 이런저런 연주자들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문득 그 전해에 교토에 갔던 것을 생각했다. 봄이었지만 아직 날씨가 쌀쌀했고 어느 날인가는 눈발이 날리기도 했다. 교토는 모든 것이 오래되고 정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서 그 안의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 도시였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때때로는 풍경 속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생생해 보이고 젊어 보일 때가 있었다. 도시에 비해 말이다. 그때 ‘光州 City’라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그걸 알려준 사람은 이제 그 음반을 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명한 밴드가 아니니까.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다시 듣긴 힘들 거야. 그렇게 말했지. 그 이야기를 할 때쯤 누군가 바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르고 세련된 차림을 한 중년 남자였다. 귀를 덮는 은발에 어깨가 딱 맞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 사람은 매실이 들어간 술을 주문했다. 그 사람은 매실이 들어간 술을 마셨고 주인은 데운 니혼슈를 마셨으며 나는 차가운 생맥주를 마셨다. 나는 어디서나 맥주를 마셨고 어디서나 사람들은 음악 이야기를 한다.
“‘光州 City’라는 노래 알지?”
“‘光州 City’?”
“어. 82년쯤인가 나왔을걸.”
“하쿠류인가? 하쿠류의 노래?”
“응. 그렇지.”
“아 그때 공연 많이 봤는데.”
“본 적 있어?”
“그럼. 뭐 그런 노래도 많았는데. 오키나와라든가 천안문이라든가.”
“오키나와에 관련된 노래는 많았지.”
“응. 그랬지.”
그때 누군가가 들어섰는데 마르고 세련된 차림을 한 중년 남자는 아니었다. 귀를 덮는 은발에 어개가 딱 맞는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당연하지라고 생각하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넘겼다. 방금 들어온 사람은 근육이 붙은 커다란 몸에 아디다스에서 나온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나와 해나를 쓰윽 보더니 주인 쪽으로 갔다. 이미 다른 곳에서 마시고 온 얼굴이었다. 붉다. 아마 만지면 뜨겁겠지. 그 사람은 바 주인과 친한 듯 주인의 맞은편에 앉아 맥주를 달라고 했다. 그 남자의 왼편에서는 40대 남녀가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있었다. 한 덩어리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아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지 알 수 없었다. 방금 들어온 남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맥주병을 손에 쥐고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혼자 중얼거렸다. 그제야 잠시 떨어진 남녀는 목이 말랐는지 각자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키스를 마친 남자가 말했다. 잔을 높이며, 그 노래 틀어요. 그 노래. 그 노래는 그해에 서울에 있는 광장에서 부를 수 없게 된 노래였다. 왜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로 부를 수 없게 되었고 그 때문에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들을 구차하게 만들었다. 왜 부르면 안 되나? 부르게 하라 이런 질문과 발언의 과정을 거치게 했으므로 결론적으로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맥주를 마시지도 않고 맥주병만 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묻는다. 그 노래? 키스를 마친 남자는 잔을 여전히 높게 들고 있다. 그래! 들어야지 오늘 같은 날! 그 노래를 들어야지.
“그 노래를 들어서 뭐해?”
“그래도 언제 들어.”
“그 노래를 들어서 뭐해요? 여기서나 트는 거잖아.”
“왜 들으면 안 돼요? 안 되는 거야?”
“듣기 싫으니까. 정말 듣고 싶지가 않으니까.”
“그럼 무얼 듣지? 무얼 불러야 하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런가? 그런 거야? 중얼거리던 남자는 잔을 놓고 여자를 끌고 나갔다. 바 주인은 어색한 표정을 했다.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가 끝나자 음반을 바꿨는데 레퀴엠이었다. 바 주인은 레퀴엠을 틀었다. 노래가 금지되면 은유가 이용됩니까. 나는 키스하던 남자의 말을 중얼거려보았다. 무얼 듣지? 무얼 듣나. 무얼 부르지? 무얼 무얼 무얼 말하다 보니 부엉 부엉 하는 것 같았다. 해나는 벽에 몸을 기대고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해나는 상념에 빠져 있는 모습을 했다. 나는 그게 싫지도 화나지도 지겹지도 않았다. 더운 기분이 들었다. 그 노래를 틀지 말라고 했던 남자는 다시 일어나서 이런 노래 좀 틀지 말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퀴엠이 뭐야. 맥주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남자는 혼자 중얼거리다 바를 나갔는데 맥주는 줄지 않았고 여전히 취한 상태였고 주인은 만 원짜리를 내미는 남자의 돈을 자꾸 안 받겠다고 했다. 남자는 만 원을 던지고 나갔다. 우리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편의점에 잠깐 갔다 오겠다고 말하며 잠시 바를 나왔다. 여전히 상쾌한 밤의 공기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편의점을 두 바퀴쯤 돌고 캔커피를 하나 샀다.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이 캔커피는 검은색 캔에 들어 있는 전혀 달지 않은 캔커피였다. 검은색 캔에 흰색 글씨로 BLACK이라고 쓰여 있었다. 네가 어떤 기대를 하든 나는 달지 않을 것이므로 달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 나는 너를 만족시키리라, 웅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달지 않은 캔커피 쓴 커피를 다 마셨다. 손바닥을 폈다. 투둑 하고 떨어지는 빗방울이 손바닥에 닿았다. 천천히 두번째 빗방울이 떨어졌다. 세번째 빗방울. 간격을 두고 네번째 빗방울도 떨어졌고 나는 모인 빗방울을 빈 캔에 흘려보냈다. 일어나 다시 바로 향했다. 이것 봐, 큰비는 오지 않잖아. 나는 오늘 취소된 공연을 생각했다. 큰비는 오지 않아. 간격을 두고 떨어지는 몇 개의 빗방울뿐이잖아.
해나 옆으로 돌아가 앉았다. 바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주인은 우리에게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또 커피네? 주인은 방금 커피메이커에서 내린 커피를 건네주었다. 커다란 머그컵을 손에 쥐니 손 안이 따뜻해졌다. 방금 빗방울을 모으던 손바닥이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나는 가방 안의 수첩을 꺼내 괜히 뒤적거렸다. 핸드폰도 확인했다. 내보일 만한 것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해나는 가방에서 사탕 껍질 같은 걸 버리려고 꺼냈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유인물 같은 것이었다. 이거 누가 묘역에서 나눠주었어. 그런데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나만 받았어. 나는 구겨진 종이를 건네받았다. 시였다. 나는 몇 년 전 버클리에서 해나가 내게 시를 건네주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김남주의 ‘학살2’였고 나는 그것이 60년대 후반 남미의 상황을 그린 시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5월이었고 두번째 시를 받게 되는 때도 5월이며 그 사이로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 중간에 교토가 점처럼 찍혀 있지만 그 모든 것은 끊어지지 않고 하나의 공기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3년 전의 시선으로 3년 후를 보았으며 내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웠는데 그 사이를 지나는 바람이 그대로였으며 사람들은 음악을 이야기하고 나는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그것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들 중 하나였으며 나는 누가 죽이고 누가 죽고 그리고 아주 많은 것들이 남아 있고 그런 것들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는데 시간은 그 사이를 바람처럼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두 밤은 습기가 없는 상쾌한 밤이었고 나는 해나로부터 시를 받는다. 겹쳐지는 밤이었다. 나는 종이를 접어 손에 들었다. 커피와 맥주를 번갈아가며 마시다 종이를 펴 테이블 가운데에 두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읽었다. 김정환의 ‘오월곡(五月哭)’이라는 시였다. 우리는 검지로 한 줄 한 줄 읽었다. 나의 검지 옆에서 해나의 검지가 움직였다. 나의 검지는 해나의 검지를 밀듯이, 해나의 검지는 나의 검지에 붙어 있는 듯한 모양으로 움직였다. 우리가 시의 끝 부분인 “은밀한 죄악의 밤조차 진저리쳤던 대낮이었습니다”라는 부분에 이르자 두 검지는 종이를 두드렸다. 툭툭 하고. 서로의 손가락도 두드렸다. 손가락을 두드릴 때는 종이를 두드릴 때 같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나는 펜을 꺼내어 이전에 해나가 했던 것처럼 줄을 그었다. “우리들 가난의 공동체여‘라는 부분과 ”제3 세계여 공동체여“라는 부분이었다.
우리들 가난의 공동체여
제3 세계여 공동체여
(이 둘은 이어진 부분은 아니다.)
공동체는 community, 제3 세계는 third world 해나는 영어로 적는다. 공동체와 제3 세계는 몹시 세계 공용 단어 같아서 그 두 단어에 밑줄을 그은 김정환의 시는 김남주의 ‘학살2’처럼 꼭 광주의 이야기만은 아닐지도 몰라 이건 60년대 남미의 이야기일지도 모르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모든 명확한 세계들이 내게서 장막을 치고 있었다. 해나는 그때 버클리 대학 근처 카페에서 누군가 광주가 어디 있지? 하고 물었을 때 광주의 위치를 정확히 짚었다. 아까의 그 검지로, 대충 그린 한국의 지도에서 여기야 하고 광주를 짚었다. 누군가 massacre의 뜻도 물었는데 또 다른 누군가는 쉽게 설명해주었어. 잔인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 한국어로는 뭐니? massacre, 학살하다. 대학생은 각주를 달듯 massacre에 줄을 긋고 그 밑에 적었지. 학살하다 하고.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러면 brutal은 한국어로 뭐니? 아 그건 잔인하다. brutal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게 massacre. 나는 그런 명확한 세계에 없었다. 마치 아주 복잡한 지도를 보고 있는 것처럼 거기는 어디지? 하고 들여다보아야만 했는데 그렇다고 무언가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들여다보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사자는 아니며 또한 명확한 세계의 시민도 아니었다. 내 앞에는 장막이 있고 나는 장막을 걷을 수 없으므로.
검지를 들어 문장의 밑부분을 밀기 시작했다. 손톱이 시의 발을 긁고 있었다.
나는 그때 교토의 시조 역에서 걸으면 5분쯤 걸리는 어느 바에 앉아 있었다. 한동안 바의 주인과 나뿐이었고 내가 맥주를 두 잔쯤 마셨을 때 어깨가 꼭 맞는 정장을 입은 은발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 남자는 매실이 들어간 술을 주문했고 우리는 셋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그 말끔한 중년 남자를 보며 묻는다.
“어떻게 다 알아요?”
“뭐를?”
“광주에서 사람들이 죽은 거요. 거기에 사람들이 있었던 거요.”
“다 알지.”
데운 술을 마시던 남자가 정리하듯 말한다. 우리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니까. 그때 살아 있던 사람이니까. 광주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은 거 알지, 제주도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것도 알지.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니까 다 알지. 나는 웃었고 나이 많은 아저씨 둘도 웃었다. 그 두 사람은 내게 너는 광주사람이니까 너도 다 아는 사람이지 했는데 나는 그런가? 하고 혼잣말을 내뱉으며 실실 웃었다. 나는 맥주를 두 잔 더 마시고 그 바를 나왔다. 어쩌면 한두 잔 더 마셨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거기 서 있는 사람은 아니고 거기 서 있는 건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단지 손가락을 허공에 내미는 사람이었다. 저기 누가 서 있어 하고 뒤돌아 걸으며 혼잣말을 내뱉는 사람. 빗방울을 모아 캔에 흘려보내는 사람.
해나는 움직이는 나의 검지를 바라보았고 나는 계속 검지를 밀었다. 바의 주인은 저기, 하고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때 그 사람은 우리에게 저녁을 먹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왜 그런 걸 묻지 이 새벽에? 그런 표정을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먹었어요 진작. 남자는 어쩔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뇨, 다름이 아니라 이 근처에 죽이 맛있는 집이 몇 군데 있거든요 떡이 맛있는 그러니까 떡집도 있어요 국수가 맛있는 집도 있고 아 아까 말한 죽은 팥죽인데 팥죽이 특히 맛있어요 호박죽도 있고 깨죽도 있고 그냥 쌀죽도 있고 그런데 닭죽은 없어요 닭죽은 아마 삼계탕집에 가야 할 거예요 팥죽에는 새 알이 들어간 것도 있고 그 위에는 가끔 삶은 밤을 올려주기도 해요 그리고 밥이 들어간 것도 있지만 역시 면이 들어간 게 제일 맛있어요 그 집에서 쓰는 팥은 묵은 팥이 아니라 새 팥이에요 새 팥으로 팥죽을 만들어요 묵은 팥은 맛이 없어요 새 팥으로 팥죽을 끓여야 맛있어요 묵은 팥은 뭔가 눅눅한 묵은 맛이 나잖아요 떡집은 매일 아침에 새로 떡을 뽑는데 지나가면 가래떡을 먹어보라고 주기도 하는데 정말 맛있어요 저는 무지개떡 같은 건 안 먹는데 거기는 무지개떡도 맛있어요 백설기도 맛있고 시루떡도 맛있어요 바람떡도 맛있고 송편도 맛있어요 그리고 어떨 때는 거기서 식혜를 만들고 있기도 해요 근데 역시 가래떡이 제일 맛있고 그다음으로 인절미가 맛있는데 인절미를 달라고 하면 거기서 막 콩가루를 묻혀줘요 뜨거운 떡에 고소한 콩가루를 묻혀줘요 아 그리고 뭐든지 맛있는 걸 먹으려면 시장으로 가야하는데 양동시장통에 맛있는 죽집이 있고 아까 말한 집이란 다른 집인데 떡집 맛있는 떡집도 있어요 국수라고 하면 보통 메밀국수인데 시내에 있는 국숫집 맛있는 데 아시지요 거기 옛날에는 반 판도 팔았어요 국수 반 판 그렇지만 시장에 가면 다른 국숫집도 있어요 그런데 국수를 먹을 바에는 그냥 팥죽을 먹는 게 낫다 싶을 때가 있어요 아니 보통은 그래요 팔죽에 칼국수 면이 들어가잖아요 그걸 먹는 게 낫지 않나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다시 아까 맨 처음에 말한 죽집으로 가요 새 팥으로 쑨 팥죽을 먹으러 가요.
죽과 떡과 국수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바의 주인은 레퀴엠이 든 음반 같은 건 진작 빼버렸다. 레퀴엠을 끝까지 듣지 않고 꺼버렸다. 그리고 튼 음반은 팻 매스니 같은 거였다. 그날의 밤에 어울리는 연주였다. 다름 아닌 가끔 허공에 손바닥을 내밀면 빗방울이 시간의 간격을 두고 툭툭 떨어졌고 손을 흔들면 손가락 사이로 상쾌한 밤의 공기가 빠져나가는 그런 밤에 어울리는 음반이었다. 우리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한 번씩 먹고 싶다 하고 반응해주며 죽과 떡과 국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주인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죽과 떡과 국수밖에 없는지도 몰랐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떡과 죽과 국수의 이야기. 가끔 보면 한 달에 아니 두 달에 한 번 정도인가 어쩌면 1년에 10년에 한 번 정도일 수도 있어요, 아직도 종을 딸랑이면서 두부를 파는 할아버지가 있어요. 정말이에요. 나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어.
그리고 계속되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떡과 죽과 국수의 이야기.
해나는 여름이 지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연락은 끊겼다. 나는 해나의 전공을 모르고 해나의 직업을 모르고 해나도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가끔 해나의 이메일 주소가 기억이 날 때가 있기는 하다. 나는 3년 정도 되는 시간을 하나로 뭉쳐서 바라보는 사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해나를 중심으로 더 긴 시간들이 뭉쳐졌다. 어떤 밤, 같은 공기를 가지고 있는 밤들은 하나로 모였다. 하나의 시간으로 모였다. 예를 들어 광주, 해나를 만난 곳은 광주였다. 광주의 그 밤에 특별히 크게 소리 내어 무언가 말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우리가 오래오래 들어야 했던 것은 떡과 죽과 국수의 이야기뿐이었다. 그 사람은 다른 중요한 이야기는 없다는 듯이 그 이야기를 했다. 마치 이야기가 끊어지면 안 될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 후로 꽤 긴 시간을 보내지만 그토록 떡과 죽과 국수의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나는 그 사람만큼 음식에 대해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전혀 달지 않은 블랙 캔커피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할 수 있었다. 전혀 달지 않았어, 그걸 기대하고 마시면 완전히 만족시켜주는 캔커피지. 해나의 검지는 어떻게 생겼는지 희미하고 하지만 해나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잖아. 내게 처음 한국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한국어를 말하는 모임이 있어 하고 권했던 사람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바에서 데운 술을 마시던 사람은 붉은 얼굴이 기억난다. 그 사람은 내게 너는 광주 사람이지 했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 옆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쪽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는 광주 사람이라는 말을 듣자 고개를 돌렸는데 꼭 아닌 것만 같아서 그랬다. 나는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 이야기를 듣자 데운 술을 마시던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80년에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어서 내게 너도 광주 사람이지 하고 말했는데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아득함을 느끼고 고개를 휙 돌리고 반응도 하지 않고 맥주만 마셨다. 반대편의 말끔한 중년 남자는 매실이 들어간 술을 금세 비웠으며 몇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매실이 들어간 술을 마신 적이 없다.
언젠가 시간이 좀더 흐르고 내 방에서 구겨진 종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김남주의 ‘학살2’라는 시였다. 나는 언젠가 김정환의 시를 읽을 때처럼 김남주의 시도 검지를 밀며 읽기 시작했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가 반복되는 그 시는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 / 아 악마의 음모도 이리 치밀하지는 않았으리”로 끝이 났다. 한밤중 군인들이 도시로 밀려 들어와 사람들을 죽이는 것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 비명을 지르는 것 통곡을 하는 것을 쓴 그 사람은 50이 되기 전에 병으로 죽었으며 그 사람이 죽은 때는 90년대로, 누군가 환멸의 시기라고 말하던 때였으며 6, 70년대 스페인과 멕시코가 어땠는지 무심하게 썼던 칠레의 대표적인 작가인 로베르토 볼라뇨는 50 즈음에 죽었으며 그것과 무관하게 그 시는 여전히 60년대 남미의 이야기처럼 보였고 아일랜드의 피의 일요일을 노래한 것처럼 보였는데 광주의 그날도 공교롭게 일요일이었다고 하며 내가 자꾸만 남미와 아일랜드를 들먹인다고 해서 남미와 아일랜드를 잘 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뜻은 아니다. 맛있는 떡과 죽과 국수를 잘 아는 사람처럼 남미와 아일랜드를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전혀 달지 않은 캔커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해나를 광주에서 만났던 날 광주는 조용했고 큰 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다만 내 앞으로는 몇 개의 장막이 쳐져 있고 나는 그 앞으로 직선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다는 이야기다. 나는 3년 정도의 시간은 하나로 볼 수 있으며 3년 전은 3년 후의 시선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러므로 나는 모든 시제를 지울 수 있으며 그렇게 볼 수 있는 시간들은 점점 늘어나지만 나의 시선은 김남주가 이야기한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에는 가닿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건 좀 신기할 수도 있지만 실은 당연한 이야기다. 확실한 이야기이다. 어떤 같은 밤들이 자꾸만 포개지는 나의 시간 속에서도 말이다. 몇 번의 5월의 밤이 포개지는 나의 시간 속에서도 말이다.
다음 장은 누군가 눌러쓴 선언문인데, 해나는 몇몇 부분을 고쳤다. 설명도 덧붙였다. 단기####년은19**년으로 바뀌어 있었다. ####년 광주 시멘트 건물 회색 복도 오월 마지막 남은 며칠, 그것은 역시나 내가 모르는 시간으로 내가 더하거나 내게 겹쳐지지 않는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