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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 함대의 진주만 기습 공격 2009.07.26
DD&srchid=CCB5VTq|3Cat|894|20090726191042 31척은 11월 26일 정박지를 출항해 동쪽으로 침로를 잡았다. 12월 2일 야마모토의 연합함대 사령부는 진주만 공격작전을 계획대로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 승조원들은 함내 방송을 통해 목적지를 알게 되자 환호했다.... http://cafe.daum.net/jsseo43 ★아름다운 미술관★
1941년 12월 미국과 일본간의 전면 전쟁이 발발하기 전 미군과 일본군은
항공전력 확장에 몰두해 왔으며 일본 항공부대는 1930년대 초반부터
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중국과 소련과의 분쟁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통해 전력을 강화하고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시적으로 미군을 압도하고 전승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친 항공 전력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정복의 유혹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1941년 8월 일본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잇던 군국주의자들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지도를 펴놓고 대동아공영권의 야심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은 장래에 치를 피의 대가에 대해서는 믿지 않으려 했다.
독일의 유럽 정복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 제국을 표류하게 했으며
이들이 공격을 받아도 본국에서의 지원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영국은 말레이 제국과 함께 싸우고 있었으나 일본이 말레이 제국을
침공해도 이를 방해할 힘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중국 본토에서 일본이 벌인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 육군과 공군의 위력이 드러났으며
일본 대본영은 소련이 너무나도 강대한 상대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1941년 겨울, 소련 육군이 모스크바로 후퇴하고 있을 때
동쪽과 남쪽에는 공격하기 쉬운 표적이 있었다.
중국 전쟁은 일본 육군의 전쟁이었다. 만약 일본 지휘부가
서 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에서 전쟁을 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일본 해군이 해군 항공대를 사용해 누릴 최고의 순간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태평양 건너편에는 아직도 중립을 지키고 있는 미국이 있었다.
미 육군은 작았지만 해군은 세계에서 가장 컸다.
미국의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큰 육군을 건설할 힘이 있었으며
1941년의 일본 함대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많은 군함과
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일본제국 해군은 30년이 넘게 미군과의 전력 비교를 전제로 전쟁 계획을 짜 왔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일본은 미국에 대항해 서태평양을 방어하는
내용의 훈련을 해왔다.
1940년에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어갔다.
1940년 7월 미국은 야심찬 새 해군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그 해 9월에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함에 따라 미국은
중요한 석유공급을 포함하는 통상금지조치를 가했다.
그러나 일본 수뇌부가 본 미래 해군 세력의 계산은 간단했으며
태평양 지역에서 기회의 문은 닫히고 있었다.
1937년에 시작된 전투함 건조계획이 1941년에 거의 끝나게 됨에 따라
그해 말까지 일본과 미국의 함정 비율은 7대 10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함정 건조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이 비율은
1943년에는 5대 10,
1944년에는 3대 10으로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만약 일본이 행동을 취하려면 지금밖에 시간이 없었다.
일본은 무방비 상태의 동남아 유럽 식민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서 태평양지역에서 방해를 제거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공격을 가해
미국을 패배시켜야 했다.
서태평양 지역의 미 해군력은 1912년에 하와이에 개항된 진주만에
배치되어 있었다.
1940년 5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 태평양함대가
미 본토 서해안 항구 대신 진주만에 영구 주둔하도록 지시했다.
1939년 8월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야마모토 제독은
미 태평양함대의
하와이 배치를 ‘우리의 목에 들이댄 칼날’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하와이에 전진배치 된 미 함대의 위협을 막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리하여 진주만은 일본군의 이상적인 공격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것인가? 해군의 전통적 사고방식은
외해에서 본격적인 해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해군 항공력은 정찰이나 교란 등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나
최종 결전은 전함의 주포로 결판날 것이다.
미 해군 역시 이러한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초기의 계획은 장거리비행정이 마샬군도 기지에서 출발해 5,500마일을
비행 후 진주만을 폭격, 미 함대를 바다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이런 유틀란트 스타일의 해전을 태평양에서 재현할
생각이 없었다.
1940년 봄에 실시된 함대훈련에서는 전함에 대한 뇌격기의 공격력을
시범했다.
이는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낼 뿐만 아니라 항공기의 강력한 공격으로
태평양함대를 제거하는 방법이었다.
1941년 1월 야마모토는 믿을만한 장교들로 비밀기획그룹을 편성했다.
해군 항공의 전문가인 오오니시 제독은 하와이를 공중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 무관을 지낸 겐다 미노루 소령의 보좌를 받고 있었다.
겐다 소령은 1940년 11월 타란토에 투묘 중인 이탈리아 함대를 영국의
해군 항공기가 공격해 대성공을 거둔 상황을 보고했다.
겐다 소령의 의견은 미군 기지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은 가능하지만
위험요소가 크다는 것이었다.
모든 항공모함과 최소한 400대의 항공기가 필요했다.
공격에 참가하는 조종사는 1 차 목표인 전함의 갑판 위에 철갑폭탄을
정확히 명중시킬 만큼 고도로 훈련되어야 했다.
어뢰 공격을 하는 뇌격기 조종사도 적함의 홀수선에 저공 저속의
수평공격을 정확히 가하는 고도의 기량이 요구되었다.
1941년 4월 야마모토는 비공식적인 예비작전 계획을 연합함대
참모들에게 시달, 세부검토에 들어갔다.
일본 해군대학은 4개월 후 이 계획으로 전쟁연습을 실시했다.
이 첫 번째 전쟁연습에서 미 전함 1척 격침, 항모 2척 격침,
항모 1척 대파라는 성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 전쟁연습은 첫 번째 연습보다 결과가 나빠서 공격함대는
항모 2척과 항공기 127대를 상실했다.
선임해군장교들은 이 작전이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은 기동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될 나구모 주이치 제독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직위해임을 내세우며 나구모를 설득시켜 이를
받아들이게 했다.
10월 초까지 이 계획은 승인되었으며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6척이
이 작전에 배치되었다.
나구모는 이 획기적인 작전을 위해 세부 준비를 해나갔다.
작전을 철저히 세분화시켜 계획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정보기관은 진주만을 비롯한 오아후섬과 여러 비행장의 정보를
알려 주었다.
호놀룰루 동쪽 5마일에 있는 광활한 천연항만의 한복판에는 포드섬이
위치하고 있고
이곳에는 항모항공전대의 중앙정비시설로 사용되는
거대한 해군항공기지가 있었다.
이곳에는 드라이독과 유류저장탱크, 7개의 미 육군항공기지가 있었다.
이들의 북쪽에는 할레이와 기지, 동쪽에는 버로 기지, 중앙에는 휠러
기지,
그 옆에는 히컴 기지가 위치하고 있었다.
항만 입구 서쪽에는 이와 해병 항공 기지가 있었다.
섬의 동쪽에는 카탈리나 PBY 초계비행정을 보유한 카네오헤
해군 항공기지가 있었다.
오아후섬과 해군 기지의 큰 모형이 만들어져 조종사들은 이 곳을
극비리에 눈으로 익혔다.
일본 가고시마만의 천해가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진주만의 지형조건과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어뢰공격의 정확성이었다.
해군의 최고 조종사들에 의해 6개월간의 훈련이 수행되었지만 결과는
아직도 실망스러웠다.
어뢰 투하고도는 너무 높거나 낮아서 착수 후 항주하는 데 실패했다.
겐다 소령은 저공 어뢰공격을 포기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어뢰공격 없이 이 작전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암호명 작전 Z 공격은 1941년 11월 17일로 계획되었다.
그 달 11일까지는 어뢰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바다에 어뢰를 안정적으로 투하하기 위한 목제 안정장치를
부착한 개량 어뢰 인도는 지연되었다.
일본과 미국의 협상은 예정일자가 지나도록 계속됐다.
야마모토는 공격 개시 일자를 일본 시각으로 12월 8일로 재조정했다.
이 날은 오아후 시간으로는 12월 7일 일요일이었다.
기동함대는 11월 22일까지 일본 북쪽 안개 덮인 쿠릴열도의
가장 큰 에토로푸 섬 히토카푸 만에 집결했다.
나구모의 함대 31척은 11월 26일 정박지를 출항해 동쪽으로 침로를
잡았다.
12월 2일 야마모토의 연합함대 사령부는 진주만 공격작전을 계획대로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 승조원들은 함내 방송을 통해 목적지를 알게 되자 환호했다.
하와이 시간으로 1941년 12월 6일 나구모의 기동함대는 무선침묵과
안개를 이용해 전속력으로 목적지로 항진했다.
최종해상급유를 실시한 후 유조선은 일본으로 회항했다.
기동함대의 주력은 <아카키>, <카가>, <소류>, <히류>,
새로 건조된 <쇼가쿠>와 <즈이카쿠> 등 6척의 항공모함이었다.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 순양함 <도네>, <지쿠마>,
<아부쿠마> 등은 경계진에 편성되어 있었다.
이 주력함대의 전방에는 이미 27척의 잠수함이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상선 항로를 우회하고 미군 초계기의 감시를 피해 항해를 계속한
기동함대는 12월 7일 새벽에 하와이 북쪽 230마일 거리 해역에 도착했다.
일본 함대에서 최초로 발진한 항공기는 순양함 소속 수상정찰기였다.
항공모함의 비행갑판과 격납갑판에서는 정비사가 항공기를 점검하고
있었고 무장사들은 폭탄, 어뢰, 기관총탄 등을 탑재하기에 바빴다.
바다는 비교적 잔잔하고 옅은 안개가 끼어있어 기동함대의 은폐 및
공격지 발진에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기함 아카키 함상의 나구모 사령관은 표적에 대한 최신정보를 수령했다.
8척의 전함은 전함투묘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항공모함은 없었다.
<렉싱턴>, <호넷>, <요크타운>, <사라토가>는 어디로 갔을까?
요크타운은 대서양에 있었고 사라토가는 샌디에이고에서 수리 중이었다.
렉싱턴과 엔터프라이즈는 미드웨이와 웨이크섬의 해병부대에 공급할
항공기를 나르는 중이었다.
오전 6시 30분에 첫 공격편대가 일본 항공모함에서 발진을 시작했으며
30분 동안 183대가 출격했다.
이 중에 1,800파운드급 철갑폭탄(16인치 포탄을 개조해 제작)을
장비한 수평폭격기 B5N 케이트 49대는 전함을 공격할 것이었다.
그리고 비행장 폭격용으로 250kg 폭탄을 탑재한 아이치 D3A1 발
급강하 폭격기 55대,
그리고 폭격기들을 엄호하고 지상에 기총소사를 가할
A6M 제로 전투기 43대도 있었다.
호위전투기를 이렇게 많이 배치한 것은 중국전선에서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 폭격기는 현대식 전투기의 공격에 아주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공격편대군은 항공모함 함상에 집결해 편대를 짜고 남쪽으로 향했다.
비행고도는 옅은 구름의 바로 위인 6,750피트였으며 목표지역까지
소요시간은 1시간 50분이었다.
제1파 공격대 지휘관은 후치다 미쓰오 중령은 호놀룰루 시의
KGMB 방송국의 일요일 아침 경음악 방송에 다이얼을 맞췄다.
그는 시정이 좋을 것이라는 기상예보를 듣고 힘이 숫았다.
진주만 해군 기지는 일요일 아침의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함정 승조원들은 제3종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전투함에는
대공포 중 4분의 1에만 요원을 배치했다.
진주만 언덕에 있던 미 육군 레이더조작사는 접근해오는
일본 항공기들을 포착하고 보고했으나
그 보고는 그날 아침 캘리포니아에서 날아올 B-17 편대로 간주되었다.
오전 7시 55분 태평양 기뢰함대 소속의 기뢰부설함에 승선해
진주만 입구에 있던 기뢰함대 사령관은 항공기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항공기의 동체에 그려진 일본국기를 볼 때까지 그는 이것이
단순한 사고인 줄만 알았다.
폭탄이 떨어짐과 거의 동시에 태평양지역사령부에 경보가 울렸다.
수분 후에 놀란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스밴드 킴멜 제독은 일본군의
공격보고를 받았다. 포드섬에서는 부사령관인 벨링거 제독이
“진주만 공습 중.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라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많은 함정승조원들은 일요일 외출로 육상에 나와 있었다.
진주만에 정박 중인 94척의 함정 중 네바다 호는 두 개의 보일러를
가동하고 있었다.
연돌에서 엷은 흰 증기가 하늘로 길게 뿜어져 나갔다.
오전 7시 55분, 성조기를 게양하기 위해 국기게양 요원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본 수병들은 북쪽 하늘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점을 발견했다.
많은 항공기들이 진주만 뒤 사탕수수밭 언덕을 넘어 저공으로 비행해왔다.
첫 번째 공격은 오아후의 비행장들을 강타했다.
히컴과 휠러 비행장에 폭탄이 떨어져 사보타지를 막기 위해 밀집시켜
놓은 육군 항공기들을 파괴했다.
7시 57분 뇌격대 제1파가 전함 정박구역의 함정을 공격하기 위해
해상을 초저공으로 날아왔다.
일본의 제로 전투기들은 미군 전투기들이 반격하러 출격하지 않자
지상표적에 대해 임의로 기총소사를 실시했다.
오전 8시 5분 수평폭격기에서 투하한 특별철갑폭탄이 전함에 명중하기
시작했다.
공격은 약 6분간 계속되었으며 진주만 해군 기지는 폭발과 하늘로
치솟는 연기구름에 싸였다.
전함 정박지에 있던 함정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아리조나는 잔해만 남아 침몰했으며 테네시, 메릴랜드는 불길에 싸였다.
오클라호마는 12발의 폭탄을 맞고 대파되었으며 버지니아는 9발,
캘리포니아는 3발의 직격탄을 맞았다.
항진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전함인 네바다는 폭탄을 맞고 해안에
좌초됐다.
노후된 유타는 전복되었으며 순양함 헬레나는 어뢰 5발을 맞았다.
수천 명이 익사하거나 소사당했고, 침몰하는 배와 함께 수장되었다.
오전 8시 54분 시마자키 중령이 이끄는 제2파 편대군의 167대의
공격부대가 출격했다.
제2파 편대군은 폭격기 엄호용 제로 전투기 35대, 비행장을 공격할
수평폭격기 54대,
전함을 공격할 급강하 폭격기 72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미군의 공중 저항은 미미해서 제1파 편대군의 지휘관 후치다 중령은
3시간 동안 한 대의 미군기도 보지 못했다.
미군의 항공전력은 대부분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미 해병 항공기지인 이와 비행장에
있는 와일드캣 49대와 SBD 던트리스는 제로전투기에 의해 지상에서
격파되었으나
해병대는 던트리스 후방석의 기총으로 공격하는 일본기에
필사적인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공격이 한창인 때에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에서 날아온
SBD 던트리스가 이와 비행장 상공에 도착해 공격을 목격했다.
SBD 편대장 H. L. 양 중령은 전투기의 공격과 대공포 사격을 피해
포드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10분 후에 엔터프라이즈에서 날아온 13대의 항공기도 무사히 착륙했다.
북쪽에 떨어져 있어 공격을 받지 않은 작은 육군 비행장인 할레이와에서
P-40 전투기 4기편대 2개와 P-36 1개 편대가 오전 8시 15분부터
10시 사이에 출격해 일본기 7대를 격추했다.
빌로 기지는 9시 50분까지, 히컴 기지는 11시 27분까지 한 대의
전투기도 출격시키지 못했다.
오아후섬의 육군 항공기 231대 중 97대가 완파되고 88대가 대파되었다.
그날 늦은 아침에 항모 엔터프라이즈에서 날아온 F4F 와일드 캣 4대와 SBD 4대가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격추되었다.
그날 오후에 와일드캣과 SBD는 일본함대를 찾아 나섰다.
일본은 작은 피해로 얻은 큰 승리에 기뻐 날뛰었다.
많은 훈련을 통해 그들은 에상한 대로 높은 공격 정확성을 얻어냈다.
항공기 투하 어뢰 반 이상이 명중했으며 급강하 폭격기의 폭탄 50%,
수평폭격기 폭탄의 25%가 명중했다.
나구모의 공격함대는 전투기 9대, 급강하폭격기 15대, 뇌격기 5대를
상실했으며 74대가 파손되었지만 귀환했다.
하와이에서 40마일까지 접근한 일본 항모에 착함한 일본군 항공기들은
해상상태가 나빠져 15도까지 함이 롤링하는 악천후 속에서 50대가
착함 중 파손되었다.
일본군 항공기 승무원 손실은 총 55명이었다.
미 해군은 전함 4척이 격침, 3척이 대파, 1척이 소파되었다.
경순양함 2척이 파손되었으며 구축함 3척이 대파되었다.
보조함은 3척이 침몰 및 대파되었다.
해군과 해병대에서는 3,077명(실종자 960명 포함,
대부분은 전복된 아리조나 함내에 갇힌 인원)이 전사했으며 876명이
부상당했다.
육군은 226명이 죽고 396명이 부상당했다.
제1, 제2파 편대군이 무사 귀환하다 기함인 아카기 함상에서는 다음에
무엇을 할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히류에 타고 있는 야마구치 제독은 제3차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구모 제독과 제1항공함대 사령관 구사카 제독은 처음부터
2차 공격까지만 계획하고 있었다.
오아후 섬의 방어력은 거의 괴멸되었으나 수리시설과 유류저장시설은
아직 건재했다.
마침내 기함 아카기의 지휘소에서는 철수를 결정했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진주만 공격성공의 보고를 듣고 환성이
터져 나왔다.
누구나 야마모토가 미 태평양함대를 완전 섬멸하기 위해 그날 밤이나
다음날에 나구모에게 재차 공격을 지시할 것으로 기대했다.
항상 신중한 야마모토는 결정을 나구모에게 일임했는데 역시 신중한
나구모는 미 해군의 항공모함들이 하와이로 돌아올 것을 우려해
공격을 중단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정찰기와 정보기관은 단 한척의 미 항모도 발견하지 못했다.
기함 아카기의 마스트에 철수신호가 게양된 것은 오후 1시 30분.
폭탄을 탑재한 공격기가 아카기 갑판을 이함 한지 7 시간 만이었다.
진주만 공습은 약 3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항공전술의 측면에서 볼 때 진주만 공습작전은 새로운 무기와 전술을
구사해 놀라운 성공을 거둔 공대지전투의 걸작품이었다.
방어군 측의 항공전력은 5개월 전 바바로사 작전 초기의 소련 공군처럼
지상에서 괴멸되었다.
장거리 항속능력을 갖추고 중무장한 제로전투기는 앞에 잇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놀라운 비행기처럼 보였다.
일본 함대의 공격은 미 해군 태평양함대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으나
전략적으로 볼 때 그것은 큰 실책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치욕의 날이라고 했듯이 일본의 공격은 사전경고나
선전포고 없이
수행되어 미국 고립주의자들을 복수심에 불타게 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미군은 손상을 입었으나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6척의 전함이 침몰하기는 했으나 앞으로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항공모함은 아직 건재했다.
일본 해군은 남방의 자원지역을 계속 정복해 나갔으며 작전 Z는
그 서곡에 불과했다.
미국의 해군항공대는 서태평양 및 중부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방해할 능력이 있었고 진주만의 수리시설과 유류저장시설은
재건함대를 육성하고 지원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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