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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세자좌부빈객 행 통정대부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창석 선생 이공행장〔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世子左副賓客行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蒼石先生李公行狀〕
창석(蒼石) 이공(李公)의 휘는 준(埈), 자는 숙평(叔平), 본관은 흥양(興陽)이다. 고려 시대에이양승(李陽升)이란 분이 거란과의 전투에서 힘써 싸우다가 죽었는데,역사서에서 “장군 이양승이 죽었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며, 공에게 12대조이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이서원(李舒原)이란 분은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다. 그의 아들 이은(李垠)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그의 아들이언(李堰)은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는데 청렴하고 결백함으로 저명하여 광묘(光廟세조)께서 편지를 내려 칭찬하였다. 그의 아들이수천(李壽川)은 사헌부 집의를 지냈는데 정도를 지키며 흔들리지 않았다. 이분이 공의 4대조이다. 증조부이조년(李兆年)은 판관을 지냈고, 조부는 이탁(李琢)이고, 아버지이수인(李守仁)은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신수경(申守涇)의 딸이며 숙부인에 증직되었다.
공은 가정 경신년(1560, 명종15) 3월 6일 상주(尙州)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릴 적에 《맹자》의“어째서 굳이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라는 글을 읽고 곧 척연(惕然)히 말하기를 “의리와 이로움의 분별은 특히 학자가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21세 때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유성룡(柳成龍))에게 가서 배웠는데, 유 선생이 자주 칭찬하며 원대한 인물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임오년(1582, 선조15)에 성균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신묘년(1591)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낮은 관직인 교서관에 소속되었다. 이것은 정권을 잡은 자가 공을 미워해서였다.
임진년(1592)에 왜적이 한꺼번에 많이 침입하여 노략질을 했는데, 조령 이남이 제일 먼저 침략을 당했다. 공은 당시에 서울에 있다가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부모 계신 곳을 몰라 밤낮 울부짖으며 다니다가효곡(孝谷)의 산속에서 만나니,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한 것이라고들 하였다. 고향 사람 중 불량배들이 무리 지어 다니며 왜적의 의복을 주워 입고 도적질을 했는데 노략질이 왜적보다 심하였다. 공이 그들을 의리로 타이르자 불량배들 역시 감동하고 복종하였다. 이에 피난민 수천 명을 모아 안령(鞍嶺)에 웅거하며 왜적을 막을 계획을 세웠으나 왜적이 그곳을 습격하여 피난민 중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공 역시큰 변을 당하여피눈물을 흘리며 의병을 일으키려 도모하자, 사람들이 공과 우복(愚伏) 정공(鄭公정경세(鄭經世))을 추대하여 주장(主將)과 소모장(召募將)으로 임무를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집한 인원이 수천 명에 이르러 충의(忠義)로 서로 격려하니, 사람들이 또한 공을 위하여 울면서 적을 죽이고자 하였다. 드디어 고모담(鈷鉧潭)에 진을 치고 무기를 수리하며 군량미를 지급하였으며, 틈틈이 방략(方略)을 세워 왜적을 많이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계사년(1593) 2월 왜적이 크게 살육하고 약탈하여 의군(義軍)이 무너지고, 공이 또한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땅에 엎어져 거의 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는데, 백씨(伯氏)인 월간공(月澗公이전(李㙉))이 등에 업고 달아난 덕분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공은 의군을 다시 세울 수 없음을 알고 경상좌도로 돌아 들어가 관찰사 홍공 이상(洪公履祥)을 찾아가 울며 상황을 말하기를,
“위급한 상황을 돕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자, 홍공이 말하기를,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힘이 고갈되었습니다. 내가 돕는 것이 어찌 만에 하나라도 보탬이 되겠습니까. 공이 만약 힘써 둔전(屯田)을 경영할 수 있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드디어 동지들과 도모하여 우거진 풀을 베고 못에 물을 대며 굶주린 백성들을 모집하여 힘써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가을에 풍년이 들자, 수확한 곡식으로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고 남는 곡식은 모두 군진에 보낼 계획을 세우니, 이때가 갑오년(1594)이었다. 조정에서는 공이 의군을 일으키는 데 공로가 있다고 하여 전적으로 승진시켰으나, 공은 상기를 마치지 않아 부임하지 않았다. 9월에 예조와 형조의 좌랑에 제수되었다.
을미년(1595)에 경상 도사(慶尙都事)가 되어 군량과 어염(魚鹽)을 조달하는 등의 일을 겸하여 주관해서, 바다에서는 배로 소금을 운반하고 육로에서는 수레로 곡식을 실어 날랐는데, 반드시 그 완급을 때에 맞게 하여 시의(時宜)를 곡진하게 맞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당시에 조정에서는 유신(儒臣)들에게 전대(前代) 국가의 흥망을 기술하여 바치게 하였다. 공은 이전에《중흥귀감(中興龜鑑)》을 지어 하(夏)나라의소강(少康)으로부터 송(宋)나라의 고종(高宗)에 이르기까지 먼저 군덕(君德)의 득실을 논하고 다음으로 신하의 사정(邪正)을 언급했는데, 손바닥을 보여 주듯 분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 책을 올리니, 상이 가상히 여기며 감탄하고 손수 쓴 교서를 내려 칭찬하였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이 영해 부사(寧海府使)로 있었는데, 사대부로서 아부하며 붙좇는 사람이 많았다. 공이 홀로 말하기를 “이 사람은 간사한 사람이다.” 하였다. 공이 영해부를 지나갈 적에 정인홍이 나와서 맞이했는데, 공이 들어가지 않고호창(呼唱)하게 하며 지나가자 정인홍이 매우 성내며 이를 악물어 이가 거의 부러질 정도였다. 이 말을 들은 이들은 공의 앞날이 위태롭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다. 경상 도사로서 임기가 찼을 때, 체찰사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잉임할 것을 청했는데, 물자를 조달하는 일을 잘했기 때문이다.
정유년(1597)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왔다. 지난날 상이 나라 안에 명하여 왜적에게 가족을 잃은 자들에게 부대를 만들어 왜적을 토벌하게 하고‘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이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소모관(召募官)에 임명되었다. 왜적이 승승장구하고 매우 날래서 임금이 다시 피란을 하려 하자, 공이 상소하여, 상께 조령(鳥嶺)에 머물면서 의연히 왜적을 토벌하고 스스로 분발하실 것을 청했는데, 그 대략에,
“조령 위에는 성(城)이 한 채 있는데‘어류성(御留城)’이라 합니다. 그 남쪽에는 함창(咸昌)과 상주(尙州)의 비옥한 들판이 멀리 보여 둔전을 경영할 수 있고, 그 북쪽에는 충주가 강을 굽어보고 험준한 지형을 등지고 있어 보루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핏줄이 서로 통하고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돕는 격이니, 친히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조령 위에 나아가 주둔하신다면 성상의 위엄이 임하여 군사들이 용기를 백배는 더 낼 것입니다. 또한 조령 아래에 있는 함창과 문경(聞慶)과 용궁(龍宮) 세 현을 합쳐 하나의 큰 부(府)를 만들어 어류성의 근본을 굳건하게 하고, 상주 등지에 둔전을 크게 설치하기를강족(羌族)을 굽어보며 무력을 떨친 고사처럼 한다면 양식은 반드시 풍족하고 수비는 반드시 견고하며 전쟁은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하였다. 상이 가상하게 여겼으나 끝내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공이 소모관으로서 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가 의병을 규합하니 의병들의 정신이 아주 달라졌다. 체찰사가 공을 곽공 재우(郭公再祐)에게 소속시켜 협력하며 서로 돕게 하였다. 마침내석문산성(石門山城)에 들어가 성과 못을 수리하고 양식을 많이 모으자, 사람들이 모두 성은 굳게 지킬 수 있고 죽음은 즐겁게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근거 없는 주장이 일어나 주둔지를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오고 문득 또 병력을 해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공은 마음이 몹시 아파 상언하기를,
“신(臣)이 애를 태우며 침이 마르도록 성을 수리하고 양식을 모으며 정성을 다해 노력하여 조금씩 쌓아 올린 것이 이제 낙동강 물과 함께 흘러가 버리게 생겼습니다. 하늘이 실로 이렇게 한 것이니,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답을 받지 못하였다.검찰사(檢察使)성영(成泳)이 공을 자신의 종사관으로 지명하였다.
무술년(1598)에 좌총리사(佐總理使) 이공 원익(李公元翼)의 휘하로 옮겼는데, 좌총리사가 일찍이 공을 존중하였으므로 모든 일을 공에게 맡겼다. 공이 계획하고 시행한 것들은 한결같이 정도(正道)에서 나왔으며 크건 작건 간에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서 처리하였다.
이때 명나라 군대가 크게 모였다.형 군문(邢軍門)과양 경리(楊經理)가 둔전을 설치하고 강제로 농지에 세금을 매기고 곡식을 수확하게 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백성이 위태하구나!”라고 말하고는 드디어 공문서를 올려 그 수량을 반으로 줄였다. 잠시 후 예천 군수(醴泉郡守)에 제수되었다. 총리사가 보고하여 아뢰기를,
“이준이 관리하는 일은 이준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잉임할 것을 명하였다.
기해년(1599)에 단양 군수(丹陽郡守)에 제수되었다. 단양군은 영남으로 가는 요충지로 명나라 군사들이 베 짜는 북처럼 자주 왕래했는데 치고받거나 소란스럽게 떠들며 군수를 모욕하고 날마다 백성을 겁탈하였다. 공이 부임하자 그들의 예모가 공손하고 그 말이 바르거늘, 공이 문득 울면서 호소하기를 “부모가 자식을 구한다면서 해치며 사납게 굴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격장(游擊將)모국기(茅國器)가 노래와 시를 지어 사과하고 군졸 중에 횡포한 자들을 단속하니, 백성들이 편안해졌다. 공이 단양 군수로 있던 5년 동안 교화가 크게 행해져 감사가 치행 제일(治行第一)로 올렸다.
계묘년(1603)에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 백성들이 수레를 부여잡고 차마 보내지 못하며 노래하기를 “단양의 산이 빼어나고 기이하며 단양의 물이 깊고 맑으나, 공을 머물게 하지 못하고 공의 이름만 머물게 하는구나.[丹山秀且奇 丹水深而淸 不能使公留 但得公留名]”라고 하였다.
이전에서애옹(西厓翁)이 소인배에게 탄핵을 받아 재야로 물러나자,공이 상소문 수천 자를 지었는데 내용이 뼈에 사무치게 절실하였다. 서애옹이 그 말을 듣고 힘써 말리며 말하기를 “공은 꼭 늙은이의 다리가분수령을 한 걸음 넘어가게하고자 하는가.”라고 하고, 공 역시 이익은 없고 단지 재앙만 부추길 뿐이라고 생각하고 상소문을 찢어 버렸다.
경연에 입시하였을 적에 문장의 뜻을 계기로 상주하여 말하기를,
“당 덕종(唐德宗)은 즉위 초기에 정사가 맑고 밝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헤아리고 살피는 것이 너무 지나쳐 상하가 막혀 끝내 피난하는 욕을 보았으며,육지(陸贄)한 사람이 있었으나 끝내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전하께서 유성룡을 대우하는 것이 불행하게도 이에 가깝습니다.”
하니, 상이 좋아하지 않고 경연을 중단하였다. 며칠 뒤에 오봉(五峯)이공 호민(李公好閔)이 상에게 아뢰기를,
“근래에 위선과 아첨이 풍습을 이루었는데, 유독 이준만은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으니, 칭찬해야 하지 진노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공은 드디어 형조와 공조 두 조의 정랑으로 좌천되었고, 상례(相禮)로서 실록청 낭청(實錄廳郞廳)을 겸하였다.
갑진년(1604)에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에 충원되어 북경에 갔다. 이듬해 돌아왔는데, 어떤 일로 파직되었다.
정미년(1607)에 우복공(愚伏公)과 약속하고북산(北山)에 들어가 《심경(心經)》을 강독하며 한 달 넘게 있다가 돌아왔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선조(宣祖)가 승하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였다. 공은 수찬으로 있다가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때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지평임연(任兗)이 말하기를,
“임해군은 선왕의 병이 위독하던 날에 군사로 자신을 호위했으니, 반역을 저지른 것이다. 사명을 받든 자가 그의 죄를 명나라에 말하지 않고 그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명나라가 한창 조선이 장자를 폐위했다고 의심하고 있고 임해군이 몰래 사정을 엿들으려 하고 있는데 만약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아마도 애매모호함은 심해지고 실상은 드러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신의 대답이 명나라의 의심을 푸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였다.임연은 기가 꺾였으나 결국 사신을 탄핵하였으니, 사신은 바로 오봉공이었다.공은 인혐(引嫌)하여 체차되었다가 바로 교리(郊理)에 제수되어기자헌(奇自獻)을 탄핵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꺼리고 피하던 것을 파헤쳤고,박승종(朴承宗)에게 내릴 교서(敎書)의사두(詞頭)를 돌려보내면서 짓지 않으려 하자 억지로 시키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소인을 꾸며 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당시에 사람을 귀하게도 하고 천하게도 할 수 있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의 소행을 미워하면서 용서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광해군이 처음 정사를 볼 때부터 공은 이미 광해군의 끝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근심하여, 잘못이 있을 적마다 번번이 일에 앞서 간쟁하였으며 작은 일이라고 해서 그만두지 않았다. 공이 홍문관에 있을 적에재이(災異) 때문에 차자를 진달했는데,그 대략에,
“첫째, 국권을 총괄하소서. 죄를 알고도 베지 않으면 그 벌로 더위가 내려집니다. 탐욕스럽고 포학한 벼슬아치에게는 법을 밝게 보여 주어 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변경 수비를 신칙하소서. 유성(流星)이 떨어지는 이변은 전쟁을 상징합니다. 지금 외적이 틈을 엿보는 낌새가 있는데 국경을 지키는 사람이 착취를 일삼고 있으니, 합당한 사람을 엄격하게 선발하여 방비를 엄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 총애하는 신하들을 물리치소서. 음기가 맺혀 우박이 되는 것은 음기가 양기를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사사로이 하는 짓을 다 살필 수 없지만 지극히 공정한 도량을 넓히고 치우치는 해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넷째, 언론을 막고 가린 자들을 제거하소서. 안개는 덮는 것이니, 몽매한 것을 상징합니다.한(漢)나라 말기에 누런 안개가 피어난 일과천보(天寶) 연간에 안개 때문에 낮이 어두워진 현상등 지난 일에서 볼 수 있으니, 싹트기 전에 그 기미를 살피고 미연에 그 간사함을 헤아려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필부도 죄 없이 억울한 형벌을 받으면 오히려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할 수 있는데, 하물며 원통한 한을 품고 억울하게 죽었음에도 시간이 오래 지나도록 억울함을 풀지 못한 자이겠습니까. 억울함을 씻어 내는 일은 하루가 급하고 이미 ‘죄가 없다.’라고 했으니, 어찌 3년을 기다리겠습니까.”
하였다. 당시에 호남(湖南) 사람들이정개청(鄭介淸)등 여러 사람의 억울함을 씻어 줄 것을 청했는데, 광해군이 3년 후에 의논하여 처치하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아뢰기를,
“두세 사람의 대신(大臣)이 서로 이어서청고(請告)하며 직위를 편안히 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대신들에게 직임을 맡기고 성공을 요구할 때는 늘 자질구레하게 간섭하면서, 훌륭한 관리를 올려 쓰고 어리석은 관리를 내치며 일이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것에 이르러서는 막연히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하였다. 대개 임해군의 옥사에 대해 유사(有司)가 사형을 내릴 것을 청하자, 영의정완평공(完平公)이 은혜를 보존할 것을 청하였다가 대각의 탄핵을 받고서 인의(引義)하며 사무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은 조정의 상황이 어그러지는 것을 걱정하여 극진히 논하였는데, 광해군은 쓰지 못하였다.
경연을 오래 중지한 것 때문에 차자를 진달했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는 즉위한 초기에도삼접(三接)이 매우 드물고십한(十寒)이 늘 이르렀습니다. 교묘히 아첨하고 헐뜯는 시녀와 내시가 그 사이에 뒤섞여 들어가 예(禮)에 맞지 않는 것으로 꾀고 의롭지 못한 것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도(道)와 서로 멀어지고 덕을 지키는 것이 확고하지 않아 아첨하는 사람은 쉬이 친해지고 현명한 사람은 날이 갈수록 소원해졌으니, 마지막에 일어날 사태에 대한 걱정을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옛날 송 영종(宋英宗)은 질병이 있는 군주였으나 건강이 훼손될까 염려하느라고 학문을 접지는 않았고, 철종(哲宗)은 어린 군주로서 체질이 허약하여 혹심한 무더위가 염려스러웠지만 정자(程子)는 이 때문에 강학을 접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정자와 같은 신하가 있다면 소대(召對)를 하지 않는 것이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토목공사 때문에 차자를 진달했는데, 그 대략에,
“대궐 안이 좁고 누추하지만 이곳은 참으로 선왕이 정신을 수양하며 편안히 거처하신 곳입니다. 전하께서는 곧 이곳에서 지내고 이곳에서 잠을 자며 기둥과 서까래를 우러러보고 난간과 뜰을 굽어보며 늘 선왕이 실제로 그 위에 강림한 것처럼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긍구(肯構)하는 도리이고, 또한그 지위에 올라 그 예를 행하는의리입니다. 더구나법궁(法宮)의 완공을 알려 오면 오래지 않아 들어가 사실 텐데 또 급하지도 않은 곳에 큰 공사를 일으키니,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종묘가 완공되어 백관이 하례(賀禮)하게 되었는데, 공이 아뢰기를,
“옛날송 신종(宋神宗)의 상기를 마치지 않은 때에 백관이 동지(冬至)에 표문을 올려 하례하려 하자, 정자가 ‘하례’를 ‘위로’로 바꿀 것을 청했으니,지금 또한 그것을 본받아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가주(假主)를 만들어 조문하는 사신을 맞이하는 것 때문에 차자를 진달했는데,그 대략에,
“우리나라가종호(宗號)를 쓰는 것은 예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대대로 이어 온 지 몇백 년이 되도록 고치지 않은 것은 대개 신하가 임금의 아버지를 높이는 정성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만약 앞뒤를 가리고 덮은 채 그 잘못을 감싸려고 한다면 예의를 벗어난 가운데 또한 예의를 벗어난 것입니다. 더구나 임금은 지극한 정성을 마음에 지니고 사사로운 거짓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웃나라와 교류하고 오랑캐를 대할 때도 오히려 안 되는데, 더구나 명나라는 조선에게 하늘처럼 존귀합니다.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 것이 얼마나 성대한 의례인데 감히 지극히 엄중하고 경건한 자리에서 거짓을 행하겠습니까. 설령 저들이 따진다면 다만 사실에 근거하여 대답하여 말하기를 ‘종호를 더하는 것이 참람하고 외람된 짓인 줄 모르지는 않으나 대대로 이어 온 지 오래되고 눈과 귀에 익숙하여 감히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큰 나라를 섬기는 성의는 하늘의 해가 비추고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말이 순하고 이치가 곧아서 가주를 만들어 거짓을 행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라도 유생 고경리(高敬履) 등이 상소하여,우계(牛溪) 성혼(成渾)이국조(國朝)의 사현(四賢)을 이을 수 있다고 하면서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 선생을 빼놓고 거론하지 않았다. 공이 또한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은 온 나라 사람들이 똑같은 말로 다 칭송하지 않음이 없고 오현(五賢)이라고 부르는데, 괴물 같은 무리가 눈을 멋대로 부릅뜨고 쳐다보며 마음대로 평가한다. 속히 오현을 높이 받들어 기리고 문묘에 배향하여 삿된 학설이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였다.
《연거십잠(燕居十箴)》을 올렸는데, 하늘을 본받을 것, 선조를 본받을 것, 어진 이를 존경할 것, 백성을 사랑할 것, 습관을 조심할 것, 멀리 생각할 것, 간언을 들을 것, 간사함을 물리칠 것, 성심을 보존할 것, 학문에 힘쓸 것이 그 내용이다. 광해군이 표범 가죽을 하사하고 칭찬하였으며, 또한 침전에 걸어 놓아 보기 편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백사(白沙) 이공(李公이항복(李恒福))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연거십잠》의 설명은 의리가 정밀하고 절실하니, 오늘날계상(溪上)의 서론(緖論)을 볼 수 있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책문(對策文)으로 급제한임숙영(任叔英)이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된 것 때문에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임숙영이 임금을 비난했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른바 ‘비난했다’는 것은 어떤 일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설령 그가 명예를 얻기 위해 한 모난 주장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끝내 성상의 덕에 무슨 손해 될 것이 있겠습니까. 혹 그가 말한 내용이 만에 하나라도 거짓말이 아니라면 더욱 근심하며 스스로 반성해야지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임숙영의 뜻은 참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을 근심하는 지극한 마음에서 나와서 얻음과 잃음의 사이에서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 사람이 장대하여 얽매이지 않는 점이니, 훗날 곧은 절개를 지닌 선비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취할 때마다 늘 이와 같이 하는데, 과거의 문장에 대해 ‘격식에 어긋났다.’라고 말하더라도 임금의 덕에 보탬이 있다면 또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한재(旱災) 때문에 유지에 응하여 상소로 진달했는데, 그 대략에,
“금지와 방비가 엄하지 않으면 외부인 중에 궁궐을 드나드는 자가 생기고, 법이 어지러워지면 내지(內旨) 중에 관직을 사사로이 제수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상을 후하게 받고 선발된 자들이라고 반드시 다 유능한 인재는 아니고, 벌을 경감받아 사면된 자들이라고 반드시 다 억울했던 사람은 아닙니다. 하늘에 국운이 영원하기를 비는 것은 본래 덕을 닦는 데 달렸는데음사(淫祀)를 지내고 푸닥거리를 하여 간사하고 교활한 길을 열어 주는 경우가 있고, 인재를 등용하고 장관을 발탁하는 것은 본래 현재(賢才)를 선발하는 데 달렸는데 권문세가와 귀족에게 선물을 바쳐 작록을 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한재를 그치게 할 방법을 구하려 한다면 한재를 이르게 한 근본을 바로잡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쌍하게 여기며 슬퍼하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더라도 끝내 한재를 그치게 하는 방도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부역이 번다하고 무거우며 토목공사가 또 일어난 것 때문에 차자로 진달했는데, 그 대략에,
“국가가 난리를 겪고 난 이래로 태묘(太廟)의 수리와 법궁의 건립을 때마침 동시에 일으켰는데, 급하지 않은 외부 먼 곳에 당(堂)이니 방(房)이니 각(閣)이니 전(殿)이니 하는 것들을 몇 달 동안에 모두 지으라고 독촉하고 있습니다. 전하는 백성의 부모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병에 걸리면 약을 먹이고, 주리고 추워하면 입히고 먹입니다. 이렇게 했는데도 혹 자식이 죽으면 오히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이 치료를 미진하게 했던 것을 가슴 아파합니다. 이것은 깊이 사랑하고 지극히 아파하는 마음에 본래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도리어 해독을 끼치고 괴롭혀서 다 죽게 된 목숨을 재촉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상복을 입은 뒤로 2주기가 지났는데도 아직 경연을 열지 않으십니다. 좌우에서 모시며 총애를 받는 무리가 교만과 사치로 성상의 마음을 꾀어 이 무익한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왕명을 받들고 파견을 나가 예안(禮安)에서 죄수를 국문(鞫問)하고서, 노비를 꾀고 도적을 끼고 주인을 죽인 자를 조사하여 법대로 사형한 것을 말미암아 조정에 보고하여 아뢰기를,
“이것은 하루아침에 생긴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반드시 그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 근본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요즘 듣건대 내수사(內需司) 소속 한두 간사한 관리가 그 사이를 파고들어 백성을 으르고 부르며 꾀니, 이 때문에 재앙을 즐기고 주인을 보고 짖는 개 같은 자들이 앞다투어 뛰어든다고 합니다. 이번에 일어난 변고도 그중에 한 가지입니다. 사실을 밝혀내어 빨리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살펴보지 않았다. 노비가 횡포를 부리는 곳마다 살인이 일어나 사람의 피가 길에 흐르자,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정인홍이 상소하여 회재와 퇴계 두 현인을 비난하였는데,그에 대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황(李滉)이 조식(曺植)을 논한 것은 신들 같은 후학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조식이 남긴 글인〈혁대명(革帶銘)〉에 이르기를 ‘살아 있는 용을 묶어서 깊은 곳에 감추어 두라.’라고 하였습니다. 저 허령(虛靈)한 체(體)는 동정(動靜)에 일정함이 없어, 잡고 있으려는 뜻을 두기만 해도 이 마음이 먼저 움직일 뿐만이 아닙니다. 오뚝이 이 안에서 지키고만 있으면 그 전체와 대용(大用)이 공적(空寂)에 국한되지 않겠습니까.〈신명사명(神明舍銘)〉에서는 또한《음부(陰符)》에 따라 수양하는 사람들의 학설을 인용하여 말은 알기 어렵고 뜻은 분명하지 않으니, 우리 유가(儒家)에서 하는 평탄하고 절실한 말이 아닙니다. 단지 이 두어 가지로도 선유가 무엇을 지적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 조식이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은 것을 노장(老莊)에 가깝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정인홍이 이에 순(舜) 임금,이윤(伊尹),여상(呂尙),공자(孔子), 안연(顔淵) 등 역대로 벼슬하지 않은 사람들을 인용하여 증명했는데, 그는 어찌하여 조식을 격이 훨씬 높은 사람들에게 비기고 이황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논한단 말입니까.
이언적이 정인홍에게 모함을 받은 것은 또한 까닭이 있습니다. 이언적이, 일찍이 조식이 어머니를 장사 지낼 적에 조개껍데기 가루를 썼다는 말을 듣고 ‘괴이한 짓에 가깝다.’라고 하자, 조식의 넓은 도량으로도 편안히 있을 수 없어 시를 지어 이유를 밝히는 데 이르렀습니다.
저 정인홍은 두 유학자의 도덕이 성대하게 한 시대의 유종(儒宗)이 되는 것을 보고 스승의 학문이 두 유학자와 나란히 평가받는 것을 보지 못하자 시샘하여 이기려는 마음으로 성을 내고 원망하는 기질을 끼고 온갖 말로 비방하면서 시비의 나뉨이 흑백과 같음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한 시대의 견해를 바꾸려 한들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성균관의 유생들이 청금록(靑衿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고 서울과 지방에 방을 붙여 보이자, 광해군이 유생들을 금고(禁錮)시켰는데, 유생들은 성균관을 비우고 사방으로 나갔다. 공이 또 상소하여 극진히 간쟁하자, 광해군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앞뒤 차자 내용에서 종횡으로 논의한 것이 당동벌이(黨同伐異)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홍문관은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번거롭게 하기를 꺼리지 않는구나.”
하였다. 공이 또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하의 도리는 의(義)를 따르지 군주를 따르지 않습니다. 성상의 조치는 한결같이 이치에 어긋나니, 아무리 형벌을 내리더라도 복종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한(漢)나라 말기에 내렸던 망국의 조치와 같은 조치로 성균관에서 일제히 분개하는 선비들을 죄주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치가 타고난 성품에 근본을 두고 사람의 마음에 드러나 있어서 위세로 그것을 바꿀 수 없고 필부라고 해서 그것을 빼앗을 수 없는 것을 생각지 않으시고, 당동벌이라고 배척하고 또한 의리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억압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의리라고 한 것은 어떤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도(道)가 있는 곳이 바로 이치가 있는 곳입니다. 지금 정도(正道)를 부지하고 사문(斯文)을 지키는 것을 의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여기시니, 반드시 정인홍의 주장을 빌려 파란을 일으키고박여량(朴汝樑)의 말에 따라 기세를 도운 것입니다.장차 임금을 따르려 하는데, 금고하는 조치가 잘못 내려져서 갑자기 선비들의 시비(是非)가 전도되고 의론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이런 후에야 비로소 의리에 맞게 되는 것입니까.”
하니, 광해군이 이르기를,
“내가 어리석고 용렬하여 제현(諸賢)에게 그 직위에서 불안을 느끼게 하였다. 반드시 빨리 직위에 나아와 나의 잘못을 바로잡으라.”
하였다.
광해군이 겉으로는 공론을 두려워하며 간혹 낯빛과 말을 거짓으로 꾸몄으나 속으로는 좌지우지하려는 마음이 절로 드러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이제 물러나야겠다.”
하였다. 당시에 세 사람의 흉인을삼창(三昌)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조정을 틀어쥐고 당여와 원군을 심고 위세와 복록을 멋대로 하자, 공은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이때가 신해년(1611)이다. 공이 떠나기에 앞서 상소하였는데,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숭상하고 안일과 욕망을 억제하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할 것을 권고하였다. 또한 아뢰기를,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되고, 욕심은 법도를 망치고 방종은 예의를 망칩니다. 아무리 부자 형제 같은 지친(至親)이라도 영원히 보전해 줄 수 없으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당시 어진 사대부들은 공이 떠나는 것을 애석해하였다. 오봉공이 광해군에게 아뢰기를 “이준이 고고함과 정직함을 조정에서 용납받지 못하자 조각배를 타고 남쪽으로 돌아가니, 애석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집 근처 시냇가에 정사(精舍)를 짓고 이름을 수옥(漱玉)이라 붙이고, 그곳에 단정히 앉아 《주역》을 읽었는데, 고개를 숙이면 글을 읽고 고개를 들면 생각을 하여 먹고 자는 것을 잊는 데에 이르렀다. 우복공이 날마다 찾아와 번번이 서로 마주하고 강론하였으며, 공이 늘 말하기를 “우복은 나의 형제이다. 다만 성이 같지 않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임자년(1612)에 외직인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임명되었는데, 마침동계(桐溪) 정공(鄭公)이 언사가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경성 판관으로 옮겨 제수되었기 때문에공은 부임하지 않았다.
계축년(1613)에 풍기 군수(豐基郡守)에 제수되었다. 일찍이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낼 때는 법에 따라 향축(香祝)이 내려오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렇게 싹이 말랐으니, 만약 지극한 정성으로 한다면 어딘들 제사를 지내지 못하겠는가.”라고 하고, 곧 마당에 제단을 쌓고 관복을 입고 홀(笏)을 바로잡고 밤새도록 심어 놓은 것처럼 서 있자 아침에 큰비가 내렸다.
또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어 주는 것을 임무로 삼아 글로 타일렀는데 “자신의 생활은 검소하게 하고 정무를 공정하게 보는 것은 태수에게 달렸으니 태수가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이 지내며 이웃과 화목하게 살며 삼가 법규를 지키는 것은 너희 백성에게 달렸으니 너희 백성들은 듣거라.”라고 하였다. 공이 혹은백운서원(白雲書院)에 가고 혹은 향교에 가서 여러 유생을 모아 놓고 강의하는 것을 일상으로 하자 유학의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당시에 흉악한 무리가 포진하고 반역이라 무고하는 일이 계속 잇따랐다. 겨우 8세인 영창대군(永昌大君)에게 정조(鄭造), 윤인(尹訒) 등이 “반역의 근본이 영창대군에게 있다.”라고 말하며 죄를 덮어씌우는 것이 지극히 참혹하였다. 공이 그런 소식을 듣고 크게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겠구나.”라고 하였다. 공이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영창대군의 억울함을 해명하려 하자, 좌우에서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마침 병조 판서 박승종이 수졸의 무고를 억지로 끌어 붙여 공을 파직하였다.
공은 마침내 당시의 세상에 뜻을 끊고 낙동강 가에 땅을 사서 두어 칸 집을 짓고, 경전에 침잠하고 이치와 의리를 탐색하며 의롭지 않게 부귀를 얻은 자들을 보면 마치 자기 자신도 더러워질 것처럼 여겼다. 어진 사대부들이 그곳을 지나갈 때면 반드시 대문에 나아가 예의를 표한 후에 갔다.
공이 그렇게 산 지 10년 되었을 때,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고 공을 교리(校理)로 불렀다. 잠시 후 검상(檢詳), 사인(舍人)으로 옮겼다가 집의로 옮겼다. 처음 상이 즉위할 적에 폐세자(廢世子) 이지(李祬)를 강화도에 위리안치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구멍을 파고 나왔다가 일이 발각되었다.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공 귀(李公貴)가 사형에 처하려 했으나 공론이 합치되지 않았다.우복공이 당시에 홍문관에 있었는데,공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의논하는 자들은 폐세자 지가 재앙의 근본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저도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또한 말하기를 ‘상께서도 훗날을 위한 걱정이 없지 않으시다. 홍문관이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여 임금께 평가가 돌아가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라고 하는데, 이 말도 혹 이치가 있는 듯합니다.”
하니, 공이 답장하기를,
“‘은덕을 베풀려는 성상의 마음을 따를 것이니, 구차하게 한때의 의론에 동조하고 싶지 않다.’라는 것이 형의 처음 견해였습니다. 여러 의논하는 자들이 임금께 평가가 돌아가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치를 크게 해치는 것입니다. 충신은 도를 따르지 임금을 따르지 않으니, 임금의 뜻이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논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다. 연평부원군이 또한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공은 반드시 폐세자를 위하여 절의를 세우려 하는가?”
하자, 공이 답장하기를,
“예로부터 어떤 일 때문에 반드시 임금에게 간쟁한 자들이 모두 그 일을 위하여 절의를 세웠는가?”
하였다. 마침내계사(啓辭)를 지었는데, 그 대략에,
“무릇 죄가 드러난 자는 아무리 성인이라도 죄인의 목숨을 보전해 줄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죽인 것이 이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억울하게 죄를 받은 정황이 있는 자에 대해 성스러운 왕은 그가 죽음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반드시 살릴 방도를 구하니 ‘함정에 빠진 자를 구출할 방도를 찾는 경우는 있어도 함정에서 나온 자를 다시 빠뜨릴 방도를 찾는 경우는 없다.’라는 것입니다. 강화도에서 담에 구멍을 낸 사건은 비록 ‘밝히기 어렵다.’라고는 하지만 그 정황이 쉽게 드러납니다. 땅굴이 안쪽에서 파져 밖으로 나온 것을 보면 밖에서 원조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고, 편지가 위조되어 진짜가 아닌 것을 보면 밖에서 호응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울타리 안이 비좁아 이 무더운 여름에 바람이 불어오는 길이 다 막히자 우울하고 답답한 증상이 마침내 정신병이 되고, 하늘의 해를 보고 싶은 마음과 부모를 보고 싶어 그리워하는 정이 가슴에 답답하게 맺혀 스스로 그칠 수가 없자 망녕되이 울타리를 빠져나갈 꾀를 냈다가 탈출하는 죄를 스스로 초래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실정을 깊이 살펴보면 불쌍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죄가 죽음에 이르겠습니까. 죽음에 이르지 않는데 반드시 그를 죽인다면 어찌 성스러운 덕에 한 가지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법을 맡은 자는 다만 그를 붙잡아 도망가려 한 죄를 다스리고 전처럼 가두기만 하면 됩니다. 광해군은 10여 년 동안 형제를 참혹하게 해치고 끝내 오상(五常)을 아주 없애 버리고 임금의 덕을 엎어 버리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오늘날 깊이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 계사를 미처 올리기도 전에 우연히 바로 체직되었다. 연평부원군이 노기가 그치지 않아 공을 외직으로 좌천시켜 철원 부사(鐵原府使)에 제수하였다.
이조 판서신공 흠(申公欽)이 크게 놀라 낭관을 불러 묻기를,
“이공(李公)이 산림에 있은 지 이미 10여 년이다. 지금 도리어 용납하지 못하고 또 쫓아내는가?”
하였다. 몇 달이 지나자 신공이 말하기를,
“이준이 외지에 오래 있는 것은 조정의 복이 아니다.”
하고, 임금께 아뢰어 청하여, 공이 사인(舍人)으로 돌아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일로 파직되었다. 대사간정공 엽(鄭公曄)이 상에게 아뢰기를,
“이준은 문장과 덕의(德義)가 있으며 평소 일을 행할 때 몸가짐이 바르고 지조가 곧았으니 다른 사람들과 싸잡아 파직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영의정 완평공이, 공이 결코 머물지 않을 것을 알고 편지로 만류하자, 공이 말하기를,
“의리상 머물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남쪽으로 돌아가기 전에 만언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관서(關西)의 형세는 비록 수(隋)나라, 당(唐)나라의 성대함으로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금 만약 그때의 일을 살펴보고, 성책(城柵)을 많이 설치하고, 무관 중에 담략을 지니고 군대의 일을 아는 자를 진영의 장수로 삼아 기율을 거듭 밝히며,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성에 들어가 적을 방어하면 살고 성을 나가 적을 피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성을 지키는 제도는 포루(砲樓)가 가장 중요한데 그 제도는 선정신(先正臣) 유성룡(柳成龍)이 지어 올린병요(兵要)에 갖춰져 있으니 빨리 채택하여 시행하고 이어서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게 하소서. 저 덕을 닦는 요체는 또한 전대의 잘못을 거울삼아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에게도 이러한 잘못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반드시 제거하는 데 달렸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청인(淸人)이 창궐하여 요동과 심양을 차지하자, 공이 그것을 깊이 우려하여 첫머리에서 그것을 언급했는데,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갑자년(1624)에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이 공주(公州)로 피란하였다. 공이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여러 동지와 함께 의병 1000여 명을 모집하여 이름을 의승군(義勝軍)이라 붙이고, 날짜를 정해서 행재소로 달려가려 하였다. 그러다가 역적이 토벌되고 어가가 서울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의병을 해산하고 서울로 들어가 늦게 온 것에 대한 죄를 청하였다. 이어서 상소하여 역적의 변고가 일어나게 된 원인과 백성이 원망하는 상황을 극진히 아뢰니, 상이 받아들였다.
집의로 있다가 부응교에 제수되고, 사인으로 옮겼다가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자, 상에게 아뢰기를,
“진양(晉陽)은 나라의 남문(南門)입니다. 병사와 백성은 같지 않은데 절도사로 하여금 고을의 사무를 섭행하게 하니, 절도사는 다만 백성을 착취할 뿐입니다. 빨리 판관(判官)을 설치하고 각자 사무를 주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전에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이름이 반역자의 초사(招辭)에서 나오자, 상이 더 이상 캐묻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연평부원군이 상소하여, 양사(兩司)가 인성군을 탄핵하지 않은 것을 탄핵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인성군의 이름이 이미 역적의 초사에서 나왔는데 그를 외지로 내보내지 않으니,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 심할까 두렵습니다. 우선 그를 외지로 내보내는 것만 같지 못하니, 이는 또한 왕자의 목숨을 보전하는 한 가지 방도입니다.”
하였는데, 조정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역적이 또 인성군을 끌어들이자, 연평부원군이 인성군을 대궐에 두어 변고를 막을 것을 청했는데, 공과 우복공이 안 된다고 하였다. 연평부원군이 노기를 가득 띠고 대하자,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공이 인성군의 목숨을 보전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 것은 듣기에는 아름다운 말이나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로부터 혐의와 핍박을 받는 처지에서 두려운 마음을 안고 지존(至尊)과 함께 거처하면서도 편안히 지냈던 신하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리고 공이 궐내에 인성군을 두려는 것은 의심을 버리지 못해서인데, 이 의심이라는 말을 막는 데에는 이중으로 성벽을 쌓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연평부원군이 더욱 화를 냈다.
며칠 후 공이 경연에서 강의를 하고 강의가 끝나서 물러 나오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준은 앞에 그대로 있으라.”
하고, 또한 분부하기를,
“시사(時事)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인성군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서 한두 번 나온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는 하늘같이 더없이 인자하여 반드시 골육의 목숨을 보전하려 하셨으니, 이것은 삼대의 제왕이 했던 일과 같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친척을 가까이한 후에 백성을 사랑한다.’라고 했습니다. 친척을 가까이하는 것이 이미 처음에 무너졌다면 또한 어떻게 백성을 사랑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 태조(宋太祖)가 자주 미복 차림으로 다니면서 말하기를 ‘천명을 지닌 자가 있다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 하였으니, 송 태조가 엄하게 금지하거나 경비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으나 이 때문에 기회를 틈탄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제왕의 마음이 드넓고 막힘없으며 은연중에‘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다.’라는 것에 가만히 자신을 비기는 뜻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제왕의 큰 도량으로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나를 그리워하여 간사한 마음이 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의론의 이동(異同)에 대해 힘으로 제어하고 위협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의론이 같으면 기뻐하고 다르면 미워하는 것이 어찌 태평시대의 기상이겠습니까. 며칠 전 정경세(鄭經世)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옥당(玉堂)이 경(經)을 지켰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귀(李貴)의 말을 권도(權道)에 맞는 것으로 여기시는 것입니까? 권도의 말은 경중을 헤아려 중도에 맞게 하는 것인데, 이귀의 말이 어찌 중도에 맞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수천 마디 말을 끊임없이 하였는데, 상이 응답을 메아리처럼 하였고, 좌우에서 듣는 자들은 목을 움츠렸다.
공이 어전에서 물러 나오자 바깥 여론이 시끄럽게 들끓고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라고 한 말을 죄안(罪案)으로 삼아 말하기를,
“연신(筵臣)이 감히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다. 간관(諫官)이 공을 파직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연의 신하가 자신의 임금에게 허물이 없기를 바라서 기휘를 피하지 않았으니, 직분을 다했다고 할 만하다. 훈신이 한번 말을 꺼냈을 적에 그의 잘못을 바로잡는 이가 없다면 나라의 복이 아니다. 너희는 이귀가 자기와 다른 주장을 공격하는 것을 배우지 말라.”
하였다. 대각(臺閣)이 공을 파직할 것을 재차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라고 한 이야기는 옛사람의 미담(美談)이다. 임금이 의심하고 시샘하는 마음만을 품고서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다가 끝내 나라를 잃고야 마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이준의 말은 증거가 있으면 벌을 주고 없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팔짱을 끼고 천명을 기다리기를 그대들이 말한 것처럼 하는 것을 이른 것이 아니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장공 유(張公維)가 말하기를,
“이 노인의 마음에는 다른 것이 없다. 만약 심하게 문구를 가지고 따진다면 우리는 공론에 죄를 얻을 것이다.”
하였다. 헌납정공 백창(鄭公百昌)은예대(詣臺)했다가, 공이 파직되자 공의 집에 찾아와 절하고 말하기를,
“공은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 공은 나 때문에 명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오.”
하였다. 공이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옮겨졌다.
당시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김공 류(金公瑬)의 아들이 사람을 죽이자, 죄를 다스리라는 명이 의금부에 내려져서 승평부원군이 몹시 근심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곽희(郭晞)의 일을 보지 못했습니까? 예로부터 훈척(勳戚) 집안이 제멋대로 방종하며 불법을 저지르다가 완전히 망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당한 일은 불행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공이 늘 이 경계를 명심하길 바랍니다.”
하자, 승평부원군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공은 참으로 덕으로 사람을 사랑해 주십니다.”
하였다.
천둥이 치는 기상이변을 계기로 공이 응교로서 여섯 가지 일을 차자로 진달하였다.그 여섯 가지 일은 천도를 본받을 것, 성학을 힘쓸 것, 선비의 기개를 길러 줄 것, 종족을 가까이할 것, 인재를 거두어 쓸 것, 재용을 절약할 것이다. 차자 끝에 또한 아뢰기를,
“나라를 세울 때는 무력으로 인정(仁政)을 이기지 않고, 재산을 관리할 때는 이익으로 의리를 해치지 않으며, 백성을 부릴 때는 술수로 신뢰를 사지 않고, 인재를 쓸 때는 교묘함과 민첩함으로 덕을 이기지 않습니다. 혹자는 다스림의 효과가 드러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위력과 형벌로 진작하려 하고, 국가 예산이 넉넉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조세를 마구 거두어들여 풍부하게 하려 하며, 정성과 신뢰는 거짓과 속임만 못하다고 하고, 인의(仁義)는 가혹하게 대하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모두 나라를 베는 도끼나 나라를 좀먹는 해충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였다. 며칠 후 천둥이 또 치자, 또 차자를 올려 그것에 대해 극진히 논하였다. 상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고, 옆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이르기를,
“옥당의 차자는 문장이 좋고 의론이 바르다. 임금에게 고할 때는 이와 같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을축년(1625)에 사간, 겸필선에 제수되었다. 당시에공주의 저택을 지으라는 명령이 내렸는데,저택의 크기가 분수를 넘어서는 것이 심하여, 공이 힘껏 간쟁하였다. 상이 듣지 않자,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목재와 석재가 들판을 덮고, 동산의 담장이 몇 리를 두르며 ‘어영차, 어영차.’ 구호 소리가 하늘 높이 퍼져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 크게 한숨을 쉬는데, 전하만이 모르고 계십니다. 신들이 말하는 것은 조종(祖宗)의 법이고, 전하가 행하는 것은 자전(慈殿)의 뜻입니다. 전하는 한 나라 법도의 주인이 되었으니, 마땅히 사리(事理)로 일깨워드리는 것이 곧 대효(大孝)가 되는데, 어찌 모후(母后)의 분부라고 해서 불의(不義)를 곡진히 따르는 것을 효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이 겸보덕으로서 일찍이 서연(書筵)에 입대(入對)했을 적에 왕세자가 좌우를 돌아보자, 공이 얼굴빛을 엄정하게 하고 아뢰기를,
“용모를 움직이는 것과 낯빛을 바르게 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맹자(孟子)가‘기러기와 큰 새가 장차 이르거든 활과 주살을 당겨서 쏠 것을 생각한다.’라고 한 것에 가까우니, 배운 것을 어찌 잊거나 헷갈리는 데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몸가짐을 바로잡았다.
공은 사성, 사복시 정, 보덕, 집의, 겸필선으로 누차 옮겨졌다가 보덕으로 이배(移拜)되고, 휴가를 얻어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집의로 부름을 받았다. 당시에정자(正字) 유공 석(柳公碩)과 대교(待敎) 목공 성선(睦公性善) 등이 상소하여, 이공(李珙)이 유배 간 것은 무슨 죄 때문이냐고 묻자,상이 그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연평부원군이 크게 성을 내며 말하기를,
“감히 나가서 유석을 돕는 자가 있으면 그를 반역으로 논하겠다.”
하였다. 이에 양사(兩司)가 합사(合詞)하여, 이공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중지해 줄 것을 청하였다. 공이 시골에서 올라오자, 친구들이 맞이하고 말하기를 “공이 만약 시의(時議)에 반대한다면 재앙이 당장 이를 것이네.” 하였다. 공이 예대(詣臺)하여 사직하며 아뢰기를,
“당초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공이 나가지 않으면 기찰(譏察)이 그치지 않고 난리의 싹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공이 이미 외지로 나갔는데도 며칠 전 옥사가 또한 기찰에서 나왔으니, 환란을 막는 근본은 이공을 옮기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유석이 고집을 부리는 것은 참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신은 전후의 말이 다른 것을 혐의하지 않고 처음의 견해를 다시 지키니, 그것을 의논하는 자들과는 크게 어긋납니다.”
하고, 이어서 자신을 탄핵하였다. 시의를 따르는 자들이 성을 내며 떠들자, 공은 마침내 연좌되어 면직되었다. 완평부원군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도 이런 깊은 계책을 할 줄 모르는데, 지금 사람을 몹시 통쾌하게 한다.” 하였다.
병인년(1626)에인헌왕후(仁獻王后)가 훙서하였다. 연평부원군이 아뢰기를,
“상은 마땅히 삼년상을 입어야 합니다.”
하며, 매우 힘써 주장하자, 공이 응교로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주상은 지손(支孫)으로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였으니,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에 합칠 수 없습니다.”
하며, 삼년상이 예에 맞지 않음을 극진히 논하였다. 예관(禮官)이 이에부장기(不杖期)를 청하자, 상이 비록 힘써 따르겠다고 했지만, 의장(儀章)과 절문(節文)은 모두 왕후의 예를 썼다. 공이 동료들과 함께 또 간쟁하였는데, 그 대략에,
“종통(宗統)의 막중함과 천지의 큰 법도와 존비의 구분에는 대의(大義)가 엄정합니다. 만약 정해진 분수를 넘어서 부당한 것을 한다면 이것은 예에 맞지 않은 예가 되어 종묘에 죄를 얻고 후세에 기롱을 받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지손으로서 대통을 계승하여, 생부모의 상을 검소하게 치르는 것이 마음에 편안하지 못한 것만을 알았지 예에 맞지 않은 데 빠지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셨습니다. 한번 사사로운 마음에 가려지자, 이 때문에 걸핏하면 예를 어겨 명정에는 금빛 전자(篆字)를 쓰고, 빈전(殯殿)을 준비할 때는 찬궁(欑宮)을 썼으며, 5일 만에 빈(殯)을 하고, 6일 만에 성복하니, 이것은 왕후의 예입니다. 그 상(喪)이 아닌데 그 예를 쓰는 것은 예에 어긋나고 분수에 참람합니다. 속히능원군(綾原君) 이보(李俌)를 상주로 삼도록 명하고 분수를 넘는 상제는 모두 정지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때 상주가장기복(杖期服)을 입는 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자, 또 간쟁하기를,
“신들이 간쟁하는 것은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선묘(宣廟선조(宣祖))에 있어서, 순서에 따라 내부에서 계승한 임금과는 본래 같지 않습니다. 이것을 ‘입승(入承)’이라 하니, 사가(私家)에서 양자로 나가 후사를 잇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미 들어가서 곧바로 선묘를 계승하였으니, 이것을 ‘대통(大統)’이라 합니다. 전하는 이미 종묘의 상주인데 또한 사상(私喪)의 상주가 된다면 어찌이존이참(二尊二斬)이 아니겠습니까. 고금 천하에 단연코 이러한 이치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 삼사(三司)가 번갈아 상소문을 올리고,우복공이 대각(臺閣)에 있으면서더욱 힘써 간쟁하자, 상이 몹시 진노하여 간원(諫院)의 관원들을 모두 체차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승정원은헌체(獻替)를 주관하는데내비(內批)를 돌려보내지 못하고 마침내 군부의 잘못된 조치를 이루어 주니, 의리를 해치고 일의 체모를 손상함이 몹시 크다.”
하고, 드디어 해당 승지를 탄핵하여 파직하니,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연평부원군이,홍문관에서 올린 차자에서 “죄를 얻다.[得罪]”, “기롱을 받게 된다.[取譏]”라는 등의 구절을 떼어 내어 조정에서 심하게 욕하며 말하기를,
“이런 말을 하는 자는 모두 벨 수 있다.”
하였다. 공이 사간으로서 자신을 탄핵하며 아뢰기를,
“이귀는 간사한 학설을 외쳐 전하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으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반성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남이 임금에게 고한 매우 적절한 말에서 흠을 잡아 상을 격노하게 하려 하니, 어찌 해괴하지 않습니까. 조정의 체모는 지극히 엄중하여,성인인 공자(孔子)도 말씀을 분명하고 유창하게 하면서도 정중하게 했으며,전(傳)에 이르기를‘조정에 안색이 변하는 다툼이 있으면 아래에 공격하고 싸우는 폐해가 있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각이 비록 세력이 없더라도 어찌 훈신이 함부로 욕하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후세에 반드시 장차 ‘그 폐해는 이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할 것인데, 신이 어찌 구차하게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부제학 최공 명길(崔公鳴吉)이 차자를 올려 “주상이 이미 대통을 계승했고 보면 대원군을 선비의 예로 제사 지내는 것은 예에 맞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또한 “주상의 공적은광무제(光武帝)와 같고 계승한 것은효선제(孝宣帝)와 같으니, 대원군을 서자나 지손으로 여기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또한 “비록 서자라도 성인(聖人)이 되면 적자(嫡子)가 누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또 간쟁하며 아뢰기를,
“최명길이 비록 말을 많이 했지만 이 세 가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눌림이 없는 것으로 말하자면, 전하는 곧 대종을 이었고 대원군은별자소종(別子小宗)이니 ‘소종은 선조의 대종에게 눌린다.’라고 한 것이 그 뜻이 자약(自若)합니다. 조상을 높이고 대종을 공경하는 것은 대의(大義)이고, 대의가 있는 곳에 어찌 눌림이 없겠으며, 이미 눌림이 있다면 최명길이 말한 것은 천착이 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명길은 자신이 경연의 장관이 되었는데도 선한 도리를 말하여 간사한 마음을 막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간사한 학설을 외쳐 성상의 귀를 미혹시켰습니다. 이단의 학설은 정학의 학설과 함께 세울 수 없으니, 그를 물리쳐 주소서.”
하였으나, 상은 살펴보지 않았다.
여러 훈신과 귀족이 시탄(柴炭)과 목장 용도로 땅을 분할받고노비를 점유하여,그들이 있는 곳마다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였다. 공이 예대하여 아뢰기를,
“시탄과 목장 용도의 땅은 백성들에게 함정이 되고 생선과 소금의 이익을 가지고 개인집 문 앞에 시장을 세웠으나 그들에게 복호(復戶)를 하사하고 세금을 면제하는 데에 이른 것은 어떠한 정사의 요령이란 말입니까. 더구나 군읍(郡邑)에 노비가 있는 것은 마치 몸에 손발이 있는 것과 같고 노비를 제거하는 것은 스스로 손발을 자르는 것이니, 어떻게 움직이겠습니까. 임금이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팔병(八柄)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인데 팔병을 한번 잃으면 남이 와서 빼앗는 재앙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훈신과 귀족이 제멋대로 행패 부리는 습속이 끝내노(魯)나라의 경(卿)이 만족을 모른 것과 같은 지경에 이를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때 조사(詔使)가 이를 무렵, 유사(有司)가 조사의 책응(策應)에 드는 비용이 많을 것이라며 해영(海營황해도 감영)에서 백금(白金)을 빌릴 것을 청하였다. 공이 나아가서 아뢰기를,
“나라를 세우는 체모는 정도를 지키는 데에 있습니다. 더구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는 예의를 지키며 교제할 뿐입니다. 지난해 오랑캐 사신이 올 적에 권력을 잡은 사람이 나라를 정도로 다스릴 줄 모르고 오직 사신이 화를 낼 것만을 두려워하여 소비한 백금이 거의 10만에 이르렀습니다. 눈앞의 일은 혹 미봉했을지라도 훗날 받을 폐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조사가 올 때는 거듭 해당 조에 명하여 책응을 힘써 간략하게 하고, 해영에서 은을 빌리는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말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매우 진노하여 이르기를,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내어 원근의 사람으로 하여금 조정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갖게 한다.”
하고, 이어서 그 실상을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어리석은 백성이 조정에 서운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이미 당초 조세를 많이 거두던 날에 있었으니, 굳이 오늘 신들의 말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백성들이 조정에 서운한 마음을 갖지 않기를 바라신다면 그 근본은 해당 조에서 조세를 많이 거두어 함부로 쓰는 행태를 제거하는 데 달렸을 뿐입니다. 지금 서운한 마음을 그치게 하는 근본을 생각하지 않고, 신들이 그동안 없던 서운한 마음을 백성들에게 일으키게 할까 봐 몹시 두려워하시니, 어째서 너그럽지 못함을 사람들에게 보이십니까.”
하였다.
처음에 요동 사람모문룡(毛文龍)이 피난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와 우리나라 가도(椵島)에 들어와 피하며, 적을 토벌하고 요동을 회복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자, 명나라가 가상하게 여겨 봉(封)하고 작호(爵號)를 내리고, 우리나라도 해마다 양식과 예물을 보내 그 비용을 도왔다. 시간이 오래 흘러 세력이 매우 커지자, 적을 토벌하고 승리한 것을 크게 과장하여 장계로 보고하니, 진실을 헤아릴 수 없어 명나라 조정이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모문룡이 조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가 그의 공적을 칭송하여 행적을 숨겨 주기를 바랐는데, 조정은 그의 바람을 어기지 못하고 그의 뜻대로 칭송하는 글을 지었다. 공이 간쟁하기를,
“지금 조사가 오는 것은 분명히 변경의 정황을 알기 위해서인데, 도리어 공적이 없는 사람을 칭송하여 명나라 조정을 속입니까.”
하였다.
세자가 조사를 접견할 적에 공이 보덕으로서 앞을 인도했는데, 세자의 행동이 예법에 맞자 조사가 치하하였다. 상이 듣고 이르기를,
“이것은 세자시강원 보덕이 애쓴 덕분이다.”
하고, 어찬(御饌)을 거두어 하사하였다.
공이 물러 나와 만언소를 올렸는데, 세자를 보좌하고 인도하는 것을 큰 근본으로 삼고 교육 정책을 닦아 인재를 만드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그다음에 아뢰기를,
“장수를 얻어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형법을 너그럽게 시행하여 백성의 원망을 그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그다음에 아뢰기를,
“치도(治道)는 효험을 빨리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며, 간절한 충심을 반복하며 뜻을 재삼 전달할 뿐만이 아니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정묘년(1627) 봄에 청나라가 군대를 일으켜서 침입하여 주군(州郡)을 잇따라 함락하자, 상이 세자에게 충청도와 전라도로 나가 돌며 사방의 군사를 불러 모을 것을 명하였다. 공이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재빨리 행장을 꾸려 나섰는데, 도중에 수암(修巖)유진(柳袗)을 만났다. 유공(柳公)이 말하기를,
“공이 가는 것은 잘못된 계책입니다. 옛날충사도(种師道)가 도성에 들어갔던 것을 주자(朱子)가 애석해했는데,이것은 도성에 들어가면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을 위한 계책은, 영남의 의리를 외쳐 격발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외적을 토벌하는 것이 중대함을 명백하게 알게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하자, 공이 옳다고 여기고 근왕(勤王)할 것을 도모하였다. 사람들이 공을 추대하여 맹세를 주관하게 하고 공이 개연히 충의로 사람들과 맹세하니, 소식을 들은 자들이 앞다투어 달려왔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호소사(號召使)가 공에게 격문을 보내 군량미를 조달하게 하여 공이 의리로 격발하자 부자들이 벼를 내놓았는데 열흘도 안 되어 수천 가마에 이르렀다.
이때에 세자가 전주(全州)에 머물고 있어서 공이 달려가 알현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예로부터 이적(夷狄)의 우환은 본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믿을 만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외적이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왔는데 용기를 내어 외적을 향해 진격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평소 국가가 높은 작위와 많은 녹봉으로 대우한 효과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인재를 만들고 정치와 형벌을 밝히며 성벽과 연못을 고치고 병기를 수리하는 것이 대비하는 것인데, 대비하지 못했다면 난리가 닥쳤을 때 어떻게 극복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무군사(撫軍司)에서 공을 조도사(調度使)에 제수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세자에게 사은숙배하고 물러나 무군사의 여러 공을 보고 말하기를,
“짐작건대 이 외적들은 명나라가 자신들의 뒤를 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형세상 반드시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 다만 그 후에는 우환이 도리어 커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각자 스스로 힘쓰고 스스로 서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서 도적이 물러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길에 올라 또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니, 사람들이 모두 메아리가 응하듯 감동하여 떨쳐 일어나 한 달 사이에 벼 만여 가마가 쌓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외적이 물러가자 모은 군량미를 관고(官庫)에 귀속하였다.
4월 서울에 조회 가자,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특별히 자급을 뛰어넘어 첨지중추부사 지제교에 제수할 것을 명하였다. 공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윤허하지 않자, 또 상소하여 아뢰기를,
“외적이 물러간 것은 우리에게 지킬 수 있는 신의가 있어서가 아니니, 결국 화(和)라는 한 글자는 그들의 손발을 묶지 못합니다. 도모하지 못하게 우리를 속이고 대비하지 못하게 우리를 엿보다가 혹 작은 잘못을 핑계 삼아 다시 멋대로 크게 군사를 일으킨다면 우리는 어떤 계책으로 대응할 것입니까? 신은 전하의 근심이 이로부터 더욱 깊어질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는 외적이 쳐들어온 날처럼 늘 엄숙하게 편전에 납시어 대신을 불러 ‘외적이 물러간 후에 과연 아무 일이 없겠는가? 또한 적이 반드시 다시 쳐들어오지 않겠는가? 묘당의 계책에는 화친하는 일만 있는가?’라고 물어보소서. 그리고 산천이 험난하고 평탄한 것의 유리함과 불리함, 사졸의 용맹함과 비겁함에 이르러서는 어떤 것이 쓸 만하고 어떤 것이 쓸모없는지, 어떤 장수가 어떤 험지를 통제할 수 있고 어떤 병사가 어떤 곳을 방어할 수 있는지 일일이 우리 마음속에서 경영하고 계획하지 않을 수 없으니, 조금 편안해진 것을 다행으로 여겨 적을 얕보며 날을 보내지 마소서.”
하였다. 공조 참의에 제수되고, 휴가를 얻어 돌아왔다.
무진년(1628)에 동부승지에 제수되고, 우부승지, 좌부승지로 옮겼다. 조정에서 오랑캐 땅으로 사신을 파견하려 하는데 갖다 주고자 하는 물품의 수효가 매우 많았다. 공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뜻을 굽히고 화친을 하는 것은 오로지 백성을 보전하기 위해서인데, 이제 만약 해마다 이런 수효를 보내 준다면 싸우지 않아도 절로 피폐해질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걱정입니다. 오랑캐의 성품은 탐욕스러워 강제로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올해 약간 더 요구하고 내년에 약간 더 요구하면 끝없는 탐욕을 어떻게 채워 주겠습니까. 이것이 두 번째 걱정입니다. 저들이 우리가 갖다 주는 물품이 그 분수에 지나침을 보고서 반드시 조선이 약하고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따를 수 없는 요구를 할 것이고, 우리가 응할 수 없으면 이것을 가지고 말하며 반드시 군대를 움직이는 데 이를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걱정입니다. 어찌 처음에 신중하지 않아서 저들의 교만한 마음을 더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은 살피지 않았다.
우리 백성으로서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돌아온 자를 청나라 사람이 데려오라고 큰소리로 명령하자 조정이 그들의 요구대로 따르려 하였는데, 공이 그것은 안 된다고 힘써 말하며 아뢰기를,
“내몰려서 가게 될 자들이 원통함이 뼈에 사무칠 뿐만 아니라, 돌아오지 못한 자들도 남쪽으로 돌아올 희망을 끊고 적을 섬기는 마음을 더욱 굳히게 되어, 우리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 반드시 심해지고 우리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 반드시 깊어질 것입니다. 적이 우리를 속여 도모하지 못하게 한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만약 그 계책 속에 떨어진다면 훗날 이보다 심한 요구를 해 오더라도 또한 고개를 숙이고 명령을 들으며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내 품 안의 갓난아기를 빼앗아 호랑이 아가리에 차마 던질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상소하여, 장수를 선발하고 군량미를 축적하는 것을 자강(自强)의 근본으로 삼기를 청했는데, 그 대략에,
“지금 훌륭한 장수를 구하여 아주 급한 일에 쓰고자 한다면 전국이 넓으니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내삼청(內三廳)과 군관 출신 중에 용맹하고 튼튼한 자들을 정밀하게 잘 골라 뽑아 묶어서 1개초(哨)를 만들고, 그들의 무예를 시험하면 반드시 뛰어난 자가 한 사람 있을 것이니, 그 사람을 얻어서 100인의 장(長)으로 삼습니다. 10초의 장 10인을 합하고 그들의 무예를 시험하면 또한 반드시 뛰어난 자가 한 사람 있을 것이니, 그 사람을 얻어 1000인의 장으로 삼습니다. 100초의 장 100인을 합치고 그들의 무예를 시험하면 또한 반드시 뛰어난 자가 한 사람 있을 것이니, 그 사람을 얻어 1만 인의 장으로 삼되, 지모(智謀)가 있고 임기응변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발굴해 내야 하는데, 반드시 대장으로 삼을 만한 자가 한 사람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사람 10여 인을 얻을 수 있다면 그들은 기름진 음식을 먹고 자란 자제(子弟)로서 평범하고 어리석으며 용렬하고 나약한 자들이나 저 부귀가 극에 달해 의지와 기운이 쇠한 자들에 비하면 그 득실(得失)의 차이가 어찌 만 배 이상 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묘당에 의견을 물었으나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당시에 고변(告變)이 서로 이어지고 사건 심리가 몹시 준엄하여 모든 사람이 매우 두려워하며 감히 상언하는 자가 없었는데, 공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전하는 지극히 인자한 마음이 하늘 같아서 사건의 정황이 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한번 보고 즉시 석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옥(逆獄)이 일어나고부터는 잔당이 근심거리가 되는 것을 염려하여 성년이 되지 않은 동자와 석방했던 사람들도 모두 일일이 조사하고 찾아내어 북쪽 변방에 던져 버리니, 모든 친족이 서글퍼하고 원통한 절규가 하늘에 사무칩니다. 법률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면 결코 잘못된 전례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무고(誣告)는 한(漢)나라 법에서 엄중히 다룬 것이니, 진실로 반좌(反坐)의 법률이 없으면 선량한 사람이 화를 당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하자, 상은 가상히 여겼으나 시의(時議)는 공을 더욱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발의 재앙 때문에 유지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부부(夫婦)의 강상은 천지의 큰 법도입니다.아내로서 남편의 죄악을 숨긴 것은 참으로 정리(情理)상 가엾게 여길 만하고,애영(愛英)이 곤장 아래 죽은 것은 용서할 만한 경우에 해당합니다.이계선(李繼先)등은 반역한 정황이 드러났으나 자복(自服)하지 않았는데, 죄를 결정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반역자의 썩은 시체에 형벌을 추가한 일은, 마침 한발의 재앙을 만나 반성하고 두려워하는 날에 갑자기 시체를 칼로 베는 잔인한 명령을 시행하였으니, 신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박승종(朴承宗)은 반정(反正) 초기에 아들이 병사를 모집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자기의 생각을 써서 바쳤습니다. 더구나 그 손녀가폐서인(廢庶人)을 위하여 죽은 것도 가상합니다. 더구나 박승종은 이미 이이첨(李爾瞻) 등 여러 악당과 서로 등지고 모후(母后)를 보호한 공이 있으니, 탐욕을 부린 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덮기에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폐서인은 죄가 있어 죽었지만 성스러운 조정의 관대한 정치로 말하자면, 그의 후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어찌끊어진 세대를 이어 주는 성인의 대의(大義)에 부합하지 않겠습니까.이인거(李仁居)는 임금 곁의 간신을 제거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으니, 그의 죄는 몸을 칼로 만 토막 내는 형벌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필부 한 명이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으니,홍보(洪靌)의 공은 자급을 한 등급 올려 주면 충분했습니다. 이것을 어째서 작위를 찢어 공신에 봉해 주어 당대의 웃음거리를 만드십니까.”
하였다. 사람들이 크게 놀라 “폐서인의 일은 말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독화살을 얹고 노려보며 쏘았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기사년(1629)에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경오년(1630)에 삼척 부사에 제수되었다. 공이 떠날 때 동계옹(桐溪翁)이 이별하며 손을 잡고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잠시 지체하며 나와 함께하지 않는가. 그대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와 함께하겠는가. 바라건대 그대는 치달려 가지 마시게.”
하였다. 공이 삼척 부사로 1년 동안 머물자, 유학의 교화가 널리 퍼지고 산삼 징수가 줄고 어민들이 편안해져 백성들이 칭송하였다. 공은 글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전원에 있을지라도 조정의 정사가 잘 되면 기뻐하고 안 되면 슬퍼하였다.
임신년(1632)에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으며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양사(兩司)가 이귀(李貴)를 탄핵한 것은 온 나라의 공론이니 어겨서는 안 되는데 전하께서는 이에 대해 사적인 부담 때문에 억양(抑揚)을 둠을 면하지 못하십니다. 임금이 대각(臺閣)을 얕보고 거만하게 스스로 잘난 줄 알면 단정한 선비는 날이 갈수록 멀어지고 아첨하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나아오게 되어, 결국사슴과 말이 모습을 바꾸어도 사람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 하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하였다.
6월인목왕후(仁穆王后)가 훙서하였다. 상이, 공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리하고 길에 오를 것을 명하니, 공은 황공하여 명을 받들고 서울로 향했다. 도중에 우복옹을 방문했는데, 우복옹은 병세가 이미 깊어져서 공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저는 다시는 성상을 가까이 모시지 못하게 되었지만, 국사는 오히려 도모해 볼 수 있으니 공은 힘쓰십시오.”
하였다.
당시에 상의 몸에 병환이 나자 방술사는 저주가 빌미가 된 것이라고 하고, 어떤 요망한 의원은 침전에 들어가 좌우의 근시를 물리치고 곧 침(針)을 불에 태워 옥체에 던지며 눈을 부릅뜨고 꾸짖는 모양이 몹시 모질었는데,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의견을 아뢰기를,
“조정의 예절은 엄정함을 위주로 하여, 필부나 망녕된 사람이 희롱하고 재주를 부리는 곳이 아닌데, 대신이 말을 하지 못하고 대각이 간쟁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임금의 병이 중대하여 저들에게 굽혀 따라도 해로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망하고 허탄함을 알았다면 어찌부시(婦寺)의 인(仁)만을 하며 사리에 해로움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한예와 겸양을 행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에서 아뢰기를,
“주자(朱子)가‘모름지기 우레가 하늘에 있는 것처럼 해야 바야흐로 예에 맞지 않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요망한 것이 빌미가 되어 병환이 생겼다는 이야기에 대해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귀신의 덕은 총명하고 정직하니, 귀신에게 지각이 있다면 앙화(殃禍)가 반드시 흉악한 짓을 하는 자보다 앞서 나타날 것입니다. 더구나 국가의 운수가 오랫동안 막힌 끝에 하늘이 성인을 내어 예악과 인륜의 종주로 삼았는데, 어찌 다시 음험하고 사악한 요괴가 감히 태양의 청명함을 범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란 동요하는 것이 있으면 외부의 사악한 기운이 올라타기도 합니다. 《대학》에서 ‘마음에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걱정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그것이 지나치게 우려되어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식견 있는 자들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정에 참된 유신(儒臣)이 있다.”
하였다.
계유년(1633)에 휴가를 얻어 돌아왔다.
갑술년(1634)에 상이 대원군의 묘호를 원종(元宗)으로 추숭하고 태묘에 합사(合祀)하려 하는데, 공이 상소문을 올려 그 잘못을 아뢰기를,
“예(禮)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사(士)이고 아들이 제후이면, 제사는 제후의 예로 하고 그 시신은 사의 옷을 입힌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작위를 내리는 도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제후의 아들이 공자(公子)가 되면 아버지를 선군(先君)이라 부를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신분이 낮은 손자는 선조의 사당에 부묘(祔廟)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공자나 공손으로서 사가 되거나 대부(大夫)가 된 자는 선군의 사당에 부묘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공자의 자손으로서 임금으로 봉해진 사람이 있으면 후손은 이 사람을 조(祖)로 삼지 공자를 조로 삼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에서 찾아보면 추숭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데, 지금 말하는 자들이 반드시 전하를 오도하기를 태묘에 부묘하는 것으로 하는데, 이것은 무슨 예입니까. 전하께서는 지극한 정리에 마음이 가려서 예에 맞지 않은 일을 하지만, 대원군이 어찌 예에 맞지 않은 것을 편안히 누리겠습니까. 위로는 공적이 있는 성조(聖祖)를조묘(祧廟)에 모시고 아래로는 온 나라의 공론을 어긴다면 신이 어찌 초야에 있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아 결국 성상으로 하여금 후세에 기롱을 받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또한 김 승평부원군(金昇平府院君김류(金瑬))에게 편지를 보내서 태묘에 부묘하는 것은 예에 맞지 않음을 극진하게 말하고, 편지 끝에 말하기를,
“장총(張璁)과 계악(桂萼)은,헌황제(獻皇帝)가 천자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태묘에 세실(世室)을 세워 제향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저 장총과 계악은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사람인데도 그것이 불가함을 간쟁했는데, 어찌 상공(相公)은 예를 지키는 바른 사람으로서 간쟁을 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승평부원군이 편지를 보고 차자를 올려 간쟁했는데, 끝내 견책을 받았다.
당시에 장령강공 학년(姜公鶴年)이 상소문을 올려 절실하게 직간했는데, 대간(臺諫)이 법률에 따라 그에게 벌을 줄 것을 청하기에 이르자, 공이 대사간으로서 상소하여, 상소문을 올린 것 때문에 외직에 보임되거나 변방으로 쫓겨난 자들을 속히 방환(放還)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강학년의 상소문은 말이 비록 맞지 않지만 끝내 성상의 덕에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대각이 그에게 죄줄 것을 청하기까지 한 것은 신이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을해년(1635) 4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그 한 달 전에이기안(李基安)이란 자가 폐조(廢朝)의 잔당으로서 체포되었는데, 그가 진술한 말에 연루된 사대부들이 매우 많았다. 상이 특별히 이준, 정온(鄭蘊),최현(崔晛)은 불문에 부치라고 명하였다. 부제학에 제수하는 임명장이 내려오자, 공이 행장을 꾸려 출발했는데 충주(忠州)에 이르러 병이 났다.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은 살아서 성상께 사은숙배하지 못할 듯합니다. 멍에를 재촉하여 길을 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달리며 쉬지 않았는데, 중간도 못 와서 병이 나 쓰러져 누웠습니다. 천지 같은 은혜를 다시 보답할 길은 없는데 죽어서 구렁을 메울 때가 머지않은 듯하니, 북으로 대궐 쪽을 바라보면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흐릅니다. 또 나아갈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호씨(胡氏)의 말에 ‘임금의 걱정은 강관(講官)이 학문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 강관이 학문을 알지 못하면 임금이 대도(大道)를 들을 수 없어서 세속의 말이 들어가기 쉽고 의리의 말이 나아가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신은 몹시 배우지 못한 데다 시험해 보셨으나 효험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장차비상한 대례(大禮)를 거행하고자 하는 성상의 결정이 이미 단호하여 형세상 되돌릴 수 없다고 들었는데, 배우지 못한 신이 어찌 조금이나마 성상의 덕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돌아왔다.
6월 17일 지팡이 끌고 꽃 핀 섬돌을 따라 걷다가 섬돌을 정리하라고 명하였다. 날이 저물자 “기운이 편치 못하구나.” 하고, 시중드는 사람에게 마당과 실내를 깨끗하게 청소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있다가 잠시 후 자리를 바르게 하고 눕히라고 명하고 신시(申時)에 정침(正寢)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 76세이다. 부음을 받자 탄식하고 애석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듬해 1월에 살던 곳에서 5리 떨어진 대현(大峴)에 장사 지냈다가, 훗날 도장산(道莊山) 묘향(卯向)의 언덕에 이장하고, 부인 두 분을 합장하였다. 공이 일찍이 원종훈(原從勳)에 참여되었고 조정이 은택을 베풀어 이조 참판에 증작(贈爵)되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남다른 데다 학문의 힘으로 채웠으니, 대개유 선생(柳先生)을 뵙고부터 성현의 학문을 들었던 것이다.몸을 닦은 것으로 말하자면,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지식을 지극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지식을 지극하게 하는 것을 경(敬)으로 하지 않으면 미혹되고 어지러워져 무지한 사람이 되고, 실천을 경으로 하지 않으면 게으르고 방자해져 위태로운 사람이 된다. 두 가지는 반드시 경으로 아울러 지켜야 학문에 나아갈 수 있다.”
하였다. 이런 까닭에 한가롭게 지내거나 홀로 거처할지라도 큰손님을 뵙는 듯이 엄숙하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즉시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나가서 선영 쪽을 바라보고 두 번 절하고, 오로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어깨와 등을 꼿꼿하게 세웠는데, 무더위에도 흐트러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독서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을 근본으로 하고 다른 책을 두루 읽어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높고 밝게 사색하고 의리를 찾아서 얻음이 있으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또한 의심이 없는 경지를 추구하여 한밤중에도 일어나 촛불을 켜고 깨달은 것을 써 놓았다.
공이 집안에서 행동한 것으로 말하자면, 공은 부모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보여 주지 않아도 알아보고 말해 주지 않아도 알아들었다. 예순의 연세에도“슬프고 슬프다, 부모여.”라고 한 시를 읊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지난날 부모님을 곁에서 모실 때는 살림이 궁핍해도 맛난 음식을 빠트리지 않고 드렸다. 지금 녹봉을 받기 위해 벼슬을 살지만 누구를 위해 효도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제사를 받들 때에는 반드시 정성으로 하고 반드시 경건하게 하여숙연하고 개연하였다.제사가 흠 없이 끝나면 매우 기뻐하고, 조금이라도 제대로 되지 않으면 종일 즐거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세속에서는 묘소를 중시하고 사당을 경시하는데 몹시 예에 맞지 않다. 만약 이로 인하여 묘제(墓祭)를 완전히 폐지한다면 인정상 또한 마음이 편치 않다. 지금문공(文公)의 예를 따라 단지 한식 및 10월 상순에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고, 그 외 나머지속절(俗節)에는 다과를 차릴 뿐이다.”
하고, 편지로 우복옹에게 묻자, 우복옹도 그것을 옳다고 여기고 따라서 시행하였다.
월간공(月澗公이전(李㙉))이 공보다 두 살 많았는데, 공은 아버지를 섬기는 마음으로 월간공을 섬겼다. 일찍이 말하기를 “전쟁 속에 굶주리고 전염병을 앓던 날에 우리 형이 없었으면 내 몸도 없었다.”라고 하고,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써넣어 이름을〈급난첩(急難帖)〉이라 하였다.
아래로 집안에 이르러서도 화목하게 질서가 있었고 엄숙하게 법도가 있었다. 종족을 보살필 때는 고아와 과부를 더욱 우선시하였으며 가진 것을 모두 주고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계산하지 않았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기년복을 입은 자가 10여 명이나 되었다.
공이 조정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말하자면, 공은 평소 공손하기가 마치 말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일을 만나면 곧 마치 못을 끊고 쇠를 자르는 것 같이 의리로써 판단하였으며, 늠름하여 범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임금에게 허물이 있거나 조정 정사에 잘못이 있는 것을 보면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은 남김없이 다 하였는데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하여 성상이 마음을 돌려 따르게 하는 데에 힘썼다. 국가의 큰 의리나 의론에 관련된 일에는, 탄식하고 분발하여 용감하게 임금 앞에 곧장 나아가 안색을 범하고 진노를 저촉하며 날마다 상소문을 번갈아 올렸고, 훈신이나 귀족이 성을 내며 위협하더라도 그 때문에 조금도 중지하지 않았다.
공의 말은 처음에는 쓰이지 않아도 결국 나중에는 증험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마치 촛불을 비추고 숫자를 센 것 같았으니, 식견 있는 자들은 열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다만 시기하는 자들이 매우 많았으니, 그들은 옆에서 공을 노려보다가그림자를 쏘며반드시 맞추려고 하였는데, 인조(仁祖)의 성명(聖明) 덕분에 예로써 대우하는 은총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자와 의견이 맞지 않았으니, 지위가 크게 현달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강대하고 방정한 기개가 백세토록 더욱 빛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공을 평론하는 자가 무슨 유감을 갖겠는가.
공이 저술한 몇 권의 책은 지극한 이치가 담겨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내면을 수양한 지 오래되어 광채가 절로 드러났으니, 이것이 어찌 근본이 없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그 가지와 잎을 따라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면 백세 후에도속일 수 없는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
공이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에 글을 지어 자제들을 경계하기를,
“늙은이가 혹시라도 어느 날 세상을 떠나면 아무리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말하는 까닭이다. 무릇 상례(喪禮)를 치르는 데에는 정해진 제도가 있으니 절대로 참람하게 분수를 넘어서는 안 된다. 시신을 염할 때는 입던 옷을 써야지 새로 옷을 지어서는 안 되며, 구의(柩衣)는 비단을 써서는 안 된다. 광(壙)의 깊이는 1장(丈)이고, 봉분의 높이는 4자이다. 나무는 부족하면 또한 판자를 연결해도 된다. 곽(槨)을 쓰는 것은사마(司馬)의 설에 따라 비록 곽을 쓰지 않더라도 또한 괜찮다. 유회(油灰)와 송진은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앙화와 경사는 선과 악이 쌓여서 일어나는 것이다. 예경(禮經)이 무너지자 요망한 학설이 일어나서 음양가(陰陽家)와 풍수가(風水家)의 학설에 빠지게 하여 법도 있는 가문일지라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깊이 경계해야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가례(家禮)》 한 부를 따라 행하며 실수하지 않는다면증민(曾閔)이 될 수 있다. 죽을 먹고 지나치게 애훼하여 중도에 맞지 않으면 모두 불효가 되니, 유념해야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제물(祭物)은 살림에 걸맞게 하되, 희생 대신 닭을 쓰는 것을 일정한 법식으로 삼아라. 그러나 만약 재물이 있어 희생을 준비할 수 있다면 또한 어찌 너희를 막을 수 있겠느냐.”
하였는데, 이것들은 모두 공이 작고한 후 오랜 뒤에 글 상자 안에서 찾은 것이라고 한다.
공은 처음에 선산 문씨(善山文氏) 문수민(文秀民)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대규(大圭)는 관직이 현감에 이르고, 차남 원규(元圭)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正郞)에 이르렀으며, 사위는 이혐(李馦)이다. 나중에 능성 구씨(綾城具氏) 구충윤(具忠胤)의 딸이자 이조 참판을 지낸 구봉령(具鳳齡)의 손녀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문규(文圭)는 지행(志行)이 있었으나 일찍 죽고, 광규(光圭)는 성균관 생원이 되고, 사위는 조흥원(趙興遠), 유천지(柳千之)이다. 측실 소생으로는 아들이 산규(山圭)이고, 딸은 이제전(李悌傳)에게 시집갔다.
대규의 아들은 재관(在寬)이고, 사위는 이동야(李東野), 이렴(李濂)이다. 원규의 아들 재발(在發)은 불치병에 걸렸다. 이혐의 외아들은 이유후(李裕後)이다. 문규의 아들은 재청(在淸), 재명(在明)이다. 광규의 아들은 재아(在雅)이다. 산규의 아들은 재시(在始)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이 세상을 떠난 지 100여 년이 지났는데, 공의덕을 기록한 글이 아직 지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참으로 사문의 전장(典章)에 결함이 있는 것이고, 사림(士林)이 한스러워하는 것이다. 공의 5세손 현감이화국(李華國)이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고, 공의 아들 정랑공 이원규가 지은 가장(家狀) 한 부를 보여 주며 내게 행장을 부탁하였다. 제공(濟恭)은 절하고 일어나 손을 씻고 그 가장을 살펴보며 세 번 읽었다. 대개 공이 조정에 선 이래 당시의 정치를 끊임없이 논평하고 임금의 과실을 지적하여 진술한 것은 천지간 제1등의 의리 아님이 없었다. 만약 광해군이 공의 말을 썼다면 반드시 그 덕을 전복하는 데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고, 중흥(中興) 이후의 훈신이나 귀족이나 대신 들이 공의 말을 썼다면 예악의 다스림이 반드시 삼대(三代)의 아래에 있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이 참으로고산경행(高山景行)을 끝없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정묘년(1627) 이후에 입술이 타고 입이 해지도록 깊이 근심하고 분명하게 말하며 국토를 침략당할 우환이 아침이나 저녁에 일어날 것처럼 두려워하였으니“이 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라는 탄식을 더욱 견디지 못한다.
이때를 당하여 권세를 잡은 신하들의 부귀가 이미 극에 달하고 지혜와 사려가 막혀, 참으로 이른바“제비와 참새가 서로 즐기면서 굴뚝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는 것이었으나, 공만이 홀로 “이후의 근심이 바야흐로 커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조정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획하고 크고 작은 것을 경륜하는 것들이 자강(自彊)하는 큰 근본이 아니므로, 공은 곧 장수를 선발하고 군대를 다스리는 계책을 조정에 올렸는데, 우활하여 적용하지 못할 것이라 비웃지 않는 자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공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병자년(1636)에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치욕은 천고에 씻을 수 없다. 아, 공이 미리 헤아려 앞일을 안 것은 마치 신명한 눈을 높이 매달아 놓고 보는 것과 같았는데, 이것에 어찌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바로 거경궁리(居敬窮理)하여 밝음이 비추지 않은 곳이 없고 의리가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의 평소 언론과 행동을 삼대 이후에 특별히 저명했던 사람들과 비교하면 오직 한나라의가의(賈誼),당나라의육지(陸贄),송나라의이강(李綱)ㆍ진덕수(眞德秀)가 가깝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적막할 뿐이다. 아, 성대하도다.
제공은 참람함을 헤아리지 않고 오직 그 아래에 이름을 의탁하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삼가 가장 안에서 천하 국가에 관련된 일들을 뽑아 편집하였다. 집안에서의 행적 중에 세상의 모범이 될 만한 것들은 또한 많이 생략하였는데, 이것은 그 큰 것을 들면 그 작은 것은 기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붓을 쥔 군자들이 채택하기를 바란다.
성상(聖上) 8년 갑진년(1784, 정조8)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 원임 겸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손좌빈객 규장각제학(行判中樞府事原任兼兵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孫左賓客奎章閣提學) 채제공은 삼가 짓다.
[주-D001] 창석(蒼石) 선생 이공(李公):
이준(李埈, 1560~1635)으로,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수인(李壽人)의 아들이자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모담(姑姆潭)에서 왜적과 싸운 공으로 형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유성룡과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가 다시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이어 예조 정랑, 단양 군수(丹陽郡守) 등을 지냈고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광해군 때에는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다시 교리에 등용되었다. 그 이후 응교, 사간, 승지, 대사간, 부제학 등을 지냈다.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당시의 학계(學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南人)의 세력을 결집하고 여론을 주도하였다. 저서로는 《창석집》이 전한다.
[주-D002] 이양승(李陽升):
?~1216. 1216년(고종3)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자 장군으로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적이 다시 침공해 오자 이를 맞아 싸웠으나 패전하여 전사하였다.
[주-D003] 역사서에서 …… 것:
역사서는 《고려사(高麗史)》를 가리킨다. 《고려사》 권103에 “관군이 위주성 밖에서 적들과 싸우다가 패전하여, 장군 이양승 등 1000여 인이 죽었다. 서울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는 사람이 성에 가득하였다.[官軍與賊, 戰于渭州城外敗績, 將軍李陽升等千餘人死. 京都聞之, 哭者滿城.]”라고 하였다.
[주-D004] 이서원(李舒原):
조선 태종 때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청렴결백한 것이 명나라 조정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주-D005] 이언(李堰):
본관은 흥양, 자는 심원(深源), 호는 낙빈(洛濱)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였다. 전주 부윤을 지냈는데, 치적이 가장 우수하다 하여 세조가 교지를 내려 승직(陞職)을 포상하였다. 의흥(義興)의 나계서원(羅溪書院)에 배향되었다. 《한국계행보(韓國系行譜)》에는 이은의 아우로 되어 있다.
[주-D006] 이수천(李壽川):
본관은 흥양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한국계행보》에는 이은의 아들로 되어 있다.
[주-D007] 이조년(李兆年):
본관은 흥양이다. 의장고 판관(儀仗庫判官)을 지냈다.
[주-D008] 이수인(李守仁):
1524~1592. 본관은 흥양, 자는 춘경(春卿)이다. 임진왜란 때 안령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안령은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외남면 구서리에 있는 지명이다.
[주-D009] 어째서 …… 말씀하십니까: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서 양 혜왕이 맹자에게 어떤 방법으로 내 나라를 이롭게 할 것인가 묻자, 맹자가 “왕은 어째서 굳이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라고 하였다.
[주-D010] 효곡(孝谷):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에 있는 지명이다.
[주-D011] 큰 변을 당하여:
1592년 6월 이준의 부친 이수인이 왜적에게 살해된 것을 말한다.
[주-D012] 중흥귀감(中興龜鑑):
이준이 지어 1595년에 바친 책으로,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혔다.
[주-D013] 소강(少康):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6세손으로 제상(帝相)의 아들이다. 요(澆)가 제상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라 하(夏)의 왕통(王統)이 끊어진 지 40년이 지났는데, 소강이 토지 1성(成) 즉 10리와 군사 1려(旅) 즉 500명으로 그 덕을 선포하고 계책을 세워 하우(夏禹)의 왕업을 회복하였다. 《春秋左氏傳 哀公1年》 《史記 夏本紀》
[주-D014] 호창(呼唱):
귀인(貴人)이 외출할 때 하인이 길을 비키라고 외치는 소리이다.
[주-D015] 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
의리를 떨쳐 원수를 갚는 군대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형제나 자손 들이 원수를 갚게 하기 위해 편성한 군대이다.
[주-D016] 어류성(御留城):
어류성(禦留城)이라고도 한다. 문경의 조령(鳥嶺) 동쪽에 있는 산성으로 고려 태조가 이곳에 잠깐 머물렀다 하여 어류성이라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17 〈산성(山城)〉에, 어류성의 동남쪽은 절벽이 만 장이나 되어 새와 짐승도 넘지 못하며, 북쪽은 동남쪽에 비해 조금 낮지만 또 인력(人力)으로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어 성첩(城堞)을 약간만 설치해도 안심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북 지방에 일이 생기면 파천하여 머물 곳이 될 것이고 남방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이곳에서 다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주-D017] 강족(羌族)을 …… 고사:
한 선제(漢宣帝) 때, 강족이 변방을 공격해 오자 조충국(趙充國)이 70여 세의 고령으로 조서(詔書)를 받들고 금성(金城)으로 파견되었는데, 금성에 이르러서는 “강족은 계책을 써서 격파해야지 무력으로 격파하기는 어렵다.”라고 하며 둔전 설치에 관한 방책을 올리고 장기간 머물며 둔전을 경영함으로써 적을 항복시키고 큰 공훈을 세워 변방을 안정시킨 고사를 말한다. 《漢書 趙充國傳》
[주-D018] 석문산성(石門山城):
1597년(선조30) 곽재우가 경상좌도 방어사로 있을 때 현풍에 신축한 산성인데, 공사를 마치기도 전에 왜적이 침입하여, 곽재우는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수비하였다.
[주-D019] 검찰사(檢察使):
대목부(大目付)를 일컫는 말이다. 막부(幕府)의 노중(老中) 즉 집정(執政)에게 직속(直屬)되어 지방 장관 등을 검찰한다.
[주-D020] 성영(成泳):
1547~162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함(士涵), 호는 태정(苔庭)이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남정양향사(南征糧餉使)로서 군량미 조달을 맡았다.
[주-D021] 형 군문(邢軍門):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파견한 총독(總督) 형개(邢玠, 1540~1612)이다. 자는 식여(式如), 호는 곤전(昆田)으로, 산동성(山東省) 익도(益都) 사람이다. 1597년(선조30) 10월에 총독이 되어 조선으로 출병하였다가 울산에서 대패하고, 이듬해 3월에 귀국했다가 7월에 다시 출병하여 직산(稷山)과 울산에서 왜적을 대파했다.
[주-D022] 양 경리(楊經理):
양호(楊鎬, ?~1629)를 가리킨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로, 경략조선군무사(經略朝鮮軍務使)가 되어 총독 형개, 총병(摠兵) 마귀(麻貴), 부총병 양원(楊元) 등과 함께 참전하였다. 울산에서 벌어진 도산성(島山城)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는데 이를 승리로 보고하였다가 들통나 파면되었다. 1618년(광해군10) 청나라가 명나라를 침략하자 다시 기용되어 요동(遼東) 등을 경략하였으나, 살이호(薩爾滸) 전투에서 크게 패해 그 책임을 지고 사형되었다.
[주-D023] 모국기(茅國器):
호는 행오(行吾)이고, 절강성(浙江省) 소흥위(紹興衞) 사람이며 무진사(武進士)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절승영(浙勝營)의 보병 3000기를 거느리고 조선에 와서 울산 전투에서 크게 전과를 올렸다. 정유재란 이후 전주에 주둔하였으며, 3월부터는 성주(星州), 고령(高靈)으로 옮겨 주둔하다가 제독 동일원(董一元)의 지휘 아래 사천(泗川) 싸움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주-D024] 서애옹(西厓翁)이 …… 물러나자:
유성룡이 1598년 9월 정응태(丁應泰)의 무고 사건(誣告事件)에 대한 진주사(陳奏使)가 되었으나, 빨리 출발하지 않는다는 탄핵을 받고 차자를 올려 해명하였으나, 10월 진주사와 영의정에서 체직되고, 11월에 파직되고, 12월에 삭탈관직된 것을 말한다. 정응태의 무고 사건은 명나라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응태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무고한 일을 말한다. 그때 조선에서는 양호가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이 있다고 하면서 비호하였다. 그러자 정응태가 조선을 무고하기를 “왜를 꾀어서 함께 중국을 침범하고 요하(遼河) 이동(以東)을 탈취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한다.” 하였으며, 또 조(祖)니 종(宗)이니 하는 왕의 칭호를 가지고 무고하였다. 《燃藜室記述 卷17 楊鎬劾去遣使辨誣》
[주-D025] 분수령을 …… 넘어가게:
영남에서 큰 고개를 넘어서 서울로 가는 것을 말하는데, 서울에 가면 여러 가지 논쟁에 휘말려야 하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주-D026] 당 …… 보았으며:
당 덕종은 즉위 초기에는 좋은 의견을 받아들여 다스림에 힘썼으나, 환관들을 등용함에 따라 정사가 어지러워져 반란군에게 장안(長安)을 점거당하여 봉천(奉天)으로 피난하는 일까지 있었다.
[주-D027] 육지(陸贄):
754~805. 당나라 소주(蘇州) 가흥(嘉興) 사람으로 시호는 선(宣)이다. 주자(朱泚)가 반란을 일으키자 덕종을 따라 봉천으로 피란하며 보좌하였다. 뒤에 병부 시랑에 임명되고 중서 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가 배연령(裴延齡)의 참소에 의해 충주 별가(忠州別駕)로 폄적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주-D028] 이공 호민(李公好閔):
이호민(1553~1634)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ㆍ남곽(南郭)ㆍ수와(睡窩)이다.
[주-D029] 갑진년에 …… 파직되었다:
이준은 1604년 봄에 세자책봉 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 이정귀(李廷龜)의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갔다가 겨울에 돌아오는 도중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갔다.
[주-D030] 북산(北山):
정경세가 살던 집의 뒷산인 우북산(于北山)을 말한다. 정경세가 거주하면서 우복산(愚伏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주-D031]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
광해군이 즉위한 해인 1608년 2월 14일 양사에서 “오랫동안 이심(異心)을 품어 사사로이 무기를 저장하고 몰래 병사를 양성하였다.”라는 이유로 임해군을 외딴섬에 유배할 것을 청하여 진도(珍島)에 안치하는 것으로 처결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2월 18일부터 5월 5일까지 임해군의 종들을 추국한 일을 말한다. 임해군은 선조(宣祖)의 서자(庶子)였지만 서열상으로는 첫째이므로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성질이 난폭하여 아우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그는 진도에서 다시 강화(江華)의 교동도(喬桐島)에 이배(移配)되었다가 그 이듬해인 1609년(광해군1)에 죽었다.
[주-D032] 임연(任兗):
1567~1619.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자정(子正), 호는 당호(棠湖)이다. 1610년(광해군2) 임해군의 옥사 때 공이 많았다는 것으로 녹훈(錄勳)되었다.
[주-D033] 임연은 …… 오봉공이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중국에서 광해군이 적통(嫡統)이 아니라는 이유로 위호(位號)를 준봉하지 않자 조정에서 사신들의 잘못이라고 비난하여 오봉 이호민이 파직되었다.
[주-D034] 기자헌(奇自獻)을 …… 파헤쳤고:
이준이 1608년 기자헌을 탄핵한 내용은 《창석집(蒼石集)》 권6 〈옥당차(玉堂箚)〉에 보인다. 기자헌(1562~1624)의 본관은 행주(幸州), 초명은 자정(自靖), 자는 사정(士靖), 호는 만전(晩全)이다. 1608년 유영경(柳永慶) 등의 소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자, 이를 탄핵하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주-D035] 박승종(朴承宗):
1562~1623.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효백(孝伯), 호는 퇴우당(退憂堂), 시호는 숙민(肅愍)이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손녀가 광해군의 세자빈(世子嬪)이 되어 그 일족이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사실을 자책하여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하였다. 관작이 추탈되었으나, 뒤에 신원(伸冤)되었다.
[주-D036] 사두(詞頭):
왕이 사신(詞臣)에게 조서를 짓게 할 때 어떤 내용으로 글을 지으라고 내려 주는 요지를 말한다.
[주-D037] 재이(災異) …… 진달했는데:
《창석집》 권6 〈옥당재이차(玉堂災異箚)〉를 말한다.
[주-D038] 한(漢)나라 …… 일:
한 성제(漢成帝)가 즉위하여 모후 왕씨(王氏)를 황태후로 봉하고, 외숙 왕봉(王鳳)을 대사마(大司馬)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자, 외척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하평(河平) 2년에 다섯 왕씨가 같은 날에 후(侯)로 봉해지자 누런 안개가 사방을 덮었다고 한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22 帝系部 同日五侯》
[주-D039] 천보(天寶) …… 현상: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기 전, 안개가 일어나 한낮에도 어두웠던 현상을 말한다. 《문헌통고(文獻通考)》 〈물이고(物異考)〉에 “천보 14년 겨울에 3개월 동안 늘 안개가 일어나 어두워져 10걸음 밖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었는데, 이것을 주혼(晝昏)이라 하였다.” 하였다.
[주-D040] 정개청(鄭介淸):
1529~1590.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困齋)이다. 1589년(선조22)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와 함경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주-D041] 청고(請告):
휴가나 퇴직을 청하는 것을 말한다.
[주-D042] 완평공(完平公):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을 가리킨다. 1608년 2월에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에 제수되고, 3월에 차자를 올려 임해군의 옥사에 대하여 논하였다.
[주-D043] 삼접(三接):
하루에 임금이 신하를 세 번 접하는 것이다. 《주역》 〈진괘(晉卦)〉에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임금은 신하에게 말을 주는 것이 많고 낮에 세 번 신하를 만난다.[康侯, 用錫馬蕃庶, 晝日三接.]”라고 하였다.
[주-D044] 십한(十寒):
일폭십한(一暴十寒)의 준말이다. 하루 따뜻하고 십 일은 춥다는 뜻으로, 하루만 부지런하고 십 일은 태만함을 말한다.
[주-D045] 긍구(肯構):
긍구긍당(肯構肯堂)의 준말로, 자손이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하는 것을 뜻한다. 《서경》 〈대고(大誥)〉에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당기(堂基)를 마련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랴.[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6] 그 지위에 …… 행하는:
《중용장구》 제19장에 “그 자리에 올라 그 예를 행하며 그 음악을 연주한다.[踐其位, 行其禮, 奏其樂.]”라고 하였다.
[주-D047] 법궁(法宮):
궁실의 정전(正殿)으로,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무를 처리하는 곳으로, 여기서는 창덕궁(昌德宮)을 가리킨다.
[주-D048] 송 …… 청했으니:
《이정유서(二程遺書)》 부록 〈이천선생연보(伊川先生年譜)〉에 나온다.
[주-D049] 가주(假主)를 …… 진달했는데:
가주는 신주(神主) 대신 임시로 만들어 놓은 신위이다. 1609년(광해군1) 선조(宣祖)의 국상에 명나라에서 제사를 내려 사신을 보내자, 예조의 담당 관원이 선조의 신위에 쓴 묘호(廟號)와 시호가 예에 맞지 않는다고 명나라 사신에게 질책을 받을까 염려하여 가주를 만들지를 물으면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준은 가주를 세워 명나라 사신을 속이는 것은 진실한 방도가 아니고 본래의 신위를 놓더라도 명나라 사신이 이해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光海君日記 1年 4月 24日》
[주-D050] 종호(宗號):
죽은 왕의 신위에 쓴 묘호와 시호를 말한다.
[주-D051] 전라도 …… 상소하여:
고경리(高敬履, 1559~1609)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척(而惕), 호는 창랑(滄浪)이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 대북파(大北派)가 서인 측을 공격하자, 정철(鄭澈)과 성혼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에서 이언적을 현인의 반열에서 제외하였다는 이유로 종신토록 금고(禁錮)되었다. 《광해군일기》 즉위년 4월 24일 기사에 보인다.
[주-D052] 국조(國朝)의 사현(四賢):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이다.
[주-D053] 계상(溪上):
이황이 살던 곳으로 지금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있는 곳이다.
[주-D054] 임숙영(任叔英):
1576~1623. 본관은 풍천(豐川), 초명은 상(湘), 자는 무숙(茂淑), 호는 소암(疎庵)으로, 임기(任奇)의 아들이다. 1611년(광해군3) 별시 문과에 응시하여 척신(戚臣)을 공박하는 대책문을 써서 급제하였으나,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여러 달 동안 삼사(三司)가 간쟁하고 영의정 이항복이 주장하여 다시 급제자가 되었다.
[주-D055] 음사(淫祀):
제사를 지낼 만한 대상이 아닌데 지내는 제사로, 《예기(禮記)》 〈곡례 하(曲禮下)〉에 “제사할 대상이 아닌데 제사 지내는 것을 이름하여 음사라고 하니, 음사는 복이 없다.[非其所祭而祭之, 名曰淫祀, 淫祀無福.]”라고 하였다.
[주-D056] 왕명을 …… 것:
예안에서 노비가 주인을 죽이거나 배반하고 내수사의 노비로 투신하는 일이 생기자, 조정에서 이준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이준이 조사해 보니, 내수사에서 간사한 무리가 이런 일을 조장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므로, 그 간사한 무리를 처벌할 것을 제안하였다. 《蒼石集 續集 卷5 禮安按獄後狀》
[주-D057] 정인홍이 …… 비난하였는데:
《광해군일기》 3년 3월 26일 기사에 정인홍 상소의 대략이 보인다. 정인홍은, 조식이 벼슬하지 않은 것을 노장의 사상을 따른 처신이라고 평가한 이황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며, 오히려 자주 나아갔다가 자주 물러난 이황의 처신이 도리에 어긋난 것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주-D058] 혁대명(革帶銘):
조식이 허리띠에 새긴 글로 “혀는 새는 것이요, 가죽은 묶는 것이니, 살아 있는 용을 묶어서, 깊은 곳에 감추어 두라.[舌者泄, 革者結, 縛生龍, 藏漠沖.]”라고 되어 있다. 《南冥集 卷1》
[주-D059] 신명사명(神明舍銘):
〈신명사도(神明舍圖)〉에 대한 명문이다. 〈신명사도〉는 조식이 마음의 작용과 수양 방법을 그린 그림이다. 《南冥集 卷1》
[주-D060] 음부(陰符):
도가(道家)의 비서 《음부경(陰符經)》이다. 황제(黃帝)가 저술하고 태공(太公), 범려(范蠡), 귀곡자(鬼谷子),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 이전(李筌)이 주석을 달았다고 전해진다. 《新唐書 藝文志》
[주-D061] 이윤(伊尹):
상(商)나라 때의 재상으로 탕(湯) 임금을 도와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주-D062] 여상(呂尙):
태공망(太公望), 또는 강태공이라고도 한다. 위수(渭水) 가의 반계(磻溪)에서 낚시하다가 문왕(文王)을 만나 사부(師傅)가 되고, 무왕(武王)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했다.
[주-D063] 청금록(靑衿錄):
성균관에 있던 선비들의 명부이다. 중국 고대 선비들이 청백색의 깃을 단 옷을 입은 데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여기에 오르면 유림 사회에서 선비로 인정받고 특권을 누렸다.
[주-D064] 한(漢)나라 …… 조치:
후한 때에 당옥(黨獄)을 크게 일으켜 천하의 명현들을 모두 연좌시켜 체포했던 것을 말한다.
[주-D065] 박여량(朴汝樑)의 …… 것입니다:
박여량(1554~1611)의 본관은 삼척(三陟), 자는 공간(公幹), 호는 감수재(感樹齋)이다. 1611년(광해군3) 여름에 정인홍이 상소하여 이언적과 이황을 비난하면서 문묘(文廟)의 향사(享祀)에 참여케 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성균관의 여러 유생이 상서(上書)하여 반박하고 해명하는 한편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렸다. 지평 박여량이 이 사실을 광해군에게 아뢰자, 광해군이 노하여 앞장서 의론을 제기한 유생을 찾아내 금고(禁錮)시키도록 명하였는데, 제생이 이 명을 듣고서 동맹 휴학을 하고는 성균관을 떠났다.
[주-D066] 삼창(三昌):
광해군 때 세도가였던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李爾瞻),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 박승종(朴承宗),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유희분(柳希奮)을 일컫는 말이다. 《燃藜室記述 卷21 崔沂海州之獄》
[주-D067] 동계(桐溪) …… 때문에:
동계 정온(鄭蘊)은 1611년(광해군3) 11월 정언에 임명된 후, 광해군이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移御)하는 것을 반대하여 독계(獨啓)했다가 경성 판관으로 좌천되었다. 《光海君日記 3年 11月 27日》
[주-D068] 백운서원(白雲書院):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주-D069] 폐세자(廢世子) …… 발각되었다:
폐세자 이지는 광해군 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 광해군과 함께 폐서인 되어 교동도(喬桐島)에 안치되었는데, 굴을 파고 도망치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仁祖實錄 1年 5月 22日》
[주-D070] 이공 귀(李公貴):
이귀(李貴, 1557~1633)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주-D071] 우복공이 …… 있었는데:
우복 정경세는 1623년(인조1) 3월 인조반정 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주-D072] 은덕을 …… 듯합니다:
《창석집》 권9 〈답정경임(答鄭景任)〉에 나온다.
[주-D073] 계사(啓辭):
《창석집》 권4 〈청심리원옥소(請審理冤獄疏)〉에 나온다.
[주-D074] 주공(周公)이 …… 것: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죽은 뒤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잇게 되어 그의 숙부인 주공이 섭정하였는데, 주공의 형제인 관숙, 채숙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주공을 모해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이 토벌하여 그들을 죽인 것을 말한다. 《書經 金縢》
[주-D075] 신공 흠(申公欽):
신흠(1566~1628)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ㆍ현헌(玄軒)ㆍ현옹(玄翁)ㆍ방옹(放翁)이다.
[주-D076] 정공 엽(鄭公曄):
정엽(1563~1625)으로,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이다.
[주-D077] 병요(兵要):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로, 유성룡이 전투할 때 꼭 알아 두어야 할 10가지를 자세히 설명한 글이다. 10가지 조목은 척후(斥候), 장단(長短), 속오(束伍), 약속(約束), 중호(重壕), 설책(設柵), 수탄(守灘), 수성(守城), 질사(迭射), 통론형세(統論形勢)이다. 《西厓集 卷14 戰守機宜十條》
[주-D078] 진양(晉陽):
경상남도 진주(晉州)의 옛 이름이다.
[주-D079]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
선조(宣祖)의 일곱째 아들이다.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폐위를 논의할 때 종척(宗戚)과 함께 참석한 사실이 있으므로 이귀(李貴), 신흠(申欽)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인조가 관용을 베풀어 무사하였다. 1628년(인조6) 유효립(柳孝立) 등이 대북(大北)의 잔당(殘黨)을 규합하고 모반을 기도할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등 역적배들의 주인공으로 몰려 끝내 진도(珍島)로 귀양 가고 이어 자살(自殺)하는 형벌을 받았다. 1637년(인조15) 관직이 회복되고 제자(諸子)의 등용이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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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