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를 하면서 / 박수봉
환하게 핀 봄날 도주한 청년의 방을 닦는다
창문을 열고 침구류를 걷어내자
푹 익은 살 냄새가 날개를 단다
바닥에 버리고 간 각종 고지서에서 그의
무수한 불면의 밤들이 쏟아진다
벽지에 써 놓은 욕설을 지우다가 그것이
문지를수록 번지는 그의 상처임을 알았다
어떤 세제로도 지워지지 않는
세상에 긁힌 마음을 조심조심 문지르며 나는
그 절망의 깊이를 가늠해 본다
매일 아침 변기에 앉아 상상하던 미래를
가래침처럼 뱉어버리고 도주한 청년
욕실 구석구석에 곰팡이 꽃이 피어있다
생각에 찌든 변기를 닦아놓고 고여 있던
슬픔의 성분을 꾹 눌러버렸다
주방에는 양은냄비가 퉁퉁 불은 허기를 물고 있다
청년실업수당으로 면발을 불린 라면에
노랗게 허기가 부풀어 있다
도주세대 곳곳에 청년이 남기고 간
가래침과 절망 그리고 성난 목소리를 거두어
종량제 봉투에 담아 묶으면서
그가 지녔던 어둠의 총량을 가늠해본다
찢어진 달력이 걸려있는 원룸에서 나는
청년이 버리고 간 난감한 문장들을 뒤적이고 있다
멀리서 보면 꽃 피는 세상이 화려하게 보여도
꽃그늘에 서 보면 우울한 꽃의 눈물도 있다
세상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
젊은이가 앓던 자리, 그 멍든 자국을
나는 걸레를 새로 빨아 자꾸만 닦는다
징검다리 / 박수봉
찬 물에 엎드려 식어버린 침묵이
물안개를 자욱이 피워내고 있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물소리에 갇힌
차고 습한 몸뚱어리가
물 그늘에 제 슬픔을 감추고 있다
한때는 산맥의 줄기를 이루던 등뼈가
부서지고 깨어져 방향도 없이 떠돌다가
여기 도막난 길이 되었다
가슴에 돌처럼 박힌 한 사람을 기억하며
나는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다
돌다리가 잠기면 성난 황토 빛 갈기 속으로
주저 없이 뛰어들던 사내
구릿빛 등 위에서 내발은 언제나 뽀송했다
물에 박힌 돌처럼 온몸이 굳어 가면서
가족의 길을 덧대느라 사내의 등은 늘 젖어 있었다
오랜 침묵으로 다져진 돌이어서
물컹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등뼈를 밟으면 아직도 신음소리 새어나오는 듯하다
강물에 손을 씻으며 사내처럼 마른 징검다리의
등을 씻는다 얼마나 많은 위태로운 걸음들을
업어 건넸는지 우둘두둘 만져지는 등뼈,
두 손으로 등목을 하듯 물을 끼얹는다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을 열어주는 징검다리
나는 다리의 등에 업혀
도막난 길의 숨결을, 스며있는 울음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