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소리가 크다고 생각 말고 내 허물을 생각할 일이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매미 허물
장은수
한 계절 계곡물도 입을 꽉 다물고서
풍장을 치러낸 밭, 먼지만 펄펄 나고
까맣게 타버린 시간 하얀 속살 드러낸다
누가 또 떠나는가, 껍질뿐인 몸을 묻고
이제야 버거웠던 허물을 벗어놓을 때
어긋난 척추마디에 흙냄새 물씬 난다
묵정밭 다스리던 저녁놀도 스러지고
이랑 너머 꽂혀 있는 무뎌진 호미자루
찢어진 비닐하우스 바람에 펄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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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견지에서 “허물없는 사이”란 정말 있을까? 또 “허물없는 사람”은 존재할까? 전자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답하면 말 같지도 않은 자문자답일까? 그러나 “피부적” 견지에서 사람도 ‘허물’이 있다. 당연히 피부가 있으니 ‘허물’이 있지만 ‘매미’처럼 “허물을 벗다” 라고 하지 않고 “허물이 벗겨지다” 라고 쓴다고 한다. 동물과 인간의 “탈피脫皮”에 대한 생물학적 과정을 바라보는 시각은 “벗어야”만 짧게라도 생존할 수 있는 매미와 생존하다 보니 “벗겨지는” 인간의 격차를 우월감에 인위적으로 나눈 구분區分일 것이다.
시인이 첫째 수에서 ‘입을 꽉 다물고서’, ‘풍장을 치러낸 밭’, ‘먼지만 펄펄 나고’, ‘까맣게 타버린 시간 하얀 속살’이라고 표현한 어느 시구든지 ‘매미 허물’에 대입해도 그 이미지가 선명하다. 매미의 첫 울음소리가 지문처럼 남겨진 것이 ‘허물’인 것이다.
‘누가 또 떠나는가’라는 이 표현은 허물을 ‘벗으면서’ 생기는 상처에 바를 연고로 쓸만한 문장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겠다. 우리는 떠남을 전제로 살면서 정서적이든 생물학적이든 허물이 생기기도 하고 벗기도 하고 벗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매미는 7년을 땅속에서 있으면서 네 번의 변태 끝에 마지막에 나무에 매달려 허물을 벗으면 불과 1~3주 살다가 짝짓기하고 “떠나간다”. 매미의 ‘흙냄새 물씬 나는’ 그 ‘어긋난 척추 마디가 낯설지 않다.
풍요롭던 밭이 ‘묵정밭’ 되기까지 예리하던 호밋자루가 ‘무뎌지기’까지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 보았고 허물없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음도 알게 되었다. 또한 뜨거운 여름 한낮 매미가 ‘잠시 잠깐’ 왜 그리 어지럽게 끊임없이 혼절하듯 울어대야 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시끄럽다고만 생각한 나는 직립보행을 하는 ‘어긋난’ 척추에서 탈피해야겠다. ‘비닐하우스’는 자기 몸을 찢어내며 허물을 벗는데 나는 뭐라고 바람에도 뻣뻣한 걸까?
울음 소리가 크다고 생각 말고 내 허물을 생각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