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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76
창세기 27:30-45
이삭의 축복(3)
창세기 27장을 통해 이삭의 축복에 대하여 계속 연결하여 말씀을 나누는 중이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의문을 가질 수 있고 그 의문들에 대하여 우리는 시원한 답을 가지기 힘들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삭과 리브가, 에서와 야곱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보고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도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삭을 통해 또한 에서와 야곱을 통해 어떻게 드러내고 계시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 인간의 죄악이다. 하나님께서 선악의 나무를 만들지 않으셨으면 좋았을텐데 왜 선악의 나무를 만드셨고 또한 그것을 왜 동산 중앙에 두셨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선악의 나무를 중심으로 일하시겠다는 것을 생각했었다. 그것은 인간을 죄 가운데 가두어 두심으로 하나님 자기 언약에 의해 생명 나무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창조 언약은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삭에게 계속 이어져 다른 모습으로 그 의미를 다양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삭의 축복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도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고 에서가 뒤늦게 와서 아버지에게 다시 축복해 주길르 바랬을 때 왜 야곱에게 축복한 것을 취소하고 다시 에서에게 하면 안 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지난 강론에서 이삭의 축복은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나누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만드는 축복이 아니라 생명을 넘겨주는 언약의 후손을 이어가는 전수라는 의미를 확인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한 것을 취소하고 다시 에서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약의 후손(씨)을 통해 언약의 실체가 이 땅에 와서 생명을 이루는 일이라면 취소되고 다시 반복하여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의 생명이기에 인간이 아무리 자기 유익대로 움직여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대로 이끌어 가시는 생명나무의 길이라면 언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 내려지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죄악이다. 그 죄악은 장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복과 저주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30-31절). “곧”이란 히브리어로 ‘아크’인데 ‘확실히, 오직, 그러나, 바로 지금,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이다. 문자적으로 보자면 야곱이 축복을 받은 후 즉시 에서가 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의미적으로 보자면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서가 와서 축복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가로챘지만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 에서는 언약의 복과는 상관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에서도 별미를 만들어 왔지만 성경은 별미로 인해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었다. 에서의 별미는 사냥한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차원에서의 죄악된 행위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겠다는 것이다. “아들이 사냥한 고기”란 스스로 장자인 아들로서 자기 의를 세우는 율법적 행위를 바쳐 언약의 복을 누리겠다는 심성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32절)라고 말한 것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33절).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라는 말의 ‘하라드’는 ‘떨다, 두려워하다, 놀라다’라는 뜻인데 단순히 야곱에게 속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 확인하였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발견하면 죄인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삭은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언약이기에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취소되거나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이루실 것을 언약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18-21)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슬피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34-36절).
에서는 자신에게도 축복해 달라고 떼를 쓴다. 자신이 장자인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라고 한 것은 야곱은 속이는 자이지만 자신은 정직하다는 것이다. 속이지 않고 정직한 것이 죄악이다. 야곱이나 에서는 둘 다 비진리에 속해 있으나 에서는 자신이 정직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율법적 행위를 정당화한다. 이것이 인간이 하늘의 복에 대하여 생각하는 오류이다. 에서는 야곱이 자신이 받을 복을 빼앗았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한 번도 야곱이 에서의 복을 빼앗았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에서가 장자권을 망령되게 생각하였다고 말씀한다.
창세기에서는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 25:34)라고 한 것을 신약에서는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6)라고 하였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을 망령된 것이다. 에서는 장자권, 즉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을 잇는 복을 음행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것이 에서의 우상숭배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죄악을 드러낸 것이다.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37-38절).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라고 하였는데 이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것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은 야곱이 현실적으로 장자가 되어 장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자권을 통해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언약의 성취자로 보내신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이렇게 전하였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는 말의 헬라어 ‘쉼모르포스’는 ‘같은 형상, 같은 모양’이라는 뜻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만드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맏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39-40절). 문자적으로 보면 축복인지 저주인지 헷갈린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어떻게 이끌어 가실 것인지를 보여주셨다. “주소”란 히브리어로 ‘모샤브’인데 ‘자리, 회합, 위치, 거주, 거주민’이라는 뜻이다. “하늘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상징어이다. 현실적으로 에서는 칼을 믿고 생활하는 존재로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에서 멀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이 에서의 자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아우를 섬기는 것으로 통해 매임을 벗고 죄의 멍에를 떨쳐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야곱의 후손을 통해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41-45절).
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기에 야곱에 대한 원망이 있고 야곱을 죽이려고 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불만이다. 이것이 우리의 죄이다. 그 죄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살인으로 성경은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긍휼을 베풀 자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이다. 그 선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 있다.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0-18)
(202405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