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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78
요한계시록 20:4-6
천 년의 왕 노릇
요한계시록 말씀을 나누면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래의 사건에 대한 예언이라든지 인간의 구원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심이나 핵심도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초점이 나의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하늘에 보좌가 있고 그 보좌를 중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드러난 하늘의 모습이다. 결국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으로 주셨다.
자기 영생에만 관심 있는 자들에게 주신 성경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한다(요 5:39). 그러니까 우리는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십자가에 대하여, 피에 대하여 공부하여 내 것으로 만들면 영생이 저절로 주어진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은 십자가 은혜가 일방적으로 주어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에게 다시 살아나는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르심의 은혜를 입은 자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말씀을 나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그 말씀에 끌려가는 것이 생명이고 그것을 앞의 본문에서 “천 년”이라고 하였고 오늘 본문에서는 “왕 노릇”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4절).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또 내가 보니”라고 두 번 강조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장면이 전환되어 요한 사도가 하늘의 보좌를 보게 되었고 그 보좌에 앉은 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잘 보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라고 말씀한다. “앉은”이라는 말의 헬라어 ‘카디조’는 ‘앉다, 머무르다, 정착하다, 임하다’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 비스듬히 앉는 ‘카타클리노’와는 다른 것(눅 7:36, 9:14 등)으로 왕이 다스리거나 선생으로 가르치는 것, 재판장이 재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자세를 말한다. 그러므로 “거기에 앉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들이다.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라는 말씀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성취된 언약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어떻게 말씀을 드러내느냐 하면 목 베임을 당하는 것으로 드러낸다. “목 베임”의 헬라어 ‘펠레키조’는 기본적으로 ‘도끼로 자르다’라는 말로 ‘참수하다’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여기 단 한 번 나오는 단어이다. 그러면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은 누구인가? 보좌에 앉은 자들이다. 그들의 정체성을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듯이 특별하게 선교하다가 순교한 소수의 몇 사람을 말하거나 문자 그대로 목을 베여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좌에 앉은 자들이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며 이들이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들이다. 이런 점에서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란 한마디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죽음이 이루어진 자들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 죽음은 죄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머리가 되심으로 성취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날마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그래서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라고 말씀한다.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죽음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다 이루신 그 말씀으로 자기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도끼로 자르듯이 잘라내고 찍어낸다는 것이다. 교회요 성도는 자신이 머리가 되어 자기 율법적 행위로 살아가는 존재였는데 거기서 잘라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합류되는 것이다. 그것을 목 베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영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프쉬케’인데 ‘목숨, 생명, 영혼, 마음’이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네페쉬’의 역어로 쓰였다.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 살아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하였는데 “살아서”라는 말은 육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육으로 죽어 있던 자가 하늘의 생명으로 살아나는 거듭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천 년 동안”이란 이미 지난 강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천 년이라는 어떤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 년에 대하여’라는 뜻으로 말씀의 은혜를 사는 상태를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점에서 “왕 노릇”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야 한다. 헬라어 ‘바실류오’는 ‘왕으로 다스린다’라는 뜻이다.
1:6에 보면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하였고 5:10에서도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라고 말씀하였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여기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의 헬라어 ‘엑상겔로’는 ‘발표하다, 선전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으로 왕이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왕이기에 단순히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는 그런 다스림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고 드러내는 것을 “왕 노릇”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라고 말씀한 것이고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성취된 말씀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는 “아들의 나라”(골 1:13)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이런 점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다시 반대적인 상태로 강조한다. 짐승과 우상에게 예배하지 않은 자들, 즉 자신의 생각(머리)에서 나온 행위(손)가 죽은 자들이어야 한다. 그래서 왕 노릇하는 것은 단지 천국에 가서 이루어질 미래의 사건으로 이해하며 비록 세상에서는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을지라도 천국에서 교회에 봉사한 대가로 면류관을 받아 쓰고 왕 노릇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위안을 삼는 교인들이 많으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미래의 상태를 말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말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진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 왕국에 살면서 말씀에 이끌려감으로 말씀이 드러나는 것 그것이 왕 노릇하는 것이고 그 상태를 “천 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5-6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란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교회를 다니며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율법적 행위에 매여 자기 의를 위해 사는 자들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죽은 자들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첫째 부활”이란 지금 여기서 하나님 왕국을 사는 자들이 곧 교회요 성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부활”이란 단순히 죽었다 살아나는 소생이나 재생, 윤회의 차원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런 점에서 “둘째 사망”이란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사망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표현이다. 즉 부활이라는 생명에 참여한 교회는 사망과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되었다는 뜻을 첫째 부활이요 둘째 사망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4-17)
이렇게 볼 때 현실은 육으로 살지만 그것이 사망일 수 없고 늘 말씀에 이끌려 가는 예수 그리스도 믿음 안에서 생명으로 사는 존재로 바뀌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닌 전적으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복”이라 하고 “거룩”에 참여된 것이라 말씀한다.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5-7)
결국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죽음으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것이다(202405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