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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77강
출애굽기 31:12-18
영원한 언약의 안식
성막에 대한 계시가 안식일을 말씀하심으로 끝난다.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부르셨고 그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하여 성막을 만들게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주어진다. 언뜻 보면 문맥상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씀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도록 하신 말씀에 이어 안식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창조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창조를 통해 거룩한 공간을 말씀하셨고(창 1:1-31), 이어서 거룩한 시간을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말씀하셨다(창 2:1-3). 마찬가지로 성막을 만들 자에게 성령 충만하게 하여 자기 구원의 계획을 말씀하신 후 그 계획의 궁극적인 목적이 안식에 있음을 오늘 본문에서 밝히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2절). 앞에서 이미 나누었던 것처럼 ‘다바르’를 위한 ‘아마르’이다. 한마디로 언약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한 선포이다. 출애굽기 25:1, 30:11, 17, 22, 31:1, 12에서 성막에 대한 계시를 주시는 과정에서 여섯 번 강조하셨고, 일곱 번째는 출애굽기 40:1에서 성막의 완성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하신다. 마지막 일곱 번째 ‘아마르’를 위한 ‘다바르’가 미뤄진 것은 금송아지 사건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안식을 강조하시고,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 인간의 죄성을 극대화하여 드러내신 후 마지막 일곱 번째 ‘아마르’를 위한 ‘다바르’를 말씀하심으로 성막이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완성하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13절). “안식일”의 ‘샵바트’는 ‘샤바트’(그치다, 중지하다, 쉬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안식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도 “지키라”라는 표현은 ‘샤마르’(지키다, 준수하다, 보존하다)로 마음에 품고 새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표징”이라고 하였는데 ‘오트’는 ‘표시, 표징, 징조, 표적’이라는 뜻으로 언약의 표를 말한다. 그러니까 성막 건립은 새로운 에덴동산의 창설로 창조 언약을 시내 산 언약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스라엘은 공간적 거룩의 성막을 건립할 때 시간적 거룩의 안식일 규례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창조 언약을 기억해야 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1-2)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1-3)
그래서 레위기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30)
이렇게 함으로 공간적 거룩과 시간적 거룩이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다. 결국 성막 건립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갑자기 안식일 규례를 주신 것은 성막을 짓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담고 있는 계시의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계시의 초점은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시고 자기 백성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적이다.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14-15절). 안식일을 기억하고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언약을 기억하고 마음에 품는 것이다. 그래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이스라엘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문자의 율법으로 지킨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교회들이다. 교회는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날인 일요일로 대체되었다고 하면서 주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 지키듯이 일하지 않고 주일 성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주일에 일하는 자는 죽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죽이라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만 해당되고 신약 시대 이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교회는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교회’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결국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사람의 계명과 교훈, 장로들의 유전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엿새”(15절)는 “일곱째 날”(15절)을 위한 것이다. 즉 엿새는 인간의 일로 일곱째 날로 구별됨,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결국 인간의 일을 상징하는 6일을 통해 7이라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주어지는 안식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6일과 일곱째 날의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고자 하신 것이 나중에 있다는 사실이다. 엿새 동안 만나를 거두게 하시고 나중에 안식일을 주심으로 하늘의 안식을 계시하신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시기 위해 먼저 애굽과 광야를 주셨고, 나중에 가나안 땅을 주신다. 처음에는 예수를 육으로 알지만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으로 알게 하신 은혜를 입은 자가 교회요 성도이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는 “큰 안식일”(15절)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로는 ‘샵바트 샵바트’로 하나님의 안식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한 날”(14절)이라고 말씀하셨다. 날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시간을 거룩함으로 설명하고 계시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죄인이 거룩한 날에 자기 일을 한다는 것은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 인간의 일을 계속 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그래서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14절)라고 말씀하셨다.
“더럽히는”(14절)의 히브리어 ‘할랄’은 본래 의미는 ‘구멍을 뚫다’라는 말인데 상징적으로 ‘상처를 입히다, 꿰뚫다, 꿰찌르다, 피리를 불다, 더럽히다, 모독하다, (약속을) 어기다’라는 뜻이다. 안식을 마음에 품지 않은 상태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언약을 어긴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표현을 우리 성경에서 14절에서는 “죽일지며”(14절), 15절에서는 “반드시 죽일지며”(15절)라고 번역하였는데 두 구절 다 ‘무트 무트’로 죽음을 강조하였다. ‘반드시 죽이라’라는 말도 되지만 죽음으로 죽는다는 의미이다. 결국 죽음으로 죽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죄인들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죽음으로 언약의 말씀이 완성됨을 통해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죽음으로 진리의 완성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일하셨다.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4-16)
안식일에 일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6-18)
문자의 율법에 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늘 엿보며 죽일 기회를 찾고 있었다. 유대인들 역시 안식일에 일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못마땅하였고 이런 일을 계기로 박해하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결국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죽이라는 규례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심으로 죽음으로 생명을 주시겠다는 자신의 죽음을 계시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율법 속에 담아 놓은 복음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16-17절). 그러므로 시내 산 언약은 창조 언약의 반복이요 또한 갱신으로 이스라엘과 맺으므로 이스라엘을 통해 영원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원한 언약”(16절), “영원한 표징”(17절)이란 영원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로서 자신을 위해 창조하셨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3-17)
결국 하나님께서 안식을 표징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먼저 육을 창조하고 영을 창조하시는 일의 표징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 창조가 지향하는 나중 창조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처음 창조 상태를 폐하시는 것이다. 처음 주신 육을 멸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새 창조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날은 야훼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신 완성의 날이다. 완성이란 창조에 부족함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창조에 손댈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안식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어떤 날을 지켜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안식하게 된 것이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18절). 어쩌면 18절 말씀은 무의미한 말씀처럼 보인다. 이미 앞에서 다 보여주시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출 24:12). 그런데 성막의 계시가 다 주어진 이 시점에 증거판 둘을 강조하신 이유는 32장 이하에 기록된 금송아지 사건을 소개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 것은 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송아지 사건이 처리된 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출 34:1)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고 있는 돌판으로 만들어진다. 결국 “증거판 둘”이라고 강조하신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가지는 계약서로 언약의 증거판이다. 즉 이스라엘은 이 언약에 합당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폭로하고, 언약을 완성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202607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