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화도량 완주 종남산 송광사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종남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867년(경문왕7)에 체징(體澄) 창건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입니다.
그 뒤 폐허화되었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영천의 물을 마신 뒤, 영천으로 인하여 뒷날에 큰 절을 세울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여 샘 주위에 돌을 쌓아두었다가 제자를 시켜 뒷날 그 자리에 절을 중창하도록 당부하였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뜻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1622년(광해군 14)에 응호·승명·운정·덕림·득순·
홍신등이 이극룡의 시주를 얻어서 중창하였다. 중창 후 벽암을 초빙하여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 때 전국에서 수 천인이 모여서 시주하였다고 합니다.
송광사의 옛 이름은 ‘백련사(白蓮寺)’입니다. 연꽃은 중생 속의 관세음보살님을 의미합니다ㆍ
백련사라는 사명을 보면 법화경 사상을 담은 관음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 보림사를 일으킨 보조선사 체징스님이 이 곳에 머물면서 소나무가 널리 퍼진다는 의미의 ‘송광사(松廣寺)’로 이름을 바꿨다고 합니다ㆍ 소나무 밭에는 다른 식물이 자라기 어렵다고 합니다.
선종이 널게 펴지길 바라는 체징스님의 뜻이 담겨 있답니다.
선종대가람으로 화려했던 송광사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실천하듯 복지법인 송광정심원과 백산장학재단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000년 넘은 연꽃씨앗이 발아해 다시 꽃을 피우듯 어느새 자비도량 백련사의 모습도 찾아가고 있답니다.
연꽃을 왜 불교의 상징이라고 하나 ?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부처님이 들어보이신 꽃이 바로 연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연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덕성을 높이 샀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처님께서는 청정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을 곧잘 연꽃에 비유하셨습니다.
연꽃을 일러 만다라화라고도 합니다. 오묘한 법칙이 연꽃에 드러나 있기때문입니다.
"처염상정"이라는 말이 바로 연꽃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연꽃은 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을 상징 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이나 보살의 청정미묘한 미소가 연꽃송이를 통해 구체 적으로 비유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불교가 추구하는 것은 연꽃이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처럼 불교인 들은 갖가지 불의와 부정이 난무하는 사바세계에서 중생으로만 남아있을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보살의 온갖 실천행위를 비유한 표현입니다.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우리들의 무명 과 어리석음, 즉 이러한 진흙 속에서도 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대웅전♣️
송광사 대웅전은 1996년 5월29일 보물 제1243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석가여래를 큰 영웅 즉 대웅(大雄)이라 일컫는데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여래를 모신 전각을 말한다. 송광사 대웅전에는 조선후기에 유행한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 즉 삼세불상(三世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에는 사바정토의 교주인 석가여래, 향우측에는 중생들의 병고를 다스리는 동방약사유리광정토의 교주인 약사여래, 향좌측에는 서방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여래가 배치되어 있다. 또한 불단에는 왕· 왕비· 세자의 축원을 위한 용도로 제작된 조선후기 최대의 목공예품인 삼전패(三殿牌)가 있다.
정면 5칸, 측면3칸의 대웅전은 「송광사사적기」에 의하면 초창 당시인 1622년에는 2층건물이었으나, 1857년에 건물이 기울어져 제봉선사에 의해 중수되면서 단층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외부 기단은 가공된 장대석을 두르고 있는데, 최근 대웅전 주위의 흙을 걷어내 기단의 높이가 높아졌다.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추녀의 처짐을 보완하는 활주를 모서리마다 세워두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불상 크기에 비해 내부공간이 좁지만 천장부에 파격적인 장엄을 하여 천장 전체가 천개인 것처럼 꾸민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요소이다.
대웅전 현판의 글씨는 선조의 아들인 의창군(義昌君)이 썼는데, 구례 화엄사 대웅전 현판 역시 의창군의 글씨여서 두 사찰과 의창군 그리고 벽암각성대사의 관계가 주목된다.
♣️대웅전의 사방벽화 비천상♣️
보물 1243호로 지정된 대웅전에는 보물 1274호로 지정된 삼세불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벽화인 부처님의 진리를 찬탄하며 음성과 춤 공양을 올리는 11점의 비천상이 유명합니다.
다른 사찰 벽화와 달리 채색과 선이 뚜렷하게 남아 민중예술과 불교미술이 함께 어우러진 최고의 천장 벽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일주문♣️
송광사 일주문은 1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일주문은 송광사의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상징물로 조선 후기에 지은 것이다.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절의 영역이 축소되어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현재 자리로 옮긴 것이다.
건물은 2개의 원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간결한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용 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기둥의 앞뒤로 연꽃무늬를 장식한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금강문♣️
송광사 금강문은 1999년 7월 9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금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를 모시는 문인데, 조선후기 금강문에는 중앙 통로 좌우로 두 명의 금강역사와 문수보살·보현보살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송광사 금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천장을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 천장이다. 앞면 3칸 중에 가운데칸이 출입구이고, 양 옆칸에는 금강역사와 동자 모습의 사자를 탄 문수보살상과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금강문은 새날개 모양으로 장식된 익공양식의 공포와 지붕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어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송광사 금강문은 다포계 팔작지붕인 점이 특징이다.
벽암각성(1574~1659) 대사가 중창한 충북 보은 법주사· 전남 구례 화엄사· 경남 하동 쌍계사, 그리고 완주 송광사는 일주문 → 금강문 → 천왕문의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어, 임진·정유 양란 이후 신중신앙이 호국신앙과 연결된 가람 배치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천왕문 ㆍ사천왕상♣️
1997년 6월 12일에 보물 제125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사천왕(四天王)은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등 네 명의 천왕을 말합니다.
도리천에 사는 제석천의 심부름꾼으로 사방을 수호하는 호법신인데 국가적 차원에서는 호국신앙과 연결되었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불법과 사찰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신앙되었습니다.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앞 뒤로 문이 달려 여닫을 수 있는 천왕전에 안치되어 있으며, 이곳에서는 음력 매월 초하루 사천왕 법회 및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천왕 기도가 행해지고 있는 신앙 공간으로서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천왕문이라 하지 않고 천왕전이라 하고 있습니다.
송광사의 사천왕은 진흙으로 조성된 소조상으로 크기가 425cm에 달하는 거대한 상이며, , 인조 27년인 1649년에 조성되었습니다.
얼굴 표정은 분노형으로 마음 속의 모든 번뇌 망상을 모두 잊게 할 만큼 무섭다. 갑옷을 입고 있으며 손에는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습니다
동방 지국천왕은 비파를,
남방 증장천왕은 칼을,
서방 광목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북방 다문천왕은 당과 보탑을 들고 있습니다.
신체 비례가 균형잡혀 있고 각 부분의 세밀한 표현이 돋보이는 등 조선후기 사천왕상 가운데 뛰어난 조형성을 가진 수준작으로 평가됩니다.
♣️종루♣️
송광사 종루는 1996년 5월29일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었다.
종루는 범종·법고·목어·운판 등 사찰에서 의식 때 사용하는 불전사물을 봉안한 곳이다. 송광사 종루는 중앙의 1칸에서 사방으로 1칸씩 돌출된 아(亞)자형 평면의 2층 누각 건물로, 십자형 평면 위에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세웠다. 일반적으로 종루나 종각이 사각형으로 지어지는데 반해 송광사 종루는 보궁에 주로 채택되는 십자형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2층의 누마루는 우물마루로 구성되고 주위를 계자난간을 두르고 계단이 있는 쪽만 개방되어 있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에는 기둥 바깥으로는 마루가 설치되지 않고 계자난간도 없어 지금과 같은 마루와 계자난간은 『조선고적도보』 에 실린 사진 촬영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송광사의 종루는 현재까지 그 연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건물의 연대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1814년 혹은 1857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루에 걸린 범종·법고·목어·운판 등은 1977년에 조성된 것이고, 바닥에 놓인 범종은 1716년(숙종 42)에 무등산 증심사에서 조성되어 1769년(영조 45)에 중수된 것이다.
♣️송광사 범종♣️
1992년 6월 20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십자형 종루 바닥에 놓여있는 송광사 범종은 전체높이 104.5㎝, 몸체높이 84.0㎝, 입지름 72.0㎝로, 종 몸체에 새겨진 기록에 의해 숙종 42년(康熙 55년, 1716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77년 범종이 새로 조성되기 전까지 사용해 왔으나 이후 범종에 균열이 생겨, 1981년에 두 차례에 걸친 균열방지 작업 후 타종이 불가능해져 현재와 같은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몸체 중앙부의 배부분에는 네모꼴 연곽을 비롯하여 보살상과 위패모양이 장식되어 있다. 거의 수직을 이루는 몸체의 하단부에는 연곽 바로 아래에, 범종을 조성한 시기와 봉안사찰· 봉안장소· 조성에 참여했던 스님들과 사주자 등을 기록하고 있다.
범종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강희 55년인 숙종 42년(1716년)에 조성되어 광주 무등산 증심사 대웅전에 봉안되었는데, 어느 시기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송광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영조 45년인 1769년에 범종을 중수했다는 기록도 추가로 새겨져 있다.
️불보살상 및 나한상️
송광사의 가장 유명한 불상은 대웅전의 진흙으로 조성한 석가여래상· 약사여래상· 아미타여래상 등 세 분의 부처님으로, 조선시대에 조성된 불상 가운데 가장 큰 삼세불상이다. 지장전에는 지장삼존상과 저승 세계의 재판을 담당하는 시왕과 동자·판관 ·사자 등이 봉안되어 있다. 나한전에는 석가삼존상·16나한상·500나한상·제석천·금강역사·동자·사자 등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 유물♣️
1997년 8월 8일 보물 제1274호로 지정되었다.
송광사 대웅전에 모셔진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중앙에 모시고, 좌협시(향우측)로는 약사여래를, 우협시(향좌측)로는 아미타여래를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0cm)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65c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 양식에 걸맞는 표현 기법을 보여준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상에서는 세 불상의 조성기와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 불상 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 극복의 의지와 역사 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고 역사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불상과 함께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송광사 목조 삼전패♣️
1999년 4월 23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완주 송광사의 목패는 대웅전 안 석가여래상 옆과 약사여래상 및 아미타여래상 앞에 놓여 있다.
당시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 명호를 기록한 불패와 구분하기 위해 삼전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삼전패라고 일컫는다.
높이가 약 230cm에 달하는 거대한 목패는 모두 3점인데,이들은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세부의 문양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여러 장의 나무판을 엮어서 만든 것으로 구름과 용을 뚫어새긴 것이 특징이다.
석가여래상 옆의 목패는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으며, 인조 때 조성된 것이라는 제작 연도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왕과 세자를 위한 전패에는 정조 16년(1792)에 수리했다는 묵서명이 있어, 목패 연구에 기준작이 되고 있다.
조각이 정교하고 크기가 거대하며 조성된 연대와 수리한 연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 연대를 알 수 없는 조선시대 불교 목공예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장전 소조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
1999년 4월 23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되었다.
지장전은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성불하는 것을 뒤로 미룬 대원본존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모신 전각을 말한다.
당나라 때 개원사 스님이었던 도명존자는 동명이인으로 잘못 판단한 저승사자에 의해 지옥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지장보살을 만난 후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무독귀왕은 『지장보살본원경』에 의하면 어떤 브라만의 딸이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찾으러 지옥에 갔을 때, 그녀의 어머니가 있는 지옥 세계를 보여주었다는 인연으로 지장보살의 협시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명부전은 지장삼존상과 명부세계의 재판을 담당하는 10명의 왕인 시왕을 함께 모신 전각을 말한다.
송광사 소조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은 1999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에는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명부전이 협소한 까닭에 지장전을 신축하고 지장전으로 옮겨 봉안하게 되었다.
현재 지장전에는 지장삼존상을 비롯하여 시왕상 10구, 판관상 6구, 사자상 6구, 동자상 8구, 금강역사상 2구 등 총 31구의 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조성기에 의하면 1640년에 승명스님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17세기 명부신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이후 명부전의 존상들은 2005년에 보수·개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에도 송광사 지장전은 우리나라 3대 지장성지로 유명하다.
♣️나한전 목조석가여래 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
1999년 4월 23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되었다.
송광사 나한전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여래와 그 제자들이 설법 듣는 장면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나한은 아라한을 줄인 말로, 중생에게 복덕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키는데 독특한 능력이 있는 분을 말한다. 중국에 와서는 16나한 및 500나한 신앙이 성행하게 되었고, 이러한 나한신앙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지게 되었다.
송광사 나한전에는 석가삼존상을 비롯하여 16나한상과 500나한상, 사자상, 제석범천상, 동자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에는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좌협시로는 미륵보살상이, 우협시로는 제화갈라보살상이 각기 높은 연화좌 위에 자리하고 있다. 16나한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 각 8구씩 배치되어 있으며, 오백나한상은 높이 25~40cm 정도의 작은 상으로 기둥 사이의 벽면에 봉안하고 있다.
<조성기>에 의하면 오백나한상 역시 석가삼존상 및 16나한상과 함께 순치 13년, 즉 조선 효종 7년(1656)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송광사 나한전의 조각상들은 전각의 규모에 비해 그 규모가 당당하고 조각 솜씨가 우수하다. 또한 1656년의 제작 연대가 확실히 밝혀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조선후기, 특히 17세기 불교조각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을 수 있다ㆍ
♣️송광사 사적비♣️
1971년 12월 2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송광사 약사전에서 승탑원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절의 개창(開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높이 240cm, 폭 94㎝이다.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올리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 이름과 비문이 새겨 있는데, 고려 보조국사가 전주 종남산을 지나다가 절터를 잡아놓고 제자들에게 절을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는 내용과, 보조국사 지눌에서 벽암각성 대사에 이르는 스승과 제자의 계보가 주된 내용이다.
뒷면에는 송광사를 짓는데 참여했던 승명 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절을 짓게 된 경위 및 벽암각성 대사의 제자와 시주한 사람, 개창 당시 장인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세운 비로, 신익성이 비문을 짓고, 선조의 아들인 의창군 광이 글씨를 썼다.
♣️완주 송광사 연꽃♣️
완주 송광사에 조성된 6700평 규모의 연밭이 있습니다
《9월18일의 연밭》
연밭들의 안쪽에는 송광사의 옛 명칭을 담은 정자인 ‘백련정(白蓮亭)’이 있습니다ㆍ
계절이 지난 연꽃이 지고없는 연밭이었지만 연잎만 있는 연밭과 한옥건물이 매치가 되어 멋졌습니다
불교의 상징인 연꽃은 깨끗한 물이 아닌 더러워 보이는 물에 살지만, 더러움을 자신의 꽃이나 잎에는 묻히지 않는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고 합니다.
연꽃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서도 군자의 청빈의 상징으로, 도교에서는 신선 세계의 꽃으로,
힌두교에서는창조와 생성의 의미를 지닌 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경내에는 연꽃보다 아름다운 성보들이 가득합니다ㆍ
중앙종회 사무처장과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 등을 역임했던 주지 법진스님은 “중앙에서 활동할 때 늘 현장이 건강하고 활발했으면 생각했다”며 “지역에 있는 작은 사찰이지만 건강한 불자로 살아가는 게 어떤 것인지 항상 모색하는 도량으로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습니다ㆍ
♣️송광사 승탑원♣️
'송광사 벽암대사 승탑’은 1999년 4월 23일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4호로 저정되었다.
완주 송광사 승탑군은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13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승탑군 주변은 돌담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16구의 승탑과 2기의 비가 있다.
완주 송광사 승탑들은 지붕인 옥개(屋蓋)가 있고 탑신이 둥근 형태인 승탑과, 범종 모양의 석종형(石鐘形) 등 두가지 형식으로만 조성되어 있다.
완주 송광사는 승탑원에 명문이 있는 승탑이 남아있기 때문에, 조선후기 어떤 스님들이 이곳에서 수행했는지를 알 수 있어 귀중한 역사 자료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특히 승병장으로 유명하였던 벽암 각성대사의 승탑이 이곳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은 주목된다.
승탑의 형태는 둥글게 다듬은 바닥돌 위로 종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사각의 지붕돌을 얹어놓은 모습이다.
탑신에는 ‘벽암당(碧巖堂)’이라는 법호를 새겨 그 주인공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벽암각성 대사는 조선 현종 원년인 1660년에 완주 송광사에서 돌아가셨다고 전하고 있어 승탑을 세운 것도 그 즈음으로 추측된다.
YouTube에서 '■백화도량 완주 송광사 ■해운대 반야선원9월18일 사찰순례3' 보기
https://youtu.be/HmFXn6NDd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