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0년 충남언론지원사업으로 진행된 ‘동학농민혁명, 충남에서의 발자취를 따라서’ 중
제가 ‘천안의 세성산전투’를 현장답사와 취재를 통하여 쓴 글입니다.
저도 잊고 있다가 지인께서 우리 지역의 동학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서 책을 펴내는 수고를 하셨는데,
여기에 제 글이 수록되어 있어 보존의 의미로 2회에 걸쳐 이곳에 올립니다. (그 중 1회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천안 세성산전투(1)
-다시 피는 세성산 들꽃
이번 호에서는 천안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격전지였던 천안 세성산전투를 소개한다. 지난 한 해 천안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조명하고 기념하기 위해 ‘동학3.1혁명의길’, ‘세성산문화제’, ‘이이화선생님 초청강연회’ 등의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했던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이용길 회장이 그 역사의 현장을 안내해주었다.
반란에서 혁명까지
“작년(2019년)에 동학농민혁명 125주년을 맞아 황토현 전승일인 5월11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여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행사가 처음 열렸습니다. 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제야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으니 ‘반란에서 혁명까지’ 125년이 걸린 셈입니다.”
우리 근대역사의 출발점이요, 민주주의의 뿌리인 동학농민혁명이 긴 세월과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이제야 비로소 제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라고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이용길 회장은 말한다.
그동안 천안에서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조사나 기념사업은 고사하고 유적지의 안내표지판조차 세워져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끄럽게도 농민반란의 역사로 치부한 채 참고할 만한 연구논문 한 편이 없었다고 그는 덧붙인다.
그래서 그는 지난 한 해 천안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조명하고 기념하는 많은 활동을 해왔으며, 그 격전지의 중심인 세성산에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으며 아울러 기념관과 연수원 등을 건립하기 위한 다방면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한 세기 하고도 4반세기가 지나서야 반란에서 혁명으로 재조명 받기 시작한 것이다.
천혜의 요새 세성산에 집결
1894년 3월에 전라도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7월에는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으며 9월에는 대일본전쟁을 선포하고 10월에는 서울로의 진격을 준비하게 된다. 이렇게 농민군의 위세가 점점 커지자 친일조정은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일본군에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출병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때가 9월18일이다.
그 해 11월18일 드디어 동학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천안 세성산전투이다. 특히 이 전투가 주목받는 것은 그 규모도 규모려니와 지정학적 위치상 동학농민군 진영의 최북단에 있고 서울과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에 일본군이나 친일관군에 가장 위협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일단 세성산이 왜 지정학적으로 요충지일 수밖에 없는지부터 살펴보자.
세성산은 현재 충남 천안시 목천면과 병천면, 성남면 사이에 위치한 해발 180미터의 야트막한 야산이다. 그러나 이 산에 오르면 주변 지역을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고, 또 사통팔달하는 교통도로망에 접해 있어 그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니 전략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산의 북쪽은 절벽을 이루고 있고 남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북쪽으로부터 오는 일본군과 친일관군을 경계하고 방어하기에 용이하고 남쪽으로부터 오는 지원군이나 군수물자를 조달받기에 적합한 지형이다.
또한 세성산 정산에는 길이 144미터 높이 3미터의 내성과 길이 350미터 높이 3미터의 외성이 있고, 길이 412미터 폭5미터의 보루가 있어 예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곳에 집결하여 주둔한 동학농민군의 기병 상황을 살펴보자.
천안지역 동학농민군은 김복용과 이희인을 중심으로 기병하여 세성산으로 집결하였다. 김복용은 북접 소속 대접주로서 세성산 동학농민군을 총지휘한 대장이었는데, 세성산전투 이전의 천안 지역의 활동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이희인은 천안 지역에 기반을 둔 동학지도자였다. 이희인(1846-1894)은 목천현 병천면 병천리 개목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줄곧 살았던 양반 가문의 선비였다. 그는 1893년 동학도 상소문을 조정에 올릴 때 허연, 서병학 등과 연명하였을 정도로 동학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세성산전투 당시에는 좌우도(左右道) 도금찰(道禁察)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세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김복용을 중심으로 한 외부세력이 주도하는 가운데 이희인과 같은 토착세력이 인적, 물적 지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세성산 일대를 중심으로 기병하여 주둔지로 삼은 것은 차후 서울로의 진격을 위한 교두보를 삼고자 했던 것이다.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농민군과 최시형이 이끄는 농민군 모두가 서울로 올라갈 상황에서 세성산에서의 집결과 주둔은 지정학적 위치상 동학농민군 진영의 최북단에 있고 서울에 근접해 있다는 것이 친일관군이나 일본군에게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세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관군과 일본군의 출병 규모를 알아보자.
관군은 9월14일부터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내용은 친군경리청병 703명, 친군장위영군 850명, 친군통위영군 401명, 교도대 328명 등 총 2,414명이었다. 이두황과 이규태가 이들 관군을 인솔하였는데, 이두황 군대는 9월20일 서울을 출발하여 경기도 죽산을 거쳐 충청북도 청주 방면으로 진군하였고, 이규태가 이끄는 관군은 서울을 출발하여 경기도 수원을 거쳐 천안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그와 동시에 조정은 일본군대에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병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때 출병한 일본군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특별히 파견된 후비보병독립 제19대대, 그리고 병참부에 소속된 수비병 약 5,800명, 그리고 해군 군함 2척과 해병대 2개 중대였다.
일본군의 출병보다 더 끔찍한 것은 동학농민군의 진압 통제권을 전적으로 일본군이 행사했다는 것이다. 당시 출병과 전투 상황을 기록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보면, ‘동학당을 진압하기 위해 전후로 파견된 조선군 각 부대의 진퇴와 조달은 일본군 사관의 명령에 따라서 하며 일본 군법을 지키게 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척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2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