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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퇴계 이황[退溪 李滉 3]
퇴계 이황[退溪 李滉 ] (1501년(연산군 7년) ~ 1570년(선조 3년) )
고려말 유입된 성리학의 토착화에 한 획을 긋는 인물
당대 사회 주도층으로 성장하고 있던 사림세력의 활동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인물이다.
영원한 스승, 퇴계 이황
한국 역사상 많은 위대한 인물이 있었다.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가요 가운데 역사상 위대한 인물 100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을 빛낸 인물이 어찌 100명에 그치겠는가 마는, 저 멀리 단군에서부터 시작하여 현대 미술가인 이중섭까지 100명의 인물들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는 이 노래를 부르면, 왠지 모르게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하여 자부심이 들게 한다. 이 노래에서 이황은 “주리 이퇴계”라 하여 그가 주장한 성리설의 핵심인 주리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주리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노래를 입으로 흥얼흥얼하면서 퇴계 이황을 위대한 100인의 한 명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지식인의 한 유형, 의리 탐구에 주력
조선시대에는 많은 지식인이 활동하였다. 물론 논자에 따라서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대략 이 시대 지식인은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한 분류는 학문에 침잠해 성현의 도를 추구하는데 주력했던 인물로, 대표적으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이들은 현실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성리학을 학문적 바탕으로 하여 내면 수양의 기초가 되는 심성의 탐구에 주력하였다.
다음으로는 의리의 실천에 주력했던 인물로, 대표적으로는 조식(曺植)과 송시열(宋時烈)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내면의 수양을 전제로 축적된 학문의 실천에 주력했던 인물들이었다. 마지막 부류로, 국가 경영의 경륜을 실천했던 인물들로, 조선 전기에 양성지(梁誠之), 김육(金堉)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실제 국가 경영의 현장에 참여, 경륜의 실천에 주력했던 인물들이다. 다만, 당대 지식인을 반드시 어느 한 부류에 속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앞서 제시한 이이의 경우 의리의 추구에 주력하면서도 실제 국가 경영의 현장에 참여하며 자신의 경륜을 제시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분류는 경향성의 파악을 위한 편의적인 것일 뿐이다. 이 같은 3가지 분류에서 이황은 첫 번째에 해당되는 인물로, 철저하게 의리의 탐구에 치중하였으며,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었다.
퇴계학의 완성 과정
경상도 예안 온계리에서 출생한 이황은, 12살이 되던 해에 숙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하며 학문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그는 [주역]에 한 때 몰입하기도 하였으나,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간 뒤에는 [심경부주]에 심취하였다. [심경부주]는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인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심경]에 정민정(程敏政)이 주석을 붙인 책으로, 인간의 마음 이해를 위한 성리학자의 필독서였다. [심경부주]에 대해서 당시 대부분 사람이 구두조차 떼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이황은 “문을 닫고 여러 달 연구한 끝에 대강을 이해할 수 있었다”([퇴계선생언행록])고 한다.
이황이 기대승의 서신에 대한 답한 글(퇴계집 권16).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이후 이황은 홍문관수찬이나 성균관사성 등의 관직을 제수받기는 하였으나 출사하지 않고 더욱 학문에 침잠, 43살이 되어서는 주자학의 정수인 [주자대전]을 입수하였다. [주자대전]은 주자의 저술인 [근사록]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글이 망라된 것으로 주자학의 백미 중에 백미라 하겠다. [주자대전]을 통해 주자의 저술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였던 이황은 이후 성리학 관련 다양한 저술을 내놓은 한편 학문적으로 완숙기였던 59살 때에는 33살의 어린 기대승과 사단(四端: 仁․義․禮․智)과 칠정(七情: 喜․怒․哀․樂․愛․惡․欲)과 관련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논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황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한편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기대승의 의견을 받아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기도 하였다.
이황이 이처럼 마음이나 인간의 내면에 대한 철학적 해명에 관심을 둔 데에는 당대의 철학적 사조에서 영향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면 도덕성 회복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전제된 것이었다. 당대뿐 아니라 앞 시대 집권세력에 의해서 자행되던 정치 사회적 비리나 폐단을 목격한 상황에서 그가 제시한 해답이라 하겠다.
사림의 시대, 사회운영 원리를 제시
역사학계에서는 16세기 후반 이후의 시기를 사림의 시대라고 하고 있다. 사림이 정치나 사회 등 제 분야에서 주도층으로 등장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황은 바로 이런 사림의 시대에 국가나 사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논리를 제공한 인물로, 그의 학문적 업적과 함께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황은 먼저 향촌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예안향약을 제정하였다. 예안향약은 그의 고향인 예안현 농민이 여러 가지 이유로 유망(流亡)함으로써 향촌사회가 피폐해짐을 목격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제시한 것이었다.
[성학십도] 중 제1도 태극도.<출처: 국가전자도서관>
예안향약을 통해서 이황은 농민의 유망을 막아 향촌사회를 안정화시키려고 하는 한편 그가 평생 공부했던 성리학의 사회윤리를 현실에 구현하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불손한 자를 극벌로 다스린다든지, 친척과 화목하지 못한 자를 중벌로 다스린다는 조항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밖에도 그는 다가오는 사림의 시대를 주도할 사림의 육성에 치중하였는데, 이때 주목한 것이 서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서원은 1543년(중종 38)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인데, 이 서원의 설립 당시 주된 기능은 고려시대 유학자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安珦)의 제향이었다. 그런데 이황은 1550년(명종 5) 풍기군수로 내려갔을 때,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중앙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는 한편 서원을 단지 제향하는 공간이 아닌 사림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자기 수양을 하는 공간으로 규정하였다. 초기 서원이 중시했던 제향 기능을 부수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황은 이를 계기로 서원보급운동에 주력하여 상당수의 서원 건립에 참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황의 이런 활동을 통해서 이른바 조선 서원의 전형이 완성되었거니와, 이황은 서원을 통해서 다가오는 시대에 국가 경영이나 사회 운영을 주도할 사림들을 육성하려고 하였다.
한편 이황은 말년에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바쳤다. [성학십도]는 그림을 통해서 성리학의 정수를 표현한 것으로,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군주학인 성학(聖學)을 제시하였다. 선조가 유학에서 성인이라 말해지는 요순(堯舜)처럼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믿음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동방의 주자로 추앙
이황의 이상과 같은 학문적 또는 사회적 활동은 비리와 부패로 점철된 시대를 청산하고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림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로 나아가려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황의 문인 조호익은 이황을 평하여,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라고 하였다. 가히 ‘동방의 주자’라 할 만하다.
이황의 학문은 당대뿐 아니라 이후 조선 사회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가지며 확산되면서 이른바 퇴계학파라는 조선조 학파의 큰 맥을 형성하였다. 비록 이후 시기 그의 문인이나 후학들이 정치적으로 당대 주도세력과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여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학문은 대부분 논자들이 성리학의 정수로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문집이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내 주자학의 주류로 자리매김하였다. 오늘날 그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과 대만, 미국, 중국 등 국경을 초월해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도 그가 탐구하려고 하였던 큰 주제가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대한 것이기에,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조선 주자학을 확립한 퇴계(退溪) 이황(李滉)
학문하는 것은 거울을 닦는 것과 같다. 남보다 백배 더 공부하라
조선의 선비들을 말할 때 대표적으로 꼽는 인물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다. 이들은 학문과 품행이 뛰어나 후학들로부터 칭송받았으며, 조선의 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6세기 이후에는 조선의 선비들이 이들을 추종하여 문인이 되기를 바랐을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이들이 탐구한 이기론(理氣論)은 중국을 능가할 정도로 학문적 경지가 높았다.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로 불리는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도 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을 대표하는 두 학자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다. 율곡 이이에게는 시, 글씨, 그림에 능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였던 신사임당이 있었고, 퇴계 이황에게는 남편이 없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들을 대학자로 키운 과부 박씨가 있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1501년(연산군 7년)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7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 이식은 좌찬성을 지낼 정도로 쟁쟁한 학문과 경륜을 가졌으나, 청렴하여 재물을 축적하지 않아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어머니 박씨는 7남 1녀 중에 장남만 출가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홀로 어린 자식들을 보살펴야 했다.
어머니는 일찍 홀몸이 되어 장차 집안을 유지하지 못할까 염려해서, 더욱더 농사와 양잠 일에 힘쓰셨다. 여러 아들이 점점 장성하자, 가난한 중에도 학비를 내어 먼 데나 가까운 데나 취학을 시켰다.
이황이 훗날 손수 쓴 어머니 묘비명의 기록이다.
"사람들은 보통 과부는 자식을 올바로 가르치지 못한다고 흉을 본다. 너희들이 남보다 백배 더 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느냐?"
박씨는 항상 자식들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이황은 재롱을 부릴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가르침을 가슴속에 새겼다. 그는 이웃집에 사는 한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게 되었다.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이웃집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것을 여러 차례 속으로 외운 후에야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 앞에 나가면 공손하게 절을 하고 엎드려서 글을 배웠다. 이황이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이황은 홀로 자식들을 키우는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그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이황은 12세가 되자 형 이해와 함께 숙부인 이우에게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황은 문리가 트이면서 스스로 『논어』를 이해했다.
'이 아이를 가르치기에는 내 역량이 부족하구나.' 이우는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그 뜻을 헤아린다.'
이황은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책을 읽은 뒤에는 반드시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사색했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숙부에게 질문했다.
하루는 이황이 이우에게 질문했다.
"모든 일에 있어 옳은 것이 이(理)입니까?"
"어찌 이(理)에 대해서 묻는 것이냐?" 이우가 놀라서 되물었다.
"기(氣)와 이에 있어서 무엇이 먼저입니까?"
이황은 이기론에 대해 이우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네가 벌써 글의 뜻을 알았구나." 이우는 크게 기뻐했다.
"사람은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가면 공순(恭順)하여야 한다."
이황은 『논어』에서 이 글을 읽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된 도리가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황의 학문은 빠르게 발전했다.
이우는 자신의 자식보다 형의 아들들이 뛰어난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형에게는 이 아이들이 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
이우는 그후로도 이황의 학문이 나날이 발전하자 더욱 기뻐했다.
읽고 또 읽어라
이황의 공부 방법은 반복 학습이었다. 같은 책을 수없이 되풀이하여 읽는 바람에 책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러나 단순하게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사색했다. 사색은 의문에서 시작된다.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는 성리학의 대가들이었으나,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훗날의 사가들은 그들의 학문이 거칠고 정묘하지 않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황은 사색을 통해 성리학을 사상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었다.
이슬 머금은 풀 물가에 싱싱하게 얽혀 있고 露草夭夭繞水涯 로초요요요수애
작은 못 맑아서 모래도 없이 깨끗하네 小塘淸活淨無沙 소당청활정무사
원래 멋대로 구름 날고 새가 지나기는 하나 雲飛鳥過元相管 운비조과원상관
때때로 제비가 차서 물결 일까 두려워하네 只怕時時燕蹴波 지파시시연축파
이황이 18세 때 지은 7언절구다.
이황은 20세에 『주역』을 구하여 방문을 닫고 들어앉아 읽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주역』의 세계에 빠져든 것이다. 때는 한여름이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황은 방에 단정하게 앉아 『주역』만 읽었다. 사람들이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하는 이황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더위 때문에 쓰러질까 봐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 가슴속에서 문득 시원한 기운이 생겨 전신으로 퍼진다.
저절로 더위를 잊게 되는데 어찌 병이 나겠는가."
이황은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역』을 읽는 사람은 공부하는 방법을 저절로 알게 된다. 그 방법을 안 뒤에 사서(四書)를 보면 성현의 말씀을 구절구절 깨닫게 되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황은 『주역』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책 표지가 너덜너덜해지고 글자가 희미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퇴계선생 유첩
퇴계 이황이 제자 권호문에게 보내는 편지를 모아놓은 책(개인 소장).
이황은 21세가 되었을 때 진사 허이찬의 딸 허씨와 혼례를 올렸고, 두 아들을 두었다. 이황은 23세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주역』을 읽은 이황의 학문은 동년배들을 압도했다. 이때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선비들은 성균관에서 공부하기를 꺼려했지만, 이황은 신경 쓰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27세가 되자 이황은 경상도 향시의 진사시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생원시에서 2위에 입격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을 낳은 부인 허씨가 병으로 죽자, 이황은 슬픔에 잠겼다.
'사람은 왜 태어나고 죽는 것일까?'
이황은 부인의 죽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마다 슬픔을 이기는 방법이 다른데, 이황은 책을 읽는 것으로 슬픔을 극복했다.
학봉 김성일이 이황에게 독서하는 방법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학문은 그저 익숙하도록 읽는 것뿐이다. 글의 뜻을 알았다 한들, 익숙하지 못하면 금방 잊어버리게 되어 마음에 간직할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배우고 난 뒤에 익숙해질 때까지 공부를 해야 마음에 간직할 수 있으며, 또 흠씬 젖어드는 맛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황은 30세가 되었을 때 봉사 권질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는 공부에 전념했기 때문에 과거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들이 그에게 과거를 볼 것을 청했다. 그래서 34세가 되었을 때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고, 고향에서 올라와 한양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이황의 벼슬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검열(檢閱) 이황은 반역자 권전의 형인 권질의 사위인데, 권질은 지금도 죄인의 몸이니 결코 사관(史官)이 될 수 없습니다. 예문관 관원의 죄를 살피고, 아울러 이황을 물러나게 하소서."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이황은 간신들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등용되었다.
이황이 37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 박씨가 죽었다.
이황은 또다시 큰 충격을 받고 깊은 사유에 빠졌다. 그러나 곧 사가독서의 명을 받고 독서당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했다. 독서당은 동호(東湖)에 있었는데, 국가에서 인재에게 학문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곳이다. 사가독서는 문학에 출중한 선비들을 선발하여 책을 읽게 하는 것인데, 이황이 사가독서에 선발되었을 때 대부분의 선비들은 밖으로만 돌아다니며 공부를 게을리 했다. 이와 달리 이황은 사가독서의 영을 받고 오직 글 읽기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자, 일본과 화친하되 방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특히 백년 사직의 우환이라며 임진왜란을 예측하는 듯했다.
"대저 국가가 왜인에게 화친을 허용할 수 있지만 방비는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신이 본디 허약하여 고질병이 있는데 요즘에 더욱 극심하여 가까스로 숨만 이어가고 있던 중, 전하께서 왜인의 청을 거절하였다는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마음속으로 탄식하면서 '이 일은 백년 사직의 우환과 억만 생령(生靈)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죽어서 무궁한 한을 안고 갈 수는 없다'고 여겼기에, 병든 몸을 이끌고 고통을 참으며 삼가 어리석고 경망한 말씀을 올립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상소를 자전(慈殿)께 여쭈시고 다시 널리 조정의 신하들과 의논하시어 겸허한 마음으로 살피시고 절충하여 조처하신다면, 이 어리석은 신하의 복이 될 뿐 아니라 곧 종묘사직에도 큰 복이겠습니다."
"이 상소도 함께 의논하라."
명종이 대신들에게 영을 내렸다. 그러나 대신들은 반대했다.
"이황의 상소는 신광한의 말보다도 더욱 오활(迕闊)하여 결코 논의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황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벼슬보다 학문 탐구가 우선이다
48세가 되었을 때 이황은 단양군수로 임명되었다. 이황은 단양군수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때 기생 두향을 만나 애절한 사랑을 나누었다. 기생 두향은 이황이 임기를 마치고 단양을 떠날 때, 홍매와 백매 두 송이를 이황에게 선물했다. 이황은 눈바람 속에서 피는 매화를 좋아하여 매화를 매형(梅兄)이라고 부르고 많은 시를 남겼다. 이황이 매화를 얼마나 아끼고 소중히 여겼는지는 이간재의 『언행록(言行錄)』 중 「고종기(考終記)」에 잘 나타나 있다.
8일 아침에는 매화에 물을 주라고 하셨다. 이날은 개었는데 유시로 들어가자 갑자기 흰 구름이 지붕 위에 모이고 눈이 내려 한 치쯤 쌓였다. 조금 있다가 선생이 자리를 똑바로 하라고 명하므로 부축하여 일으키자, 앉아서 돌아가셨다. 그러자 구름은 흩어지고 눈이 개었다.
이렇듯 이황은 임종 전까지 매화를 사랑했다. 이황이 후학을 가르치던 도산서원이나 이황의 생가는 온통 매화 밭이다. 매화는 선비의 고결한 성품을 상징하여 옛날부터 선비들이 좋아하던 꽃이었다.
도산서원이황이 60세에 지어, 학문에 전념하고 후학을 키웠던 서원(ⓒ이수광).
이황은 단양군수를 지낸 뒤에 명종과 선조의 경연관이 되기도 하고 여러 벼슬을 거쳤다. 그러나 그는 벼슬보다는 학문을 탐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지만,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황은 50세가 되자 안동의 퇴계리에 거처를 마련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김성일, 유성룡 등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글을 배웠다. 김성일은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유성룡은 훗날 영의정을 지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도체찰사가 되어 7년간 전쟁을 총지휘하고 나중에 하회마을로 돌아가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황은 고봉 기대승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학문적인 논쟁을 벌였다. 기대승은 1527년(중종 22년)에 태어나 1572년(선조 5년)에 죽었다. 아버지는 기진이고, 작은아버지 기준은 기묘명현(己卯名賢 :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신하)의 한 사람이었다.
기대승은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청직을 역임하면서 조광조와 이언적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기도 했다. 성균관대사성과 대사간 등의 벼슬을 지내다가, 병으로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했다.
그는 직설적이고, 학문에 대한 의욕이 강했다.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갈 때 김인후와 이항을 만나 태극설을 논하는가 하면,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읽은 뒤에는 이황을 찾아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기대승과 이황은 장장 12년에 걸쳐 편지를 교환하면서 학문을 논했는데, 특히 8년 동안 두 사람이 편지로 주고받은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명하다.
기대승은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했다.
"그대는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하는가?"
"그렇습니다. 선생의 주리설(主理說)은 의문스러운 바가 많습니다."
이들의 논쟁은 기대승이 의문을 제기하면 이황이 답변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평행선을 달리듯 치열한 논쟁이었지만, 이 논쟁을 통해 두 학자의 학문은 더욱 깊어졌다. 후에 기대승은 사칠이기설(四七理氣設)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황은 60세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스스로 도옹(陶翁)이라고 불렀다.
집이 가난하여 나물과 잡곡밥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집에는 항상 많은 선비들이 찾아왔고, 학문을 배웠다. 이황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명종과 선조는 그를 자주 조정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황은 병을 이유로 사양하거나, 부득이 벼슬을 받더라도 곧바로 사직했다.
"경이 사직하는 상소를 보니, 나의 마음이 섭섭하다. 경은 모쪼록 병을 잘 다스리고 올라와서 누차 부르는 내 정성을 저버리지 말라."
명종이 전교를 내렸다.
"이황이 올라올 때에는 일로(一路)의 각관이 특별히 후대하여 편안히 올라오게 하라. 그리고 내의 연수담(延壽耼)은 약을 가지고 가서 문병하고 돌아와 아뢰도록 하라."
이황은 도산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에 명종은 독서당(讀書堂)에 술을 하사하고,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 데 대한 탄식(招賢不至嘆)'이라는 어제(御題)를 내어 율시(律詩)로 짓게 한 다음, 어필(御筆)로 이황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를 달았다.
이황은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학식이 뛰어났다. 예전부터 성현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어 마음으로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뜻을 맑게 가지고 행실을 독실하게 하였다. 권세를 쥔 간신들이 정권을 도맡아 국사가 날로 비하해지자, 그는 결국 병을 핑계 삼아서 경상도 예안 지방으로 물러가 살았다.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혹 나갔다 해도 곧 돌아오곤 했다.
식량이 자주 떨어졌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날마다 경서를 탐구하고 도를 즐기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중년 이후에는 소견이 더욱 밝고 얻은 바가 매우 높았으며, 학문이 심오하고 실천이 투철하였다. 지금 권세를 휘두르던 간신들이 자취를 감추고 상이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니, 국정이 날로 새로워졌다. 이무렵 이황의 문장과 도덕이 으뜸간다고 추천하는 자가 있어서 봄 초엽부터 전지를 내려 불렀는데, 이황은 신병이 쌓였을 뿐만 아니라 출처 문제를 놓고 매우 염려한 나머지 여러 번 사퇴했다. 그러자 위에서는 어의를 급파하여 진찰하는 등 은전을 베풀었으나, 끝내 부름에는 응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처럼 시를 짓게 하였으니, 은근히 측석(側席)의 뜻을 보인 것이다.
『명종실록』의 기록이다. 명종은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송인(宋寅)에게 영을 내려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었다. 명종은 조석으로 병풍을 보면서 이황을 흠모했다.
그 후 친정(親政)의 기회를 얻어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 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여 자주 초빙했으나, 이황은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어 조정에서 이황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고, 할 수 없이 한양에 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명종이 갑자기 죽고 선조가 즉위했다. 선조 역시 이황을 예조판서로 임명했지만, 그는 병을 이유로 간곡하게 사직하고 귀향했다. 선조는 이황을 여러 차례 불렀다. 이에 이황은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내가 상소를 보고 여러 번 깊이 생각해 보건대, 경의 도덕은 옛사람과 비교해 보아도 따를 사람이 적을 것이다. 이 6조목은 참으로 천고의 격언이며 지금의 급선무이다. 내 비록 하찮은 인품이지만 어찌 가슴에 지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듯 선조는 이황의 상소를 한순간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1568년 12월, 이황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렸다.
『성학십도』는 학문을 논한 상소문으로, 제1도에서 제5도까지는 "천도(天道)에 기본을 두고 그 공과(功課)는 인륜을 밝히고 덕업(德業)을 이룩하도록 노력하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학문의 큰 뜻을 설명하고 있다. 제6도에서 제10도까지는 "인간의 심성에 근원을 두어 일상생활에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높이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황은 이를 선조에게 바치며 아뢰었다.
"신이 나라에 보답할 것은 이뿐입니다."
선조는 『성학십도』를 읽은 후 감동하여 이 같은 영을 내렸다.
"이는 학문하는 데 매우 필요하고 절실한 것이다. 이것을 병풍으로 만들라.
내가 매일같이 이를 보면서 반성할 것이다."
성학에는 강령이 있고 심법(心法)에는 지극히 요긴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드러내어 도(圖)를 만들고, 이것을 지목하여 해설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과 덕을 쌓는 기초를 보여주니, 이것 역시 후현(後賢)이 부득이하여 만들게 된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의 마음은 만 가지 징조가 연유하는 곳이요, 백 가지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온갖 욕심이 공격하고 온갖 간사함이 서로 침해하는 곳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하여 방종이 따르게 되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과 같을 것이니, 이것을 누가 막겠습니까.
이황은 선조에게 학문을 열심히 하여 성군이 되라고 충고한 것이다.
1570년(선조 4년) 이황의 병이 악화되었다. 그는 아들 이준에게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고 지시한 뒤, 단정하게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했다.
그의 부음이 알려지자 많은 선비들이 탄식하고 슬퍼했다. 장례를 치를 때는 수백 명의 선비들과 성균관 유생들이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
오로지 성리의 학문에 전념하다가 『주역』을 읽고 한결같이 그 교훈을 따랐다. 참된 지식과 실천을 위주로 하여 여러 학설의 차이점과 장단점에 대해 널리 통달하고 주자의 학설에 의거하여 절충하였으므로, 의리에 있어서는 소견이 정미(精微)하고 도의 대원(大源)에 대하여 환히 통찰하고 있었다.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확립되자 더욱더 겸허해져서 그에게 배우려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달관(達官), 귀인(貴人)들도 마음을 다해 사모하였다. 그가 학문 강론과 몸단속을 위주로 하면서 사풍(士風)이 크게 변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있는 기록이다. 이황은 학자로서 선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논자들에 의하면, 이황은 이 세상의 유종(儒宗 : 유학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으로서 조광조 이후 그와 겨룰 자가 없으니, 이황이 재주나 기국(器局)에 있어서는 조광조에 미치지 못하지만 의리를 깊이 파고들어 정미한 경지까지 이른 것은 조광조가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조광조는 정치적으로 뛰어났고 이황은 학문적으로 뛰어나서 이 세상의 유종이라고 불렸다는 『조선왕조실록』의 대목은 그가 왜 선비들에게 높이 받들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황은 살아 있을 때부터 유종으로 불렸다. 그동안 유학을 하는 선비들은 주자학을 단순하게 받아들여 실천하는 데 불과했으나, 이황은 사상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주희에 버금가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황은 이로 인하여 많은 문인들을 배출했고, 영남학파를 이끌게 되었다.
구계서원1611년에 이황과 이정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출처] 53. 퇴계 이황[退溪 李滉 3] 조선 중기 (1501년~ 1570년 )(69) : 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주자와 버금가는 학자)|작성자 조아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