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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재 박병순 선생님께서 12월 2일 별세하셨습니다. 지난해 시조문학 시상식 축사에서의 그 꼬장꼬장하시던 모습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김명호> |
청천벽력이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3일 새벽 12시50분이었다. 노을재가 모르는 구름재 선생님의 소천이라니........ 벌써 하루가 지났다는 얘기가 아닌가? 참으로 부끄러웠다. 이 시각에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별세를 하시었는지, 장례식장은 어디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댓글을 달았다.
노을재 (08.12.03 00:51) 아니, 이게 어인 일입니까? 아직 정정하신 줄 알고 있었는데....... 어이고 큰일났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노래를 부르셨는데 아직 못가 뵈옵고........ 죄인 노을재 사부님 영전에 삼가 영원한 안식을 비옵니다. |
부랴부랴 우리 너른 고을 문학회 홈페이지로 가서 둘러보았으나 그곳은 조용하였다. 답답한 마음에 공지사항에 글을 올렸다.
구름재 박병순 선생님께서 12월 2일 영면하셨답니다. 누구 연락 받으신 분 없어요? |
1995년 5월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날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선생님은 그 특유의 책 보따리를 끌어 앉고 시조를 가르치시겠다며 퇴촌에서 곤지암까지 찾아오시었고, 그것이 민망하여 나는 퇴촌으로 공부를 하러 먼 길을 다니게 되었지만 그렇게 하여 끈질긴 사제의 연은 맺어졌다. 제자 사랑이 너무나 유별나시어 힘들기도 하였지만, 문학의 불모지라 하리만큼 뒤떨어졌던 너른 고을에 문학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시며, 이 너른 고을을 당신의 고향만큼이나 사랑하셨던 분! 좀처럼 시조를 짓지 않는 나는 놀라움과 슬픔에 절로 낙서처럼 글을 지었다.
어서와 어서 오게 환한 미소 지으시고
손을 굳게 잡으시면 놓을 줄 모르시던
그 정은 어디에 두고 홀연히 가셨나요.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연락을 받고서도
바쁘다 딴청 피며 찾아뵙지 못한 죄인
후회와 송구스러움 부끄러워 우옵니다.
행여 누구라도 아직 취침 전인 줄 알면 연락이 올까싶어 컴퓨터를 켜놓은 채 깜빡 잠이 들었다. 꿈자리가 뒤숭숭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왁자지껄 전을 부치고 부산하게 움직이는데 이종남씨도 보이고, 나는 누구에겐가 큰소리로 나무라다가 그만 내 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 새벽 5시를 조금 넘고 있었지만 아직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만한 시각은 아니었다. 다시 홈페이지로 가서 사정을 알아보려 하였으나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확인해야지를 몇 번이나 반복하였는지....... 드디어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님이신 유강 선생님의 댓글이 올라왔다.
유강 (08.12.03 07:56) 송전 선생님께서 올리신 글에 구름재 선생님께서 타계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어 제가 직접 자제분께 확인해본 결과 아직 돌아가시지는 않은 상태로 현재 곡기를 끊고 계셔서 가족들이 지켜보며 현재도(12월 3일 새벽)대기상태랍니다. 우리 한국시조시인협회장으로 장례를 치룰 계획으로 있어서 저희 협회에서도 지금 비상상태로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아드님이신 박영우 교수께 전화를 걸었다. 아직 생존하여 계신데 곡기를 끊으신지 10여일이 넘었고 얼마 못 가실 것 같다며, 시간 되시면 오셨다 가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답변이었다. 즉시 문화원 부원장님이시며 너른 고을 문학의 대장인 남재호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전후 사정을 말씀드리고, 우리를 보시지 못하여 눈을 못 감으시는 것 같으니 서둘러야겠다고 하였으나, 마침 출판관계로 선약이 되어 있다며 점심 후에 가 뵙는 것이 어떠냐 하셨다. 그러다가 오전에 돌아가시면 어쩌겠느냐고 다그쳐 물으니 선약을 조금 미루고 오전에 함께 가기로 하셨다. 곧바로 구름재 선생님께서 특별하게 아끼시던 이종남 시인에게 연락을 하고 말 그대로 번개처럼 모여 가락동 삼환 아파트로 달려갔다.
철이 두 번 바뀌고 나서야 찾아뵙게 된 선생님의 모습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참혹하리만치 야위신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알아보셨다. 내 손을 잡으시고 남 부원장님 손을 잡으시더니 이종남 시인의 손을 잡으시고는 끌어당기시며 도무지 놓지를 않으셨다. 무슨 말씀인가 하시려고 온 힘을 다 하여 용을 쓰셨으나 우리는 선생님 뜻을 끝내 짐작과 눈빛으로만 알아차려야 했다. 숨소리가 이상하였다. 운명하시는 거 아니냐고 고개를 갸우뚱 하였더니 아직 2~3일은 더 버티실 것 같다는 의견을 듣고 다시 문화원의 선약을 지키기 위하여 일어섰다. 나는 여기 남아 병상을 더 지켜야 할 것 같아서 잠시 망설였지만 돌아올 때 교통도 복잡하고 길눈도 어둡다는 이유로 그냥 편히 묻어가자는 안일한 생각에서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돌아오며 분명 선생님께서 우리 때문에 눈을 못 감으신 거 같다고 입을 모았으며, 이제 우리를 보셨으니 편히 돌아가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11시 30분에 발길을 돌려 문화원에 도착하니 아드님이신 박영우 교수가 비보를 알려왔다. 방금 12시에 임종하셨다는....... 그랬다. 우리를 마지막 보시고 그 길로 임종에 들어가신 것이었다. 서울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으로 모실 것이며 장례는 시조시인협회장으로 치룰 예정이라고 하였다. 조금 있으니 구름재 선생님의 수석제자이신 시조문학 발행인 김준 박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금 외부에 나와 있는데 7시까지 장례식장으로 가겠으니 거기서 보자고 하셨다. 남부원장님과 이종남 시인과 약속을 하고 허정분 시인에게 연락을 하였다. 허정분 시인은 깜짝 놀라며 안절부절 하였지만 마침 집안에 일이 있어 옴짝달싹 못하는 터라 조의금만 전달 받아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고두석 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과 김석철 수석부회장님, 구름재 선생님의 애제자이신 진복희 선생님과 김준 박사님, 달가람의 고동우 사무국장, 그리고 너른 고을 문학회 회원 이현아, 정애란, 한창희, 손월빈 시인 등 여러 명이 먼저 와 계셨다. 선생님의 존경스러움과 흉허물까지 생전의 삶을 회상하며 담소를 나누는 등 밤늦도록 빈소에 머물다 돌아왔다.
4일 오후 2시, 가족들 틈에 끼어 입관 예절에 참석을 하고 몇몇 시조시인들과 장례절차에 대하여 의논을 하는데 너른 고을 문학의 윤일균 시인 그리고 최영옥, 정윤옥 시인이 잇따라 들어왔다. 이제 올 사람들은 다 왔나보다 하였더니 뜻밖에도 너른 고을의 이삭들까지 다 주워왔다며 유대형 시인이 최영우, 한기수, 공한성 시인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참 고마웠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너른 고을 문학 회원들 중에는 구름재 선생님을 잘 모르는 문인들도 있지만 선생님을 섬기는 마음은 차고 넘치어, 바쁜 중에도 또 시골 먼 길임에도 주저 없이 문상을 온 것이다. 생전의 그 꼿꼿하신 성품이며 나라사랑 시조사랑 한글사랑을 목숨처럼 중히 여기시고, 또한 수하의 제자나 후배의 사랑이 유별나셨던 그분의 공덕이 깊이깊이 뿌리를 내린 것이리라.
5일 아침6시에 남재호 부원장님과 영결식장으로 향했다. 고두석 사무총장의 사회로 김준 박사님의 조사에 이어 진복희 시인의 조시가 낭독되었으며, 화면에서는 선생님의 생생한 육성과 함께 살아생전의 모습이 비춰져 조문객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마지막 분향을 끝내고 고두석, 진복희 시인과 함께 영구차에 올라 진안 선영으로 향했다.
박병순(朴炳淳) 4250(1917, 丁巳). 12. 23(음 11. 10).
춘당(春塘) 박종수·김성녀(芙蓬)의 맏아들로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적내[笛川] 1245번지 태어나, 이제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시는 것이다. 서울에서부터 4시간 남짓 달려 모래재를 넘어서자, 구름재 선생님의 고향인 세동리 장지에 도착할 즈음에는 선생님의 소천을 서러워하는 듯 하얀 눈이 휘날리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눈꽃으로 소복하게 앉아 그렁그렁 고인 눈물인 듯 반짝이기도 하였다. 장지에는 시조시인이신 최승범 교수님과 정순량 교수님 그리고 전북의 문인들과 지인들께서 먼저 와 기다리고 계셨다. 목사님의 인도에 따라 하관 예식을 마치고 유족들 틈에 끼어 삽으로 흙을 떠 무덤에 부으며 영원한 안식을 빌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이다.
춥고 궂은 날씨 탓인지 모두들 서서히 발길을 돌린다.
‘선생님, 이렇게 선생님을 버려두고 가옵니다.......’
눈발이 휘날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안으로 중얼중얼........
따스한 봄이 오면 선생님 무덤 앞에 세워질 비문이 눈에 들어온다.
무거운 책보따리를 들고 허우대던 불우한 국어 국문 학도였다.
그러나 한글 전용의 선구자요, 실천자요, 공헌자였고, 시조 전문지의 효시<신조(新調)>의 주재자로 시조 문학 부흥과 시조 보급 운동의 거점을 이룬 끈질긴 과감한 투쟁자였다.
한글을 사랑하고 시조를 종교하는 민족 시인으로 가람의 뒤를 이은 한국의 별로 살다 간 가냘프고 고달픈 순결한 대한의 교육자였다. - 4308.4.13~16. 상오
그렇다, 더 무엇을 말하랴?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다. 덧없는 이 세상에서 굽힘 없는 소신으로 힘차게 살다 가신 선생님, 그러나 실상은 가냘프고 순결하신 분이셨다.
삼가 선생님 영전에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첫댓글 노을재 선생님의 애도의 글 잘 읽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뒤늦게 맺은 제 마지막 스승님이라서...........그런데도 선생님 사랑을 버거워서 많이 거부했거던요......제가 참 못돼먹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