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마을 _ 오영수
서(西)로 멀리 기차 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면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있다.
더깨더깨 굴딱지가 붙은 모 없는 돌로 담을 쌓고, 낡은 삿갓 모양 옹기종기 엎딘 초가가 스무 집 될까 말까? 조그마한 멸치 후리막이 있고, 미역으로 이름이 있으나, 이 마을 사내들은 대부분 철 따라 원양 출어(遠洋出漁)에 품팔이를 나간다. 고기잡이 아낙네들은 썰물이면 조개나 해조를 캐고, 밀물이면 채마밭이나 매는 것으로 여느 갯마을이나 별다름 없다. 다르다고 하면 이 마을에는 유독 과부가 많은 것이라고나 할까? 고로(古老)들은 과부가 많은 탓을 뒷산이 어떻게 갈라져서 어찌어찌 돼서 그렇다느니, 앞바다 물발이 거세서 그렇다느니들 했고, 또 모두 그렇게들 믿고 있다.
해순이도 과부였다. 과부들 중에서도 가장 젊은 스물셋의 청상이었다.
초여름이었다. 어느 날 밤, 조금 떨어진 멸치 후리막에서 꽹과리 소리가 들려 왔다. 여름 들어 첫 꽹과리다. 마을은 갑자기 수선대기 시작했다. 멸치 떼가 몰려온 것이다. 멸치 떼가 들면 막에서는 꽹과리나 나팔로 신호를 한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막으로 달려가서 그물을 당긴다. 그물이 올라 수확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짓’이라고 해서 대개는 잡어(雜魚)를 나눠 받는다. 수고의 대가다. 그렇기 때문에 후리를 당기러 갈 때는 광주리나 바구니를 결코 잊지 않았고 대부분이 아낙네들이다. 갯마을의 가장 풍성하고 즐거운 때다. 해순이도 부지런히 헌옷을 갈아입고 나갈 차비를 하는데, 담 밖에서 숙이 엄마가 숨찬 소리로,
“새댁 안 가?”
“같이 가요, 잠깐…….”
“다들 갔다, 빨리 나오잖고…….”
“아따, 빨리 가먼 짓 먼첨 받나 머!”
하고 해순이가 사립 밖을 나서자, 숙이 엄마는,
“아이구 요것아!”
눈앞에 대고 헛주먹질을 하면서,
“맴(홑)치마만 걸치면 될 걸…… 꼬물대고서…….”
“망측하게 또 맴치마다. 성님(형님)은 정말 맴치마래?”
“밤인데 누가 보나 머, 철벙대고 적시노먼 빨기 구찮고…….”
사실 그물을 당기고 보면 으레 옷이 젖는다. 식수도 간신히 나눠 먹는 갯마을이라 빨래가 여간 아니다. 그래서 아낙네들은 맨발에 홑치마만 두르고 나오는 버릇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로 해서 또 젊은 사내들의 짓궂은 장난도 있다. 어쩌면 사내들의 짓궂은 장난을 싫찮게 받아들이는 갯마을 여인들인지도 모른다.
해순이와 숙이 엄마는 물기슭 모래톱으로 해서 후리막으로 달려갔다. 맨발에 추진 모래가 한결 시원하다. 벌써 후리는 시작되었다. 굵직한 로프줄에는 후리꾼들이 지네발처럼 매달렸다.
── 데에야 데야.
이켠과 저켠에서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면 로프는 팽팽해지면서 지그시 당겨 온다. 해순이와 숙이 엄마도 아무렇게나 빈틈에 끼여들어 줄을 잡았다. 바다 저만치서 선두가 칸델라 불을 흔들고 고함을 지른다.
당겨 올린 줄을 뒷거둠질하는 사내들이, 데에야 데야를 선창해서 후리꾼들의 기세를 돋우고, 막 거간들이 바쁘게들 서성댄다. 가마솥에는 불이 활활 타고 물이 끓는다. 그물이 가까워 올수록 이 데에야 데야는 박자가 빨라진다.
── 데야 데야 데야 데야.
이 때쯤은 벌써 멸치가 모래톱에 헤뜩헤뜩 뛰어오른다. 멸치가 많이 들면 수면이 부풀어 오르고 그물주머니가 터지는 때도 있다. 이 날 밤도 멸치는 무던히 든 모양이다. 선두는 곧장 칸델라를 흔든다. 후리꾼들도 신이 난다.
── 데야 데야 데야 데야.
이 때 해순이 손등을 덮어 쥐는 억센 손이 있었다. 줄과 함께 검잡힌 손은 해순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내버려두었다. 후리꾼들의 호흡은 더욱 거칠고 빨라진다. 억센 손은 어느새 해순이의 허리를 감싸안는다. 해순이는 그만 줄 밑으로 빠져 나와 딴 자리로 옮아 버린다. 그물도 거진 올라왔다.
── 야세 야세.
이 때는 사내들이 물기슭으로 뛰어들어 그물주머니를 한 곳으로 모아드는 판이다. 누가 또 해순이 치마 밑으로 손을 디민다. 해순이는 반사적으로 휙 뿌리치고 저만치 달아나 버린다. 멸치가 모래 위에 하얗게 뛴다. 아낙네들은 뛰어오른 멸치들을 주워 담기에 바쁘다. 후리는 끝났다. 멸치는 큰 그물 쪽자로 광주리에 퍼서 다시 돌(시멘트)함에 옮겨 잡어를 골라 낸다. 이래서 멸치가 굵으면 젓감으로 날로 넘기기도 하고, 잘면 삶아서 이리꼬를 만든다.
|생략 부분 줄거리| 해순은 짓을 한 바구니 받았다. 해순이의 짓이 유독 많은 것을 보며, 아낙네들은 해순이를 놀렸다. 자리에 누워서도 해순은 잠이 오질 않았다. 어쩌면 돌아올 것도 같은 성구의 손 같기도 한, 아니면 징용으로 끌려가 버린 상수의 손 같기도 한─그 억센 손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해순이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애써 본다. 눈을 감아 잠을 청해 본다. 그러나 금하는 음식일수록 맘이 당기듯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놓치기 싫은 마음──그것은 해순이에게 까마득 사라져 가는 기억의 불씨를 솟구쳐 사르개를 지펴 놓은 것과도 같았다. 안타깝고 괴로운 밤이었다.
창이 밝아 왔다. 해순이는 방문을 열었다. 사리섬 위에 달이 솟았다. 해순이는 달빛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바다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뇌어 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눈시울이 젖는다. 한숨과 함께 혀를 한번 차고는 문지방을 베고 누워 버린다. 달빛에 젖어 잠이 들었다.
누가 어깨를 흔든다. 소스라치고 깨어 보니 그의 시어머니다. 해순이는 벌떡 일어나 가슴을 여미면서,
“우짜고, 그새 잠이 들었던가베…….”
시어머니는 언제나 다름없는 부드럽고 낮은 소리로,
“얘야, 문을 닫아 걸고 자거라!”
남편 없는 며느리가 애처로웠고, 아들 없는 시어머니가 가엾어 친딸 친어머니 못지않게 정으로 살아가는 고부간이다. 그러나 이 날 밤만은 얼굴이 달아 올라 해순이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의 시어머니는 언젠가 해순이가 되돌아오기 전에도,
“얘야, 문을 꼭 걸고 자거라!”
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날 밤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그의 시어머니다. 어쩌면 해순이의 오늘은 이 ‘얘야, 문을 꼭 닫아 걸고 자거라…….’는 데 요약될는지도 모른다.
|생략 부분 줄거리| 해순은 열아홉에 성구에게로 시집을 갔다. 고등어철이 되자 성구를 포함한 여덟 명이 고기잡이를 나갔다. 고깃배가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비바람이 몰아치고 몇몇 집이 파도에 휩쓸렸으며 윤 노인이 죽었다. 고등어배는 돌아오지 않았고 마을은 수심에 잠겼다. 이틀 뒤 후리막 주인이 신문을 한 장 가지고 와서 출어한 많은 어선들이 행방불명이 됐다는 기사를 읽어 주었다.
마을은 다시 수라장이 됐다. 집집마다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이틀이 지났다. 울음에도 지쳤다. 울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설마 죽었을라고.
이런 희망을 가지고 아낙네들은 다시 바다로 나갔다. 살아야 했다. 바다에서 죽고 바다로 해서 산다. 해순이는 성구가 돌아올 것을 누구보다도 믿었다. 그 동안 세 식구가 먹고 살아야 했다. 해순이도 물옷을 입고 바다로 나갔다.
해조를 따고 조개를 캐다가도 문득 이마에 손을 하고 수평선을 바라보곤 아련한 돛배만 지나가도 괜히 가슴을 두근거리는 아낙네들이었다. 멸치철이건만 후리도 없었다. 후리막은 집뚜껑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 그대로 손볼 엄두를 내지 않았다. 후리도 없는 갯마을 여름밤을, 아낙네들은 일쑤 불가에 모였다. 장에 갔다 온 아낙네의 장시세를 비롯해서 보고 들은 이야기──이것이 아낙네들의 새로운 소식이요 즐거움이었다. 싸늘한 모래에 발을 묻고 밤 새는 줄 몰랐다. 숙이 엄마가 해순이 허벅지를 베고 벌렁 누우면서,
“에따, 그 베개 편하다…….”
그러자 누가,
“그 베개 임자는 어데 갔는고?”
아낙네들의 입에서는 모두 가느다란 한숨이 진다. 숙이 엄마는 해순이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면서,
에에야 데야 에에야 데야
썰물에 돛 달고
갈바람 맞아 갔소.
하자 아낙네들은 모두,
에에야 데야
샛바람 치거던
밀물에 돌아오소
에에야 데야.
아낙네들은 그만 목이 메어 버린다. 이 때,
“떼과부년들이 모아서 머 시시닥거리노?”
보나마나 칠성네다. 만이 엄마가,
“과부 아닌 게 저러면 밉지나 않제?”
칠성네도 다리를 뻗고 펄썩 앉으면서,
“과부도 과부 나름이지 내사 벌써 사십이 넘었지만, 이년들 괜히 서방 생각이 나서 자도 않고…….”
“말도 마소. 이십 전 과부는 살아도, 사십…….”
“시끄럽다, 이년들아, 사내녀석들 한 두름 몰아다 갈라 줄 테니…….”
“성님이나 실컷 하소…….”
모두 딱따그르 웃는다.
이래저래 여름이 가고 잡어가 많이 잡히는 가을도 헛되이 보냈다.
모자기, 톳나물, 가스레나물, 파래, 김 해서 한 무렵 가면 미역철이다.
미역철이 되면 해순이는 금보다 귀한 몸이다. 미역은 아무래도 길반쯤 물 속이 좋다. 잠수는 해순이밖에 없다. 해순이가 미역을 베 올리면 뭍에서는 아낙네들이 둘러앉아 오라기를 지어 돌밭에 말린다. 미역도 이삼월까지면 거의 진다.
어느 날 밤, 해순이는 종일 미역바리를 하고 나무둥치같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얼마쯤이나 됐을까? 분명코 짐작이 있는 어떤 압박감에 언뜻 눈을 떴다. 이미 당한 일이었다. 악!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 숨결만 가빠지고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사내의 옷자락을 휘감아 잡았다. 세상없어도 놓지 않을 작정 하고──그러나 해순이의 몸뚱어리는 아리숭한 성구의 기억 속으로 자꾸만 놓여 가고 있었다. 그렇게도 휘감아 잡았던 옷자락이 모르는 새 놓아졌다.
──아니 내가 이게…….
해순이는 제 자신에 새삼스레 놀랐다. 마치 꿈 속에서 깨듯 바싹 정신이 들자 그만 사내의 상고머리를 가슴패기 위에 움켜쥐었다. 사내는 발로 더듬어 문을 찼다.
“그 방에 누꼬?”
시어머니의 잠기 가신 또렷한 소리다. 해순이는 가슴이 덜컥했다. 그러나 입술에 침을 발라 목을 가다듬었다.
“뒷간에 갑니더!”
그리고는 사내의 상고머리를 슬그머니 놓아 주고 자국 소리를 터덕댔다. 이 날 밤 해순이는 가슴이 두근거려 더는 잠을 못 잤다.
다음 날도 미역바리를 나갔다. 숨가쁜 물 속에서도 해순이 머리 한구석에는 어젯밤 기억이 떠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성기를 건져다 시어머니에게 국을 끓여 드렸다. 시어머니는 성깃국을 달갑게 먹으면서,
“얘야, 잘 때는 문을 꼭 닫아 걸고 자거라!”
해순이는 고개를 못 들었다. 대답 대신 시어머니 국대접에 새로 떠 온 따신 국만 떠 보탰다.
|생략 부분 줄거리| 지난 밤 해순을 덮친 사내는, 두 해 전에 상처를 하고 이모가 있는 이 마을로 온 상수였다. 상수는 해순에게 자기랑 고향에 가서 같이 살자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낙네들 사이에 해순이와 상수가 그렇고 그렇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고등어철이 와도 칠성네 배는 소식조차 없었다. 밤이면 아낙네들만 이 불가에 모여들었다. 칠성네가 그의 시아버지(박 노인──박 노인은 그 뒤 이렇다 할 병도 없이 시룽시룽 앓아누워 지금껏 자리를 뜨지 못한다.)가 시키는 말이라면서 작년 그 날을 맞아 일제히 제사를 지내라는 것이었다. 모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 H마을에 여덟 집 제사가 한꺼번에 드는 셈이다. 제사를 이틀 앞두고 해순이 시어머니는 해순이에게,
“얘야, 성구 제사나 마치거던 개가하두룩 해라!”
“…….”
“새파란 청상이 어찌 혼자 늙겠노!”
해순이는 그저 멍했다.
“가면 편할 자리가 있다. 그새 여러 번 말이 있었으나, 성구 첫 제사나 치르고 보자고 해 왔다. 너도 대강 짐작이 갈 게다!”
해순이는 낯이 자꾸 달아올랐다. 상수가 틀림없었다. 해순이는 고개가 자꾸만 무거워 갔다.
“과부가 과부 사정을 안다고, 나도 일찍이 홀로 된 몸이라 그 사정 다 안다. 죽은 자식보다 너가 더 애처롭다. 저것(시동생)도 인젠 배를 타고 하니 설마 두 식구야…….”
다음 날은 벌써 상수가 해순이를 맞아 간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쫙 퍼졌다. 그러면서도 아낙네들은 해순이마저 떠난다는 것이 진정 섭섭했고 맥이 풀렸다. 눈물을 글썽대는 아낙네도 있었다. 해순이는 이 마을──더구나 아낙네들의 귀염둥이다. 생김새도 밉지 않거니와 마음에 그늘이 없다. 남을 의심할 줄도 모르고 거짓도 없다. 그보다도 우선 미역철이 오면…… 아낙네들은 절로 한숨이 잦았다. 그러나 해순이는 그저 남녀가 한번 관계를 맺으면 으레 그렇게 되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됐고 또 그렇게 해야 되나 보다──이러는 동안에 후리막 안주인과 상수를 따라 해순이는 가야 했다.
해순이마저 떠난 갯마을은 더욱 쓸쓸했다. 한 길 물 속에 미역밭을 두고도 철을 놓쳐 버렸다. 해조로 끼니를 이어 가는 집도 한두 집이 아니었다.
또 고등어철이 왔다. 두 번째 닿는 제사를 사흘 앞두고 아낙네들은 불가에 모였다.
“요번 제사에는 고동 생복도 없겠다!”
“이밥은 못 차려도 바다를 베고서…….”
“바닷귀신이 고동 생복 없이는 응감도 않을걸!”
이렇게들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뒤에서 누가,
“왁!”
해순이었다.
“이거 새댁이 앙이가!”
“새댁이 우짠 일고?”
“제사라고 왔나?”
“너거 새서방은?”
그 중에서도 숙이 엄마는 해순이를 친정 온 딸이나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싸고 들여다보면서,
“좀 예빘(여위었)구나?”
그러자 칠성네가
“여기 좀 앉거라, 보자!”
해순이는 아낙네들에 둘러싸여 비로소,
“성님들 잘 기셨소?”
했다.
“너거 시어머니 봤나?”
해순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시어머니는 해순이를 보자 일부러 실룩이고 눈물을 가두었다. 아들 생각을 해선지? 아니면 제삿날 잊지 않고 온 며느리가 기특해선지? 해순이는 제 방에 들어가서 위선 잠수 연모부터 찾아보았다. 시렁 위에 그대로 얹혀 있었다. 해순이는 반가웠다. 맘이 놓였다. 그래서 불가로 나왔다.
“난 인자 안 갈 테야. 성님들하고 같이 살 테야!”
그리고는 훌쩍 일어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가슴 가득히 숨을 들이켰다. 오래간만에 맡는, 그렇게도 그립던 갯냄새였다.
아낙네들은 모두 서로 눈만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상수도 징용으로 끌려가 버린 산골에는 견딜 수 없는 해순이었다.
오뉴월 콩밭에 들어서면 깝북 숨이 막혔다. 바랭이풀을 한 골 뜯고 나면 손아귀에 맥이 탁 풀렸다. 그럴 때마다 눈앞에 훤히 바다가 틔어 왔다.
물옷을 입고 철벙 뛰어들면…… 해순이는 못 견디게 바다가 아쉽고 그리웠다.
──고등어철──해순이는 그만 호미를 내던지고 산비탈로 올라갔다. 그러나 바다는 안 보였다. 해순이는 더욱 기를 쓰고 미칠 듯이 산꼭대기로 기어 올랐다. 그래도 바다는 안 보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마을에서는 해순이가 매구 혼이 들렸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시가에서 무당을 데려다 굿을 차리는 새, 해순이는 걷은 소매만 내리고 마을을 빠져 나와 삼십 리 산길을 단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너 진정이냐? 속시원히 말 좀 해라, 보자.”
숙이 엄마의 좀 다급한 물음에도, 해순이는 조용조용,
“수수밭에 가면 수숫대가 모두 미역발 같고, 콩밭에 가면 콩밭이 왼통 바다만 같고…….”
“그래?”
“바다가 보고파 자꾸 산으로 올라갔지 머, 그래도 바다가 안 보이데.”
“그래 너거 새서방은?”
“징용 간 지가 언제라고…….”
“저런…….”
“시집에선 날 매구 혼이 들렸대.”
“쯧쯧.”
“난 인제 죽어도 안 갈 테야, 성님들하고 여기 같이 살 테야!”
이 때 후리막에서 야단스레 꽹과리가 울렸다.
“아, 후리다!”
“후리다!”
“안 가?”
“왜 안 가!”
숙이 엄마가 해순이를 보고,
“맴치마만 두르고 빨리 나오라니…….”
해순이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낙네들은 해순이를 앞세우고 후리막으로 달려갔다. 맨발에 식은 모래가 해순이는 오장육부에 간지럽도록 시원했다.
달음산 마루에 초아흐레 달이 걸렸다. 달 그림자를 따라 멸치 떼가 들었다.
──데에야 데야.
드물게 보는 멸치 떼였다.
오영수(吳永壽, 1914~1979)
호는 월주(月州). 경남 울산 출생. 1949년 <신천지>에 「고무신」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에 <서울신문> 신춘 문예에 단편 「머루」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대개 토속적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을 서정적인 필치로 묘사하였으며, 향촌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드러낸다.
주요 작품으로는 「화산댁이」, 「메아리」, 「은냇골 이야기」 등이 있다.
작품 투시도
포인트 1 ‘해순’을 통하여 갯마을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그림
포인트 2 ‘해순’은 자연의 일부로 파악된 인간의 원형을 상징함
작품 해설
원시적 순박성을 추구하는 작가 의식
작가는 문명과는 거리가 먼 갯마을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그 속에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융합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원시적 순박성을 드러내고 있다. 바다의 일부로서 그 질서에 지배되고 바다가 주는 것과 빼앗는 것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진솔한 해순의 모습은 자연의 일부로 파악된 인간의 원형이라 하겠다.
문명과 동떨어진 원시적 공간, 갯마을
해순이 살고 있고,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갯마을은, ‘징용’이라는 표현이 없다면 시대조차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초시간적 공간이다. 이 곳은 문명 사회와는 떨어져 있는 현대 물질 문명이나 이념으로부터 벗어난 곳이고, 이 속에서 인간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갯마을은, 역사적 현장과는 동떨어진, 인간의 삶의 원형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하겠다. 이러한 배경 안의 사람들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진솔한 모습과 순수한 욕망을 갖고 있을 뿐 사회적 문제나 윤리의 문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역순행적 구성 방식
이 작품은 역순행적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바닷가에서 후리질하는 해순의 모습이 제시된 후, 이전에 해순이 성구와 결혼했다 과부가 되었던 일, 다시 상수와 재혼했으나 상수가 징용으로 끌려간 후 산골 생활을 견디지 못해 바다로 돌아온 일이 제시된다.
핵심 정리
갈래단편 소설
배경시대적 - 일제 강점기
공간적 - 동해안의 H라는 갯마을
시점전지적 작가 시점
주제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원시적 생명력
작품 내용
해녀의 딸. 열아홉에 시집 간 성구가 고기잡이를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과부가 됨. 재혼한 상수마저 징용으로 끌려가자 산골에 남아 바다를 그리워하다 결국 갯마을로 돌아옴.
해순이의 첫 남편. 원양 출어를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음.
해순이의 두 번째 남편. 밤중에 해순을 범하고 동네에 소문을 퍼뜨려 해순과 결혼함. 해순을 데리고 고향인 산골로 갔으나 징용으로 끌려감.
해순의 시어머니. 갯마을에서 과부로 살아온 사람으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과부가 된 해순을 안타까워하여, 상수에게 개가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