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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부문
<우수상>
포켓 엔젤
조혜경
1
가게 문 밖으로 차가운 비가 타닥타닥 을씨년스레 내리고 있었다. 맹렬한 바람이 비와 함께 불어와 몸으로 느껴지는 한기가 더욱 매섭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십이 월 초의 시애틀 날씨는 냉담하게 서늘하고 무겁게 축축했다. 진한 코나 커피의 향기가 가게 안에 가득 차오를 때쯤 가게 문이 열리며 소라 언니가 들어왔다.
“은혜야, 네 엄마가 오늘 가게에 못 들른다고 나더러 네 저녁 배달 부탁하셨어. 그 덕분에 나도 맛난 김밥으로 포식하고 오는 길이야. 어묵국에 무도 넣고 아주 시원하게 끓여서 보온병에 담아 주셨네. 우리 은혜, 저녁 맛있게 먹고 힘내서 오늘 일도 마무리 잘해야지. 그나저나 가게가 한가하네, 오늘 저녁은.”
소라 언니가 수선스레 떠들며 엄마가 전해주라 하신 저녁 도시락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소라 언니는 나와 교대로 가게에서 일하는데 엄마와 같은 교회를 다니며 우리 가족과는 오래전부터 한 가족처럼 지내는 사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 사춘기를 잠깐 앓았을 때도 소라 언니가 큰 말동무가 되어주고 진심 어린 상담과 조언도 아끼지 않아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 무렵 아빠가 밖으로 돌기 시작하고 오빠는 마약에 입문했으며 엄마마저 이런저런 병마에 시달려서, 그 당시 나는 세상에 아무런 재미나 의미를 두지 못하고 절망스레 방황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의 한 무거운 단면을 봐 버렸다고나 할까? 그런 희망 없던 사춘기 여학생에게 소라 언니는 참 큰 존재로 다가왔다. 나이 차이로 보면 언니라기보다 이모뻘에 가까웠지만 나는 그냥 언니라는 호칭이 더 맘에 들었다.
“제이는 어디에 있어? 엄마가 제이 것도 같이 싸 주셨는데. 또 밖에 나간 거야?”
“네, 아까 낮에 오빠 친구들이 가게에 놀러 왔는데 같이 나갔어요. 이제 곧 오빠가 돌아올 시간이긴 해요"
“아니 네 오빠는 왜 그리 밖으로만 돌고 널 도와줄 생각은 안 한다니? 이제 나이도 먹었으니 철이 들 때도 되었는데 말이야. 자기 어린 동생은 그 좋은 대학 나와서 써먹지도 못하고, 좁아터진 가게에서 이 고생하며 가장 노릇 하는데, 미안하지도 않다니? 제이가 내 아들 같았으면 내가 그냥 이 녀석을 아주…”
나는 소라 언니에게서 더 험한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마침 제가 코나 커피 진하게 내려놓았는데 한 잔 드시고 가세요. 언니도 오늘, 또 식당 알바하러 가셔야 하잖아요.”
소라 언니는 우리 가게 일 외에도 식당 알바, 세탁소 일까지 무려 세 가지 일을 하며 그야말로 일개미처럼 살아가는, 내 눈에는 참 고달픈 인생이다. 그래도 참 신기한 건 그 얼굴에 항상 미소가 떠나질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다는 거다. 내가 힘들었던 그 당시에 언니가 나에게 고백해 알게 되었던 비밀 하나, 그녀의 불법 체류자 신분 문제를 고려해 본다면 언니의 삶이 그다지 평탄하지 않을 것 같은데 원래 성격이 낙천적인 건지 어떤 건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새 그녀 특유의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내가 커피를 잔에 따르는 사이, 문이 열리며 우리 가게 단골손님인 영자 할머니가 젖은 우산을 털며 가게로 들어왔다. 항상 즐겨 입으시는 손수 뜬 하얀 털실 카디건에 빗방울들이 맺혀 마치 투명한 작은 진주알 장식들처럼 보였다. 영자 할머니가 언제나처럼 냉장고에서 콜라 한 병을 꺼내고 카운터 바로 아래 진열대에서 바둑알 모양 껌 한 통과 손녀에게 줄 지렁이 모양 젤리를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마침 소라 씨도 와있었네. 은혜야, 혹시 오늘 뉴스 못 들었어? 어젯밤에 레이크우드에서 강도 살인 사건 났다잖아, 그 그로서리 가게 주인 여자가 내 친구랑 같은 성당 사람인데, 어제 강도 두 명한테 총 맞고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네. 특히 머리에 총을 여러 번 맞아서 얼굴 형체가 거의 없어져 버렸대. 아휴, 끔찍해라. 어떡하니, 지금 온통 뉴스에 난리야. 흑인 한 명, 백인 한 명 이 인조 강도라는데, 아직 안 잡혀서 수배 중인가 봐. 그 돌아가신 분, 내 친구 말 들어보니까 인품이 아주 좋은 양반이셨고 평소에 한인사회를 위해 기부도 많이 하셔서 이 지역에서 존경받는 분이셨다나 봐. 지금 연말이라 사람들이 돈이 많이 필요해서 이런 강도들이 들끓고 있다니, 소라씨도 은혜도 몸조심해. 아휴, 세상이 이렇게 험악해서 어떻게 살지 모르겠네. 여기 미국엔 이놈의 총이 있어서 문제야, 쯧쯧쯧.”
할머니의 말을 듣는 동안 나는 그저 아무 대꾸도 못 한 채 머릿속이 하얀 백지가 되어 멍해졌다. 마치 먼 나라의 소문을 듣는 것처럼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생각마저 잠시 들었다. 그러다가 이내 잔인한 현실감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갑자기 목에서 뜨거운 어떤 것이 불붙듯 확 타올랐다가 다시 심장 쪽으로 불쑥 내려가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아랫배 쪽으로 이동하며 날 선 칼처럼 변형되더니 내 속살을 무참히 찢어내는 것 같았다. 극심한 공포와 불안감으로 인해 생기는, 이 아랫배를 가르는 서늘하면서 동시에 너무 뜨거운 고통, 처음 느껴보는 이 감각에 나는 소스라쳤다. 평생 두 번 다시 느껴보고 싶지 않은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정지화면처럼 서 있으니 소라 언니가 얼른 내 어깨를 주무르며 영자 할머니에게 말했다.
“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놈들이 어제 우리 가게로 왔었으면 제가 어젯밤 근무였으니, 제가 죽을 운명이었겠죠. 우리가 스스로 피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거죠,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요. 그리고 비극이 오늘 우리를 피해갔다면 다시 한번 감사하면 되고요.”
영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그만 때 묻은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물건값을 계산했다. 칠십 센트의 거스름돈은 여느 때처럼 계산대 앞의 유리컵 안에 무심히 던져 넣었다. 이렇게 손님들이 잔돈을 조금씩 넣어 쌓인 유리컵의 동전들은 때론 다른 손님이 돈이 모자랄 때 보태지기도 했다.
“그래, 어쨌든 나도 기도할게, 우리 모두 이 험하고 힘든 세상 잘 살아낼 수 있게. 아이구, 우리 손녀딸 젤리 먹고 싶어 목 빼고 기다릴 텐데 얼른 가야겠다. 그럼 난 내일 저녁에 또 올게.”
소라 언니도 이제 저녁 식당 일에 가야 해서 서둘러 자리를 떴다. 언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코나 커피가 반이나 남아 있는 커피잔이 왠지 쓸쓸하게 보인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 소리도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고 서글프게 느껴진다. 내 마음처럼.
스마트폰으로 어제의 강도 살인 사건을 찾아보고 있는데 가게 문이 거칠게 열리며 흑인 손님 한 명이 들어왔다. 백팔십이 훌쩍 넘는 큰 키에 검은 모자 티를 입고 짙은 청색의 야구모자까지 눌러쓴, 그는 처음 보는 손님이었다. 새까만 피부의 얼굴엔 군데군데 짙은 여드름 자국처럼 보이는 흉터가 있고 코 바로 옆엔 큰 사마귀가 나 있었다. 그는 간단한 인사마저 없이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급하게 맥주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고개 숙여 냉장고 안을 잠시 살핀 후 밀러 라이트 맥주 두 캔을 집어 들고는 다시 이리저리 가게를 돌아다녔다. 무엇을 찾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가게 정탐을 하는 건지, 내 마음이 갑자기 불안감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가끔 모자 티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무언가를 만지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저 주머니 안에 총이 있는 건 아닐까, 무서운 생각이 나를 엄습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하며 스스로를 애써 달래는 그때, 가게 문이 과격하게 젖혀 열리며 한 명의 백인 남자가 거친 말투로 투덜거리며 들어섰다.
“에이, 썅. 이 죽일 놈의 지겨운 비.”
겨울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헐렁한 반소매 티셔츠 밖으로 삐져나온 그의 팔이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손목과 목에는 누가 봐도 가짜로 보이는 금팔찌와 금목걸이들이 치렁치렁 둘려 있었고, 그 비쩍 마른 양팔에는 빛바랜 싸구려 문신들이 흉하게 드러났다. 백인치고는 유난히 가늘고 째진 눈이 매섭게 빛났고, 듬성듬성 나 있는 오른쪽 눈썹에 작은 피어싱 두 개가 나란히 매달려 있었다. 키가 작은 편에 몸집이 왜소한 그의 얼굴은 호감형이 아닐뿐더러 매우 날카로운 인상에 짙은 불안감마저 어려 있었다. 그 역시 나에게 “Hi”조차 없이 가게 안쪽 복도로 들어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게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손님들의 행태가 대부분 다 파악되는 구조라서, 난 유심히 그 백인 남자와 좀 전에 들어온 흑인 남자를 번갈아 관찰하려 애썼다. 나도 모르게 몸이 달팽이처럼 둥그렇게 뭉치면서 긴장과 불안감으로 근육에 쥐가 난 듯 온몸이 저렸다.
그때 그 두 사람이 서로 마주쳤다. 나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둘이 동시에 한쪽 입꼬리를 싸악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각자의 한쪽 주먹을 서로 맞대며 귓속말로 뭐라 조용히 속삭였다. 그 장면을 본 몇 초 동안 나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저들은 각자 따로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짜인 계획대로 한 사람이 동정을 살피고 다른 한 사람이 따라 들어와 범행을 저지르려는 것일까? 정말로 저 주머니 안에 총을 갖고 있을까? 그렇다면 저들이 뉴스에 보도된 그 이 인조 살인강도일까? 그래도 내가 돈만 내어주면 나를 살려줄지도 몰라. 아니야, 나는 이미 저들의 얼굴을 보았잖아, 아마 살려두지 않을 거야.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의식마저 까무러지려 하는 찰나, 그들이 함께 계산대 앞으로 왔다. 손에는 캔맥주 몇 개와 땅콩 스낵, 말린 육포 등이 들려 있었다. 물건들을 카운터에 올려놓는 흑인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의 불타는 듯한 눈동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동자의 하얀 부분이 거의 핏빛처럼 빨갰다. 새빨간 핏줄이 타래타래 얽혀 붙어 마치 영화에서 본 흡혈귀의 눈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놀란 마음을 감추려 마른 헛기침을 했고 그러다 진짜로 목에 사레가 들었다. 나는 내장이 쏟아질 듯 심하게 기침을 해댔고 그것은 좀처럼 멈춰지지 않았다. 이에 동시에 두 남자가 나를 보며 괜찮으냐고 물었는데 그들의 목소리가 의외로 다정하고 인간적이었다. 기침하느라 제대로 대답도 못하는 그때, 마침내 외출했던 오빠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헤이, 제이든, 왓츠 업?”
그 흑인 남자가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반갑게 오빠를 맞았다. 그 옆의 백인 남자도 오빠와 주먹을 마주 부딪친 후 얼싸안으며 격렬하게 반가움을 표현했다. 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마음이 급속히 진정되며 심한 기침도 차츰 멈추었다. 오빠가 날 보며 말했다.
“왜 그리 기침을 해, 감기 걸렸어? 너 건강관리 잘해라. 나는 이번 달에 일이 많아서 가게 일은 못 도와주니까. 연말이라 나도 계획이 많아. 부업도 좀 해서 돈도 벌어야 하고. 오빠가 잘돼야지 은혜 너 시집도 보내고 오빠 노릇도 하지, 안 그래?”
내가 아프던 안 아프던 절대 도와주지 않는 오빠가 언제나 말은 참 잘한다. 저런 오빠라도 가게에 함께 있어 주면 이 험한 연말에 내가 그나마 안심할 텐데, 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가게에 있을 때가 많지 않다. 소문에 듣기로는 오빠가 하는 그 부업이란 마리화나 혹은 엑스터시, 몰리 같은 마약 종류들을 어떤 경로를 통해 유통하는 조무래기 심부름꾼으로 주로 배달 일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쪽 일을 몰라도 그것이 상당히 불량하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직감으로 느낀다.
마약에 손대기 전의 오빠는 상당히 다감하고 정이 많은 성격으로 어쩌면 여성스러운 면도 많을 만큼 섬세하고 소심하기까지 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아빠는 늘 오빠에게 꾸지람했고, 남자답지 못하다며 담력훈련이랍시고 야밤에 깜깜한 공원이나 작은 야산 입구, 때론 공동묘지에 오빠를 혼자 두고 오시곤 했다. 그때 어린 소년이 느꼈을 그 무시무시한 공포감이 얼마나 컸을까? 오빠가 그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던 것이 문득 떠오른다.
“나는 그때, 앞으로 살면서 느낄 모든 공포와 두려움을 이미 다 겪었어. 그리고 그 이후로도 극도의 불안과 환란이 내 혼과 살을 깎아내는 걸 견뎌내야만 했지. 내가 당했던 그 모든 경험의 기억이 나를 생지옥으로 몰아넣고야 말았거든. 특히 그 사건 이후의 나는 절대로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버렸어. 넌 너무 어려서 듣지 않는 게 좋아. 그 당시 나에 대해 동네에서 떠돌던 소문들, 너도 그게 사실인지 궁금하지? 나도 궁금해. 그게 진짜 나에게 일어났던 건지 아니면 내가 지옥을 잠깐 다녀온 건지. 나도 이제 헷갈린다는 말이지. 내가 팟 해드(대마초를 많이 피우는 사람을 일컫는 영어 속어)가 돼버려서 그런가, 머리가 맛이 갔나 봐. 그래도 다행이야. 이놈의 약 덕분에 그 악몽 같은 기억들이 그나마 희미해져 가니까. 더 고맙게도 미국 대통령께서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마리화나를 합법화시킨 것 아니겠어? 옛날처럼 숨어서 피우지 않아도 되고, 세상 참 좋아졌다. 크크크.”
오빠가 말하는 ‘그 사건’이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 당시에 떠돌던 소문 중에는 오빠가 한밤중에 공원에서 불량배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했다는 둥 혹은 공동묘지에서 원혼이 서린 귀신을 만나 땅속에 같이 묻힌 채 발견되었다는 둥 그 외에도 대여섯 가지 해괴망측하고 흉흉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빠는 성장해 가며 어떤 것에도 정을 붙이지 못했고 그 흉측한 소문들 때문에 가까운 친구조차 생기지 않아 외롭게 살았다. 그러면서 차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마리화나와 갖가지 마약을 시작했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온갖 문제를 일으키다가 결국 고등학교까지 중퇴하고 말았다. 오빠에 대한 교육방식의 차이로 상대방을 탓하며 자주 다투던 부모님도 이 시기 이후로 급격히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내 생각에 아마 이때부터 우리 가정이 분열되기 시작하며 깊은 상처로 찢겨나간 것 같다.
오빠는 카운터 안쪽에 놓여 있는 저녁 도시락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이 촉촉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 두 친구들과 농담을 지껄이며 함께 밖으로 나갔다. ‘아, 맥주와 스낵 값을 받지 못했는데.’라고 생각하며 밖으로 쫓아 나가려 했지만 다리가 풀려서 나갈 힘이 없었다. 이 인조 강도 뉴스 이후로 그 두 사람을 오해해 잔뜩 긴장했다가 오빠가 구세주처럼 등장하면서 단단히 뭉쳤던 나의 몸과 마음이 스르르 풀려버렸다. 마치 나 자신의 형체마저 녹아내려 땅속으로 꺼져버린 느낌이다. 그래도 참 다행이다, 그들이 강도가 아니어서... 나는 곧 엄마가 싸준 김밥과 어묵국을 먹으며 출출했던 뱃속을 달랬다. 긴장을 많이 했던 탓인지 위장이 꿀렁꿀렁 뒤틀리는 느낌이 났지만 그래도 김밥은 혀에 착착 붙었고, 따뜻하고 걸쭉한 어묵국은 식도를 따라 부드럽게 내려갔다. 그래, 소라 언니 말처럼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거야. 오늘도 무사히.
2
이제 어느덧 십이 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점점 다가오며 여기저기 거리에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화려하게 뽐내고 있었고, 가게 손님들의 얼굴에도 흥분과 설렘이 가득 넘쳤다. 점심 무렵부터 가게가 정신없이 바쁘더니 초저녁이 되자 조금 한가해져 그제야 숨을 돌리고 커피를 한 잔 마시려 준비하고 있었다. 소라 언니가 심한 감기에 걸려 낮에 일을 일찍 마치고 집에 가는 바람에 나의 오늘 토요일 근무 시간이 몇 시간 늘어났다. 가게 닫을 때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지라 진한 커피가 필요했다. 코나 커피가 다 떨어져 건너편 스타벅스에서 사 온 다크 로스트 원두로 내렸다. 손님들도 가게에 진하고 고소한 커피 향이 나는 걸 좋아들 한다. 커피가 뽑아지자 어느새 가게 안에 특유의 강렬한 스타벅스 커피 향이 진동했다.
그때 가게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대여섯 살쯤 돼보이는 흑인 여자아이 하나가 힘겹게 문을 밀며 들어왔다. 바로 뒤에 바짝 붙어 들어온 사람은 영자 할머니였다.
“아이구, 이 녀석은 굳이 혼자 이 무거운 문을 열겠다고. 저 고집을 못 당해.”
”아, 이 꼬마가 바로 할머니가 매일 젤리를 사다 주는 그 손녀딸이구나.”
아이가 참 똘똘하게도 생겼다. 그러고 보니 영자 할머니의 돌아가신 남편이 흑인이었다는 이야기를 소라 언니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우리 가게 단골손님인데도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 꼬마는 물고기가 물 만난 듯 신나게 가게 안을 휘젓고 다녔다. 그리고 젤리와 사탕을 마구 집으며 마냥 좋아했다. 할머니는 그런 손녀딸을 한동안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오늘이 저 녀석 생일이야. 엄마, 아빠도 없이 이 할미가 혼자 키우니 저 애에게 얼마나 부족한 게 많겠어? 지금이야 어려서 저런 젤리나 사탕, 과자들만 줘도 좋아하는데, 나중이 문제지. 내가 오래오래 건강해야 우리 손녀딸을 잘 뒷바라지할 텐데…”
순간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그녀에게 먼저 뭐라 물을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영자 할머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원래 내 이야기를 남한테 잘 안 해. 그런데 오늘은 내가 은혜한테 줄 물건도 있고, 그 전에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
“네, 저야 듣고 싶어도 제가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알아도 될까요?”
“그럼, 우리가 뭐 남인가? 내가 너희 가족을 알고 지낸 지도 세월이 얼만데. 그나저나 너희 엄마도 내 사정 다 아는데 그동안 어디에 떠벌리지 않고, 참 입이 무거운 양반이야.”
도대체 영자 할머니에겐 무슨 남모를 사정이 있는 것일까? 갑자기 궁금함이 몰려왔다. 그녀는 긴 한숨을 쉬더니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한국에서 아주 작은 외딴 섬 처녀로 살고 있었는데, 그때 서울 미군기지에 청소 일을 다니던 친척 이모 소개로 미군 흑인 남자 하나를 소개받았어. 나는 그 당시 ‘헬로' 조차 모르는 영어 일자무식이었는데도 용감하게 손짓발짓하며 그를 쫓아다녔고, 우리는 곧바로 서울에서 동거에 들어갔어. 마침내 그가 미국 고향으로 발령이 났을 때 우린 결혼을 하고 함께 미국으로 왔어. 작은 섬에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나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그야말로 거대한 기회의 땅이었지. 처음 미국에 막 왔을 때, 모든 것이 마냥 낯설고 신기하고 좋기만 했어. 열심히 ESL 클래스를 다니며 영어 공부도 하고, 미국 마켓에서 쉬지 않고 일하며 번 돈을 한국 부모님께 부쳐 드렸어. 내 나름대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나갔지. 그 와중에 이쁜 딸래미 유레카가 태어나며 내 삶은 절정에 이르는 듯했지. 그러다 남편이 군대 안에서 애매한 사건에 연루되며 억울하게 군사재판에 넘겨졌고, 결국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어. 그리고 감옥에 들어간 지 사 개월 만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지. 순식간에 나 혼자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 거야. 그래도 나에겐 사랑스러운 딸 유레카가 있기에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앞만 보며 살았어. 딸은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그 흔한 사춘기 말썽도 없이 참으로 잘 커 주었지. 주립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고 졸업 후엔 큰 회사에 들어가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어. 유레카는 내 인생의 보배이자 큰 자랑거리였어. 그러나 내가 모르는 한 가지가 있었어. 딸에게는 고등학교 때 만난 흑인 남자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내가 그를 싫어하는 걸 알고, 그 둘은 나에게 비밀로 한 채 계속 만났던 거야. 그 애 이름은 마커스였는데 그도 아버지가 없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고, 게다가 그리 행실이 좋지 못하다고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었지. 난 그 두 사람이 고등학교 때 이후 헤어진 줄만 알고 있었어. 어느 날 저녁 유레카가 마커스를 우리 집으로 예고도 없이 데려오더니 그 둘은 충격적인 고백을 했어. 유레카가 임신을 했다는 거야. 난 그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그 둘의 철없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이내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지. 그 두 사람은 곧 작은 아파트를 얻어 나갔고 마침내 달이 차자 그들에게 예쁜 딸이 태어났지. 그게 바로 내 손녀딸 에밀리야.”
영자 할머니가 잠시 이야기를 쉬고, 가게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노는 에밀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후 유레카와 마커스는 딸을 키우며 잘 사는 듯했어. 내 딸은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며 살림을 꾸려나갔지만 그에 비해 마커스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고 여러 마약에도 손을 대더니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더군. 그 무렵 유레카가 자주 울며 나에게 호소를 해왔지. 마커스가 점점 나쁘게 변해간다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한다고. 그래도 아이의 아빠니까 참고 다독이며 살라고 하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었어. 그때 내가 심각성을 알고 조처를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갑자기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잠시 말을 못 이었다.
“할머니, 힘드시면 그만 말씀하세요.”
내 목소리도 어느새 흔들리고 있었다.
“아냐, 괜찮아. 하도 많이 울어서 눈물이 다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이야기를 꺼내니 또 이러네.”
그녀가 눈물을 닦아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 유레카에게서 전화가 왔어. 마커스랑 헤어져야겠다고 하더군. 에밀리는 자기가 키울 거라며 나보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다 잘 될 거라고 그랬어. 그리고 부탁 한 가지를 한다며 에밀리를 며칠만 봐달라고 했어. 마커스와 이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이를 잠깐 맡아달라는 거였어. 난 한 살배기 손녀를 집에 데려왔고, 그날 이후로 에밀리는 부모를 못 본 채 지금까지 나와 살게 된 거지. 그날 밤에 마커스가 이혼을 요구하는 유레카를 총으로 쏴 죽였고, 경찰이 도주하던 그를 총으로 사살했어. 그의 부검 결과 그의 몸에선 상당량의 마약이 검출되었다더군. 제정신이 아닌 채로 내 딸을 살해한 거지. 그 이후 난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어. 어떻게 내가 온전히 살 수 있겠어? 내 인생이 저주스럽고 비참했어. 의지하던 남편도 일찍 떠나고, 내 전부이던 딸이 앞서 가버렸으니, 이제 내 인생은 빈 껍데기였지. 심지어는 극심한 공황장애와 우울증에 걸려 자살 시도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 거야. 그런데 사람이 죽으라는 법이 없다더니 그때 나에게 기적처럼 다가온 사람 하나가 있었어. 매일 집에 와 내 식사를 챙겨주고, 고아처럼 방치된 에밀리를 씻기고 보살펴주며 나를 위로하며 함께 목놓아 울어준 사랑의 천사. 그게 누군지 알아? 바로 숙희 씨, 너의 엄마였단다. 그 당시 병마와 싸우던 숙희 씨는 남편의 도박 문제와 아들의 마약 문제 등등 자신의 짐만으로도 버거웠을 텐데 수렁에 빠진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에 모든 힘과 정성을 쏟았어. 그리고 아무 의지할 데가 없다고 느꼈던 내게 큰 선물 하나를 손에 쥐여 주었지. 그것은 바로 ‘포켓 엔젤’ 이었어. 그 동전만 한 크기의 메달에 박혀 들어가 있는 작은 천사, 그가 두 손을 꼭 모아 날 위해 기도해주고 있었고,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모습이 마치 나를 평안한 천국으로 안내하는 것 같았어. 그 작은 동전 안의 천사가 뭐라고 나는 숙희 씨한테 그걸 받는 순간부터 나에게 생기는 마음의 변화를 감지했어. 내 마음에 점점 평온함이 찾아오기 시작한 거야. 그 평안은 그 포켓 엔젤을 준 숙희 씨의 사랑과 위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 난 어딜 가나 그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그 동전 속의 천사는 나에게 큰 부적 같은 힘을 주었지. 말 그대로 그 작은 천사가 나의 주머니 안에 살며 나를 악한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준 거야. 주머니 안에서 가만히 포켓 엔젤을 만지고 있으면 그걸 나에게 준 사람의 사랑과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거든. 바로 사랑의 힘이지.”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영자 할머니의 얼굴에서 환한 빛이 난다고 느끼는데 마침 꼬마 에밀리가 한 아름 과자들을 안고 앞으로 오더니 이제 집에 가자고 보챈다. 할머니가 계산대에 과자들을 올려놓으며 다시 말했다.
“은혜야, 어린 너에게 내가 왜 이리 주책같이 노인네 인생 타령을 했을까? 요즘 여기저기 가게들에서 권총 강도 사건이 자주 일어나니 네 어린 마음에 얼마나 무섭겠니? 너도 뉴스 들었겠지만, 요 며칠 전 타코마 그로서리 가게에 강도가 또 들어 주인 남자한테 총 쏘고 돈이랑 차 뺏어 달아났잖아. 올겨울에만 벌써 세 번째 살인강도 사건이야.”
“네, 뉴스 봤어요. 여기서 10분 떨어진 마트에요. 저 요즘 많이 불안하고 무서워요. 밤에 악몽도 자주 꿔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며 갈라졌다.
“아휴, 가엾어라. 그래서 내가 힘들었던 내 과거 이야기까지 꺼낸 거야. 너한테 이거 주려고. 자, 이제 네가 가지렴. 너에게 이 천사가 큰 위로가 되길 기도하마.”
할머니가 자신의 카디건 주머니에서 꺼내 준 것은 다름 아닌 포켓 엔젤이었다. 그녀의 묘사를 듣기만 하다가 막상 손에 쥐고 보니 왠지 더 신기하고 신비롭게 보였다. 이십오 센트 쿼터 동전만 한 크기의 동그란 메달 안에 두 손을 모은 채 두 날개를 활짝 편 천사가 새겨 있었다. 나는 감격스레 그것을 받아 들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한 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영자 할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가 내 촉촉한 눈을 깊이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와 에밀리가 가게를 나간 후 나는 포켓 엔젤을 다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메달 뒷면에 쓰여 있는 작은 글자를 발견했다. 글자가 너무 작아 아주 가까이 보아야 했다. 깨알같이 작은 영어 글자는 다름 아닌 ‘Love & Peace’였다. 이 연말이 끝나고 맞이하는 새해에는 내 마음에 이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길 소원해 보았다. 나를 지켜주는 포켓 엔젤과 함께.
3
같은 날 밤, 오빠와 함께 마감 돈 계산을 한 뒤 정시에 가게 문을 닫았다. 가게 장사가 잘되어 종일 바쁜 토요일이었다. 오빠는 가게 앞 주차장에서 친구들과 좀 더 놀다가 갈 테니 나더러 먼저 집에 가라고 했다. 언제 왔는지 오빠 차 옆에 낡은 세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열린 차창으로 마리화나 연기가 구름처럼 몰려나왔다. 그 독하고 역겨운 냄새가 금세 주차장을 가득 메웠다. 나는 가게 문을 이중 열쇠로 잠그며 벌써 마음이 저만치 친구들에게 가 있는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 저런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지 마. 지난번에 가게에 왔던 그 두 사람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더라. 꼭 범죄자 행색이야. 같이 어울리면 오빠도 똑같이 나쁜 사람이 되는 거야.”
“야, 말하는 게 네가 꼭 내 누나 같다. 걱정 마. 나 이젠 남한테 당하기만 하는 그런 약하고 못난 놈이 아니야. 나쁜 놈이 강한 놈이라면 난 기꺼이 악당이 될 거라 다짐했지.”
“그래서 오빠한테 좋은 게 뭐야?”
“이제 날 아무도 괴롭히지 못하고 건들지 못해. 네가 말하는 ‘나쁜 친구들’이라는 그 녀석들이 나에겐 얼마나 든든한 지원군인지 알아? 그 중에 특히 라말, 그 친구는 나와 죽음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야. 알고 보면 참 불쌍한 놈이기도 하고... 사연을 말하자면 너무 길지만 나처럼 그 애도 자기 아버지를 찾아다니고 있어. 나는 만나서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는 거고, 라말은 그를 죽이기 위해서 찾는 거라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말이야.”
뭐라고? 누가 라말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해 찾는다고? 내 귀를 의심하면서 또 한 가지 더 큰 의문이 함께 일어났다. 오빠가 여태껏 아빠를 찾고 있었단 말인가? 방금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만나서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아빠를 찾아다니고 있다고. 갑자기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그동안 오빠를 잘 몰랐나 보다. 오빠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르겠다. 그 순간 왠지 오빠가 한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오빠가 구름 연기로 온통 뒤덮인 낡은 세단에 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기가 느껴져 나도 얼른 차에 올라탄 뒤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차고에 차를 세우고 뒷문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부엌 쪽으로 이어진다. 허기를 자극하는 시큼한 김치찌개 냄새가 나를 반겼다. 십 년도 훌쩍 더 된 사 인용 나무 식탁 위로 엄마가 정성스레 차려놓은 밥상이 보였다. 여느 때처럼 오빠와 나를 위한 이 인분 정도의 야참이다. 아직 온기가 있는 계란말이를 보니 엄마는 막 식사를 차려 놓으시고 잠자리에 드신 모양이다. 식탁의 왼편 모서리 쪽에 엄마의 약병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다. 엄마는 몇 년 전까지 유방암으로 투병하시다 결국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여러 가지 후유증으로 인해 많이 쇠약하신 상태다. 배는 허기지는데 막상 상에 앉으니 밥이 많이 먹히질 않는다. 장사가 잘된 날은 그만큼 몸과 정신이 피곤해서 밥맛이 떨어지고 그저 빨리 침대에 눕고 싶기만 하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욕실로 향했다. 나는 따뜻한 물을 욕조에 가득 채우고는 비누 거품을 물 안에 풀어 넣고 은은한 아로마 꽃잎들을 몇 개 띄웠다. 진한 꽃향기가 욕실에 가득 찬 수증기와 한데 어울려 나의 신경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곧 나는 지치고 피곤한 몸을 욕조에 담갔다. 이 순간이 나의 일과 중 가장 편안하고 사치스러운 시간이다. 따뜻한 물의 감촉이 나의 살갗을 쓰다듬으며 어느새 몸과 마음이 노곤해졌다. 욕조에서 깜박 잠이 든 것 같은데 누가 욕실 문을 거세게 두드려 잠이 깼다. 곧 엄마가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아직 안 주무셨어요? 아휴, 난 여기서 깜박 잠이 들었었나 봐.”
“은혜야, 얼른 옷 좀 입고 나와봐. 나랑 어디 좀 갔다 올 데가 있어.”
“이 밤에요? 지금 밤 12시도 넘었을 거에요. 어디를 가시려고요?”
“일단 빨리 나와. 더 늦기 전에 가야 해.”
나는 목욕 마무리도 못 한 채 허둥지둥 물기를 닦고 옷을 입고 나왔다. 엄마는 이미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로 무장을 끝낸 채 차고로 나가는 뒷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혹독하게 추운 전쟁터로 나가는 비장한 전투사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나는 엄마와 함께 차에 탄 후 시동을 걸며 물었다.
“엄마, 어디로 갈까요?”
엄마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방금 자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을 받았어. 너도 내 친구 쥬넬 아줌마 알지? 그 친구가 카지노 안에서 밤 청소 일을 하잖니. 그런데 조금 전에 일하다가 네 아빠랑 너무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거야. 남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걸 봤는데 얼굴 인상이며 몸집이며 딱 네 아빠더래. 잘 먹지도 씻지도 못하는지 행색이 말이 아니더란다. 아는 척하려다가 그 사람 혹시 딴 데로 튈까 봐 나한테부터 얼른 연락했대. 아직 그 카지노 안 어딘가에 있을 거라며 빨리 가서 찾아보래. 짙은 군청색 잠바에 청바지 입고 까만 야구 모자를 눌러 썼다고 하네. 이게 그 카지노 주소야. 빨리 가보자.”
엄마는 나에게 주소를 적은 쪽지를 건네며 어린애처럼 보채었다. 그동안 내 생각으로는 엄마가 아빠에 대해서 거의 자포자기한 줄로 알았는데 지금 엄마의 저토록 흥분한 모습을 보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빠는 엄마가 몇 년 전 암과 사투를 벌이던 그 시기쯤에 집에 조금 있던 현금다발과 약간의 옷가지를 챙겨 집을 나가셨다. 이미 수년 전부터 도박 중독에 빠져서 평생 개미처럼 일해 벌어 놓은 재산들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썸너와 퓨알럽 지역 쪽에 운영하던 다른 가게들도 담보로 은행에 넘어가 버렸고, 은퇴자금으로 쓴다던 적금도 깨진 지 이미 오래였다. 아빠도 그 나름대로 단도박 모임에 수십 번은 가셨고, 엄마가 이혼 운운하며 겁도 주고 자식들 거론하며 동정에도 호소했지만 그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아빠는 그때 이미 우리 가족이 알던 그 엄하고 든든한 가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결국 아빠는 그렇게 가출을 했고, 엄마의 병세는 더 악화하여 그때부터 남편 없이 홀로 병마와 싸워야 했다. 그나마 지금 하나 남아 있는 레이크우드 가게는 엄마가 그 당시 가게 명의를 자식들로 돌렸기에 보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길에 나앉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떠도는 소문에 아빠는 방방곡곡에 있는 카지노를 돌아다니며 거의 방랑자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말이 좋아 방랑자이지, 이제 돈이 다 떨어져 여기저기 구걸하며 상거지 꼴로 다니는 걸 봤다고들 한다. 그렇게 카지노를 배회하며 홈리스로 살더라도 아빠는 그 인생을 선택한 걸까? 왜? 한때는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상으로 미국에서도 한국의 기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며 우리 남매를 가르치시던 보수적이고 꼬장꼬장한 아빠였다. 나는 아빠의 급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도무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자신을 놓아 버리셨는지 말이다.
차를 출발 시켜 아빠가 발견되었다는 그 카지노로 향했다. 다른 날들처럼 여전히 밤비가 내리는데 다행히 대찬 소낙비는 아니라 운전 길이 편했다. 그러나 상당히 외곽에 떨어진 위치라서 가는 길이 내내 좁고 험하고 어두웠다. 30분쯤 운전해 다다른 카지노는 멀리서 보아도 번쩍번쩍 불빛이 화려했다. 얼마나 돈을 벌어들이는지 매년 증축을 해 이제는 처음 들어섰을 때보다 서너 배는 커진 것 같다. 거대한 시멘트 공룡이 떠억 버티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며 나와 엄마는 그 공룡 내부로 들어갔다. 들어감과 동시에 엄청나게 울려대는 갖가지 소음들이 나를 압도했다. 카지노 기계들에서 나오는 온갖 종류의 음향들과 현란한 음악, 토요일 밤이라 저쪽 나이트클럽 쪽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디스코 풍 노래들, 그리고 한쪽 코너에 자리한 재즈 라이브 클럽의 우렁찬 색소폰 소리. 그 모든 소리의 집합체가 내 귀뿐 아니라 머리마저 마비시켰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 굉음들에 길든 듯 아무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쭈욱 늘어선 기계들은 각각 화면 속의 화려한 영상을 자랑하며 지나가는 이들을 유혹했다. 그것들은 마치 길에서 호객을 하는 싸구려 창녀들과 똑같아 보였다. 손님들이 각자의 취향에 맞게 기계를 선택해 그 앞에 앉고, 이내 그들의 영혼이 그 기계 안으로 송두리째 빨려 들어간다. 사람들의 눈동자는 이미 화면에 붙들려 정지해 있고, 몸뚱이가 의자에 붙어버려 사지가 마비된 듯 꼼짝달싹하지 않는다. 그들의 몸 중에 활발히 살아 움직이는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기계 위 버튼을 쉼 없이 눌러대는 손가락들뿐이다. 순간 그 손가락들이 징그럽고 육중한 파충류의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금연석들이 마련된 곳에서는 숨이나마 쉴 수 있었는데 대부분을 차지한 흡연 구역으로 들어서자 찌든 담배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쾨쾨하고 눅눅한, 참으로 불쾌한 냄새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담배 연기를 용처럼 뿜어 대고 있었다. 담배 연기에 예민한 엄마가 잔기침을 계속해댔다. 나는 몸이 쇠약한 엄마가 걱정되었다.
“엄마, 여기 흡연 구역 쪽은 내가 다녀볼게. 엄마는 저기 금연석 쪽이나 다시 둘러봐요.”
엄마가 알겠다며 돌아서다가 다시 한번 나에게 아빠의 옷차림에 대해 환기시켰다.
“은혜야, 조금 힘들어도 자세히 좀 찾아봐. 짙은 군청색 잠바에 청바지, 검은 야구모자래. 어쩌면 예전처럼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그런 사람들도 잘 봐. 알겠지?”
뒤돌아서 황급히 뛰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에 내 마음이 너무 아려온다. 그랬구나. 철이 덜 든 오빠도, 몸이 아픈 엄마도 이렇게 애타게 아빠를 찾고 있었구나.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가게를 꾸려나가며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는 바람에 마음에 어떤 여유도 갖지 못했다. 사실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나 걱정보다는 질책과 원망이 앞섰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의 별명은 소녀 가장인데 나는 이 별명이 마치 내 인생 자체인 것 같아서 정말 듣기 싫었다. 내가 이루고 싶었던 모든 이상과 목표가 아빠의 도박과 가출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버린 뒤 내 마음 어디에도 ‘아빠'라는 존재는 더 자리하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 한편이 묘하게 저리며 아파진다.
나는 본격적으로 구석구석까지 훑으며 한 사람, 한 사람 꼼꼼하게 살폈다. 여자들이나 외국인들은 건너뛰고 동양 남자들 위주로 낱낱이 얼굴 확인을 했다. 그중에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이 늦은 새벽에 꽤 눈에 많이 띄어서 좀 당황스러웠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들은 나의 눈길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들에게 나는 잃어버린 가족을 애타게 찾아다니는 혼비백산한 여인의 모습 같았을 것이다. 한 중년의 동양 남자는 자기가 이 밤에 카지노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들켜 기분이 상한 듯 심하게 불쾌한 표정으로 날 위아래로 노려보았다. 돈을 많이 잃었는지 이미 심사가 뒤틀린 얼굴이었고, 내가 한 번 더 봤다간 한 대 칠 기세였다.
내가 뒤돌아 다른 편으로 가려고 하는데 멀리 화장실이 보였다. ‘맞아, 쥬넬 아줌마도 남자 화장실에서 아빠가 나오는 걸 봤다고 그랬지.’ 나는 황급히 그쪽으로 뛰어갔다. 수많은 사람이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한 십 분 남짓 그 앞에서 지키고 있는데 검은 야구모자에 짙은 색 방수 잠바를 입은 남자 하나가 낡은 배낭을 멘 채 화장실로 급히 들어가는 게 보였다. 얼핏 옆모습을 보니 선글라스도 끼고 있었다. 체격이나 뒤통수 모양이 얼추 아빠와 닮아 있었다. 아, 갑자기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손에선 땀이 삐질삐질 나고 심장은 세차게 방망이질해댔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예전 가게에서 처음 경험했던 그 서늘한 불쾌감이 아랫배 쪽에서 또 술렁대었다. 장검이 나의 뱃속을 서늘하게 갈라냈다. 숨통을 죄어오는 고통까지 더해 온몸에 쥐가 난 듯 욱신거렸다.
남자는 아직도 나오지 않는다. 이럴 게 아니었다. 엄마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를 찾아도 나 혼자 힘으로는 그를 붙잡을 힘이 없을 것 같았다. 힘으로 잡는 게 아니더라도 난 지원군이 필요했다. 그 남자가 만약 아빠라면 그는 화장실에서 나온 후 한동안 이 카지노 안에 머물 것이고, 엄마와 나는 각각 양쪽 출구를 지키고 있다가 그가 나갈 때 잡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금연 구역 쪽으로 가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마음은 급한데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가 스치듯 떠올랐다.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린 뒤 어느 특정 장소에서 만나기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환전소 앞에서 만나자고 하면 되겠다.
휴대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가 아예 터지지 않는다. 아, 맞다, 예전에 들은 말에 의하면 카지노 안에서는 일부러 통화 선을 차단해 전화를 불통으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야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가족들의 전화를 못 받게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아무리 다시 걸어도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지노 건물 밖으로 나가 전화를 시도하면 연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래, 밖에서는 전파의 방해를 받지 않을지도 몰라. 우선 엄마와 통화가 되어야 일이 풀리는 거야.’ 나는 전화를 손에 꼭 쥔 채 카지노 밖으로 황급히 나갔다. 서리맞은 차가운 공기가 코를 통해 온몸으로 훅 들어왔다. 건물 안은 그렇게 덥더니, 밖의 날씨는 그야말로 시베리아였다. 조금 전 내리던 가랑비가 그새 몇 배는 굵게 변해 묵직하게 땅을 때리고 있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날카롭게 서슬이 선 바람이 내 얼굴을 할퀴었다. 실내와의 기온 차이로 인해 그런지 내가 느끼는 추위란 정말이지 말 그대로 살을 깎아내는 듯한 고통 그 자체였다. 이제 전화를 걸려고 화면을 켜는데 추위로 얼어버린 손가락들이 경직되어 나도 모르게 전화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 전화기는 액정이 무참히 깨진 채 차가운 빗물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확 솟구쳤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원망스럽고 비참했다. 한동안 정지상태로 부서진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이내 허리를 숙여 힘겹게 그것을 집어 올렸다. 다 포기하고 그냥 카지노 안으로, 저 거대한 시멘트 공룡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로 맘먹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런데... 문이 보이지 않았다. 내 등 뒤에 있었던 그 커다랗고 화려한 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고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건물 전체를 살폈다. 분명히 문이 없어졌다.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건물 주위를 뛰어 돌며 다른 문을 찾으려 했다. 카지노 식당과 연결되는 후문 쪽으로도 가봤지만 역시 그 문도 사라진 상태였다. ‘아, 이게 뭐지, 내가 완전히 미쳐 버린 거야? 아니면 이 카지노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 무시무시한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밖으로 나오지? 아, 우리 엄마, 엄마는 어떡하지? 아빠도 저기 안에 갇혔는데... 맞다, 아빠도 그때 집을 나가신 게 아니었어. 카지노 안에서 저놈들에게 잡혀서 나오고 싶어도 못 오시는 거야. 이제야 알았어.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여기 카지노 놈들이 미친 거야. 지옥을 천국처럼 포장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현혹해 끌어들인 뒤 마침내 그 지옥문을 이렇게 닫아버려 그들을 가두어 버리는 거야. 한번 들어가면 절대 탈출할 수 없는 감옥 안에 영영 잡아두고 마지막 날까지 고문하는 거지. 아, 이제 우리 가족은 어떡하나. 어떻게 부모님을 구출할 수 있을까?’
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에서 어떤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조그만 흔들림 같이 시작되던 그것은 점차 움직임이 커지며 꾸물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진이 일어나는 듯 주위가 흔들리더니 곧이어 비에 젖어 축축한 땅이 들썩거리며 여러 줄로 금이 갔다. 내가 너무 놀라 땅에 더럭 주저앉았을 때 내 앞에 있던 카지노 건물이 요동치며 변형되고 있었다. 마치 파충류가 알을 깨고 부화하듯이 그 건물 모양의 짐승은 잔뜩 웅크렸던 둔탁한 근육을 기지개 켜는 듯 펼치더니 이윽고 가슴 속에 파묻었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얼굴 정중앙에 있는 큰 외눈이 지옥의 불처럼 이글거리며 나를 쏘아보았다. 온 몸이 파충류의 징그러운 비늘들로 촘촘히 덮여 있었고, 길게 찢어진 입 사이로 뱀의 갈라진 혀가 교활하게 날름거렸다. 뱀과 용의 형상을 섞어 놓은 듯한 그 외눈박이 괴물은 걷잡을 수 없이 몸집이 점점 더 거대해졌다. 어떤 끈끈한 진액이 몸에서 흘러나와 서로 뭉쳐가며 몸은 세 배 네 배로 자꾸 부풀려졌다. ‘아, 내가 그들의 비밀을 알아채서 이제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나는 절망했다. 그 무시무시한 괴물 앞에서 나는 힘없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이제 정말 끝이다. 아무 희망이 없어. 내가 졌다.’
바로 그때였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너무나 확연히 나의 후각을 자극하는 강한 향이 어딘가에서 흘러나왔다. 내 앞의 무시무시한 형상마저 잠깐 흐리게 만든 그 향기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진한 꽃향기 같기도 하고, 독특한 향수 냄새 같기도 했다. 지금껏 어디서도 맡아보지 못했던 그 향기를 시작으로 갑자기 내 주변이 눈부시게 환해졌다.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떠야 할 만큼 환한 광채가 나를 둘러쌌다. 나의 주위를 타원형으로 감싼 형태의 그 빛 맨 아래쪽으로부터 아주 천천히 무언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떤 구체적 형체가 없이 큰 빛 덩어리 같던 그것은 차츰 일어서며 사람의 모양을 갖춰 나갔다. 웅크렸던 허리와 등을 쭈욱 펴며 두 팔을 기지개 켜듯 위로 뻗으면서 그가 일어났다. 숙였던 고개를 정면으로 들자 그의 빛나는 얼굴이 드러나고, 어깨 뒤에 접혀 있던 날개가 서서히, 그리고 장렬하게 확 펼쳐졌다. 아, 그는 바로 나의 주머니 속에 있던 포켓 엔젤이었다. 그 하얀 깃털 하나하나가 매우 섬세하고 입체적이어서 실제 커다란 조류의 날개 같았고, 그 날개의 크기는 그 자신보다도 컸다. 이미 괴물의 모습에 놀라 바닥에 널브러져 앉아있던 나는 계속되는 충격에 얼어붙어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너무나 무섭고 흉측한 괴물과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한 천사, 그 둘 사이에 내가 주저앉아 있었다.
그 괴물은 아직 나에게 미련이 남았는지 나를 징그러운 외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찢어진 입 사이로 끈적하고 역겨운 침이 계속 흘러나왔다. 언제든 나에게 달려들 기세로 으르렁거리며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때 천사가 하늘 위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지만 분명히 그것이 나를 위한 기도문이라는 걸 직감으로 느꼈다. 이윽고 저 멀리 하늘에서 무언가가 빛과 같이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떨어지는 그것은 바로 불이 활활 타오르는 커다란 칼이었다. 그렇게 장대하고 날 선 불칼은 분명히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천사의 오른손에 장착한 불칼은 괴물을 향해 있었지만 막상 그를 공격하진 않았다. 불칼이 내려온 뒤 괴물은 그 침을 흘리던 입을 다물고 분노에 찬 눈으로 한동안 천사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마침내 모든 걸 포기한 듯 외눈 박힌 머리를 천천히 자신의 가슴 속에 다시 파묻었다. 온 땅이 또다시 크게 진동했고, 괴물의 형상이 점차 누그러지며 곧 서서히 회색 빌딩의 모습이 만들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내 눈앞에 카지노 건물의 문이 나타났다. ‘아, 이제 됐다, 이제 엄마와 아빠를 찾으러 갈 수 있는 거야’하며 내 곁의 천사를 다시 보려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외투의 주머니 안으로 조심스레 손을 넣어 보았다. 이내 보드라운 메달의 감촉이 손에 전해지며 나의 마음에 잔잔하고 고요한 평화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엄마가 영자 할머니에게 주었던 그 작은 천사가 이제 다시 돌아와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문득 좀 전에 보았던 포켓 엔젤의 빛나는 얼굴이 떠오르며 따뜻한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나왔다. ‘자,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하며 카지노 문을 열려고 하는데 그 순간 어딘가에서 엄청난 굉음이 내 머리를 내려치듯 울려댔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이 들었다.
“야, 너 욕실에서 왜 이렇게 안 나와? 너 또 욕조 안에서 잠든 거 아냐? 나 빨리 소변 눠야 하니까 잽싸게 나와라. 너 자꾸 그러다 감기 걸린대도, 참 하여간...”
오빠가 욕실 밖에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아, 내가 또 탕욕하다가 물 안에서 잠이 들어 버렸구나. 욕조 안의 물은 이미 다 식어 버려 냉탕의 한기만이 가득하다. 너무 추워서 온 몸에 작은 소름이 뒤덮여 있었다.
다 꿈이었구나. 다행이다. 그냥 꿈이어서…...
나는 얼른 물기만 대충 닦고 옷을 입고 나왔다. 내 방으로 가기 전 엄마가 주무시고 있는 안방 문을 빼꼼히 열어보았다. 틀어 놓은 가습기 때문에 덥고 습한 공기가 방 안 가득 떠다니고 있었다. 엄마는 세상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편안하게 주무시는 엄마를 보니 또 다행이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두툼한 카디건을 찾아 걸치고는 잠깐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집에 돌아와 주머니에서 꺼내 둔 포켓 엔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 더 반짝거려 마치 진짜 은화같이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리고 소중히 그것을 매만지며 혼자 중얼거렸다.
“오늘도 무사히...”
그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생시처럼 너무나 선명하고 생생했던 그 꿈속에서 가장 내 마음에 깊이 남은 건 흉측한 괴물도 아니고 빛나는 천사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집 나간 아빠를 애타게 찾아 헤매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엄마의 그 애잔한 얼굴과 황망한 뒷모습. 결코 꿈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이번 꿈을 통해 엄마의 본심을 깊이 들여다본 것 같았다. 자식들 앞에서 내색은 안 하지만 얼마나 남편이 걱정되고 또 그리울까? 예전에 소라 언니가 말하기를 엄마는 매일 아빠의 안전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비아냥거리던 그때의 내 모습이 떠오르며 나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나는 내 방에서 조용히 나와 다시 엄마가 주무시는 안방으로 갔다. 내 손에는 내 온기로 인해 따뜻해진 포켓 엔젤이 꼭 쥐여 있었다. 까치발을 하고 조심스레 안방으로 들어가 엄마의 침대 머리맡에 포켓 엔젤을 내려놓았다. 어둠 속에서 그가 짧게 한 번 빛을 내며 나에게 답례하는 듯 보였다. 그래, 먼 길을 돌아 드디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구나. 이제 우리 외로운 엄마를 좀 지켜주렴. 그리고 그 마음에 희망을 잃지 않고 사랑과 평안을 지키도록 도와주렴. 나보다 엄마에게 네가 더 필요할 것 같구나. 꼭 부탁한다.
내 방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나는 듯 가벼웠다. 자기 전 침대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으로 포켓 엔젤을 검색해 보았다. 영어로 그 역사와 기원을 알고 싶어서 들어가 본 건데 의외로 쏟아지는 항목들은 포켓 엔젤들을 파는 회사들의 광고였다. 아, 이것을 주문해 살 수 있었구나. 새삼스레 놀랐다. 줄줄이 이어지는 광고 사진들을 보니 그들의 모양과 색깔도 각양각색이었다. 한 개만 파는 것이 아니라 주로 몇십 개 단위로 묶어 팔고 있었다. 이런 광고들을 보니 포켓 엔젤에 대한 신비감이 좀 떨어졌지만, 포켓 엔젤의 힘은 그 메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건네주는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괜찮았다. 곧 맞이하는 새해에는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나의 사랑이 담긴 포켓 엔젤을 나누어 주고 싶다. 많은 사람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나의 오빠 제이, 나의 멘토 소라 언니, 아직도 긴 방황의 끝을 찾아 헤매는 청춘의 내 친구들, 그리고 언젠가 꼭 다시 만나게 될 우리 아빠. 이 세상엔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는 십 분 정도 이리저리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아마존에서 이십 개들이 한 상자를 주문했다.
이렇게 시애틀의 비 오는 겨울밤이 또 하나 지나간다. 지금 내 마음엔 이른 봄비가 따뜻하게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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