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의 혼, 다시 살아나다 >
20060660 장한상
사람이 살다보면 중요한 것, 반드시 알고 있거나, 상대방에게 알려야 할 것을 잊고 지나쳐 버려 결국 큰 실수를 할 때가 있다. 반대로, 굳이 기억하지 않고 잊어도 되는 것들은 이상하게 몇 년이 지나도 자세히 생각이 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런 소소한 기억이 머리가 아니라 당시에 내 가슴에 어떤 자극을 주어서(상투적인 표현으로는 가슴에 와 닿아서) 남아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경기도 수원에서의 15년, 화성에서의 10년, 흔히 얘기하는 정조대왕의 혼이 담겨있는 효의 도시에서 자라온 나의 이번 답사 역시 이런 소소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사실 나는 ‘답사’라는 단어와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공주, 부여로6학년 때는 다시 경주로 수학여행을 그리고 송파구에 있는 신석기 유적지로 소풍을 다녀왔으니, 이미 어릴 적부터 내 의지와 관계없이 역사 유적지 답사를 다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교에서 역사 유적지로 소풍 내지 수학여행을 많이 갔으니 나만의 경험이라 얘기하기는 좀 무리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초, 중, 고등학교를 모두 수원에서 나온 나는 수원 화성으로만 소풍을 적어도 3번 내지 5번은 갔었고, 또한 여름 방학 숙제에 문화유적 답사 보고서 제출이 매년 있어서 수원 화성만 1년에 한번 씩은 반드시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도 다녀오곤 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정기적으로 한 학기에 한 번씩, 농촌 내지 어촌 마을을 3박 4일 일정으로 답사를 다녀오니, 답사는 어찌 보면 나와 끊을 수 없는 끈이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많은 답사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나는 답사가 있는데, 첫 번째는 중학교 1학년 때의 봄 소풍 이다. 당시에 수원 화성으로 봄 소풍을 갔었는데, 화성 성곽을 둘러보던 중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결국 소풍이 오전 중에 취소되었고, 점심 도시락도 먹지 못한 채 집에서 도시락을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두 번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융건릉 답사에 대한 기억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방학 숙제로 답사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는데, 같은 반 짝꿍이었던 친구와 그 친구의 아버지와 함께 했었고, 길을 잘못 들어서 한참을 길 위에서 헤맸던 기억이 난다. 또, 융릉, 건릉이 나란히 있지 않고, 입구에서 좌우로 길이 갈려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볼 수 있었고, 당시엔 인터넷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필름 카메라로 왕릉 앞에 안내 표지판을 잘 보이게 찍고 현상하여 그 내용을 보고서에 최대한 잘 옮겨 적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왕릉 앞 잔디밭에서 심하게 장난치고 놀다가 어디론가 사라져서 친구 아버지가 우리를 한참이나 못 찾았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여러 차례의 답사 중에서도 융건릉 답사의 사소한 것까지도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당시에 나와 그 친구가 단순한 짝꿍관계를 넘어선 건전한 만남을 갖는 관계였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내가 중학교 때 화성시로 이사를 온 후, 나는 지금까지 지나가는 길에 융건릉과 용주사라는 절을 수차례 지나간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수원 출신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즉, 융건릉, 수원화성이 조선시대 정조대왕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었기에, 융건릉은 나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의 유적지였다. 익숙한 느낌이지만 정확히 알지 못했던,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던 융건릉의 모습을 지난주 일요일 답사를 통해서야 진짜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하고 자세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융건릉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융릉과 건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입구에서 볼 때 왼쪽에는 건릉, 오른쪽에는 융릉이 위치해 있다. 융릉은 후에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사도세자)와 헌경의 황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인데,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상계 공간과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구현하였다.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고,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상계에는 능침, 혼유석,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계에는 문무인석,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 밖에 융릉의 특이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공간 구성 상의 특수함인데, 바로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는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룬다. 그러나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릉에서 볼 때 앞쪽, 오른쪽에는 곤신지라 부르는 원형의 연못이 있는데, 융릉이 천장된 1790년에 조성되었으며, 융릉의 남서방향에 위치한 곤신지는 융릉의 생방(풍수지리 용어로 묘지에서 처음 보이는 물을 지칭함)으로 풍수지리학적인 논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건릉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이다. 봉분을 빙 둘러 12칸의 난간석이 에워싸고 있으며,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 방위가 문자로 새겨져 있으나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봉분 앞에 상석 1좌가 있고, 그 양측에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봉분 주위로 석양과 석호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봉분 바깥쪽으로 3면의 곡장(나지막한 담)을 둘렀다고 한다. 봉분 아랫단에 문무인석, 석마가 있고, 문인석은 금관조복을 입고 있는데 이는 매우 사실적인 조각 기법이라 부른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에 정자각과 1992년 복원한 비각이 있으며, 정자각 남쪽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을 참도라 하는데 융릉과 마찬가지로 정자각까지 참도 우 양측에 박석을 깔아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모처럼 화창한 날씨 탓에 일요일 오후의 융건릉 입구는 주차하려는 차들과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나도 주차하기 위해 한참을 헤매다가 길 한쪽에 차를 간신히 주차하고, 입장 할 수 있었다. 평상시에 내가 지나쳐온 융건릉은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모습이 아니었는데, 관광객들은 물론이고 삼삼오오 가족끼리 산책이나 나들이 삼아 나온 탓인지, 굉장히 복잡한 모습에 좀 놀랐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현대식 건물의 안내관이다. 융건릉 축조과정과 의미, 정조대왕의 업적 등을 나타낸 전시관은 최근에 지어진 듯 현대식이었으며 영상으로도 축조과정을 볼 수 있게 해 두어서 많은 어린이들이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 큰 특징이었다. 전시관을 나와 나는 갈래 길 중에서 오른쪽 융릉을 먼저 방문하였다. 융릉으로 가는 길은 주변의 산책로를 따라 5분내지 10분정도 걸어가야 하는데, 적어도 25m 이상은 되어 보이는 소나무 숲이 자리 잡고 있어서,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였지만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산책로를 걸을 때는 오히려 바람이 없는 화창한 봄날의 풍경이었다. 소나무 숲 아래는 가족단위의 나들이객들로 굉장히 붐볐다. ‘내가 사는 화성시에도 이런 멋진 휴식 공간이 숨어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융릉으로 들어가자 내 먼 기억 속에 있었던 융릉의 모습이 등장하였다. 지형상 융릉이 더 위쪽에 위치해있어서, 내가 융릉 쪽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릉의 형태나 주변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사진에서와 같이 융릉의 형태만을 간신히 확인 할 수 있는 정도 이었다. 15년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소리치면서 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부럽던지, 나도 그 아이들 틈바구니 속에서 뛰어놀고 싶었다. 융릉 앞의 연못인 곤신지의 모습은 의외였다. 풍수지리학적 관점에 따라 능을 옮기면서 만들어진 연못인데, 다른 왕릉 앞에도 이런 못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융릉만 특이한 형태로 있는지 궁금하였다. 산책로를 따라 다시 나와서 이번에는 건릉 쪽으로 이동하였다. 건릉의 안내 표지판 앞에는 일본인 관광객 무리와 한국인 가이드가 설명을 일어로 하고 있어서 그 안내판의 내용을 직접 확인하진 못하였다. 예전에는 그 안내판에 있는 설명을 옮겨 적느라, 또 사진으로 잘 나오게 찍느라 고생했었는데, 요즘엔 단어만 검색하면정말 자세하게 다 나온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건릉은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건릉의 실체는 융릉보다 더 보기가 어려워서 사진으로 건릉 주변의 봉분만을 담을 수가 있었다.
융건릉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용주사로 이동하였다. 융건릉을 나와서 5분정도만 이동하면 보이는데, 이 절은 정조가 아버지의 묘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세운 절로 1790년에 완성되었다. 능을 보호하고 그 혼을 위로하고자 세운 사찰인 용주사는 절 내부에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는 홍살문과 사도세자의 제각인 호성전이 함께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사도세자를 비롯하여 부인 혜경궁 홍씨, 정조, 효의왕후 김씨의 위패도 함께 모셔두었는데, 일제강점기 전까지 1년에 여섯 차례 재를 올렸다고 한다. 또한 용주사에는 임금이 다니던 길에 깔려 있는 박석이 있는데, 이는 정조가 용주사에 얼마나 각별한 정성을 쏟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사실 용주사 역시 낯설지 않은 것이 어머니께서 다니시는 절이라서 예전에 몇 번 갔다 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호성전이나 홍살문 같이 정조대왕의 손길이 남아있는 곳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였다. 용주사가 단순히 이 지역을 대표하는 절이라는 것을 넘어서서 숨은 뜻을 알 수 있게 한 좋은 경험이었다.
사실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이곳 화성시 화산으로 이장함에 따라 지금의 수원시에 화성을 축조하기 시작한다. 화성 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참배할 때에 머무는 임시 처소 역할을 하는 동시에 수원 신읍치의 관아로서 건립되었다. 화성 행궁은 여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경복궁 다음가는 궁이라 할 정도의 규모와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현륭원으로 이장 한 이후 11년 간 12차에 걸쳐 정조가 직접 화성에 행차할 만큼 정조의 능행이 정례화 되었고 이때마다 화성 행궁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화성은 정조가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고자 하는 정조의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사업으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 상 서울에서 화성행궁으로 다시 화성행궁에서 현륭원(융건릉)으로 걸어서 이동하는 길은 가깝지 않다. 그럼에도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자신의 아버지의 넋을 기르고 왕으로서 자신의 약한 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기르기 위한 장소로 이 곳 수원, 화성을 택하였고, 정성을 쏟아 부었다. 그러한 점이 남아있는 유적들을 통해서 단순히 왕릉, 성곽, 사찰로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미약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홀로 시간을 내어 답사를 다녀왔기에, 어렸을 적의 기억과 지금의 쓸쓸함이 같이 공존하였던 시간이었다. 서로 원인을 다르겠지만 내가 느끼는 혼자로서의 쓸쓸함과 정조가 느꼈을 그리움과 쓸쓸함이 바람이 잔잔했다면 더 진하게 와 닿을 것 같아 오히려 맑았지만 세찬 바람에 감사하고 싶다. 단편적으로는 휴일 오후에 여유 있는 나들이 풍경을 보면서 나도 이다음에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 곳으로 부담 없이 자연과 그리고 내 가족과 하나 될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는 점에서 수확을 얻었고, 또 어설프게 알고 있었던 내 고장 유적에 대해 한 번 더 자세하게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짧았지만 큰 수확을 얻은 것 같아서 마음이 든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