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생의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신 도시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시며, 갈릴리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 사역을 장식한 곳은 바로 예루살렘이다. 그렇기에 주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기까지 일거수 일투족이 남아 있는 곳을 느끼고 체험하기 위해, 해마다 3월 말에서 4월 초에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예루살렘은 크게 붐빈다. 종려 주일에 벳파게에서 예루살렘까지 주님의 입성을 재현하는 행렬에 참여하기도 하고, 성 금요일에 옛 빌라도의 법정이 있던 자리에서 시작해 예수님의 빈 무덤이 있던 무덤교회까지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종려 주일과 성 금요일의 십자가 재현 사이 성 목요일은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예루살렘 무덤교회와 마가의 다락방 그리고 겟세마네동산교회 등지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를 갖는다. 부활절 전에 성 목요일 오전 10시, 무덤교회에서 그리스정교회와 아르메니안정교회 그리고 라틴교회가 세족식 행사를 갖는다. 각 종파의 대 주교는 시간을 달리해 선발된 10여 명의 사제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준다. 정교회는 무덤교회 앞마당에 거대한 무대를 설치하고 세족식을 행한다. 반면 라틴교회는 무덤교회 안 주님의 무덤 앞에서 행한다. 사제들의 앞에 큰 대야가 번갈아 놓여지고, 큰 흰 수건을 어깨에 두른 대주교는 사제들의 발에 약간의 물을 붓고 수건으로 닦아낸다. 카메라맨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약 1시간가량 호의적인 행사를 진행한다. 세족식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즉 최후의 만찬을 갖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에서 유래되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겸손과 섬기는 자의 자세를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교황이 신도들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을 행한다. 성 세족 행사에 대해 개신교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마르틴 루터가 ‘위선’이라고 배척했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 교회 학교 등에서 수련회나 특별 행사 때 상징적으로 교사들이 학생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다. 같은 날 오후 4시가 되면,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가졌던 성만찬 재현 행사가 펼쳐진다. 만찬 재현이라고는 하지만, 마가의 다락방에서 잠시 예배를 드린 후 촛불 행진으로 이어진다. 현재 마가의 다락방으로 전해지는 장소는 두 군데 있다. 예루살렘 성 아르메니안 구역의 시리아정교회 소속의 성 마가교회와 시온산 마가의 다락방이다. 시온산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촛불 행진은 감람산 기슭의 겟세마네교회까지 갔다가 시온산의 베드로통곡교회로 돌아와 마치게 된다. 시온산 마가의 다락방을 떠난 순례객들의 행진이 절정에 달할 무렵인 오후 8시에 겟세마네교회에서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를 기념하는 예배가 드려진다. 이후 군중들은 가야바의 집터로 알려진 베드로통곡교회로 다시 행진한다. 오후 8시 겟세마네교회는 모든 문이 활짝 열리고 교회 안은 밝은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다. 일년 내내 어둠 속에 있던 예배당이 이날 저녁만큼은 환하게 불을 밝힌다. 이스라엘 경찰들의 통제 하에 수백 수천 명의 순례객들이 모여든다. 주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그 날 저녁을 기념한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겟세마네교회에서 공식 예배가 끝나도 수많은 순례객들은 자리를 떠날 줄 모른다. 옹기종기 모여 기도하고, 기념 촬영도 한다. 이후 군중들은 자연스럽게 시온산 기슭의 베드로통곡교회로 향한다. 손에는 촛불이나 손전등이 들려 있다. 군중들이 베드로통곡교회로 향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겟세마네동산에서 잡히신 후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려가셔서 신문을 받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아직 싸늘한 예루살렘의 밤공기를 마시며, 기드론 계곡을 따라 시온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2,000년 전으로 돌아가 당시 주님의 발자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갈리칸투’라고 부르는 베드로통곡교회는 이날 저녁 내내 불을 밝히고 찾아오는 순례객들에게 교회를 개방한다. 순례객들은 자정을 맞도록 마음껏 기도하고 찬양하며 주님의 생에서 마지막 성 목요일을 회상하며 금요일을 맞이한다.
글쪾사진 김강근 목회자로 예루살렘 히브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과정에 있다.
독일
올해 사순절은 2월 25일 재의 수요일(aschermittwoch)에서 종려 주일(ostersonntag)인 4월 4일까지다.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과 십자가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경건과 절제와 금식으로 지낸다. 이 기간에 행하는 성만찬은 알코올이 없는 포도주나 주스로 대신한다. 40일 동안 포도주와 초콜릿을 삼가고 카페인이 없는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재의 수요일을 앞두고 파싱(fasching)이라는 행사가 도시별 또는 그룹별로 진행된다. 이후로 특별히 절제와 경건의 삶을 살아야 하는 구속이 따르기 때문에, 파싱 때 규제와 절제를 넘어선 자유로운 행동들을 즐긴다. 이것이 카니발로 알려져 있는 행사다. 독일에서 파싱은 17세기 이후 남쪽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된 행사로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한 마인츠, 쾰른, 로트바일, 알고이 등지에서는 연례 행사로 진행된다. 많은 관광객들이 참여해 행사의 열기를 더해 준다. 하지만 파싱 카니발이 기독교인들에게 아무 관련이 없는 행사임을 강조하며, 즐겨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리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독일은 사순절 기간 동안 주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특별새벽기도회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개신교와 가톨릭은 서로 강단을 교류하거나 예배를 함께 드리기도 한다. 이때 각 교회는 성경 공부 주간을 정해 특별히 말씀을 공부한다. 참여하는 교회로는 개신교의 스테판누스교회와 알버트슈바이처교회, 가톨릭의 요한네스교회와 성파울루스교회 등이 있다. 알버트슈바이처교회는 성 목요일 저녁에 함께 모여 예배와 더불어 공동 식사를 하고, 스테파누스교회는 성 금요일 아침에 모여 아침 공동 식사를 한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성 목요일에 세족식을 갖고 사제들이 평신도를, 주교가 평사제들의 발을 씻겨주는 의식을 행한다. 부활 주일 새벽에 교회에서 부활절 기도회를 갖고 아침 공동 식사를 나눈다. 목사와 여집사의 인도로 진행되는 아침 기도회에서는 말씀 낭송과 기도 그리고 점화 촛불을 십자가 위에 놓고 침묵의 기도를 드린다. 이어서 떼제공동체에서 부르는 음악에 맞춰 교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율동을 하고 묵상의 기도를 드린다. 이곳 튀빙겐 지역은 공동묘지의 장례식을 위해 산꼭대기에 예배 처소가 마련돼 있다. 성 금요일에 산 아래에서 예배당까지 십자가의 행렬이 펼쳐진다. 2~3년에 한 번씩 가톨릭을 중심으로 일부 개신교 신자들도 참여해 행사가 치러진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로마 병사, 따르는 군중들이 함께 어우러져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행사다. 사순절 기간에 독일이 낳은 기독교 음악가 바흐의 “마태 수난곡”, 또는 “요한의 수난곡” 등이 교회에서 칸타타로 공연된다. 이것을 볼 때 독일 교회가 말씀과 기도보다 음악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난 주간에 라디오와 TV는 개신교나 가톨릭의 큰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와 칸타타 공연을 방영한다. 독일은 휴일이 대부분 교회력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재의 수요일이 있는 주간은 파싱 방학이 있고, 성 금요일과 부활 주일 그리고 부활절 후 월요일은 공식적으로 국가 공휴일이다. 이때 각급 학교는 부활절 방학을 시작한다. 이 외에 오순절, 크리스마스 방학도 있다. 이런 방학은 교회력에 따라 한두 주간씩 실시된다. 독일인들은 이 기간을 이용해 가족들과 함께 따뜻하고 일조량이 많은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지로 휴가를 떠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는 경건의 삶보다 개인의 자유와 휴식을 더욱 즐기는 독일인을 볼 때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며, 아울러 독일 교회가 생명력을 소유하도록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글쓴이 이성춘 독일에 거주하는 선교사다.
영국
기독교 국가인 영국은 사순절을 맞아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행사를 갖는다. 우선 교회의 기념 행사를 살펴보자. 장식, 설교, 음악, 연극, 특별 기도회, 금식, 성경 공부, 다양한 주제의 특강 등을 통해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실제로 체험하도록 도전한다. 모든 행사에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는가?”가 핵심 주제를 이룬다. 물론 현대 교인들은 그때 그리스도와 함께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영적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가치를 깨닫게 하며 잘못된 삶을 회개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도록 격려한다. 주일 학교 학생들은 사순절의 역사뿐 아니라, 예수님의 교훈을 실천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4장 1~11절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행동들을 일일이 기록해 보고 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지 생각해 본다. 또 마태복음 6장 1~18절에서 예수님의 나누는 삶, 기도, 금식에 관한 말씀을 읽은 후 일정 기간 동안 좋아하는 초콜릿을 먹지 않는다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하지 않기로 결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하는 시간을 갖는다. 또 시간을 정해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금식 혹은 절식(빵과 스프만 먹음)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 영국국립미술관의 경우, 사순절 기간 동안 기념 전시회를 갖는다. TV와 라디오도 사순절과 관련된 예배, 신학자와 성직자의 대담, 다큐멘터리 등을 방영한다. 성경 협회와 선교 단체들은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들을 마련한다. 예를 들면 성경 공부, 기도 모임, 현안에 대한 주제 특강(기독교와 이슬람, 과학과 믿음, 에이즈, 환경, 성 문제 등), 예수님께서 가신 수난의 길을 몸소 체험하는 성지 순례 등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려고 애쓴다. 사순절 기간 동안 주요 기념일들을 살펴보면, 우선 ‘재 수요일’이다. 재를 바르는 행동은 지극히 자신을 낮추는 자기 부인, 세상에 대해 죽음, 하나님의 구원의 필요성을 상징한다. 전통적으로 신자는 오래된 옷이나 베옷을 입고 재를 이마에 바르는 의식을 행했지만, 현대 교회들은 삼베로 교회를 장식하고 예배 후 성직자가 신자들의 이마에 재로 십자가 모양을 그려주는 예식을 행한다. 둘째는 ‘마더링 선데이’(mothering sunday)가 있다. 영국 판 ‘어머니의 날’로 사순절 기간 중 네 번째 일요일에 갖는 행사다. 본래 17세기 영국 기독교인들이 모 교회(mother church)를 찾아 감사를 표하는 날이었다. 동시에 온 가족이 만나는 날이자 특별히 어머니를 뵙는 날로서 어머니께 드릴 꽃(주로 수선화)과 케이크를 만들어 갔다. 지금 이 날은 아이들이 어머니께 경의를 표하는 날로 변해 교회 학교 학생들은 예배에 참석한 어머니들에게 봄꽃과 카드를 선물로 준다. 셋째는 ‘종려 주일’(palm sunday)이 있다.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유대인의 유월절을 상징한다. 교인들은 종려나무 잎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들고 교회 주위를 행진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 왕, 승리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외적으로 알리는 의식이다. 넷째는 ‘몬디 목요일’(maundy thursday)’이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라틴어 ‘mandatum’)과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의식이 관련된 날이다. 이것을 본받아 영국 왕들은 대대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예배한 후 가난한 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음식과 옷을 나눠주었다. 1689년 이후 세족식과 음식 및 옷을 주는 의식은 점차 ‘몬디 머니’(maundy money -특별히 만든 동전으로 된 하사금)를 주는 예식으로 간소화 되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영국 여왕은 해마다 ‘몬디 목요일’ 저녁 성찬 예배 후 그 해의 공로자와 몇 명의 어린이들에게 ‘몬디 머니’를 수여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는 어깨에 수건을 걸친 성직자가 성찬 예배를 집례하고 상징적으로 신자 12명의 발을 씻기는 예식을 행한다. 일반 교회에서도 서로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을 행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성 금요일’(good friday)’이 있다. 부활절 바로 전 금요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며, 슬픔 속에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엄숙한 날이다. 성 금요일 아침에 십자가 모양이 장식된 건포도 빵(hot cross buns)을 먹으며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한다. 오후 3시에 드리는 예배를 통해 십자가상의 칠언을 읽고 묵상하며,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짧은 설교를 듣는다. 살펴본 바와 같이 영국의 사순절은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케 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기도, 금식, 선행(마 6:1~18 참조)을 본받도록 격려하는 절기로 지킨다.
글쓴이 김재덕 영국 트리니티 칼리지(Ph.D.)에서 공부했으며, 브리스톨에 거주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
남미 대부분의 나라들은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있지만, 지역 문화와 융화되면서 상당 부분 미신적으로 변했다. 특히 마리아나 성인들의 상을 많이 만들어 숭배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사순절을 지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독실한 크리스천일 경우에 사순절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사순절 동안 고난 주간에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만들어 세라믹으로 장미꽃을 붙이고 전도지를 함께 들고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사람도 있다. 부활 주일에는 전도한 사람을 데리고 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린다. 아르헨티나의 교회는 대부분 새벽 기도회가 없다. 그러나 사순절 때 개신교 연합으로 부흥회를 연다. 2~3일간 유명한 강사를 초대해 집회를 갖는다. 브라질의 경우는 사순절 시작 3일 전부터 카니발을 즐긴다. 사순절은 육신적으로 절제하는 기간이므로 사순절 절기가 시작되기 전에 마음껏 즐겨보자는 의미에서 마련된 축제다. 가톨릭에서 고난 주간에 마리아 상을 들고 행진하는 의식을 갖는다. ‘기적의 마리아상’이라고 하여 실직자들이 직업을 구하기 위해 긴 행렬을 이룬다. 아무리 작은 시골이라 해도 어디에나 성당을 세워 그를 중심으로 행진을 벌인다. 남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사순절을 잘 지키지 않지만, 고난 주간은 잘 지킨다. 고기를 즐겨 먹는 이들은 고난 주간 특히 금요일에 어디서도 고기를 팔지도, 먹지도 않는다. 가톨릭이 국교라서 모든 것을 가톨릭 문화에 따르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 개신교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한인 교회들은 사순절 동안 특별 새벽 기도회를 연다. 특히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예배 시간을 별도로 갖는다.
글쓴이 김건형 아르헨티나 네우켄에 거주하는 선교사다.
필리핀
이곳 교회는 여느 지역처럼 전통과 개혁이 공존하고 있다. 사순절 행사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들은 성회 수요일부터 얼굴에 재를 발라주며 사순절을 예고한다. 가톨릭뿐 아니라 침례교 일부에서도 사순절 기간 동안 금욕하며 경건하게 지낼 것을 광고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들은 교회력에 아랑곳없이 성탄절이나 부활절처럼 사순절도 무심하게 지나친다. 그런 것들이 신앙의 본질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생각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흔한 추수감사절 행사도 필리핀에서 자리 잡지 못하는 이유는 지나친 가톨릭의 제도와 의식에 반발하는 초창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차별 정책에서 기인한다.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지만, 금욕이나 극기의 행사에 대한 광고도 없이 사순절의 절정인 고난 주간을 기다리고 있는 분위기다. 종려 주일에는 가톨릭과 일부 개신교에서 종려나무를 나눠 주고, 가톨릭 교회 앞에 종려나무 가지나 장식물들을 파는 장사꾼들이 많이 몰려든다. 필리핀은 고난 주간에 사순절 행사의 절정을 이루는데 주요 행사로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성경 읽기(PABASA)다. 이 행사는 가톨릭에서 사순절 기간에 주로 갖는 프로그램으로, 성당 위에 스피커를 걸어 놓고 하루에 많은 시간을 방송하듯 성경을 읽어 나간다. 꼭 성경만을 읽는 것은 아니라, 교리서에 따라 전통 기도문을 외기도 하고 음률을 섞어 노랫가락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내용은 예수님, 마리아, 가정에 관한 것들이다. 가톨릭의 전통을 잘 살려 개신교에서도 고난 주간에 성도들이 모여 성경을 통독한다. 특히 고난 주간의 목요일, 금요일은 성일(holy week)로 국가 공휴일로 선포되기 때문에 개신교 성도들은 성경 통독에 동참하거나 신앙 수련회를 갖는다. 고난 주간이 가까워 오면 동네마다 젊은이들이 모여 검은 수건을 두르고 웃옷을 벗은 채 신체에 채찍질을 가하는 행사를 한다. 많은 청년들이 얼굴을 가리고 반라 상태로 하루 종일 기어 다니며 죄를 참회하고 용서를 빈다. 실제 크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동네를 한 바퀴 돌기도 한다. 사순절의 절정은 성 금요일 정오를 기해 실제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의식인데, 특히 샌 페르난도 시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다. 좌우로 12명의 젊은이들이 늘어 서고 3명씩 번갈아 가며 5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다. 머리가 큰 강철 못을 양손바닥에 박는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기는 개인에게 속죄 기회가 되고 가문에는 영광으로 인식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세계 언론들의 취재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의식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팜팡가, 안티폴로, 보홀, 팔라완, 팡가시난 등지에서도 거행된다. 사람들이 빌라도, 로마 병정, 마리아의 분장을 하고 나타나 예수님 당시 골고다 언덕의 모습을 재현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연극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평소에 경건치 못한 사람들에게 극기와 고난의 체험을 통해 면죄부를 주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필리핀에서 복음에 대한 올바른 해설로 바람직한 헌신을 가르치는 일이 절실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