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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목사인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 2. 내 좁은 성 안에 갇혀서 나를 모욕하고 학대하며 살았습니다
🔥 3. 내 안에 있는 癡事(치사)한 마음
🔥 4. 내 안에 거하라
🔥 5. 내 뜻대로 안될지라도...
🔥 6. 일곱인봉의 재앙 1, 2
🔥 7. 내 안에 있는 사단의 영들 찾아보기
🔥 8. 성령으로 살면, 내 안에 충만한 자유와 누림이 있다
🔥 9.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 2018.10.30. 목사인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59P)
아무리 작은 초라한 교회라 할지라도,
부르심을 따라 가서,
성심을 다하여 부흥성회를 인도하고,
고혈(膏血)을 짜서 돕고 돌아오면,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의 종인 나를
반드시 축복하시리라.
세상에는 큰 교회, 작은 교회가 없고,
좋은 교회, 나쁜 교회만 있을 뿐이다.
교인이 하나도 없는 목사라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몸부림을 치면
그 교회와 목회는 아름다운 것이며,
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타락하고 다른 목적으로 逸脫(일탈)하면
그 교회와 목사는 징계를 받을 것이다.
나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행하실지라도...
2018.10.30일 서울북노회 정기노회의 날에...
🔥 내 좁은 성 안에 갇혀서, 나를 모욕하고 학대하며 살았습니다
내 스스로 상처를 주며 괴롭히는 못난이였습니다.
욕심과 두려움,
미움과 노여움의 성 안에 갇혀서
남을 괴롭히고 미워하며 살았습니다.
어리석고 못된 놈으로 살았지요.
내 밖에 서로 살리고 함께 사는
드넓은 생명의 바다가 있음을 몰랐습니다.
은총과 자유, 기쁨과 힘으로 가득한 나라,
영원히 사는 나라가 빛나고 있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 내 안에 있는 癡事(치사)한 마음
Today's Words (삼상 25:1-13)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다윗이 광야에 있어서 나발이 자기 양털을 깎는다 함을 들은지라.
다윗이 이에 열 소년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 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이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서 이 모든 말로 그에게 고하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Meditation and Application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죽음으로써,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왕정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왕정은 힘차고 바르게 시작되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왕위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새로 왕위에 오를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혼란스러운 때라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 때는 한편으로는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준비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평소 도움을 주었던 나발에게 먹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 운운하면서 다윗을 배신자로 욕하며, 그 청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나발이 사울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다기 보다는, 다윗에게 주어야 할 먹을 것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의 속내가 분명히 다른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솔직히 말하자니 치사하기도 하고 해서, 다른 적당한 이유를 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또한 그런 성향이 다분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날 중 하루는 다른 사람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대기하고 기대하는 마음 가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개인적인 감정이 휩싸인 보복을 하려 합니다.
전혀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지도 않고, 홀대한 나발을 징벌하려고 한 것입니다.
설령 다윗의 행위가 정당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먼저는 하나님께 그 뜻을 여쭙는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을 떨어지게 만드는 눈에 보이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현재 하나님께서 서서히 진행하고 계신 일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최근에 부탁을 거절하면서 했던 변명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발의 변명과는 무엇이 다릅니까?
당신이 최근에 부탁을 거절하면서 했던 변명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발의 변명과는 무엇이 다릅니까?
🔥 내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1-8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지혜와 명철을 주셔서,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
언제나 부족하기에, 언제나 주를 의지할 수 밖에 없나이다.
함께 하셔서 주의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
나는 쓰임받는 것 만으로도 기뻐하며, 무익한 종의 겸비한 자세를 가지리이다. 아멘.
우리는 지난 주에 예수님이 묻히셨던 빈 무덤과 예수님의 시체를 싼 세마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었습니다. 세마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보여 주었고, 빈 무덤은 예수님이 다시 사셨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쯤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의 삶에 대해 말씀드려야 하지만, 아직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행하셨던 너무도 중요한 것들을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많아, 이 한 주간 매우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만 할 순 없어서 기도를 했는데, 오늘 말씀을 떠올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내 안에 거하라’란 제목으로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 하겠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주의 뜻이라고 믿어, 이 말씀을 대언하려고 합니다.
나의 말이 되게 하지 마시고, 주의 말씀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여기 거북이가 한 마리 있습니다. 이 거북이를 이렇게 밖으로 내어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거북이는 얼마 간 살아 갈 것입니다. 거북이는 처음에는 ‘자유다’ 라고 생각하며 좋아하겠지요. 그러나, 먹을 것이 없어 거북이는 굶게 됩니다. 어떤 거북이는 물 밖에서 살며 풀잎도 뜯어 먹는다고 하지만, 이 거북이는 풀잎은 먹지 못합니다. 바다에서 나는 여러 가지 플랑크톤이나 고기 찌꺼기 등을 먹고 삽니다.
저는 청거북이 사료를 주지요.
거북이가 밖에 있으면, 결국 굶어 죽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지 않으면, 결국 말라 죽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매우 쉬운 질문이지요. 그것은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지 않으면, 영양분을 받지 못함으로 과실은 고사하고 자신도 말라 죽게 됩니다.
이런 가지는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6절을 보면, 불에 던져 사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만약 주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영적 영양분을 공급 받지 못하기 때문에, 집 나간 거북이처럼,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처럼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이, 우리도 주님께 붙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다 같이 4,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제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착하고 공부도 잘 하고 잘 생긴 친구였습니다. 그가 중 2학년이 되었을 때 그 동안 열심히 다니던 교회가 이제 더 이상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영화 보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한번도 안빠지던 교회를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은 늦잠을 잤고, 몇 번은 영활 보러 갔습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친구들과 싸우고 교회 선생님한테 야단맞고 나서는, 교회가 더욱 가기 싫어졌습니다. ‘교회 정도야 몇번 빠져도 되겠지. 학교도 아닌데 말이야.’ 이런 생각을 가진 그 친구는 엄마 몰래 교회를 빠지고,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삶이 점점 무기력해지고 신경질만 나고 엄마에게 짜증만 부렸습니다. 친구들과 싸우는 일이 많아지고, 도박을 하는 횟수도 늘어났습니다. 자전거도 훔치고 물건도 훔쳤습니다.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효행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이라고들 했지만, 점점 인생이 허무해졌습니다.
성적은 떨어지고, 컨닝 하다 걸리고, 성격은 나빠지고,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바라 볼 때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허무한 인생 죽으면 끝인데, 사람들은 너무나 바둥 바둥 사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와 싸우고, 누나와 싸우던 날은 정말 어디서 죽고 싶었습니다. 무언가 풀리지 않는 삶.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친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가서 주님의 말씀으로 영의 영양분을 먹지 않았기에, 그의 영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영의 영양분을 잘 섭취하면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사랑의 열매가 없으므로 이 친구는 엄마도, 누나도,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떠나 있었던 삶 그것은 처음에는 자유로운 것 같았지만, 결국은 죄악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친구를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주님의 마음은 매우 아프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친구를 사랑해서, 그가 지은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친구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어느 날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단다. 나의 사랑을 기억하라. 내 안에 거하라. 나를 떠나서는 네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이 친구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과 사랑에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밤이면 교회에 나가 기도를 했습니다. 매일 성경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친구의 마음에는 사랑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엄마, 누나도 사랑할 수 있었고, 허무하게만 보였던 이 세상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늘도 사랑하게 되었고 산들산들한 봄바람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진정으로 감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게 될 뿐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성도들! 주님을 떠나지 않게 해 주세요.
우리 성도들과 선생님들이 주님 안에 거하여서,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게 도와 주세요. 그래서, 자신도 사랑하며 부모님도 사랑하며 친구도 사랑하며 이 세상도 사랑하게 해 주세요.
우리의 아름다운 열매를 보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친구들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세요.
다시는 주님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내 뜻대로 안될지라도...
사도행전 16:6-15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 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 갔는데,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 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1.세상 일이라는 것이 마음 먹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순풍에 돛 단 듯이 잘 풀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가 못하다.
2.복음을 위해 헌신한 바울의 경우도 모든 일이 만사형통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나름대로의 역경이 있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였다.
I.계획에 제동이 걸렸다(6-7).
A.성령께서 말하지 못하게 하셨다.
1.바울과 실라의 수고는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주었다.
교인들의 믿음이 굳어졌고, 숫자도 늘어났다.
이런 열매들은 이들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2.분명히 모든 일은 만사형통이었다.
무슨 일이든 마음 먹은대로 되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이런 기쁨들도 한 순간이었다.
3.6절에 “성령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갔다고 하였다.
분명히 계획이 좌절에 부딪혔다.
일찌기 경험해 보지 못했던 좌절이었다.
B.예수의 영이 들어 가기를 허락지 않았다.
1.이들의 목표는 무시아와 비두니아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들의 계획을 허락치 않았다.
2.여러모로 애를 썼으나 들어 갈 길이 열리지를 않았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다”고 하였다.
C.누구에게나 역경은 있다.
1.지난 날 한국교회에는 거센 기복 사상의 흐름이 있었다.
이런 흐름은 성령운동에 휩쓸려, 한국교회를 주도했었다.
그래서 성령운동 하면 기복 사상인 것처럼, 그릇된 인식마저 형성됐었다.
2.에수 믿고 성령 받으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 한다는 식으로, 복음 아닌 가르침을 기정 사실화 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가면 이런 재앙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3.그래서 의식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가르침은 진리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별로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성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이들의 주장이 진리이든 비진리이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교회에 수용했다.
4.이제 우리는 차분히 자신을 돌아 볼 여유를 얻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기복사상이 교회에 발붙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5.역경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 만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하심이다.
II.다른 길이 준비되 있었다(9-10).
A.환상을 보았다(9).
1.당황한 바울과 실라는 드로아로 갔다.
그들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2.주께서 한 밤에 환상을 보여 주셨다.
그것은 꿈에 마게도냐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것이었다.
3.이들이 거주했던 드로아는 터키의 서부 국경지대였다.
그리고 마게도냐는 유럽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즉 이들은 아시아에서 전도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유럽에서 먼저 일하기를 원하셨다.
B.여럿이서 일행을 이루었다(10).
1.“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우리”라는 말이다.
2.본서의 저자는 의사 누가였는데, 누가는 비로서 여기에서 처음으로 ‘우리’라는 말을 썻는데, 이는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뜻이다.
3.바울이 누가를 만난 곳은 드로아였다.
그 뒤로 누가는 계속 이들과 함께 여행을 시작하여, 사도행전의 끝부분까지 동했했었다는 사실이다.
C.소명을 받았다(10).
1.하나님은 일단 이들이 원했던 계획들을 막으셨다. 그리고는 이들에게 딱 한 군데의 문을 열어주셨다.
2.그리고 바울과 실라를 부르셨다.
이들은 즉각 응답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심을 분명히 깨달았다.
D.하나님은 더 좋은 문을 열어 주신다.
1.우리는 살면서 인생의 문이 닫혔다고 느낄 때,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어떤 때는 병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고, 실직을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업에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2.우리는 때때로 잘못된 방향으로 향할 때가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지나치게 빨리 달릴 때도 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시는데, 일단 우리를 멈추도록 하신다.
3.때로는 인생의 좋은 기회들이 닫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한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단 우리의 문을 닫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III.예상 밖의 길이 예비되었다(11-15).
A.루디아를 만났다.
1.하나님은 선교의 문을 닫으셨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선교사들에게 마게도냐를 소개해 주셨다. 이들은 즉각 응답했다.
2.이들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빌립보로 향했다.
이들이 여행한 거리는 약 250Km 정도였다. 긴 거리를 여행해야 했다. 이들이 지나 간 네압볼리는 오늘날의 그리스에 속해 있는 도시인데, 로마의 식민지였다.
3.이들은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았다.
회당이 있었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 빌립보에는 유대인이 별로 없었던 듯 싶다. 이들은 강가에서 모여 있는 여인들을 향해 전도를 했다.
4.그런데 이들은 그 중에서 한 여인을 발견했는데, 그는 자주 장사인 루디아였다.
이 여인이 하나님을 공경했다는 것으로 보아, 유대교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던 듯 싶다. 그런데 바울의 전도를 듣고는,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5.이 여인은 즉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속해 있던 모든 사람에게도 세례를 받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일행이 머무는데,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6.전혀 예기치 못했던 귀인을 만난 셈이다.
B.지헤가 필요하다.
1.무조건 고집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그 일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고집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2.인간은 규율을 만들고 법을 만들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대신할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인간이 만든 제도나 법에 얽메이면, 결국은 실패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융통성이 필요하다.
만일 바울과 실라가 고집을 부렸든지, 원칙에 얽매였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3.결국 성령께 인도한 결과로, 이들은 루디아라는 협력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결론:
1.우리 모두는 역경에 부딪혀 실패한 경험이 있다.
2.그런가 하면, 때로는 오히려 그 역경 때문에 더 좋은 결과를 체험한 적도 있을 것이다.
3.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방법임을 깨달아야 한다.
🔥 다섯째 나팔의 재앙,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
요한계시록 9:1~12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가 열쇠를 받아 무저갱을 엽니다.
그러자 그 구멍에서 황충들이 나와 전갈처럼 쏘는 권세를 받아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자들을 다섯 달 동안 괴롭게 합니다.
그 황충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죽기를 원하지만 죽지 못합니다.
그 황충들은 아바돈 혹은 아볼루온이라 하는 무저갱의 사자(사탄)를
자기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찬 양 : 363장(새 337)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364장(새 338)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1. 무저갱이 열리다(1~2절)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에 내가 보니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하나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 그가 무저갱을 열자 그 구멍에서 거대한 용광로에서 나오는 듯한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1절) :
눅 10:18에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사탄을 의미하나,
여기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무저갱을 열고 닫는 책임을 맡았으므로, 무저갱을 지키는 천사를 뜻합니다.
- 떨어진(1절) :
여기에서 ‘떨어진’의 시제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 완료형입니다.
그 천사가 이미 무저갱에 내려와 무저갱을 지금 막 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황충(악령)들이 나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일이 지금 현재의 상황임을 나타냅니다.
- 무저갱(1절) : 바닥이 없는 마귀와 사탄의 감옥
2. 무저갱에서 황충이 나오다(3~12절)
3) 또 그 연기 속에서 황충(메뚜기)들이 땅 위에 나오매
그 황충들은 땅에 있는 전갈처럼 쏘는 권세를 받았더라.
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에 있는 풀이나 푸른 것이나 나무는 하나도 해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황충들이 주는 고통은 마치 전갈이 사람을 쏠 때의 고통과 같더라.
6) 그 다섯 달 동안에는 그 사람들이 아무리 죽으려고 애를 써도 죽지 못하고,
죽기를 갈망해도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7) 그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준비를 끝낸) 말들 같고,
그들의 머리에는 금 면류관 같은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과 같고,
8) 또 그 황충들은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과 같으며,
9) 또 철흉갑 같은 흉갑(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철로 만든 갑옷으로 가슴을 둘렀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많은 병거(전차)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10) 또 전갈과 같은 쏘는 꼬리와 살(독침)을 가졌는데,
그 황충들은 그 꼬리로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칠 수 있는 권세가 있더라.
11) 그 황충들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그 이름은 히브리어로는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아볼루온이더라.
12) 첫째 화가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두 가지 화가 더 닥쳐올 것이라.
- 황충(3절) :
황충은 길이 5cm, 날개 길이 10cm의 메뚜기과에 속하는 곤충입니다.
- 풀이나 나무는 해치지 말고(4절) :
본문의 황충이 곤충 메뚜기라면 풀이나 나무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황충은 나무나 숲은 공격하지 않고 사람들만 공격하므로
곤충이 아니라 무저갱에서 나온 악령들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다섯 달 동안(5절) :
‘다섯 달’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정도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그 고통 가운데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은 ‘다섯 달’의 기간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 죽으려고 애를 써도 죽지 못하고(6절) :
황충(악령)들의 공격이 정신적인 것임을 암시합니다.
한동안 세상 사람들이 악령들의 공격으로
정신적으로 아주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 철흉갑 같은 흉갑(9절) : 도라카스
‘흉갑(개역개정에서는 호심경)’에 해당하는 ‘도라카스’는
가슴을 보호하는 철로 만든 갑옷을 가리킵니다.
황충이 이런 모습을 가졌다는 것은 약점을 찾을 수 없는 황충의 강력함을 뜻합니다.
- 아바돈, 아볼루온(11절) :
둘 다 ‘박멸자’, ‘파괴자’라는 뜻으로 사탄을 의미합니다.
* 묵상 point
1.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들
1) 무저갱이 열리다(1~2절)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별이 하나 떨어졌는데
그 별이 하나님께로부터 무저갱을 여는 열쇠를 받습니다.
보통 성경에서 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사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만,
여기에서는 이 별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무저갱을 열었으므로
무저갱을 열고 닫는 책임을 맡은 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와 사탄을 바닥이 없는 이 무서운 감옥에 가두어 두었었는데,
그 천사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무저갱(無低坑)을 엽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그 천사에게 명하여 무저갱을 여시니
무저갱에 갇혀 있던 악령들이 모두 쏟아져 나옵니다.
2)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들 : 악령들(2~5절)
요한은 무저갱에서 나온 악령들을 황충으로 묘사했습니다.
황충은 길이 5cm 날개 길이는 10cm쯤 되는 메뚜기의 일종으로,
떼를 지어 갈 때는 1평방킬로미터에 5천만 마리의 메뚜기 떼가
앞뒤 거리가 몇십 km나 되는 거대한 군락을 이루며 지나갑니다.
이 메뚜기들이 한 번 지나가면
마치 불에 탄 것처럼 풀이나 나무가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무저갱에서 나온 악령들을 이 공포의 메뚜기 떼로 표현했습니다.
➀ 전갈처럼 사람을 쏘는 권세를 가진 황충들(3~4절)
무저갱에서 나온 자들이 진짜 메뚜기라면 풀과 나무들을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황충들은 풀과 푸른 것과 나무들은 하나도 해치지 않고
오직 사람들만 공격합니다.
그 황충의 꼬리에 전갈처럼 쏘는 것이 있고 거기에 독침이 있어서 사람을 쏘는데,
마치 전갈에 쏘인 것처럼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황충은 곤충이 아니라 사람을 미혹하고 파괴하는 악령들입니다.
➁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자를 괴롭게 하는 권세를 받은 자들(4절)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들은 하나님께 인을 맞지 않은 자들만 괴롭게 합니다.
하나님께 인을 맞지 않은 자들은 바로 그 황충들인 마귀와 사탄을 섬긴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와 사탄이 자기들을 섬긴 자들을 공격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와 사탄입니다.
이것들은 결코 자기를 섬기는 자들을 돕는 자들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고 미혹하고는
자기를 택하는 모든 자들을 멸망에 빠뜨리는 자들이 바로 사탄이요 악령들입니다.
(인을 치는 부분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7:1~8과 에베소서 1:1~14 큐티 묵상포인트를 참조하십시오)
➂ 죽이지는 말고 괴롭게만 하라(5~6절)
그러나 죽이지는 말고 괴롭게만 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공격하는 것이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임을 암시합니다.
사람들이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립니다.
우울증과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죽기를 바라지만 죽지는 못하고 괴로움만 당합니다.
2. 황충들의 정체
요한은 주님을 믿는 백성들이 마지막 때에 악령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황충의 모습을 통해 악령들이 마지막 때에 어떤 활동들을 하는지 증거합니다.
1) 악에 속한 큰 권세자들 : 머리에는 금 면류관 같은 것을 쓰고(7절)
요한은 무저갱에서 올라온 황충들이
그 머리에 금 면류관 같은 것을 썼다고 했습니다.
금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다는 것입니다.
금 면류관이 아니라 금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다고 표현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권세가 있는 자로 여겨주기를 원하여
자신의 권세를 과장되게 포장하여 과시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황충들은 도미티안과 같은 세상의 왕이나 권세자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나 통치자들은 자기의 권세를 과시하기 마련이지만
마지막 때에는 히틀러나 도미티안 같은 권세에 미친 미치광이가 나타날 것입니다.
2) 악에 속한 지식인들 :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7절)
요한은 황충들의 얼굴이 마치 사람의 얼굴과 같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는 사람처럼 지성을 가진 존재라고 말할 때
사람의 얼굴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이 황충들은 세상의 권세가들에 이어
두 번째로 세상의 지식과 지성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악한 영들이
세상의 지식과 지성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3) 악에 속한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들 :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을 가졌고(8절)
세 번째로 요한은 황충들이
여자의 머리털과 같은 머리털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여자의 머리털은 대단히 매력적인 존재임을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황충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을 만한 매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당시에는 성적인 향락의 잔치인 이교도들의 연회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오늘날에는 TV나 영화나 스마트폰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각종 매체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앞으로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더욱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4) 악에 속한 강력한 권세, 막강한 힘 : 사자의 이빨 같은 이빨을 가졌고(7~10절)
네 번째로 요한은 황충이 사자의 이빨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힘과 권세를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이들의 모양은 마치 전쟁 준비를 끝마친 말과 같고,
이들의 가슴에는 철로 만든 갑옷을 둘렀으며, 이들이 움직일 때는
많은 병거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가 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줄 만한 놀라운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군대를 움직일 권세가 있는 최고 권력자나,
막강한 돈의 힘을 가진 글로벌 기업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전 세계를 움직이는 막강한 힘을 가진 악의 존재가 나타날 것입니다.
5) 빈틈없는 막강한 방어력 : 철로 만든 갑옷 같은 것을 가슴에 두르고 있고(9절)
이들은 또한 철로 만든 갑옷 같은 것을 가슴에 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이들을 상대할 자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가진 돈과 권세의 힘으로 연약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자들입니다.
말로는 정의를 외치고, 백성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백성들 앞에서는 항상 갑질을 하는 권세자로 나타나고,
백성들은 항상 연약한 을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러므로 본문에서 요한이 황충이라고 묘사한 자들은
백성들을 지배하는 최고 통수권자나,
그 최고 통수권자들의 모사꾼 역할을 하는 지식인들이나,
사람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빼앗는 매력적인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이나,
진공청소기처럼 작은 기업들을 무섭게 빨아들이는 막강한 재벌들,
그 밖에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입니다.
6) 그들의 왕은 지옥의 사탄 : 무저갱의 사자를 자기들의 왕으로 삼고(11절)
그러나 그들은 무저갱의 사자를 자기들의 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의 이름은 히브리어로는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아불루온입니다.
아바돈과 아볼루온 둘 다 파괴자라는 뜻으로, 사탄을 뜻합니다.
세상의 모든 돈과 권력과 명예와 즐거움의 배후에 사탄이 있다는 것입니다.
● 묵상 :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은 것들의 실체를 바로 깨달으십시오.
요한은 여기에서
사람들이 한평생을 온 마음을 다해 얻으려 했던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또 사람들 앞에서 성공한 자로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자들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고발합니다.
그들의 배후에 사탄이 있습니다.
무저갱의 사자가 그들의 배후입니다.
사람을 파괴시키는 악령이 그들을 조종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낙엽처럼 세상 사람들의 흐름에 맥없이 휩쓸리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3. 지금 현재 진행 중인 고통의 때
1) 하늘에서 떨어졌다 : 현재 완료형(1절)
흔히 이 말씀을 주님이 오시기 직전의 마지막 때에 무저갱이 열려
악령들이 이 땅으로 쏟아져 들어온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1절에서는 분명히 하늘의 별이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시제가 미래가 아니라 과거 완료형입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쓰던 주후 95년에
이미 그 천사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저갱을 여는 열쇠를 받아서 내려왔고,
그가 무저갱을 열어 이 땅에 온갖 악한 황충(악령)들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현재 진행 중인 고통입니다.
2) 황충들이 사람을 괴롭게 하는 다섯 달 동안의 의미(5절)
➀ 다섯 달 동안은 지금 현재를 의미합니다.
악령들이 사람을 괴롭게 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말한 다섯 달의 의미는 확실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요한계시록 첫 장에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요한이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으로 여겼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다섯 달의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곧 오실 것이니
요한은 그들의 악령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라는 의미로 다섯 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때 오시지 않았고,
그 후로 거의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한 다섯 달이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바로 지금이 악령들이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때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➁ 다섯 달 동안은 그들의 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이 황충이라 묘사한 자들은
그야말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괴롭게 합니다.
힘이 워낙 막강해서 그들의 권세가 한정 없이 계속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다섯 달 동안뿐입니다.
그 끝이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초와 근간을 모두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3) 그런데 왜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자들만 공격한다고 했습니까?(4절)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들은
악령들이 아무리 유혹하고 미혹에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쏘는 고통의 독에 영향을 받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돈과 권세와 명예와 세상의 즐거움에 미혹되어 악령에 빠져들어 가서
그 악령들이 주는 고통에 빠지지만,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들은 주님의 교제하면서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강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니
악령이 주는 고통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지금은 고통의 때이며 동시에 은혜의 때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들도 아직은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
때로 악령들의 미혹에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믿는 자들 역시 이런 세상의 문제로 염려하고 고통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시고 위로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고통의 때이며 동시에 은혜의 때입니다.
● 묵상 :
지금 이때를 고통의 때로 살지 말고
주님과 함께 은혜의 때로 살아가는 자가 되십시오.
말씀과 기도를 쉬지 마십시오. 감사하며 찬양하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시간은 기쁨과 평강의 가득한 은혜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4. 아직 두 가지 화가 더 닥쳐올 것입니다(12절).
오늘도 고통에 견디지 못하고 어떤 사람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루라도 이런 가슴 아픈 뉴스를 접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제 겨우
하나의 화(禍)가 지나갔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아직도 두 개의 화가 더 남아 있습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강 강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예레미야 12:5).
예레미야가 사역 초기에 힘들어하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지금 걷고 있는 자와 경주하는 정도에서 벌써 지친다면
앞으로 말과 경주할 때는 어찌하려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 묵상 :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주님 오시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더 힘든 날이 올 텐데
겨우 이 정도의 어려움 가지고 힘들어하면
그 날의 어려움을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그 날의 어려움을 생각하며 지금부터 말씀과 기도로 미리 준비하십시오.
* 기도 제목
1. 세상의 돈과 권세와 명예와 즐거움의 배후에
악한 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2. 그러므로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은혜 속에 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3. 그 날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지금부터 말씀과 기도로
그 날을 미리 준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 일곱인봉의 재앙 (II)
요한계시록 9:1-21절
1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 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3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4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5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7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8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9또 철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 가는 소리 같으며,
10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11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12첫째 화는 지나 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13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14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15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16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17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18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19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20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1.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다.
여기에는 무저갱의 이야기가 나온다.
무저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땅 속에 뚤려 있는 큰 구멍이다.
2.성경에는 종종 지옥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지옥을 음부라고도 하고, 무저갱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하자면 지옥은 땅 속에 있다는 말이 된다.
3.다섯째 천사의 나팔로 인하여 별 하나가 땅에 떨어지고, 이 별은 바로 지옥인 무저갱의 열쇄를 받았다고 하였다.
I.무저갱이 열렸다.
1.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졌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화산의 폭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간혹 화산이 폭발하고 있고, 우리 나라의 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진출해 잇는 필리핀의 경우도 대표적인 케이스에 해당한다.
2.아울러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앞서 언급한 십사만 사천인에 대한 언급이 재차 반복되고 있다.
즉 이들은 고통을 면하게 된다.
3.비록 황충임에도 구분된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들이 지능이 있음을 보여 준다. 황충은 이마에 인맞은 십사만 사천명의 사람들을 식별할 것이다.
4.“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5-6)”고 하였다.
이것은 큰 고문의 시대가 바로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에고하는 말씀이다. 사람이 죽으려고 자살을 기도하지만, 영혼이 몸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5.7-11절에는 파괴자라는 뜻의 사탄이 소개된다.
사탄은 파괴자이다.
그리고 귀신들의 임금이다.
이것이 성경의 말씀이다.
귀신에 관한 언급은 매우 조심스럽다.
그러나 본문은 귀신에 대하여 정체를 밝히고 있다.
II.이억명의 마병대가 나타났다.
1.유브라데 강은 고대 바벨론 제국에 흐르던 강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대다수의 귀신 종교는 바로 이 강에 그들의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런가 하면 유브라데강은 에덴에 흐르던 네 개의 강 중 하나였다.
2.유브라데는 인간의 첫 거주지였다.
바로 이 곳에 무서운 네 천사가 결박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이 악한 천사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시려고 그 천사들을 심판 때까지 결박해 놓으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 결박이 풀려난 것이다.
3.풀려난 악령들은 세상에 남아 있는 3/4 인구 중에서 삼분의 일을 죽인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이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4.인구의 절반이 죽는 재앙 가운데서도 죽지 않고 살아 난 자들이 있다(20-21).
이들의 면모를 살펴 보면, 모두가 악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재앙 때문에 죽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회개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21절에는 이들의 네 가지 죄가 언급되어 있다.
“살인, 복술, 음행, 도적질”이었다.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병폐들이 그대로 열거돼 있다.
5.이제 마지막으로 16-21에는 이억의 숫자가 니온다.
“마병대의 숫자는 2만만이니…” 라고 하였다.
2억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군대가 도대체 어디서 모여진다는 말인가?
제 아무리 연합군을 모은다 해도 2억은 불가능하다.
2억은 커녕, 이천만도 모을 수 없다.
6.통계에 의하면 지구상의 인구가 10억을 돌파한 때가 1860년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요한의 때에는 짐작도 못할 숫자였다.
2024.11.20.수 현재 전 세계의 인구는 실시간으로 8,187,869,014명이다.
7.지금 유일하게 이억의 군대를 모을 수 있는 나라가 있다.
바로 중국이다.
요한이 바로 이런 중국의 군대를 미리 보았단 말인가?
1.지금까지 우리는 일곱번째 재앙의 여섯째 천사의 나팔까지 살펴 보았다.
2.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남은 인구는 겨우 절반 뿐이다.
남은 그들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했다. 더 악해진 것이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면 사람들이 회개할 것으로 기대했다.
3.표적을 추구하는 신앙도 결국은 이렇게 허무한 종말을 맞고 말 것이다.
지금 나의 신앙은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 보자.
만일 표적을 구하는 신앙이라면 빨리 바꿔야 한다.
4.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 오직 주의 말씀 뿐이다.
🔥 내 안에 있는 사단의 영들 찾아보기
갈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제1의 죄악, 아름다움과 우호와 신의와 의리와 사랑을 가장한 性的(성적)인 죄악, “사랑 도적놈이 가장 큰 도적놈이다.” -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제2의 죄악, 우상숭배, 무속, 무당, 미신의 죄악 -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제3의 죄악, 부정적 관계성 파괴의 죄악, “사탄은 부정적 관계성 속에서 역사한다.” -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제4의 죄악, 분리와 사이비, 이단(sect,분파)의 죄악 -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제5의 죄악, 불화, 반목, 갈등, 배척의 죄악 - 21투기와
제6의 죄악, 육신의 정욕의 죄악 - 술 취함과 방탕함과
제7의 죄악,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세상 성공 자랑의 죄악 -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하나 하나 일일이 逐邪(축사)하라.
🔥 <작성법>
○ : 자신만 접촉했거나 자신에게만 있는 현상
△ : 부모(조상)만
□ : 부모(조상)도, 자신도
🔥 1. 우상숭배의 영(타종교 포함)
불교(장례식을 불교식으로 한 것 포함),
유교(제를 드리는 행위 포함),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
이슬람교,
증산교,
단군교,
일본 신도,
기타
🔥 2. 무속의 영(민간신앙 포함)
천지신명에게 비는 모든 행위(대동제, 고사 등),
굿,
점(타롯 포함),
부적,
손금,
운세(신문이나 잡지),
철학관(작명원 포함),
붉은 악마,
기타
🔥 3. 이단의 영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통일교,
천부교 (박태선 장로),
영생교,
성락교회와 베뢰아 (김기동),
인천 예루살렘교회 (이초석),
신천지교회 (이만희),
JMS (정명석),
마음 수련회,
기타
🔥 4. 적그리스도의 영
적그리스도의 책 구독,
예수님에 대한 거짓 교리를 전파함,
교회를 정죄하고 대적함,
기독교인의 핍박,
성경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기를 원함,
안티기독교 활동,
기타
🔥 5. 미혹의 영
뉴에이지(관련 책이나 음악),
마음수련원,
별점,
요술/마술,
최면술,
초능력,
UFO,
요가,
회색주의,
환타지 소설이나 영화 탐닉,
쓸데없는 상상을 즐김,
신비주의에 끌림,
타인의 말에 쉽게 현혹됨,
성경 말씀이 자꾸 의심됨,
영적 체험이 자꾸 의심됨,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기타
🔥 6. 죽음의 영
자살 충동,
자해,
신경쇠약,
가위 눌림,
생명과 관련된 사고,
낙태,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충동,
기타
🔥 7. 중독의 영
술,
담배,
게임,
마약,
도박( ),
인터넷,
일,
비디오,
영화,
만화,
TV,
쇼핑,
소유욕,
기타
🔥 8. 음란의 영(간음의 영)
자위행위(성적인 상상 동반),
성매매,
결혼 전 성관계,
간음,
포르노 접촉(그림, 비디오, 인터넷 등),
성추행,
성폭행,
음란한 생각이나 상상을 즐김,
또는 시달림,
기타
🔥 9. 교만의 영
남을 무시함,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함,
자기 자랑을 즐김,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함,
남이 내 의견에 반박하면 기분이 나쁨,
자기 중심적임,
무례함,
냉소적,
기타
🔥 10. 두려움의 영
항상 막연한 불안감이 있음,
새로운 일을 추진하지 못함,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움,
자신감 부족,
태도를 분명히 못함,
쉽게 포기함,
공포심,
겁이 많음,
악몽,
불면증,
기타
🔥 11. 불평, 불만, 원망의 영
매사에 만족하지 못함,
쉽게 원망하고 불평함,
짜증이 많음,
신경질적임,
적개심(복수심),
반항심,
미움,
다른 사람에 대한 욕과 저주,
마음의 큰 상처( ),
기타
🔥 12. 절망의 영
매사에 자신이 없고 쉽게 절망함,
아무런 소망도 없고 의욕도 없음,
모든 것이 다 쓸데 없다는 생각,
무력감을 느낌,
버림 받았다는 느낌,
구제 불능자라는 느낌,
실패 의식,
낙담,
우울증,
불면증,
기타
🔥 13. 폭력의 영
과도한 분노,
혈기를 자주 부림,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부숨,
주먹질과 발길질,
남의 고통을 즐김,
손찌검,
매나 빗자루로 때림,
말로서 상대방을 눌러 버려야 시원함,
기타
🔥 14. 가난의 영
남의 것을 훔침,
하나님의 것(십일조와 헌금)을 드리지 못함,
불효,
게으름,
다른 사람을 망하게 함,
사업의 실패,
과다한 부채,
실직,
사기 당함,
돈이 모이지 않음,
기타
🔥 15. 질병의 영
(목록에 없으면 밑에 자세히 써 주세요)
알레르기( 알레르기),
암,
당뇨병,
신경성 질환 (신경성 불안, 소화 불량, 수면 장애, 우울증, ),
관절염,
심장병,
고혈압,
고질병(편두통, 위염, 피부염, ),
혈액 순환 장애,
기타
🔥 성령으로 살면, 내 안에 충만한 자유와 누림이 있다 (녹취본, 7P)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내게서 성령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성령이 밖으로 나타나려면 일정 기간에 성령의 충만함이 채워지는 시간과 훈련 기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이 5~10년 되는 것 같다.
성령이 하나이지만, 이것 저것 다 붙들려고 하지 말고, 5~10년 후에 나타나는데, 내 삶을 보았을 때 내 양심상 나는 성령으로 살았더니, 이런 저런 일이 생겼어... 목사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
둘째는 가정이 안정이 되어야 한다.
맨 첫 단계는 자기 내면이 안정 되어야 한다.
내가 죄악을 떠나서 성령과 동행하는 충만한 삶이 되어야 한다. 가정에 확립되어 부부의 문제,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가 안정되고, 경제가 안정이 되어야 한다.
드디어 내가 성령께 붙들려서 사역을 하고, 나의 가나안 땅을 점령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내 안에 갈등이 온다.
비전에 고통이 온다.
낙담 좌절이 오지만 깊은 골방, 더 깊은 성령 충만함, 주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이런 것을 극복해야 당신이 행복해진다.
성령의 길, 성령의 삶을 10년 정도는 일심으로 달려가고 나면, 성령의 대가라고 말 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성령의 대가가 되었다고 나 스스로 자부하지만, 부끄럽게 우리 가족에게 고백하는 것이지, 교만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하루 하루 ‘더 더 더-’ 하는 욕구 불만에 눌려 살지 않고, 성령으로 즐기며 살게 된다. 인생을 다 살아 가는데, 아직도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령이 진정한 주인이면 성령께 집중하고 “예”, “아니오”가 분명히 갈라진다. 탁탁- 삶이 정리된다. 갈등이 없어진다. 양다리를 끼고 살지 않는다.
성령의 삶은 성령 주목, 성령 순종, 성령 충만, 성령 동행의 삶에 푹 젖어 사는 것이다.
고등어조림에 고등어 양념이 안되어 싱거우면, 양념에 적시면 된다. 그래서 성령 주목, 성령 순종, 성령 충만, 성령 동행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의 단계가 초보 단계가 아니라, 5~10년 가면서 원색적으로 나타나고, 생활속에서 성령이 나타나야 한다.
이런 말이 굉장히 힘을 준다.
김인수 목사가 내 설교를 듣고 대리석에서 불이 품어져 나온다고 말씀하니, 이 곳에서 말씀이 불과 같이 품어져 나오는 것이다.
영상을 1~2편을 보고, 말씀을 계속하겠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이 찬양 영상을 보면, 순교하면서 나온 것 같다.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주님만 따르며 살겠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우리가 ‘능력’을 구하고 있는데
1. 히브리어 : ‘오즈’, ‘하라크’
2. 헬라어 : ‘뒤나마이’, ‘뒤나토스’
3. 한문 : ‘능력’
절대 주님 앞에 잘난 사람이 되지 말고,
겸손을 가장한 굴종의 사람, 비겁한 사람이 되지 말라.
겸손한 사람은 누구에게 아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는 이유가 있다.
삶에 승리해라.
사람은 내가 지배하는 대상이 아니다.
내 똘마니로 만들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그를 사랑하여 섬기는 대상이다.
내가 가르치는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길 원하는 대상이지, 내가 선생이 아니다.
가르치려면 지옥 간다.
하나님! 악한 영을 쫓아 내시고, 주님의 인도함을 받게 해 주십시오. 아멘.
약한 자를 통해서 능력이 나타난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강해진다.
내가 강해 버리면, 주님의 능력이 나에게 오지 않는다.
자기를 비워야 한다.
아까 동영상 애기처럼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요즘 미스트롯 프로그램을 본다.
애들이 트롯트를 하는데, 얼마나 기가 차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고, 우리 교회 노래방을 만들려고 하다가, 안하기로 했다.
저녁에 기도하는데, “배목사야! 너가 트로트를 좋아하고 그러는데, 교회에서 부르면 좋은 영이 나오겠느냐?” 주님이 말씀하셨다.
유행가는 수위의 선이 없다.
유행가는 선을 넘어갈수록 폭발적이고, 사람들이 미치는 것이다.
더 강하게 한다.
요즘 아이들을 미친 듯이 환호해야 폭발적이기에, 안하기로 했다.
1. 귀신을 쫓는 능력을 가져라.
막9:20~29절, 귀신을 말할 때 교만의 귀신, 염려, 걱정, 두려움, 우울증의 귀신이라 한다.
사람의 감정을 귀신이라고 합니까?
본문 25절에,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라고 말씀하셨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것이 왜 귀신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는가?
성경은 ‘장애인’들을 ‘병신’이라고 하다. 한자로 ‘병든 육신’이라고 한다. 자꾸 써서 관용어가 되었다. ‘장애인’도 그렇다. 결국 말 장난이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모든 부정적인 것’도 귀신이라고 하셨다.
풍랑도 “바람아! 잠잠하라.” 이것은 귀신이다.
풍랑을 일으킨 것은 ‘거라사의 군대 귀신’이다.
예수님이 못 오도록 방해한 역사이다.
귀신이 떠나 가니까, 바다가 잠잠하다.
우리 삶의 모든 환란과 풍파는 모두 귀신 역사이다.
우리가 힘들고 신음하면, 귀신은 박수치고 좋아한다.
속지 말아야 한다.
설날에 속초 어느 펜션에 가스가 폭발해서 일가족이 죽었다.
귀신 역사이다.
그 가족 가운데 나 같은 기도의 영의 사람이 있었으면, 전부 안 죽었을 것이다.
내가 탄자니아에 선교를 갔는데, 탄자니아 호텔은 깨끗한 가정집인데 일류 호텔이라고 한다. 거기에 20명 있는 사람 가운데 내 얼굴이 가장 크다. 내가 리더가 된다. 내가 앉아 있는데, 바로 밖에 모스크 사원이 마주보고 있었다. 거실에서 보는데, 전부 유리창인데, 다 안밖이 보인다. 눈 감고 통성기도를 하는데, 누가 나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무려 15분 간 그랬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피하려고 했는데, 15분이 지나자 강물같은 평안이 왔다.
분명히 그 순간 누가 나를 총을 쏴서 죽이려고 했던 것 같다.
저번에 튀니지에 선교를 갔었는데, 훗날 너를 데려 갈 때, 어느 이국, 쓸쓸한 땅,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어 땅에 묻힐 것이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주님이 15분 후에 내게 오셨다.
그 날 나를 순교시키고 싶었지만, 내가 주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기에, 나의 헌신의 삶을 다 받고서 예물의 삶이 이루어지면 데려 가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응답이 왔는데, 차를 과속하지 말라고 하셔서, 사람들에게 절대 차를 과속하지 말라고 했다.
다음 날 비포장 길을 80Km를 가는데, 중간에 길에 깊은 웅덩이가 패여 있는데 차가 속도를 내어 급경사를 내려 가는데, 옆에 조수석의 임목사에게 속도를 줄이라고 했다.
그 순간 밑에서 오토바이가 올라 오다가, 바로 차 앞에서 넘어졌다. 차가 속도를 냈더라면 그 사람은 차에 깔려 죽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 때문에 모두를 지켜 주셨다. 선교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우리 일행이 내린 다음에 운전사 혼자 귀가하다가 자전거를 치어 경찰서에 갔었다. 귀신은 끝내 자기 할 일을 하고, 간다.
우리가 다 호텔 앞에 내리고 채 1분도 안되어서 돌아가던 승합차가 자전거를 치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와 상관이 없었다. 다른 차를 렌트했다.
그렇다. 우리의 짜증 하나도 그냥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혹시 여러분이 주님 일을 하는데 밥을 짓고, 찬양하고, 청소하고, 반찬 사러 가다 짜증 나면, 이는 반드시 사단 역사인 줄 알라. 다른 삶의 모든 영역에도 다 마찬가지이다.
6월장이라는 풍속이 있다. 유월절과 비슷하다.
방상시는 아주 무서운 귀신이다. 이것이 앞에 서서 귀신을 물리치려고 한다. 장례식에 악한 귀신을 물리치기 위에, 앞에 쎈 귀신을 세운다.
신라시대에 ‘처용’ 이야기가 있다.
전설인데 처용이 집에 돌아오니까, 귀신이 자기 아내와 간통을 하고 있는데, 처용이 마음에 요동이 없으니, 역귀가 처용 앞에 와서 잘못되었다고 빌었다.
방상시가 처용과 같다.
귀신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무서워 한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 무장해야 한다.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해야 한다.
예수 믿고, 성령 길을 걸어 가는데,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가 축사사역이다.
여러분 안에 숨은 어떠한 귀신들도 다 쫓아내길 바란다.
허블 망원경이 전파를 잡는 원판이 200m가 된다. 이것이 2천억 개의 별을 잡는다.
망원경이 잡을 수 있는 최대의 숫자가 2천억개의X1,000만이다. 우리가 보는 별빛은 천만 년 전의 비춰주는 별이라고 한다.
우리는 다 개미 같다.
우리 인생은 파리와 같다.
우리 이 시간에 찬양하고 기도하길 원한다.
(강물 같은 주의 평화)
2. 말씀의 능력을 가져라.
히4:12~13, 말씀의 능력을 가지길 바란다.
나는 말씀의 능력을 가졌다.
“나는 말씀의 능력이 있어!”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나는 말씀에 능력이 없어... 말씀대로 살지를 않아... 말씀을 짓밟고 살아...”
그러지 말라.
나는 하루에 15시간 골방에 있다.
하루 종일 늘 묵상하고, 영적 독서하고, 기도하고,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어떤 크고 작은 자리에서도 설교 시간에 청중을 압도할 자신이 있다.
오호라!! 대형 교회는 대형 교회끼리 놀고, 상류층은 상류층끼리 놀고, 개척교회는 개척 교회끼리 논다.
나는 내 작은 삶이 자랑스럽다.
이 길이 곧 예수님의 길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되고...
가난한 자는 하층민이고, 개척교회 목사이다.
진정으로 복음을 아는 사람은 개척교회 목사와 가난한 성도이다.
부자 교회, 부자 성도들이 과연 복음으로 살까?
일단 의문점을 붙여야 한다.
강남의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는 사람들이 교회에 벤츠를 몰고 오는데, 이 사람들은 생전에 감사헌금과 십일조를 하는 적이 없고, 만원짜리 주일헌금만 하고, 예배 끝나고 나면 온 가족이 바로 앞의 갈비집에 가서 외식하고, 그리고 놀러 간다고 한다. 그 곳은 식사 한 끼에 기본 50만 – 100만원이다.
저들에게는 하나님도 없고, 헌금도 없고, 신앙도 없다고 한다.
저들이 과연 예수를 믿는가?
관선희 목사 본인이 의심스럽다고, 강의 시간에 직접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소망교회를 목회하는 본인이 그렇게 말을 했다.
영락교회 3년 부목사 하면 집 한 채 가지고 나온다고 한다.
여러분의 말씀에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능력을 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능력이다.
말씀의 능력을 구하길 바란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잘 알고, 그대로 사는 것이다.
루터는, “나는 단순히 가르치고 설교하고 기록을 남겼다. 그랬더니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나도 똑 같다.
나는 예배하고 설교하고, 주님이 나를 먹여 살리신다.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진짜로 예배하고 진짜로 설교해라.
소중한 목사님들!
고민만 하지 마세요.
피와 땀을 쏟아가면서 말씀을 준비하십시오.
저처럼 하십시오.
저는 있는 힘을 다 쏟아,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합니다.
내가 말씀 준비를 잘 하고, 가르치는 것을 성심으로 잘 합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 않아?
내 안에 다 있다.
갈고 닦으라.
고민만 하지 말라.
사람은 자기 그릇이 다 다른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스스로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
어떤 성도는 교회에서 음식을 잘- 하고 잘- 베푼다.
내가 가난하여 돈이 없다면, 자기 잘 하는 것으로 전심전력을 해야 한다.
찬양을 잘 하든, 중보기도를 잘 하든...
자기의 영적인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당신은 동네 아저씨나, 아줌마가 아니라, 역사를 바꿀 사람이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게 하소서.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의 주인공이 되게 하소서.
기적의 주인공이 되게 해소서.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하소서.
나라의 주인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을 읽어라,
말씀을 꼭꼭 씹어 먹으라,
말씀과 함께 하라.
루터가 말씀을 선포하니까, 교황권이 무력화 되었다.
말씀의 주인공이 되라.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라.
말씀이 꽉 찬 자가 되라.
어떤 성황, 어떤 적합한 말씀이 탁탁- 터져나와야 한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구절 가운데 단어 하나만 생각하면, 성구 색인이 가능하다.
나는 목회 경험 중에 잊지 못하는 것 하나는, 심방을 하는데 어느 할머니가 위독하다고 며느리가 연락이 왔다.
임종 예배를 드리는데 축도가 끝나고 나니, 딸깍- 하고 숨을 거두었다.
홍성표라는 청년이 군대에서 맞아 뇌출혈이 와서, 제대하고 1년 만에 뇌종양으로 죽었다.
죽기 전에 전 교회가 40일 철야기도를 하는데 놀라웠다.
12월 1일부터 밤 40일 철야를 했다. 제가 앞에 앉아서 무릎을 딱-꿇으면, 새벽 5시까지 60명이 앉으면 용신을 못하고 다리를 못 풀고,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앞에 탁자가 있고, 1시간 동안 박수를 치면서 부르고, 성경 출애굽기 1장을 읽고, 즉석에서 설교했다. 원고도 없었다.
그냥 설교 준비가 없는데도, 출애굽기를 1장 읽고 강해하면 말씀이 쏟아지는데, 성령의 원음이 강했다. 쉬는 시간이 없었다. 무식하게 4시간 동안 통성기도를 했다.
그 기도회가 너무나 놀라웠다. 얼마나 기적이 많은지...
당시에 나는 방언도 못했었다 통성으로 간절히 기도하는데 우리 무궁교회에서는 전무후무한 성령의 역사였었다.
나는 그 곳에서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보고, 마가의 다락방을 보았다.
첫 40일 후에, 온전히 개근한 사람이 3명 밖에 없었다. 세 명이 40일 철야가 끝나자, 자리가 너무 비좁아서 40일 끝나면 졸업이니 나오지 말라 했다.
다시 2명 빠져 나가고, 그렇게 하여 무려 40일 철야기도회가 5개월까지 갔다.
나는 거기서 기도의 진수을 보았다.
귀신이 튀어 나간다. 병이 낫는다, 기적이 벌어진다, 축복이 임한다...
교회 안에 간증이 얼마나 많은지 난리였다.
소문에 소문이 온 교회에 퍼져, 모든 교인들이 기를 쓰고 철야기도회에 찾아왔다.
40일 철야가 5개월 갔지만, 일냔 후에 홍성표는 끝내 죽었다.
죽는 날 부목사인 나는 심방을 하는데, 12시 정오에 엄마의 전화가 왔다. “성표가 갔어요...” 했다.
서울 면목동 기독병원에 갔는데, 성표가 응급실 병상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데, 나는 그렇게 성결하게 빛나는 얼굴을 생전에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얼굴에 빛이 나는데 너무 이뻤다. 뺨을 만지며 울었다.
진짜 천국 가면, 이 청년처럼 평안이 있다.
벤허는 루 월레스 작품이다. 무신론자였지만 예수님에 대해 애로 소설을 쓰려고 성경 읽고, 자료를 수집하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벤허를 쓰게 되었다.
목사님들은 다 천국 가야 된다. 목사였기 때문에...
강0 주 권사가 주님 앞에 위대하게 쓰임 받길 원한다.
천0 희 목사님은 위대한 종이 된다.
천목사님이 앞에서 예언사역 하는 것을 보고, 내가 반했다.
영적 권위가 있고, 분별이 탁월하다.
내가 놀랬다.
하나님이 우리 <성령의군대>에 탁월한 종들을 세우신다.
안 목사님, 박0 식 목사님, 박0 목사님 다들 설교를 잘 한다.
말씀의 능력의 주인공이 되길 바란다.
3. 생명의 능력을 가져라.
요일1:1~3절
내가 살아 보니까, 40대가 가장 왕성하더라.
원숙한 40대를 살라.
생명, 예수, 말씀이다.
예수님 안에, 생명 안에, 성령 안에 있으면, 놀라운 능력이 나온다.
4. 불가능이 없는 잠재력의 능력을 가져라.
빌4:11~13절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처럼 되길 축복한다.
우리는 13절만 자꾸 인용을 하는데 그 전에 은혜 받고, 성령 받아, 어떤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처신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훈련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자리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성령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성령의 능력이 있을 때 역사한다.
초신자에게 성령님은 역사를 잘 않으신다.
초신자가 무슨 은사를 받았다 하는 것에 속지 말라.
말씀과 기도, 은혜, 믿음, 성령, 고난, 훈련, 은사가 다 천천히 함께 올라가는 것이다. 하나 하나 다 밟아 올라간다. 영성의 길에 왕도는 달리 없다. 건너뛰기란 절대 없다.
오직 나의 영성을 키워 가야 한다. 영성을 키워야, 문제를 없앤다. 나에게 들러붙거나 괴롭히거나 하는 것이 없다.
우리 교회가 처음에는 깡패, 똥 싸고 가는 놈이 있었는데, 성령 사역 하면서 없어졌다.
사람이 가다가 똥이 마려운데 쌀 때가 없어서, 이 곳이 똥 싸는 곳이라 온다.
목사가 능력이 없으면, 똥 사러 온다.
내 가족이 지저분하고, 내가 잡기에 능하다? 포르노 영화나 보고, 그러면 귀신이 다 안다. 사람도 몇 마디 말을 하면, 다 안다.
어느 교회에 가서, 그 교회가 깔끔한 것을 보면, 영적 모습이 다 보인다. 교회가 쓰레기통이면 목사가 쓰레기통이다.
“당신을 보니, 성령의 경지가 상당하십니다. 폭격하시겠네요. 깨버리시겠네요. 문제가 아무것도 아니네요...”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한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아니다. 여자도 강하고, 엄마도 강하다.
여자가 질투하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 여자의 잠재력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뇌를 2%도 안쓴단다. 98%는 잠재력 속에 갇혀 있다.
우리를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뇌이다.
사랑과 믿음, 축복... 전부 뇌에서 나온다. 뇌가 사랑을 하게 만들고, 키스도 뇌가 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뇌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뇌에서 전기가 나온다. 에너지가 많으면 많이 나오고, 적게 나오면 적게 나온다. 능력이 큰 사람은 뇌파가 강하게 나오는 것이다. 내 안에 잠재력이 강하게 나오는 것이다.
성령의 사람은 뇌의 능력은 최소한 2~4배를 개발해 나가는 것이다.
영안은 참 신비하다.
강0 나 목사를 보면 황금의 방에 앉아 있다.
핸드폰으로 성경을 보는 권사님은 미소가 어려 있다.
안0 옥 목사님을 보면 옛날 방앗간 앞에 서 있는데, 곡식이 나오는 것이 아닌데 틀이 금틀로 되어 있다. 뭔가 쏟아지면, 무엇인가 부자가 된다.
강권사를 보면 냇가에 앉아 있는데 돌을 모으고 있다. 흰 돌이다. 흰 돌을 모은다.
계시록에 보면, “이기는 자는 내가 흰 돌을 줄 것이요...” 한다.
하나님이 승리의 선물을 준다는 것이다.
강권사는 앞으로 챔피언이 되고, 12종 경기에 승리하다는 것이다.
<주님의 그 사랑은 놀라워>
여러분 안에 잠재력을 개발해 나가길 바란다.
내가 얼마나 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내가 얼마나 큰 그릇이 될 수 있는가?
내가 얼마나 큰 사역을 할 수 있는가?
빌4:6~7절에 답이 있다.
이렇게 기도의 5대 원칙을 따라 기도하는 사람은 다 된다.
“강한나 목사님이 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귀한 종이며, 하나님이 그렇게 높여 주시냐?” 물었더니, 다름 아닌 기도 때문이란다.
누군 금방석에 앉은 왕후가 되고, 나는 무수리이고...
열 받지!
그러면 당신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은 당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당신을 개발하신다. 사람은 역경속에서 개발된다.
만남이 중요하다.
여러분이 여기 온 것은 당신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맞춰서 연단하신 후에, 선물을 주신다. 하나님이 알아서 가난하게, 알아서 아프게, 알아서 굶기게 하신다.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 교민들이 진천, 아산에 수용되었다. 내가 얼마 전에 진천에 갔다 왔다. 그 곳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을 가두는데, 600m에 아파트와 학교와 어린이 집이 있는데 그 곳에 수용소를 세웠다.
이 주사파 간첩 문재인 정권 집권 초기에, 베트남에서 대통령 빼고 수석들이 다 모인 적이 있다. 내가 아는 선교사님이 일주일 동안 수행을 하면서 그들과 밀접해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나는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대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다들 동네 패거리였다”고 했다. “이런 동네 패거리들에게 나라를 맡겼다니...” 하고 탄식을 했다.
옛날 박근혜 패거리도 똑 같다.
너의 능력을 계속 훈련하고, 키워가라.
우리는 갈 길을 모른다.
하나님이 맞춤형으로 내 능력을 키우게 하고, 사람을 오가게 하고, 훈련 받게 하신다.
놀라운 일이 있다.
하나님이 쓰실 사람도 가는 곳마다 훌륭하게 통과해 나간다. 안 쓰실 사람은 그렇지 않다.
어떤 권사는 목숨 걸고 섬긴다.
그가 하는 모습이 바로 훈련이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쓰신다.
사람 많으면 신나게 설교하고, 사람 없으면 설교 안하고 그런 사람은 안 쓰신다.
진정한 진실, 성실, 순수함의 능력을 키워 가라.
첫째는 우리가 받은 것이 시시하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이다.
이것이 아무 가치가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 가장 위대하게 주시는데, 정작 우리에게는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극소수의 사람이 십자가의 위력을 아는 것이다.
둘째는 메시지를 전하는 목사가 시원찮다.
나와 같이 사는데 별 볼 일이 없다.
셋째는 별 볼일 없는 십자가의 메시지를, 별 볼일 없는 목사가 나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련하시고 섭리를 아는 사람은 이 세 가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딱- 간파하는 것이다. 내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일에 부름받았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감당해 내는 만큼 주님이 알아 주시는 것이다.
나는 올해 성령의 승부수를 뛰울 것이다.
나는 내게 오신 여러분을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한다.
창18:14절에 사라가 믿지 않을 때, 주님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다.
이런 주님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길 원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임하셨다.
너는 왜 네 입장을 말하느냐?
형편을 말하느냐?
왜 너의 돈 없음을 말하느냐?
믿음으로 말해야지!
하나님을 믿어야지...
“나는 행복합니다.
주님이 나를 쓰고 계십니다.
나는 부자입니다.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긍정적, 적극적, 창조적, 희망적, 사랑이 넘치는 마음을 가질 수 없는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길 바란다.
영혼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
나사로가 병들어 죽는다.
주님은 소식을 들었지만, 나사로가 마침내 죽기를 기다리고, 천천히 오셨다.
당신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이다.
베드로는 두려워 물에 빠졌다.
두려워 하지 말라.
두려움의 영이 만가지 사탄의 역사의 원흉이다.
내가 주먹이 없었다. 내 초등학교 친구가 싸움을 잘 했다. 전교 1등이었다. 그러나 내가 때릴 때, 나를 제압하지 않았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급장이 되었는데, 모두 말을 안 들으면 내 친구가 뒤에 있어서 욕을 하며 조용하라면 다들 조용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빽이 있다.
당신을 주님을 얼마나 의지하는가?
내 삶 속에서 일일이 그 분을 의지하라.
그렇다. 내 안에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라.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지만, 주님이 함께 하기에 다 할 수 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니, 그 분으로 하면 된다.
여기 목사님들은 위대한 목사님들이 되었다.
여러분이 된다고, 성령 안에서 된다고... 말하라.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찬양 부르고 기도한다.
🔥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필립 얀시 지음/차성구 옮김
좋은 씨앗/2001년 6월/456쪽/11,000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의 선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바로 그것이
양손잡이 같은 믿음 또는 ‘양면적인’ 믿음의 이론적인 의미다.
▣ 저 자 필립 얀시
「Christianity Today」의 편집인이자 고정 칼럼니스트이다. 연속해서 가장 주목받는 기독교 베스트셀러를 내놓고 있는 우리 시대 최고의 기독 작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미국 ECPA 선정 ‘올해 최고의 책’을 수상했으며,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등 모두 9권의 저서가 골드메달을 수상하는 등 공전의 저술 업적을 이어가고 있다.
▣ 역 자 차성구
총신대 영어교육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하나님의 교회 VS 교회주식회사』, 『존 파이퍼의 묵상』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 Short Summary
“도대체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환멸감을 느끼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와 같은 질문이 자리잡고 있다. 이 책은 의심에서 믿음으로 떠나는 영혼의 순례기로 필립 얀시는 의심,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뼈저린 갈망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우리처럼 똑 같이 이렇게 고백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분의 존재를 망각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하나님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신다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책에서 필립 얀시의 고백을 듣고 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잠시 잊었던 크리스천들에게 이 책은 내 믿음의 시작과 중간을 조용히 돌아보게 하며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믿음과 하나님을 마주서게 한다.
이 책에서 필립 얀시가 털어 놓는 영혼의 고뇌들은 정직한 내면의 고백들이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완성하실 회복의 역사에 어떻게 우리 개개인의 삶의 역사가 적극적으로 연관되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명쾌한 길잡이이다. 의심과 항변에 머무르지 않는 그의 영적 순례기는 이번에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더욱 견고하고 가까운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 차 례
1부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그 열망
어중간한 틈새/샘물 곁에서 느낀 갈증
2부 믿음: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의심을 위한 공간/연단 받는 믿음/양면성을 지닌 믿음/믿음 안에 살기/평범함에 정통하라/하나님을 아는 것
3부 하나님: 보이지 않는 그 분을 찾아
하나님의 속성/아버지의 이름으로/로제타 스톤/중재자
4부 연합: 나와 다른 하나님과 하나됨
완전한 변화/통제 불능/열정/영적 기억상실증
5부 성장: 천천히, 하나님을 따라 자라나기
어린아이/어른/부모
6부 회복: 온전한 관계의 마무리
실낙원/하나님의 아이러니/중매 결혼/성금요일의 열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제1부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그 열망
어중간한 틈새
교회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목사는 “그리스도는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십니다.” 또는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정복자입니다.”라고 선언한다. 비록 이런 말들이 무언가를 열망하게 할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말을 일상적인 경험속에 적용하지 못한다.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복음적인 개신교 전통 안에서 보냈다.
내가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말로 우리 삶에 힘을 발휘하는지 혼자 힘으로 밝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믿지 않는 사람에 비해 덜 타락하거나 타락한 세상과 떨어져 살아 갈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타락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떠나는 이번 여행의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하나님에 대한 환멸감을 느끼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은 질문이 자리잡고 있다.
저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이 존재한다는 것도 믿습니다. 단지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따름입니다.
하나님께 제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분은 나의 간구를 들어 주실까요?
그 분의 아들이 나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나 자신을 행운아로 여기고, 관계를 계속 유지해 가야 하나요?
제가 성숙하지 못한 신자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기대는 분명히 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께 실망하지 않기 위해 충분히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실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나요?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에게 무엇을 기대해야 하나요?
이 편지 속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계속 나온다.
우리는 인간의 오감으로 도저히 감지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가?
나는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다.
샘물 곁에서 느낀 갈증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하나님과의 모든 만남은 독특하고 개별적이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은밀한 만남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을 알고 사랑하도록 창조하셨지만, 정작 당신은 자신을 명확하게 드러내시지 않는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인격적인 모든 특성을 소유하셨다고 믿는다. 그 분은 예측할 수 없고,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때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신다. 문제는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어떻게 벽의 반대 편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하나님이 경험적으로 검증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 그러한 본능은 목마름이나 배고픔처럼 강력하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친밀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전통은 그러한 관계를 지나치게 남용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그들의 날조된 주장 속에는 다른 이들의 참된 경험을 날조시키고, 자신의 영적인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신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제2부 믿음: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의심을 위한 공간
나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관계를 세워 나가는 선행 조건이 된다. 하지만 믿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탐구하고 싶을 때는 슬그머니 의심이라는 뒷문을 열고 나간다. 왜냐하면 신앙을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히려 신앙의 필요성이 가장 절실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시계추처럼 신앙에서 불신앙으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계속 옮겨 다닌다면 결국 어디에 도달하게 될까?
아마 다시는 신앙을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내가 지금까지 신앙을 놓지 않고 굳게 잡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런 고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내가 교회 안에 남아 있는 가장 분명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른 특별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주여! 내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단 한 가지 일은 그런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다.
비록 나는 선천적으로 회의론자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노인들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신앙을 소유하게 되기를 갈망한다.
내가 그런 열망을 소망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런 믿음을 칭찬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기적과 관련된 본문들을 찾아 읽으면서 믿음도 다양한 면모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담대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 주었다. 더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마땅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보다 뒤쳐졌다. 믿음은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자라나고, 당연히 왕성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약화된다.
의심은 믿음이라는 공간에 숨어 있는 뼈대와 같다. 그런 골격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개된 장소로 이끌어 내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연히 밝히는 것이다.
의심은 언제나 믿음과 함께 존재한다. 성경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위기 속에서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욥기, 전도서, 시편,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 등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품는 의심의 가치를 이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거룩한 성경 속에 인간의 의심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솔직하게 자신의 의심을 드러내는 자들은 종종 의심을 초월하는 믿음이 자기 속에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딜레마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4세기에 살았던 한 프랑스 수도사가 어떤 당나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 당나귀는 두 개의 먹음직스러운 건초 더미 사이에 있었다. 정확히 두 건초 더미 중간에 서 있었다. 당나귀는 양쪽을 번갈아 보았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그런 상태가 계속 이어졌고, 결국 당나귀는 굶어 죽었다.
위험이라는 요소를 동반하지 않으면 믿음도 있을 수 없다.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은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미국의 소설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믿을 수도 없었고, 자신의 불신앙에 만족하지도 않았다.”
두 건초 더미 사이에 서 있는 당나귀처럼 그렇게 어중간한 상태는 큰 위험을 불러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열정을 제거해 버리기 때문이다.
믿음은 목적지가 뚜렷이 보이지 않고, 심지어 다음 단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인도자의 손을 붙잡고 그 분을 신뢰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토마스 그래함(Thomas Graham)의 말처럼, “믿음은 확신을 갖기 위해 용기있게 나아가는 이유다.” 하지만 이유 이상의 무엇이며, 이유 그 자체만으로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무엇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단계는 지금 보이는 범위 너머에 있기 마련이다.
의심이 이처럼 우리를 깊은 믿음으로 인도해 주기도 하지만 한편, 믿음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경우 의심은 마땅히 의문을 품어야 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또한 믿음의 다른 모습들을 깊이 연구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나는 그러한 의심 덕분에 오늘날까지 크리스천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은 완전히 상반되는 영향을 미친다. 비록 우리는 불청객처럼 다가오는 의심을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주지 않고 오히려 믿음의 양분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진로를 변경시키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
나는 점점 확실성 보다는 신비로움 속에서 진정한 평안함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우리는 파스칼처럼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그러나 확신하기에는 너무 부족하게’ 깨닫는 수준에 항상 머물러 있을 것이다. 내가 자라난 교회 환경은 의심을 위한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믿어라.”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규정된 진리에서 벗어나 헤매는 사람은 이상 성격자로 몰려 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의심의 동료를 필요로 한다. 교회는 언젠가 완성될 믿음을 위한 안전하고 든든한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나는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단 받는 믿음
“주여! 이 고난을 견뎌 낼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고난의 힘든 시기는 믿음을 성장시키고 강하게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위기의 시기를 거쳐 온 사람들의 관계는 더 굳게 결속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한 이 원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깃든 비밀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믿음은 주어진 관계 속에 어느 정도의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로 요약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흔들림 없이 신뢰하는가?
신뢰의 든든한 반석 위에 서 있다면,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관계는 깨지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올랐고, 욥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종기를 긁어야 했다. 다윗은 동굴에 숨었고, 엘리야는 사막으로 힘없이 걸어 들어 갔으며, 모세는 언제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물었다.
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며, 심지어 적대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다가오는 위기의 순간을 경험했다. 그들은 혼란스럽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분기점에 서 있었다. 화를 내면서 돌아설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들은 모두 신뢰의 길을 택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신앙의 거인들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헬라어 원본을 직역하면 좀 더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발생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일하신다.”
나는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겪은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 그 말씀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리고 나와 함께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내려 하신다는 확실한 느낌을 받았다. 확신하건대 그러한 과정에 있는 믿음은 언제나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응답되지 않은 채 “왜?”라는 질문이 계속되더라도 상급은 분명히 주어진다.
양면성을 지닌 믿음
순수한 믿음과 충실함을 겸비한 성숙한 신앙은 편집증과 정반대의 역할을 한다. 성숙한 신앙은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사랑 많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주변으로 끌어 모은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의 조건으로 삼는다. 좋지 못한 일이 생기면 그 일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과 결별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나쁜 일들까지 나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는다. 나는 그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는 선하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이 우주의 제1원리라는 전제에서 시작했다. 그러한 전제에 모순되는 주장은 다른 설명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매일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혹독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이 돌아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승인 하에 일어난 일이라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과 배치된다. 하나님께서 대변인으로 세우신 선지자들의 글을 읽어 보라.
그들은 우상숭배, 부정한 행동, 폭력, 그리고 인간의 죄악과 반역으로 나타난 여러 증상들에 대항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복음서를 읽어 보라.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있었던 온갖 장애와 불구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심으로써 위선적인 종교 집단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위대한 신비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반대하시는 일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분을 비난하는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C. S. 루이스는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심지어 자신의 기대와 정반대되는 일이라 하더라도-을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와 유익을 가져다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니케아의 그레고리는 성 바질의 믿음이 ‘양손잡이’ 같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바질이 오른쪽으로는 기쁨을 받아들이고 왼쪽으로는 고통을 받아 들이면서, 두 가지 모두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는 요소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드코사드는 이렇게 충고했다.
“지금 이 순간을 최상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 하나님의 보편적인 선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라. 모든 일은 하나도 예외없이 우리의 성화를 위한 도구며 수단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의 선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바로 그것이 양손잡이 같은 믿음 또는 ‘양면적인’ 믿음의 이론적인 의미다.
믿음 안에서 살기
믿음은 내가 만들어 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터득해야 하는 기술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내려 오기 때문에 매일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는 “두려워 말라”라는 명령을 365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현대 도시 생활의 모든 요소들이 우리가 내면을 깊이 파고들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는 돈에 대해 걱정하고, 소유해야 하고 알아야 할 것에 대해 걱정하고, 경쟁자들에 대해 걱정하고,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일들에 대해 걱정한다.
머튼은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비밀을 발견했다. 우리의 유일한 행복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며, 우리가 오직 하나님 만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를 압박해오는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의사는 사고로 절단된 손가락을 다시 붙이는 수술에 전문가였다. 일단 수술실에 들어가면 현미경을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 동안 끊임없이 응시하며 사람 머리카락 보다 가는 신경망과 힘줄과 혈관을 분류하고 연결시켜야 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환자의 손가락은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거나 감각을 잃게 된다. 그는 수술하는 동안 잠깐 커피를 마시지도 못하고 화장실에 갈 수도 없다. 언젠가 그는 새벽 3시에 비상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나갔다.
하지만 수술이 너무 복잡해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마음에 자극을 주어 수술에 집중할 생각으로 그 수술 결과를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수술이 진행되는 몇 시간 동안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자기 어깨 위해 손을 올리고 곁에 서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수술했다.
그런 방법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 후로 그는 수술 결과를 자기가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바친다는 마음으로 수술했다. 그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일깨우며 말했다.
“지금 아주 어려운 수술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수술을 당신께 바치고 싶습니다. 내가 수술을 하는 동안 당신 생각을 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때 그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의 삶도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가 매일 행하는 사소한 일들-전화를 받고, 직원을 고용하고, 의학 잡지를 읽고, 환자들을 만나며, 수술 일정을 잡는 것-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인식은 세상의 일들 속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전보다 간호사들을 더 배려하고 존중하며, 환자들을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재정 문제에 대해 거의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적인 환경, 은혜의 활동, 마음의 완악함”
이것은 파스칼이 자신의 비밀 일기장에 적어 놓은 것이다. 바로 이 세 가지 요소가 우리의 삶을 에워싸고 있다.
외적인 환경이 우리를 죄어온다. 가족 간의 다툼,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재정적인 근심 등 무수한 걱정거리가 압박해 온다.
은혜의 활동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더욱 깊은 실체에 근거를 두도록 도와준다.
마음의 완악함이란 무엇일까?
세 가지 요소 가운데 유일하게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변화란 의지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작용으로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은혜를 간구하며 끊임없이 요청하는 수 밖에 없다.
평범함에 정통하라
나는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 내 마음을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고요함 가운데 느끼는 평온과 평화가 하루 종일 계속되기를 소망한다. 혼란과 소란함으로 가득 찬 하루 가운데 겨우 30분 정도를 할애해 묵상 시간으로 지키고 있지만, 그 노력은 상당한 가치과 효력이 있다.
나는 공개적으로 신앙에 대한 글을 쓰고 강연하는 사람으로서, 내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고 위선적으로 보일 때에도 여전히 나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는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내 삶의 이면이 너무나 혼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놓인 문제들을 처리해 주실 것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위대한 승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때 성취된다.
충실한 사람들은 자신이 상관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해야 하는지, 아니면 마지 못해 억지로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앞에 놓여진 일들을 책임지고 수행함으로써 믿음 생활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나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나의 연주 실력이 오직 한 가지 요소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연습이다. 음계와 아르페지오는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웅장하고 멋진 작품을 연주하려면 먼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에 정통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
다른 사람을 알게 되는 과정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지에 대해 빛을 비춰 준다.
나는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존재들’을 아는 데에는 무엇보다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가시적인 세계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종종 가시적인 세계를 ‘빌려오는’ 경우가 있다. 인간들은 비가시적인 세계와 접촉하기 위해 교회나 영적인 훈련, 또는 성만찬 같은 ‘은혜의 수단’들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기도는 호흡 기능을 한다.
이블린 언더힐의 주장대로 “우리는 감각과 영혼을 가진 피조물이므로, 두 가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랑과 결혼이라는 요소를 끊임없이 사용한다.
토마스 그린은 성공적인 기도 생활과 성공적인 결혼 생활이 비례한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결혼 서약과 하나님과의 언약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기 마련이다. 두 약속 모두 충실함을 요구하나, 하나님과의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이라는 의미에서 믿음을 요구한다.
우리는 오묘한 일과 확연히 드러난 일들 사이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열망을 충족시켜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위대한 미지의 존재시다.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는 우리를 보존하고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다.
제3부 하나님: 보이지 않는 그분을 찾아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며, 사람들과 논쟁하고(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지기도 하신다.)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때로는 의식적으로 억제하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주저하신다.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무수히 많은 일들을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급한 분이 아니다. 그 분은 섣불리 행동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에게 적대적인 상황에 직면하신다. 그 분은 우리에게 감춰진 다른 영역까지 한 눈에 보실 수 있다. 육체의 구속을 받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신다. 그 분은 우리의 관점에 맞게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제한하신다.”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하나님과 인간 존재 사이의 접촉은 양쪽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작용한다.
하나님은 자유하시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거나 감추는 것에 자유하시고, 이 땅의 문제에 개입하거나 개입하지 않는 데 자유하시며, 자연 안에서 역사하거나 자연의 외부에서 역사하는 데 자유하시다. 세상을 통치하거나 세상에 의해 멸시받고 거절당하는데 자유하시며, 자신을 드러내거나 제한하는데 자유하시다.
인간의 자유는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나는 자유하신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분을 만나기에 적절한 환경 속에 나 자신을 두는 것 뿐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확실하고 보장된 방법을 제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결정하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도로시 세이어는 하나님을 창조적인 예술가로 생각할 때, 그 분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 분의 창조 작품 -아이디어(Idea), 표현(Expression), 인식(Recognition)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된다- 을 통해 가장 밝게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러한 창조 행위를 재생산함으로써 우리들은 유추를 통해 삼위일체를 이해하게 된다.
세이어의 견해를 ‘글 쓰기’라는 창조행위에 적용시켜 보았다. 창조적인 과정의 맨 첫 단계에서는 오로지 아이디어만 존재한다. 드디어 글쓰기를 시작할 때가 아이디어를 드러내기 위한 ‘최고의 표현’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작품이 끝났다고 창조행위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이어는 이 마지막 단계를 ‘인식’이라 불렀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그 분의 실질적인 임재가 필요했다. 구약성경은 우주의 주권을 가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결점 많은 피조물들에게 찾아오신 놀라운 사건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 그 마음 때문에 그 분은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토록 찾아 다니셨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아무리 멀리 벗어나더라도 언제나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셨다. 히브리 민족을 감동시킨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그 분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구약 성경은 무한한 사랑의 마음을 품고 계신 성부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다.
로제타 스톤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결함’ 속으로 들어오셨다. ‘전지하심’은 아람어 음소 하나 하나를 배워야 하는 제한된 두뇌로 바뀌었고, ‘편재하심’은 두 발로 걷고 때로는 나귀를 타야 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전능하심’은 나무를 켤 정도의 힘은 있었지만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나약한 상태로 변했다.
물론 복음서는 예수님의 비범한 능력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친밀해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우리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위해 하늘나라를 포기하셨다. 그분은 인간이 되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 비가시적 세계와 가시적 세계 사이를 잇는 연결 고리를 다시 복구하셨다.
리차드 니버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로제타 스톤에 비유했다. 이집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어느 날 검은 돌을 발견했는데 그 돌에는 헬라어와 일상적인 이집트 문자, 그리고 그 때까지 해독하지 못했던 상형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학자들은 상형문자를 완벽하게 섭렵했고, 그것으로 희미하게 알고 있었던 세계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고, 제대로 발견하지도 알지도 못한다면, 믿음의 로제타 스톤이신 예수님을 꿋꿋이 바라보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중재자
하나님은 알고 싶어하면서 성령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더불어 자신의 이름을 죄악에 물든 사람들에게 맡기는 모험을 감행하셨다.
누군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성령님께서는 개인적이라는 말을 전혀 새로운 단계로 끌어 올려 주신다. 어떤 종교도 이와 같은 엄청난 주장을 하지 않는다.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복종해야 할 외적인 존재로만 머물러 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자신에게 향하는 직접적인 접촉 채널을 열어 주신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의 내적 자아 안에 살아 계셔서, 두 자아 사이에 조화를 이루신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내외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통합된 자아를 소유하게 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될 때의 ‘불리한 점’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교회에 넘겨 주셨을 때 그 분은 사역의 책임까지 모두 넘겨 주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거부하는 것이다.
연속되는 교회의 실패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자신을 낮추신다는 증거이며, 인간 존재에 대한 간접적인 경의의 표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분의 사역을 위임하신 것이다.
제4부 연합: 나와 다른 하나님과 하나 됨
완전한 변화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는가?
은혜다.
내가 그 사랑을 받을 만한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다. 사랑으로 그 분의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풀러신학교의 이안 피트-왓슨 교수는 “어떤 것은 가치 있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가치 있다.”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다.
성경적인 적용을 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본질적인 가치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 분의 사랑은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은혜란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이 귀중한 것이지만,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고, 아무리 보아도 사랑스럽지 않은 대상에게 고귀한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의 행위다.
어떤 것은 가치 있기 때문에 사랑 받고, 어떤 것은 사랑 받기 때문에 가치 있다. 신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두 번째 범주에 해당된다.
캐슬린 노리스(Kathleen Norris)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대담한 비유를 통해 완전히 바꿔놓았다.
지난 봄, 어느 날 아침에 나는 어린아이를 안고 공항의 탑승구를 빠져나가는 젊은 부부를 보았다. 아이는 다른 사람들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을 보자 마자, 아이는 그가 누구이든지, 젊었든 늙었든, 예쁘든 추하든, 지루한 표정이든 행복한 표정이든 아니면 근심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든 간에 순수하고 환한 얼굴로 기쁨을 나타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어색한 분위기의 탑승구가 천국 문으로 변했다. 나는 그 아이가 자기에게 반응을 보이는 어른들과 노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야곱처럼 위엄에 눌린 느낌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실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분은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쁨을 누리고, 당신이 만든 피조물들을 보며 ‘좋다’고 말씀하고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안식하셨다.
시편 139편에서 말한 것처럼, 흑암은 하나님께 아무 것도 아니다. 그 분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행하는 무수히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보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피조물로 여기신다.
오로지 하나님과 그리고 사랑을 제대로 받고 자라는 어린아이 만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께서는 내 속에 살아 계셔서 하나님께서 이식시켜 주신 새로운 신분을 버리지 못하게 방지하는 능력을 행하신다.
나의 영적인 면역 체계는 하나님의 임재가 내 속에 있어야 하며, 다른 외부 요소가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매일 일깨워 주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
나의 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분은 나에게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분의 존재를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신다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테일러는 이러한 존재 의식을 유지하는 열쇠를 ‘집중’이라 했다.
통제 불능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실제적으로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서 보여주신 성품들이다. 그 분은 자신이 보여주신 것과 동일한 성품들을 길러 주기 위해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를 자신의 거처로 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분은 성령을 통해 내면에서 활동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들 -보혜사, 돕는 자, 모사- 등은 한 개인의 변화가 내면에서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반복되는 좌절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지적한다.
“하나님께서는 일상에서 다가오는 도전들에 맞서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때로는 지극히 ‘사소한’ 일들이 ‘근본적인’ 문제일 때도 많다. 철저한 복종을 위해 부르셨다는 말은 지루하고 짜증나게 하는 사람의 말도 인내를 가지고 들어 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는 잘못을 저지른 친구를 사랑으로 대하고, 누가 보더라도 하찮은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상세한 조언을 주는 것도 포함된다.”
결혼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관계’다. 깊은 우정도 부부 관계와 마찬가지로 성숙한 관계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부부 관계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면서 일체감을 성취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남편과 아내가 공유하는 단일한 정체성이다. 물론 그 분은 나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이지만 많은 부분을 함께 공유하신다.
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혼 관계보다 더 확실하게 설명해 주는 것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사랑은 그런 식으로 힘을 발휘한다. 사랑의 대상이 눈에 보이든 눈에 보이지 않든 사랑의 원리는 동일하게 작용한다.
열정
많은 신앙의 위인들에게는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성공이나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인물들도 그와 같은 열정으로 하나님께 반응했다. 모세는 하나님과 격렬한 논쟁을 벌여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도록 설득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거머쥐기 위해 밤새도록 씨름했고, 속임수를 쓰기도 했다. 욥은 하나님께 대항해 신성 모독적인 분노를 겁없이 쏟아냈다. 다윗은 십계명을 어겼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 역시 그들을 단념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분노와 비난, 심지어 의도적인 불순종까지도 다루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한 가지 요소가 있었다. 바로 무관심이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욥과 같은 위기는 최악의 위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좀 더 미묘한 위험에 직면한다. 고장난 컴퓨터, 결제해야 할 신용카드 금액, 다가오는 여행, 친구의 결혼식, 일상적인 생활의 번잡함이 쌓여 점점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부터 가장자리로 쫓아 낸다.
어떤 날에는 사람들을 만나고, 음식을 먹고, 일을 하며, 결정을 내리느라 하루 종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긴 공백은 욥이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험을 가져 올 수 있다.
영적 기억 상실증
나는 내면의 평안과 평온함에 대한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컴퓨터의 프로그램 에러로 그 글들이 지워지면, 모니터 상의 전자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나의 내적 평안과 평온함은 사라져 버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떻게 음식을 먹기 전에 잠시 멈추고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이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버터 좀 건네 주세요”라는 말로 바뀔 수 있는가?
차가 고장나면 나의 뇌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가장자리로 밀어 내고, 오로지 그 문제 만을 생각한다. 물론 나도 거의 매일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낸다.” 하지만 그 시간은 업무 목록 가운데 한 가지 항목으로 변할 때가 많고, 그나마 원고 마감 일이 닥치면 매우 짧게 줄어든다. 다른 지역을 여행하느라 정상적인 일과를 지키지 못할 때는 식사 전 서둘러 드리는 기도를 제외하면 하루 종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잊어 버린다.
우주의 본질과 내 삶의 중심점을 잊어버린다.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에 대해서 로렌스 수도사는 다음과 같은 해답을 제시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가끔 그 분을 기억하고 예배하고 그 분의 은혜를 구하면 됩니다. 가끔 그 분께 고통을 아뢰고 그 분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면 됩니다. 당신의 노동 속에서 그 분이 주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할 수 있는 대로 그 분에게서 위로를 얻으십시오.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할 때에 가끔씩 당신의 마음을 그 분께 드리십시오. 최소한의 기억이 언제나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릴 것입니다. 그런 시간에 큰 소리로 외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십니다.”
로렌스는 영성의 깊이는 지금 하는 일을 바꾸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던 일상적인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 함으로써 깊어진다고 말했다. 로렌스는 어디서나 하나님을 발견했다.
제5부 성장: 천천히, 하나님을 따라 자라가기
신약성경에서는 성경의 저자들이 말하는 성장 과정의 단계를 편의상 세 단계 - 어린아이, 어른, 부모 –로 분류해 보았다.
영적인 생활 속의 포괄적인 단계를 세 범주로 요약한 것이다.
어린아이
먼저 이제 막 순례를 시작한 크리스천이나 어린아이 단계에 머물고 있는 자들에 대한 구절들을 살펴 보자.
시편 131편은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와 성숙하지 못한 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의 차이점을 잘 말해 준다. 바이저는 이 본문을 아래와 같이 주석했다.
“.... 아이는 점점 어머니를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여기는 습관을 깨뜨리고, 스스로 어머니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 간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들도 신앙의 연단을 겪은 후에는 하나님을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말고, 스스로 그 분을 열망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 삶의 중심점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옮겨진다.”
율법주의는 영적인 성장 과정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특히 믿음의 유아기를 잘 드러낸다. 바울은 지나치게 율법에 얽매이는 것이 얼마나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지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은혜의 사도였던 바울은 율법이 아닌, 사랑에 기초한 자유를 강조했다.
바울은 구약 시대를 되돌아보면서 옳지 못한 의존의 모습을 발견했다. 무슨 요구든 다 들어주는 부모 손에서 자란 아이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의존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짜증 내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성숙한 상태로 옮기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어린애처럼 반항하는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어른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영원한 관계가 법이나 규칙이 아니라, 신뢰와 은혜와 용서의 토양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이 강요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사랑이 희생을 요구할 때는 불평하지 않고 상대방의 뜻에 따른다. 나는 부부 생활의 이런 저런 모습을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성숙한 관계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는지 많이 배우게 된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엄격한 자기 훈련이 아니라 어떤 희생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만한 풍성하고 가치 있는 새로운 삶이다. 물론 그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연습이 필요하다.
루이스의 말을 인용해 보자.
“언젠가 자유롭고 기쁘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가운데 우리는 의무적으로 믿음의 행동들을 한다.”
머튼, 베네딕트, 아씨시의 프란시스, 존 웨슬리, 테레사 수녀, 샤를 드푸코 같은 인물들에 대해 연구하다 보면, 철저히 훈련의 삶을 살다 간 그들의 영혼 속에는 의지적인 결심보다 자발성과 기쁨이 충만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자유함을 영적 훈련에 투자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심오한 자유를 보장받았다.
부모
쟝 바니에르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서 우러나는 세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첫째, 부모에게 사랑 받으려는 욕구와, 둘째, 성장한 후에는 친구를 사귀고 싶어하는 욕구를,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보다 나약한 사람들을 섬기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성숙한 크리스천은 육신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녀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부모의 단계까지 성장하기를 갈망하신다. 그 단계에 이르러야 하나님을 닮아 가는 모습을 제대로 드러 낼 수 있다. 진 베니어가 주장한 것처럼 그렇게 고상한 단계는 영적 발달에 필수적인 요소다. 부모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무조건적인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닫는다. 로날드 롤하이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녀들을 바라보는 단순한 행동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이기심을 깨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베푸는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다. 이타심과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해지며,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의 인생이 좀 더 실질적이고 중요하게 되기를 바라는 열망을 품게 된다.”
제6부 회복: 온전한 관계의 마무리
실낙원
‘선함, 타락, 구속’이라는 과정은 이 지구상의 모든 만물에 적용된다. 가족, 교회, 경제, 정부, 기업 등 인간의 손길이 닿는 모든 영역은 원래의 선함에서 흘러나오는 좋은 향기와 타락에서 나는 더러운 악취를 함께 내뿜고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느리게 진행되는 구속의 역사를 바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제시하는 ‘줄거리’며 모든 역사의 줄거리다.
국회 도서관 직원이었던 다니엘 부어스틴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점을 다른 세계관들과 비교했다. 불교인들은 세상의 시작과 끝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단지 이 세상의 문제로부터 해탈하기 위해 노력한다.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세상의 문제들을 달게 받아들인다.
부어스틴은 과학과 예술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토양에서 자라났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일그러진 세상에 항거하려는 인간의 본능은 구속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은 중요하고, 역사도 중요하며, 각 개인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구속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역사가 약간 기울어진 상태로 멀리 돌아가긴 하지만 해결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처럼 이상한 실존 속에서 경험하는 아름다움과 가치, 그리고 의미있는 흔적들은 아직까지도 원래의 의도를 간직하고 있는 선한 세계의 자취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고통과 불안, 잔혹함과 불법으로 인한 아픔은 그러한 선한 의도에서 벗어난 타락의 자취들이다. 사랑, 정의, 평화, 그리고 연민을 드러내는 모든 모습은 궁극적으로 구속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들이다.
하나님의 아이러니
나는 창세기 첫 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읽어 나가면서 세계의 역사 속에 흐르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줄기를 발견했다. 그 한 가지로 악은 선한 것을 사로잡아 그것을 파괴한다. 그런 세력에 반대해 하나님께서는 악이 망쳐놓은 것을 회복시키는 능력의 물줄기를 보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가장 나약해 보이는 병사들을 통해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셨다. 바로 결점 많은 인간 들이다. 이러한 전략 때문에 종종 하나님께서 전투에 패배하신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능력과 영광 가운데 악의 통치를 영원히 끝내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인 이 세상에 뛰어난 방법으로 관여하실 것이다. 그 분은 우리에게 창조의 원래 의도를 반역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반역 행위조차 그분이 세워 놓으신 ‘회복’이라는 최종 목표를 위해 사용된다. 내가 하나님의 그러한 계획을 받아 들인다면 나는 건강, 재능, 금전 등의 좋은 요소들을 사용하시도록 바칠 수 있다. 무능력, 가난, 역기능적인 가정, 실패 등의 나쁜 요소들은 나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도구로 ‘재활용’될 수 있다. 크리스천들은 모든 역사가 선하신 하나님께서 원래의 의도대로 피조물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결론에서 그 결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본다.
중매 결혼
다른 문화권에서 온 크리스천들과의 대화를 통해 중매 결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유용한 모델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매 결혼하는 부부들은 부모가 결정하면 거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와 유사한 과정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용된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의 특성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유하시고, 내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이미 존재하는 ‘인격’과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나 또한 내 마음대로 못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계시한 대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나 자신을 비록 흠은 있지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중매 결혼을 약속한 배우자처럼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만을 생각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현대의 사고 방식으로 보면 병적일 정도로 중매 결혼의 사고방식을 극단적으로 고수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은 감옥에서도 진정으로 기뻐한다고 말했다. 그런 속박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의 실패와 그 동안 겪은 고난을 자랑했다. 그는 매를 맞고, 돌팔매질을 당하며, 파선당한 것과, 그 외의 자연 재해를 입은 것을 자랑했다. 또한 배고픔과 목마름, 육체적인 불편함과 응답되지 않는 기도들을 자랑했다.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당당히 밝혔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성 금요일의 열매
알콜 중독자들을 돌보는 시설인 AA의 공동 설립자였던 빌 윌슨은 이런 말을 했다. “진정한 힘은 나약함으로부터 나온다. 부활이 있기 전에 먼저 치욕스러운 고통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역설을 너무나 절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린 것인가! 고통은 과거 행동에 대한 대가일 뿐 아니라 영적인 재탄생을 알리는 시금석이다.”
그러한 아이러니는 회복 과정을 통해 계속된다. 매일의 삶에서 알콜의 유혹을 물리치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된다. 그들은 기적의 약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경험한다. 은혜의 능력은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함으로 날마다 조금씩 활성화된다.
마지막으로 세상은 구속될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최종적이고 전체적인 요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이러니의 정점에서 궁극적인 악을 궁극적인 선으로 변화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의 폭력과 증오를 통해 역사하신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내신 시간의 결과로 역사는 영원히 변화되었다.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계획은 결국 승리하게 될 것이다. 역사는 그런 계획의 세부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을 따름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음 당하신 날을 성 금요일이라 부른다. ‘어두운 금요일’이나 ‘비극적인 금요일’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조지 스타이너(George Steiner)는 말한다. “기독교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성 금요일은 십자가의 날이다. 비기독교인들과 무신론자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불법과 끊임없는 고통, 그리고 버림 받음과 죽음을 알고 계신다는 의미다. 그 분은 인간이 처한 상태의 역사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개인적인 일상의 세밀한 부분까지 광범위하게 알고 계신다. 우리는 인간의 역사적인, 그리고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운명이라 할 수 있는 고통과 사랑의 부족함과 외로움을 필연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승리의 주일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크리스천들에게 그 날은 부활과 정의와 죽음을 이긴 사랑의 친밀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토요일의 긴 여정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