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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44권
11. 환인무작품(幻人無作品)을 풀이함
[살바야]
【경】 그때에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幻人]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살바야(薩婆若)를 얻으며,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이 선(禪)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찬제(羼提)바라밀ㆍ시라(尸羅)바라밀ㆍ단(檀)바라밀을 배우고 4념처(念處) 내지 18불공법(不共法)과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배우면 살바야를 얻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겠느니, 생각하는 대로 내게 대답해 보거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色]이 환(幻}과 다름이 있으며,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환과 다름이 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눈[眼]이 환과 다름이 있으며, 나아가 뜻[意]에 이르기까지가 환과 다름이 있더냐?
빛깔[色] 내지 법(法)이 환과 다름이 있더냐?
눈의 경계[眼界] 내지 의식의 경계[意識界]가 환과 다름이 있더냐?
눈의 접촉[眼觸] 내지 뜻의 접촉[意觸], 눈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 내지 뜻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이 환과 다름이 있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4념처(念處)가 환과 다름이 있으며, 나아가 8성도분(聖道分)에 이르기까지가 환과 다름이 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이 환과 다름이 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단(檀)바라밀이 환과 다름이 있으며, 나아가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가 환과 다름이 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환과 다름이 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물질이 환과 다르지 않고 환이 물질과 다르지 않아서 물질이 곧 환이요 환이 곧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 환과 다르지 않고, 환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과 다르지 않아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곧 환이요 환이 곧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눈이 환과 다르지 않고 환이 눈과 다르지 않아서, 눈이 곧 환이요 환이 곧 눈이기 때문입니다.
눈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에서 뜻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까지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4념처가 환과 다르지 않고 환이 4념처와 다르지 않아서 4념처가 곧 환이요 환이 곧 4념처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환과 다르지 않고 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다르지 않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곧 환이요 환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환에 더러운 것[垢]이 있고 깨끗한 것[淨]이 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환에 나는 것[生]이 있고 없어지는 것[滅]이 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법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면 이 법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살바야를 얻게 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5수음(受陰)의 임시의 이름[假名]이 바로 보살이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5수음(受陰)의 임시의 이름에 나고 없어지고 더럽고 깨끗한 것이 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법에 이름[名字]만 있을 뿐,
몸도 아니고 몸의 업[身業]도 아니며, 입[口]도 아니요 입의 업[口業]도 아니며, 뜻도 아니요 뜻의 업[意業]도 아니며,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면,
이와 같은 법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살바야를 얻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살바야를 얻게 되나니,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되 마치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幻人]과 같이 배워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5음(陰)이 곧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이며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이 곧 5음이라고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5음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살바야를 얻게 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5음의 성품은 있는 바가 없으며, 이 있는 바가 없는 성품조차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치 꿈과 같은 5음으로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살바야를 얻게 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꿈의 성품은 있는 바가 없으며, 이 있는 바가 없는 성품조차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치 메아리와 같고 그림자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변화한 것[化]과 같은 5중(衆)으로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살바야를 얻게 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메아리나 그림자ㆍ아지랑이ㆍ변화한 것의 성품은 있는 바가 없으며, 이 있는 바가 없는 성품조차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6정(情)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분별[識]이 곧 6정이요 6정이 곧 5중(衆)이니,
이 법은 모두 내공(內空)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으며,
나아가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습니다.”
【논】
【문】 수보리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일로써 부처님께 묻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환술로 된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부처님이 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될 수 없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은 거짓이요 본말(本末)이 없어서 이런 일은 대답하기가 쉽거늘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 묻는가?
【답】 위의 품(品)에서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심히 깊은 공의 이치를 대답하셨으므로,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모든 법은 한 모양[一相]이어서 분별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이나 실제의 보살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보살은 모든 공덕을 행하여 부처님이 될 수 있거니와,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은 진실이 없고 사람의 눈만을 속일뿐이요 부처님이 될 수는 없다.”라고 한 것이다.
【문】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은 공덕을 행할 수 없다. 심식(心識)이 없기 때문이거늘, 어떻게 “행한다.”라고 하는가?
【답】 비록 실제로는 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보기에 행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행한다 한다.
마치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이 음식이나 재물이나 7보를 가지고 출가한 이에게 보시하며 계율을 지니고 인욕하고 정진하고 좌선(坐禪)하며 설법을 하는 등과 같나니,
지혜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행한다고 여긴다.
그것이 환술인 줄 모르는 탓이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만일 부처님의 말씀과 같아서,
모든 법은 한 모양이어서 있는 바가 없고 단지 그것은 거짓일 뿐이라면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과 실제의 보살에서 부처님에 이르기까지가 똑같아서 다름이 없다.
마치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도,
환술로써 부처님이 되어서는 6바라밀을 행하고 악마의 병사를 항복 받으며,
도량(道場)에 앉아서는 부처님 도를 이루고 광명을 놓으며 법을 설하면서 사람들을 제도하며,
실제의 보살도 진실한 도를 행하여 부처님이 되어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여기에 어떤 차별이 있는 것일까?’라고 하므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겠으니, 그대는 뜻대로 내게 대답하여라.”라고 하신 것이다.
【문】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바로 대답하시지 않고 도리어 물으시면서 뜻대로 대답하게 하시는가?
【답】 수보리는 공의 지혜로써 삼계(三界)의 5중(衆)이 모두가 공이라고 관찰하면서 마음으로 싫어함을 일으키고 모든 번뇌의 습기를 여읜다.
따라서 비록 전체의 모양[總相]으로는 모든 부처님의 법이 공하다고 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귀히 여기는 바가 있어,
“부처님의 법은 마치 환과 같아서 있는 바가 없다.”라고 관찰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마치 그대가 5중의 공으로써 증명을 삼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또한 그러하며,
그대가 세간의 5중이 공하다고 보듯이 내가 불법을 보는 것도 또한 그러하느니라.”라고 하신다.
이 때문에 수보리에게 물으시되,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이 환과 다름이 있으며, 환이 물질과 다름이 있더냐?
나아가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
만일 다르다면 그대는 물어야 하거니와,
만일 다르지 않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하리라.”라고 하시자,
수보리는 다르지 않다고 했다.
【문】 물질이 환과 다르지 않다 함은 그럴 수 있나니,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에게는 물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 환과 같아서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는가?
【답】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에게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모양이 있는데,
지혜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 있다고 여긴다.
또한 부처님은 비유를 들어서 사람들에게,
“5수중(受衆)은 거짓이요 마치 환과 같다.” 함을 알게 하려 하셨다.
5수중이 비록 환과 다름이 없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이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까닭에,
그들을 위하여 비유를 들어서 중생들에게,
“환은 거짓이니, 5수중이 비록 있다 하더라도 환과 차이가 없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 때문에 수보리는 일심으로 헤아리면서 5수중과 환은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은 물질로 된 육안(肉眼)을 속이면서 근심과 기쁨과 괴로움과 즐거움을 내게 하듯이,
5수중도 혜안(慧眼)을 속이면서 탐욕과 성냄과 모든 번뇌 등을 내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환이 조그마한 주술(呪術)과 사물과 언어를 근본으로 삼아 갖가지 일과 성곽(城郭)과 집과 누각 들을 나타내듯이,
5수중도 또한 전생의 조그마한 무명이라는 재주[無明術]의 인연으로 모든 지어감[行]ㆍ분별[識]ㆍ이름과 모양[名色] 등의 갖가지가 있게 되나니,
이 때문에 “다르지 않다.”라고 말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헛것을 보고 집착하는 마음을 내어 그 생업(生業)까지 그만두었다가 헛것이 사라진 때에 후회하는 것처럼,
5수중도 또한 그와 같아서 전생 업의 인연이 짓는 헛것에 의하여 지금의 5중이 생기고,
5욕(欲)을 받아 탐내고 성내고 하다가 무상(無常)하게 무너질 때 마음에 뉘우침이 생겨,
“나는 어째서 헛것인 5중에 집착하여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잃어버렸는가?”라고 한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요설문(樂說門)으로 물으시기 때문에 대답하기를,
“헛것도 물질과 다르지 않다.”라고 한다.
만일 다르지 않다면 이 물질의 법은 곧 공이라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안에 들어가나니,
만일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부처님이 될 수 있겠는가?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보살은 무엇 때문에 갖가지 도(道)를 행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할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그의 생각을 아시고 이내 대답하시되,
“5중은 거짓이며, 단지 임시의 이름[假名]으로써 보살이라 할 뿐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 임시의 이름 가운데에는 업(業)도 없고 업의 인연도 없으며, 마음도 없고 마음에 속한 법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나니,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마땅히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과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라고 하시니,
5중이 곧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과 다름이 없음은 전생 업의 인연으로부터 환술의 업[幻業]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5중도 또한 부처님을 성취할 수가 없나니, 왜냐하면 성품이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 밖의 꿈과 변화한 것과 그림자와 메아리 등도 또한 그와 같다.
【문】 무엇 때문에 “분별[識]이 곧 6정(情)이요 6정이 곧 5중(衆)이다.”라고 하는가?
【답】 이 의식은 12인연(因緣) 가운데 세 번째의 일이다.
이 가운데에도 물질이 있고 또한 마음에 속한 법도 있지만 아직 무르익지 못했기 때문에 의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의식으로부터 6입(入)이 생기나니, 이 두 때에는 다 함께 5중이 있다.
물질[色]이 성립되기 때문에 5정(情)이라 하고 이름[名]이 성립되기 때문에 의정(意情)이라 한다. 6정은 5중을 여의지 않나니, 이 때문에 ‘의식이 곧 6정’이라고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12인연 중에는 곳곳마다 모두 5중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단지 “6정에만 5중이 있다.”라고 하는가?
【답】 이 의식은 지금의 몸의 근본이며, 중생은 현재의 법 가운데에서 착오가 많게 된다.
이름과 물질[名色]은 아직 성숙되지 못하고 아직 능(能)한 바가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
6정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으면서 죄와 복을 내기 때문에 말하며,
그 밖의 열한 가지 인연 때문에 5중을 말한다.
또한 부처님은 5백 년 뒤에 배우는 이들이 모든 법의 모양을 분별하면서 저마다 달리하여 물질의 법[色法]을 여의고 분별[識]을 말하기도 하고 의식의 법[識法]을 여의고 물질을 말하는 것을 아셨다.
따라서 그 모든 견해를 깨뜨리고 필경공(畢竟空)에 들게 하려고 하시는 까닭에 의식 가운데에는 비록 6정(情)이 없다 하더라도,
“의식이 곧 6정이다.”라고 하시며,
6정 가운데에는 비록 5중(衆)이 아직 갖추어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6정이 곧 5중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전생에는 단지 마음을 6정에만 머무르고 있으면서 갖가지의 생각과 분별을 지었기 때문에 금생의 6정과 5중의 몸이 생겼고,
금생의 몸으로부터는 갖가지의 결사(結使)를 일으켜 후세의 6정과 5중을 만들게 된다.
이와 같이 해서 차츰차츰 전전하게 되니, 이 때문에
“의식이 곧 6정이요 6정이 곧 5중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법은 내공(內空) 가운데에서도 얻을 수 없고,
나아가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가운데에서도 얻을 수 없다.
【경】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새로 대승의 뜻[大乘意]을 일으킨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을 듣는다면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는 않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새로 대승의 뜻을 일으킨 보살이 반야바라밀에서 방편이 없고 또한 선지식(善知識)을 얻지 못한다면, 이 보살은 혹은 놀라기도 하고 혹은 겁을 내거가 두려워하기도 하리라.”
[방편]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방편이기에 보살이 이 방편을 행한다면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살바야에 상응(相應)한 마음으로 물질의 무상(無常)한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무상한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한다면,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방편을 행한다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살바야에 상응한 마음으로 물질의 괴로운[苦]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서도 또한 그러하며,
살바야에 상응한 마음으로 물질의 나없는[無我]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서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살바야에 상응한 마음으로 물질의 공(空)한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서도 또한 그러하며,
물질의 모양이 없는[無相]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서도 또한 그러하며,
물질의 조작이 없는[無作]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서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의 고요히 사라진[寂滅]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하고, 나아가 의식에서도 또한 그러하며,
물질의 여읜[離]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하고, 나아가 의식에서도 또한 그러하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방편을 행한다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물질의 무상한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하고,
물질의 괴로운 모양ㆍ나 없는 모양ㆍ공한 모양ㆍ모양이 없는 모양ㆍ조작이 없는 모양ㆍ고요히 사라진 모양ㆍ여읜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서도 또한 그와 같이 하면서,
이때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는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이 무상한 법 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해주어야 하며,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괴로운 모양ㆍ나 없는 모양ㆍ공한 모양ㆍ모양이 없는 모양ㆍ조작이 없는 모양ㆍ고요히 사라진 모양ㆍ여읜 모양의 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하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단(檀)바라밀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으로써 물질의 무상함을 관하지 않으나 이것 또한 얻을 수 없으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으로써 분별[識]의 무상함을 관하지 않으나 또한 얻을 수 없느니라.
문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으로써 물질의 괴롭고 나가 없고 공하고, 모양이 없고 지음이 없고, 고요히 사라지고 여의는 것을 관하지 않으나 역시 얻을 수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識]에서도 또한 그러하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시라(尸羅)바라밀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 모든 법의 무상한 모양 내지는 여읜 모양에서 참고 구하고 원하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찬제(羼提)바라밀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살바야와 상응한 마음으로 물질의 무상한 모양 또한 얻을 수 없고, 나아가 여의는 모양 또한 얻을 수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역시 그와 같다고 관하며,
살바야와 상응한 마음으로써 버리지도 않고 쉬지도 않는다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비리야(毘梨耶)바라밀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뜻과 그 밖의 착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선(禪)바라밀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느니라.
‘물질은 공하게 함으로써 물질이 공해지지 않나니,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와 같다.
눈을 공하게 함으로서 눈이 공해지지 않나니, 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눈이다.
나아가 뜻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도 느낌을 공하게 함으로써 느낌이 공해지지 않나니, 느낌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느낌이다.
4념처를 공하게 함으로써 4념처가 공해지지 않나니, 4념처가 곧 공이요 공이 곧 4념처이며,
나아가 18불공법을 공하게 함으로써 18불공법이 공해지지 않나니, 18불공법이 곧 공이요 공이 곧 18불공법이다.’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느니라.
[선지식]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을 선지식(善知識)이 수호하기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도 않는다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의 선지식이라 함은 물질의 무상함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선근(善根)을 가져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道)로 향하게 하지 않고 단지 일체지(一切智)에 회향할 뿐이니,
이를 보살마하살의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무상함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선근을 가져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로 향하게 하지 않고 단지 일체지에 회향할 뿐이니,
수보리야, 이를 보살마하살의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선지식이 있나니,
물질의 괴로움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괴로움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며,
물질의 나없음도 또한 얻을 수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나 없음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며,
물질의 공하고 모양이 없고 조작이 없고, 고요히 사라지고 여의는 것도 또한 얻을 수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공하고 모양이 없고 조작이 없고, 고요히 사라지고 여의는 것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선근을 가져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로 향하게 하지 않고 단지 일체지에 회향할 뿐이니,
이를 보살마하살의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선지식이 있나니,
눈의 무상함 내지 여읨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나아가 뜻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의 무상함에서 여읨까지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선근을 가져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로 향하게 하지 않고 단지 일체지에 회향할 뿐이니,
이를 보살마하살의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선지식이 있나니,
4념처의 법을 닦는 것 내지 여의는 것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선근을 가져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로 향하게 하지 않고 단지 일체지에 회향할 뿐이니,
수보리야, 이를 보살마하살의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나아가 18불공법을 닦고 일체지를 닦는 것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선근을 가져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로 향하게 하지 않고 단지 일체지에 회향하나니,
이를 보살마하살의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논】
【문】 수보리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의심을 내면서 부처님께,
“새로 뜻을 일으킨 보살이 이 말씀을 들으면 두려워하지는 않겠는지요?”라고 묻는가?
【답】 보살로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는,
“다만 5중의 법을 공하게 하는 일은 없으며, 또한 반야바라밀을 행할 수 없다.” 함을 듣고,
이 때문에 의심을 내면서,
“그렇다면 그 누가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는가?”라고 하게 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 묻는 것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보살이 안팎의 인연을 두루 갖추지 못하면 두려움이 있게 된다.”라고 하신다.
안의 인연[內因綠]이라 함은,
바른 생각이 없고 예리한 지혜가 없으며, 중생들에 대하여 깊은 자비심이 없는 것이니, 안으로는 이러한 등의 방편이 없는 것이다.
밖의 인연[外因緣]이라 함은,
중앙의 나라에 태어나지 못한 채 반야바라밀을 들을 수도 없으며, 의심을 끊어 줄 수 있는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 것이니, 이러한 등등의 바깥 인연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안팎의 인연이 화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놀람과 두려움이 생겨난다.
지금 수보리는 이런 방편을 묻는 것이요,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일체종지(一切種智)와 상응한 마음으로 모든 법을 관찰하면서도 또한 모든 법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신다.
【문】 방편으로 물질의 무상함 등의 갖가지 모양을 관찰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되거늘,
지금 무엇 때문에 단지,
“살바야와 상응한 마음으로 모든 법을 관찰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도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가?
【답】 보살은 앞에서 부터 줄곧 오직 모든 법의 공을 관찰하지만 마음이 거칠기 때문에 집착을 일으켰다.
이제는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여 부처님의 뜻과 같이 관(觀)하여 중생에 대하여 큰 자비를 일으키고 일체의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지혜에 있어서도 막힌 바가 없고 오직 중생을 제도하고자 할 뿐이니,
무상함과 공 등 갖가지로 모든 법을 관찰하되 역시 이 법을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한 뒤에 생각하기를,
‘나는 이 법에서 중생을 제도하면서 뒤바뀜을 여의게 하리라.’고 하나니,
이 때문에 마음이 집착하지 않고 결정코 진실한 어느 한 법도 보지 못한다.
비유컨대 마치 약사(藥師)가 여러 약을 섞어 지어서 냉병(冷病)이 든 이에게 열약(熱藥)을 주지만, 그것은 열병(熱病)에는 약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두 가지의 보시 가운데에서 법의 보시[法施]가 크기 때문에 이것을 단(檀)바라밀이라 한다.
다섯 가지 바라밀도 또한 이와 같이 이치에 따라 분별한다.
또한 보살의 방편이라 했는데, 18공(空)이기 때문에 물질을 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공한 모양으로써 억지로 공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 그것이 곧 공이니, 이 물질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공하다.
물질의 모양은 공하기 때문에 공이 곧 물질이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법도 또한 그와 같다.
선지식(善知識)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이다.
보살은 앞에서 무상함과 공함 등의 모든 관(觀)을 알았으며, 지금은 오직 회향을 설명한 것이 다를 뿐이다.
【경】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이 없이 삿된 벗[惡知識]을 따르기에 이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듣고는 놀라거나 두려워하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을 여의고는 반야바라밀을 닦고 이 반야바라밀을 얻으며,
이 반야바라밀ㆍ선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과 단바라밀을 생각하면서 모두 얻고 모두 생각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살바야의 마음을 여의고는,
물질[色]의 내공(內空)에서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에 이르기까지를 관찰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의 내공에서 무법유법공에 이르기까지를 관찰하며,
눈의 내공에서 무법유법공에 이르기까지와 뜻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意觸因緣生受]의 내공에서 무법유법공에 이르기까지를 관찰하나니,
모든 법이 공한 데서 생각하는 바가 있고 얻는 바가 있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살바야의 마음을 여의고는,
4념처(念處)를 닦으면서 또한 생각하고 또한 얻으며, 나아가 18불공법을 닦으면서도 생각하고 또한 얻나니,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이 없기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놀라고 두려워하느니라.”
[악지식]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삿된 벗을 따르기에 반야바라밀을 듣고 놀라며 두려워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의 삿된 벗은 반야바라밀을 여의도록 가르치고,
선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과 단바라밀을 여의도록 가르치나니, 수보리야, 이런 사람을 보살마하살의 악지식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삿된 벗이 있나니,
곧 악마의 일[魔事]을 말하지도 않고 악마의 죄[魔罪]를 말하지도 않으며 이러한 말을 짓지도 않는 자이니라.
‘악마는 부처님의 형상으로 변하여 보살에게 6바라밀을 여의도록 가르치면서 보살에게 말하기를,
선남자야, 반야바라밀을 닦아서 무엇에 쓰려 하며,
선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과 단바라밀을 닦아서 무엇에 쓰겠는가?’라고 하나니,
이러한 자를 보살마하살의 악지식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는 또한 부처님의 형상으로 변하여 보살에게로 와서는,
그를 위하여 성문의 경[聲聞經]인 수투로(修妬路)에서 우바제사(優波提舍)에 이르기까지를 말해 주며,
이러한 경을 가르치고 분별하고 연설하면서 끝내 그에게 악마의 일과 악마의 죄를 말해 주지 않나니,
이러한 자를 보살마하살의 악지식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는 부처님의 형상으로 변하여 보살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선남자야, 그대는 진실한 보살의 마음이 없고 아비발치(阿毘跋致)의 지위도 아니며, 그대는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도 없다.’고 하면서,
그에게 이와 같은 것이 악마의 일이요 악마의 죄라함도 말해 주지 않나니,
이러한 자를 보살마하살의 악지식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는 부처님의 형상으로 변하여 보살이 있는 곳으로 와서는 보살에게 말하기를,
‘선남자야, 물질은 공하고 무아이고 내 것[我所]이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공하고 무아이고 내 것이 없으며,
눈은 공하고 무아이고 내 것이 없으며, 나아가 뜻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까지도 공하고 나 없고 내 것이 없으며,
단바라밀을 공하고 나아가 반야바라밀까지도 공하며, 4념처가 공하고 나아가 18불공법까지도 공하거늘,
그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무엇하러 닦느냐?’고 하면서,
이러한 것이 악마의 일이요 악마의 죄임을 말하지도 않고 가르쳐 주지도 않나니,
이러한 자를 보살의 악지식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는 벽지불의 몸으로 변하여 보살이 있는 곳으로 와서는 보살에게 말하기를,
‘선남자여, 시방이 모두 공하여 이 가운데에는 부처님도 없고 보살도 없고 성문도 없다.’고 하면서,
이러한 것이 악마의 일이요 악마의 죄임을 말하지도 않고 가르쳐 주지도 않나니,
이러한 자를 보살마하살의 악지식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는 화상(和尙)이나 아사리(阿闍梨)의 몸으로 변하여 보살이 있는 곳으로 와서는,
보살의 도를 여의도록 가르치고 일체종지를 여의도록 가르치며,
4념처 내지 8성도분(聖道分)을 여의도록 가르치고 단바라밀을 여의도록 가르치느니라.
나아가 18불공법을 여의도록 가르치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에 들어가게 하면서 말하기를,
‘선남자여, 그대는 이 모든 법을 닦고 생각하여 성문(聲聞)을 증득하도록 하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닦아서 무엇 하려는가?’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것이 악마의 일이요 악마의 죄임을 말하지도 않고 가르쳐 주지도 않나니,
이러한 자를 보살마하살의 악지식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는 부모의 형상으로 변하여 보살이 있는 곳으로 와서는 보살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너는 수다원(須陀洹)의 과위를 증득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며,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를 증득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거라.
네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닦아서 무엇하겠느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면 장차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나고 죽고 하면서 손을 잘리고 다리를 베이며 갖은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하면서,
이와 같은 것이 악마의 일이요 악마의 죄임을 말하지도 않고 가르쳐 주지도 않나니,
이러한 자를 보살의 악지식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는 비구의 형상으로 변하여 보살이 있는 곳으로 와서는 보살에게 말하기를,
‘눈의 무상함도 얻을 수 있는 법이요, 나아가 뜻의 무상함도 얻을 수 있는 법이며,
눈의 괴롭고 눈의 무아이고 눈의 공하고, 모양이 없고 조작이 없고, 고요히 사라지고 여의는 것도 얻을 수 있는 법이요, 나아가 뜻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면서,
얻는 바가 있는 법[有所得法]으로써 4념처를 말하고, 나아가 얻는 바가 있는 법으로써 부처님의 18불공법을 말하느니라.
게다가 수보리야, 이와 같은 것이 악마의 일이요 악마의 죄임을 가르쳐 주지 않고 말하지도 않나니,
이러한 자를 보살의 악지식이라고 알아야 하며,
그런 자라고 안 뒤에는 당연히 멀리 벗어나야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먼저는 간략하게 방편이 없는 것을 말씀하셨고 이번에는 자세하게 방편이 없는 것을 말씀하려 하신다. 이른바 일체종지(一切種智)와 상응한 마음을 여의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 반야바라밀의 결정된 모양을 취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바라밀에서 모든 부처님의 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으니, 이것은 자기 자신도 방편이 없고 게다가 악지식의 가르침을 얻기 때문이다.
또한 악지식은 크게 이익을 상실하고 갖가지로 사람들을 파괴하나니,
이 크고 나쁜 인연 때문에 부처님은 다시 갖가지 인연으로 악지식의 모양을 말씀하신다.
악지식이라 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6바라밀을 멀리 여의게 하고 혹은 죄복의 과보를 믿지 않기 때문에 멀리 여의게 하며, 혹은 반야바라밀에 집착하기 때문에 말하기를,
“모든 법은 필경공이거늘 그대는 행할 바가 무엇이 있는가?”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소승(小乘)을 찬탄하면서,
“그대는 단지 스스로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나 면하면 되지 중생이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멀리 여의게 하나니,
이런 자를 악지식이라고 한다.
또한 악지식이라 함은,
제자들로 하여금 악마는 바로 부처님의 도둑이라 함을 깨달아 알지 못하게 한다.
악마는 욕계(欲界)의 주인이어서 큰 세력이 있고 항상 도를 행하는 이를 증오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위력이 크기에 악마는 어찌 하지도 못한 채 단지 조그마한 보살들만을 무너뜨린다.
이에 부처님의 형상으로 변해 찾아와서는 보살이 행하는 6바라밀을 파괴 시키며,
혹은 성문이 배워야 할 경법을 따르도록 찬탄하고 알리면서 설명해준다.
혹은 부처님의 몸이 되어 와서는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부처님이 될 수 없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눈 등의 온갖 법들은 공하거늘 무엇 때문에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닦느냐?”라고 하기도 한다.
혹은 벽지불의 몸으로 되어 와서 말하기를,
“시방의 세계 안에서 3승(乘)의 사람이란, 공이요 부처님 도를 구한다는 것도 단지 헛된 이름만이 있을 뿐이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부처님이 되려고 하는가?”라고 하며,
혹은 보살에게 37품(品)을 멀리 여의고 성문의 3해탈문(解脫門) 안에 들어가도록 가르치면서,
“그대는 이 세 문에 들어가서 실제(實際)를 증득하여 뭇 고통을 다하도록 하라.
그대는 4과(果)를 얻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할지언정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닦아서 무엇 하려는가?”라고 하기도 한다.
혹은 화상이나 아사리, 부모가 되어 와서는 부처님의 도를 멀리 여의게 하면서,
“이 손과 발이나 귀 코 등을 잘라서 구하는 이에게 주는 것은 공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주지 않는다면 부처님을 구하는 뜻이 파괴되고 만일 준다 하면 모진 고통을 받아야 된다.”라고 하기도 한다.
때로는 아라한 비구가 되어 가사를 입고 와서 말하기를,
“눈 이것은 결정코 무상한 모양이요 괴롭고 공하고 무아이고, 모양이 없고 조작이 없고, 고요히 사라지고 여의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법도 또한 그와 같다.”라고 말하면서,
얻은 바 있는 것으로 모양을 취하고 생각하면서 분별하게 한다.
이러한 등의 갖가지 한량없는 악마의 일을 말하면서도 깨달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나니,
이런 자들이 악지식이다.
멀리 떠난다[遠離]라고 함은 그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으므로 여의는 것이다.
마치 도둑이 부드러운 말을 하면서 점차 다가오며, 아주 가까이 와서는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나니,
이 악지식이란 그 보다도 더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도둑은 단지 이 세상에 있는 한 몸만을 해치지만 악지식은 세상에서마다 사람을 해치며,
도둑은 단지 목숨을 해치고 재물을 빼앗지만 악지식은 지혜의 목숨[命根]을 해치고 부처님 법의 한량없는 보배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다고 안 뒤에는 급히 몸과 마음으로 멀리 여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