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피라미드 건설하기
농업혁명은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사건 중 하나다.
일부에서는 그 덕분에 인류가 번영과 진보의 길에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파멸을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사피엔스가 자연과의 긴밀한 공생을 내던지고 탐욕과 소외를 향해 달려간 일대 전환점이었다는 것이다.
이 길이 어느 방향으로이끌었든 간에, 돌아갈 길은 없었다.
농경 덕분에 인구가 너무나 급격하고 빠르게 늘었기 때문에,
수렵과 채집으로 돌아가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농경사회는 하나도 없었다.
농업으로의 이행이 일어나기 전인 기원전 10000년경 지구에는
5백만 ~ 8백만 명의 방랑하는 수렵채집인이 살고 있었다.
기원후 1세기가 되자 수렵채집인은 1백만 ~ 2백만 명밖에 남지 않았으나(주로 호주, 미 대륙, 아프리카에 있었다),
같은 시기 농부들의 숫자는 2억5천만 명으로 수렵채집인을 압도했다.
농부 대다수는 영구 정착지에 살고 있었고, 방랑하는 양치기 부족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한곳에 정착을 하면서 사람들의 세력권은 대부분 극적으로 좁아졌다.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수십, 수백 제곱 킬로미터에 이르는 영토에서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에게 '본거지'란 언덕과 시내, 숲과 열린 하늘을 포함하는 땅 전체를 말했다
하지만 농부는 종일 작은 밭이나 과수원에서 일했고,
가정생활은 나무나 돌, 진흙으로 지어져 면적이 몇십 제곱미터에 불과한 비좁은 구조물, 즉 집에서 이뤄졌다.
전형적인 농부는 이 구조물에 매우 강한 애착을 느꼈다.
이것은 건축학뿐 아니라 심리에도 큰 영향을 미칠 커다란 혁명이었다
이리하여 '내 집'에 대한 집착과 이웃으로부터의 분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자기중심적이 된 존재의 심리적 특징이 되었다.
새로운 농업 영토는 고대 수렵재집인의 것보다 훨씬 더 좁았을 뿐 아니라 훨씬 더 인공적이었다
수렵채집인들은 불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자신들이 떠도는 땅에 의도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거의 없었다
이와 달리 농부들은 자신들이 주변 자연환경에서 힘들여 떼어낸 인공적인 섬에 살았다.
이들은 숲의 나무를 베어내고 물길을 파고 들판에서 돌을 제거하고 집을 짓고 밭고랑을 갈고 유실수를 줄지어 심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적 거주지는 오로지 인간과 '그들의' 식물과 동물만을 위한 거이었고,
성벽과 산울타리로 방어벽을 친 경우가 흔했다.
농부의 가족들은 골치 아픈 잡초와 야생돌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모든 조치를 취했고,
그런 것들이 침입하면 퇴지했다.
만이 그런 것들이 계속 살아남으면, 그것들을 적대시하는 인간들은 박멸방법을 모색했다.
집 주위로는 특히 강력한 요새를 구축했다.
농업혁명의 여명기부터 오늘날 에 이르기까지
수십억 명의 인간이 나뭇가지와 파리채, 신발과 독성 스프레이로 무장하고
인간이 사는 곳으로 끊임없이 침투하는 부지런한 개미, 은밀한 바퀴벌레, 대담한 거미,
잘못 들어온 딱정벌레 등과 가차 없는 전쟁을 벌여왔다.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간이 만든 고립된 영토는 이처럼 매우 좁았고,
그 주위는 길들여지지 않은 광활한 자연이 둘러싸고 있었다.
지구 표면은 약 5억 1천만 제곱킬로 미터인데 이 중 1억5,500만 제곱킬로미터가 육지다.
비교적 최근에 해당하는 기원후 1400년까지만 해도
압도적 다수의 농부들은 본인들이 기르는 동식물과 함께 모두 1,100만 제곱킬로미터,
즉 지표면의 2퍼센트에 불과한 좁은 지역에 몰려 살았다
다른 지역은 모두 너무 춥거나 덥거나 건조하거나 습하거나 해서 경작에 맞지 않았다.
지표면의 2퍼센트에 지나지 않은 좁디좁은 지역이 이후 역사가 펼쳐지는 무대역할을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인공섬을 떠나기가 어려웠다.
심각한 손실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집과 목초지와 곡창지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축적되었다.
쉽게 옮길 수 없는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은 한 장소에 매엿다
우리 눈에 고대 농부는 찢어지게 가난한 것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그의 가족이 소유한 인공물은 수렵채집인의 한 부족 전체가 지닌 것보다 많은 것이 보통이었다.
160-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