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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55권
5. 변수면품 ⑩
5. 번뇌[惑]의 단멸(斷滅)
5.1. 단혹(斷惑)의 네 가지 방편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온갖 수면(隨眠) 등은 무엇에 의해 끊어지는 것인가?
혜(慧)로써 그것의 소연을 관찰[觀見]함으로 말미암아 수면 등은 끊어진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욕계 중의 타계(他界)의 변행혹과, 아울러 3계 중의 견멸ㆍ견도소단인 유루연의 혹(번뇌)은 마땅히 끊어질 리가 없어야 할 것이니, 고ㆍ집제를 반연하여 법지(法智)와 법지인(法智忍)이 생겨나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욕계의 고ㆍ집제를 반연한 것이기 때문이며, 멸ㆍ도제를 반연하여 온갖 법지와 법지인이 생겨나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무루를 소연의 경계로 삼은 것이기 때문이다.32)
그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우리는 온갖 혹(惑)을 영원히 끊는 방편에 다수의 종류가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종류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인가?
모두 네 가지의 종류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소연을 변지(遍知)하였기 때문에
그것의 능연(能緣)을 끊었기 때문에
그것의 소연을 끊었기 때문에
대치도가 일어났기 때문에 끊어진다.
遍知所緣故 斷彼能緣故
斷彼所緣故 對治起故斷
논하여 말하겠다.
견소단의 혹(惑)은 [본송에서 언급한] 앞의 세 가지 방편에 의해 끊어진다.
첫 번째는 소연(즉 고ㆍ집제와 멸제와 도제)을 변지(遍知)함으로 말미암아 끊어진다.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되는 견고ㆍ견집소단으로서 자계연(自界緣)의 혹(즉 자계를 반연하는 번뇌)과, 색ㆍ무색계의 견고ㆍ견집소단으로 존재하는 모든 혹―왜냐하면 상 2계의 타계(他界)ㆍ타지(他地)를 반연하는 혹도 역시 소연을 변지함으로 말미암아 끊어지기 때문으로,33) 고ㆍ집제를 반연하는 유지(類智)와 유지인(類智忍)이 생겨날 때에는 다같이 2계의 경계를 능히 단박에 관찰[頓觀]할 수 있기 때문이다―과, 아울러 3계의 견멸ㆍ견도소단의 무루연혹은 모두 소연을 변지함으로써 끊어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것의 능연(能緣)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끊어지니, 이를테면 욕계계(繫)인 타계연(他界緣)의 혹(타계를 반연하는 번뇌)이 바로 그러한 것으로, 욕계에 계속되는 견고ㆍ견집소단으로서 자계연의 혹은 그것(타계연의 혹)에 대해 능히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자계연의 혹은 그것에 대해 능히 의지(依持)가 되는 것으로, 의지가 끊어질 때 그것도 따라 끊어지기 때문이니, 마치 병약한 자가 [뭔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을 경우, 기댄 것을 제거해 버릴 때 그도 따라 넘어지는 것과 같다.34)
[자계연의 혹이] 어떻게 그것(타계연의 혹)에 대해 능히 의지(依持)가 된다는 것인가?
이것은 그것에 대해 능히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바로 “원인을 해손(害損)시킴으로 말미암아 끊어진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실로 그러하다. 이것(의지)과 그것(원인)은 다만 그 명칭만 다를 뿐으로, [‘원인’이라고 하는 말의] 남발을 피하기 위해 이와 같이 [“그것의 능연(能緣)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끊어진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욕계의 혹으로서 자계를 반연하는 것과 타계를 반연하는 것은 모두 피차 서로의 원인이 되지만, 그렇더라도 이것(자계연)과 그것(타계연)이 [계속] 전전(展轉)하며 서로의 연이 되는 일은 없다. 따라서 여기서 ‘능연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라고 설한 것은, 오로지 타계를 반연하는 혹만이 이러한 원인(즉 자계연의 혹)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그것도 바로 따라 끊어진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는 그것의 소연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끊어지니, 이를테면 견멸ㆍ견도소단의 온갖 유루연(有漏緣)의 혹(즉 유루를 반연하는 번뇌)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즉 무루연(無漏緣)의 혹이 능히 그것의 소연이 되기 때문에, 소연이 끊어질 때 그것도 따라 끊어지는 것으로, 이는 마치 병약한 자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가다가 지팡이를 버리게 되면 그도 따라 넘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35)
어떠한 이유에서 [소연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능연도 끊어진다는 것인가?] 이같이 끊어지는 혹에 대해서는, “능연을 끊었기 때문에 소연도 끊어진다”고 설하는 경우가 있으니, 예컨대 욕계의 고ㆍ집(즉 유루)를 반연하여 현관(現觀)을 일으킬 때가 그러하며, “소연을 끊었기 때문에 능연도 끊어진다”고 설하는 경우도 있으니, 예컨대 온갖 멸ㆍ도(무루)를 반연하여 현관을 일으키는 때가 그러하다.
실로 이러한 때에는 이것(소연)과 그것(능연)이 모두 끊어질지라도, 끊어진 혹에는 수승한 것도 있고 저열한 것도 있기 때문에, “수승한 것이 끊어질 때 저열한 것도 따라 끊어진다”고 말해야 한다. 이를테면 그러한 혹의 소연에 대한 무루혜가 생겨나 능히 [그 밖의 다른 혹도] 대치하게 되었다면, 그러한 혹을 일컬어 ‘수승한 혹’이라 하고, 그 밖의 다른 혹을 일컬어 ‘저열한 혹’이라 한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그러한 혹만을 수승한 혹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한 [혹의] 소연에 대한 무루혜가 일어나 한결같이 그러한 혹에 적대되는 공용(功用)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뜻에 근거하여 “욕계의 고ㆍ집(즉 유루)를 반연하여 일으킨 현관(現觀)은 자소단(自所斷, 즉 견고ㆍ견집소단)의 번뇌 중에서 자계를 반연하는 혹[自界緣]을 수승한 원적(怨敵)으로 삼으며, 온갖 멸ㆍ도(무루)를 반연하여 일으킨 현관은 자소단(즉 견멸ㆍ견도소단)의 번뇌 중에서 무루를 반연하는 혹[無漏緣]을 수승한 원적으로 삼는 것으로, 수승한 혹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밖의 다른 저열한 혹도 따라 끊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혹(惑)을 끊는 방편에 다수의 종류가 있다고 인정하면서, “능연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따라 끊어지는 경우도 있고, 소연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따라 끊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앞서 “[무루]혜(慧)로써 그것의 소연을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수면 등은 끊어진다”고 설하였던 것인가?
여기에서는 다만 종의(宗義)를 먼저 세우고 나서 “온갖 혹(惑)은 다수의 방편에 의해 영원히 끊어진다”고 말한 것일 뿐으로, 앞서 세운 종의와 뒤에서 해석한 말은 그 뜻이 각기 다르지도, 앞뒤 서로 모순되지도 않는다. 뒤에서도 틀림없이 앞서 세운 종의대로 해석하였거늘, 어찌 내가 앞뒤 서로 모순되게 설하였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우리의 종의에서 “[무루]혜(慧)로써 그것의 소연을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온갖 혹은 끊어진다”고 말하였지만, 이 말의 뜻은, “‘혜’로써 욕계에 계속되는 견고ㆍ견집소단으로서 자계를 반연하는 번뇌[自界緣惑]의 소연의 경계를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욕계 견고ㆍ견집소단의 모든 혹이 영원히 끊어지고, ‘혜’로써 상 2계에 계속되는 견고ㆍ견집소단으로 존재하는 온갖 혹의 소연의 경계를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상계의 견고ㆍ견집소단의 모든 혹이 영원히 끊어지며, ‘혜’로써 3계에 계속되는 견멸ㆍ견도소단으로서 무루를 반연하는 번뇌[無漏緣惑]의 소연의 경계를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견멸ㆍ견도소단의 모든 혹이 영원히 끊어진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말의 뜻이 [단순히] “존재하는 [일체의] 혹이 끊어진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36)
앞에서 “‘혜’로써 그것의 소연을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온갖 혹은 끊어진다]”37)고 [말하고 나서] 그 후 다시 “우리는 온갖 혹을 영원히 끊는 방편에 다수의 종류가 있다고 인정한다.”고 말한 것일 뿐인데, 어떻게 내가 앞서 세운 종의와 뒤에서 해석한 말의 뜻이 각기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앞뒤가 서로 모순된다”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혹은 내가 다만 “‘혜’로써 그것의 소연을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온갖 혹은 끊어진다.”고 말한 것은, 그 밖의 다른 번뇌도 함께 끊어진다[兼斷]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그 밖의 다른 번뇌의 끊어짐이] 저절로 성취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38) 만약 다만 능히 [그렇다고] 한다면, ‘혜’로써 그것의 소연을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그 같은 혹이 끊어질 때, 그 밖의 다른 혹도 [그것의] 능연이 끊어졌기 때문에, 소연이 끊어졌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혜(慧)로써 그것의 소연을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온갖 혹은 끊어진다”는 말은] 첫머리에 간략히 종의로서 설정한 것일 뿐이다.
만약 ‘혜’로써 일부 번뇌[少惑]의 소연을 관찰할 때 일체의 번뇌가 다 그에 따라 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우리는 온갖 혹을 영원히 끊는 방편에 다수의 종류가 있다고 인정한다”고 말하였을 것인가? 다만 마땅히 한 가지 방편만을 설정했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소연을 변지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오로지 “소연을 변지함으로 말미암아 [온갖 혹이] 끊어진다”는 사실만을 [단혹(斷惑)의 방편으로] 설하지 않은 것은, 끊어지는 번뇌에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능히 나타내는 것으로, 첫째는 ‘혜’와 소연의 경계가 동일한 번뇌이며, 둘째는 ‘혜’와 소연의 경계가 다른 번뇌이다.
이에 따라 필시 다음과 같이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연이 ‘혜’와 동일한 온갖 번뇌의 경우, ‘혜’가 그러한 번뇌의 [소연의] 경계를 관찰할 때, 그것이 끊어진다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소연이 ‘혜’와는 다른 그 밖의 번뇌의 경우, 그러한 번뇌는 어떠한 방편에 의해 영원히 끊어질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온갖 혹을 영원히 끊는 데에는] 다수의 방편이 있다”는 말을 설하게 된 것으로, 이치상 [앞서 설한 바와 같은] 의심을 물리치는데 매우 유용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또한 번뇌를 끊는 데에는 결정코 다수의 갈래(즉 방편)가 있지만, 바야흐로 그 중의 수승한 방편(즉 무루혜에 의한 소연의 변지)을 종의를 설정하게 되었으니, 그 밖의 갈래는 모두 이 같은 첫 번째 갈래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세 가지 방편으로 견소단의 혹을 끊는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수소단의 혹은 [본송에서 언급한] 네 번째 방편에 의해 끊어진다. 즉 그것은 다만 대치도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끊어지는 것으로, 만약 이러한 품류의 대치도가 생겨나게 되면, 바로 이러한 품류 중의 온갖 혹은 단박에 끊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하품(下下品)의 대치도가 일어날 때 상상품(上上品)의 혹은 모두가 단박에 끊어지며, 내지 상상품의 대치도가 일어날 때 하하품의 혹은 모두가 단박에 끊어지는데, 이와 같은 이치에 대해서는 마땅히 뒤에서 다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39)
어찌 일체의 견소단의 혹이 끊어질 때에도 역시 대치도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끊어지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러한 부(部, 예컨대 견고소단)의 대치도가 생겨났다면, 바로 이러한 ‘부’(예컨대 견고소단) 중의 온갖 혹도 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치상으로는 실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3계의 수소단의 혹으로서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9품(品, 하하품 내지 상상품)의 도에 의해 끊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수혹을] 끊는 대치도는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말을 설한 것이다. 그러나 견소단의 혹 중에서는 오로지 유정혹(有頂惑,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의 번뇌)의 대치도만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40) 혹은 견소단의 온갖 혹이 끊어질 때의 방편은 결정코 세 가지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것[別]에 근거하여 설하였지만, 수소단의 혹을 능히 끊는 방편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인 것[總]에 근거하여 [한 가지로] 설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밝힌 네 번째의 방편은 앞에서 세운 종의(즉 ‘무루혜로써 그것의 소연을 관찰할 때 끊어진다’)와 서로 관계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수도위(修道位) 중에서는 멸(滅)ㆍ도지(道智)로써 능히 3계의 수소단의 혹을 끊을 수 있지만, 혜(慧)는 이러한 [수]혹의 소연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1)
이것(네 번째 방편)과 종의는 실로 서로 관계하지 않으니, 앞서 [언급한] 종의는 오로지 견소단의 혹에 대해 분별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온갖 방편을] 모두 포섭한다고 할지라도 [네 번째 방편과] 상위하지 않으니, 그러한 [견]혹의 소연을 관찰할 때 이러한 [수]혹의 대치도도 생겨나기 때문이다.
5.2. 4종의 대치(對治)
앞에서 말한 대치(對治)에는 모두 몇 가지의 종류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치에는 모두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단(斷)ㆍ지(持)ㆍ원(遠)ㆍ염(厭)이 바로 그것이다.
對治有四種 謂斷持遠厭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대치의 갈래에는 모두 네 가지의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단대치(斷對治)이다. 이는 말하자면 온갖 혹(惑)의 득(得)을 능히 직접적으로 끊는 도로서, 무간도(無間道)가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는 지대치(持對治)이다. 이는 말하자면 ‘끊어짐[斷]’의 ‘득’과 최초로 구생하는 도로서, 해탈도(解脫道)가 바로 그것이다. 즉 이와 같은 도에 의해 ‘끊어짐’의 ‘득’을 임지(任持)함으로 말미암아 온갖 혹의 ‘득’으로 하여금 상속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42)
셋째는 원분대치(遠分對治)이다. 이는 말하자면 앞서 끊어진 혹의 ‘득’으로 하여금 더욱 멀어지게 하는 도로서, 승진도(勝進道)가 바로 그것이다. 즉 해탈도 이후에 일어난 도를 일컬어 ‘승진도’라고 한 것이다. 나아가 그것의 ‘득’과 구기하는 ‘생’ 등도 역시 승진도라고 이름할 수 있으니, 혹의 ‘득’과 상위하는 온갖 ‘득’(즉 대치도의 득)으로 하여금 상속 증장하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염환대치(厭患對治)이다. 이는 말하자면 어떠한 계(界), 어떠한 지(地)에 대해 온갖 과실을 관찰하여 그것에 대한 깊은 염환을 낳게 하는 도이다. 이는 바로 그러한 계ㆍ지에 대해 여러 종류의 [방편]문으로써 과실을 관찰하는 도라는 뜻으로, 이는 오로지 온갖 염작의(厭作意)의 취(聚, 그룹)에 포섭된다. 바로 이러한 세력으로 말미암아 설혹 이후 미묘한 경계를 만나더라도 역시 탐착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대부분의 도는 바로 이러한 가행도(加行道)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4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이것을 가장 마지막으로 설한 것인가?44)
아비달마(阿毘達磨)는 순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어찌 일찍이 듣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번거롭게 따져 묻는 것인가? 혹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첫 번째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즉 그것은, 무간도 뒤에는 결정코 해탈도가 존재하며, 해탈도 뒤에는 바야흐로 승진도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고 한 것으로, 가행도는 혹 어떤 경우 무간도 이전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혹 어떤 경우에는 승진도 뒤에 생겨나기도 하는 등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일정하지 않다’고 함은, 혹 어떤 보특가라는 한 가지 가행에 의해 [예류과] 내지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도 하고, 혹은 두 가지, 혹은 다수의 가행에 [의해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고 한 것이다. 또한 ‘일정하지 않다’고 함은, 무간도 등은 앞의 가행도와 마찬가지로 뒤의 도에 대해서도 역시 가행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오로지 그러한 것만이 가행도에 포섭된다고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염환대치를 설하면서] ‘대부분’이라고 말한 것은, 무간ㆍ해탈ㆍ승진도 가운데 고ㆍ집제를 반연하는 것도 역시 염환대치가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5.3. 단혹의 근거
혹(惑)의 대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단혹(斷惑)의 이치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온갖 혹은 결정코 무엇에 따라 영원한 끊어진다[永斷]고 해야 할 것인가? 소연에 따라 [끊어진다고] 해야 할 것인가, 상응에 따라 [끊어진다고] 해야 할 것인가, 자성에 따라(다시 말해 스스로의 성질에 따라) [끊어진다고] 해야 할 것인가?
어떠한 까닭에서 이 같은 의문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인가?
이 세 가지 모두에 과실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먼저 [혹(惑)은] 소연에 따라 끊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만약 이러한 [소단(所斷)의] 법이 바로 그것의 소연이라면, 일찍이 소연이 되지 않았던 때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45)
역시 또한 상응에 따라 끊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이를테면 상응법은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기 때문으로, 이러한 [소단의] 법이 원인이 되지 않는 때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46) 또한 이러한 혹으로 말미암아 마음(즉 ‘혹’의 상응법)은 염오를 성취하게 될 것이니, 이러한 [혹과 상응하는] 마음으로서 불염오를 성취하는 때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또한 자성에 따라(다시 말해 스스로의 성질에 따라) 끊어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으니, 이를테면 법이 자성을 버리는 것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혹을 끊을 때, 그러한 소단(所斷)의 제법으로 하여금 끊어지는 성질[所斷性]을 상실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혹(惑)은 무엇에 따라 끊어지는지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소연에 따라
가히 온갖 혹(惑)이 끊어지게 되는 것임을.
應知從所緣 可令諸惑斷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혹’의 영원한 끊어짐은 결정코 소연에 따른 것으로, 소연에 대해 두루 아는 힘[遍知力]으로 말미암아 혹은 영원히 끊어지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47)
그런데 ‘혹’의 소연에는 모두 두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유계사(有繫事, 계박함이 있는 소연의 경계)와 무계사(無繫事, 계박함이 없는 소연의 경계)가 바로 그것이다. 유계사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 온갖 혹과, 아울러 이러한 혹의 힘에 의해 견인되어 생겨난 것으로서 이러한 [유계]사를 소연의 경계로 삼지 않는 온갖 혹, 이와 같은 두 가지 혹은 어떤 유정의 현재 상속 중에 온갖 [혹의] 득(得)을 인기하는데, 설혹 염오함이 없는 마음이 현재전하더라도 이러한 ‘득’은 간단(間斷)없이 항상 현행하여 과거ㆍ미래세의 온갖 혹의 결과가 되고 원인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계사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 온갖 혹과, 아울러 이러한 혹의 세력에 의해 인기되어 이에 따라 그 후 현행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무계]사를 소연의 경계로 삼지 않는 온갖 혹, [이와 같은 두 가지 혹에] 의해 인기된 ‘득’의 종류도 역시 앞서 언급한 [유계사의] 경우처럼 [항상 현행하여 과거ㆍ미래세의 온갖 혹의 결과가 되고 원인이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과거ㆍ미래의 혹의 결과가 되고 원인이 된다”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이러한 온갖 ‘득’이 현재세에 존재할 때 그것은 바로 과거 혹의 등류(等流)이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결과가 된다’고 한 것이며, 바로 미래 혹의 생연(生緣)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원인이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온갖 ‘득’은 단대치(斷對治)의 등류인 온갖 ‘득’의 현행과 상위(相違)하는 것으로, 능히 과거ㆍ미래에 획득되었거나 획득될 온갖 혹을 임지(任持)하기 때문에 이러한 [유ㆍ무계]사를 반연으로 하는 일체의 혹과 그 밖의 다른 것을 반연하는 혹으로 하여금 상속 전전하게 하지만, 이러한 [유ㆍ무계]사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 온갖 단대치의 등류가 일어날 때 혹의 ‘득’은 바로 끊어진다. 즉 획득된 온갖 혹은, 자신의 소연에서 비록 [법] 자체로서는 여전히 존재할지라도, 원인과 결과가 되는 ‘득’이 영원히 끊어졌기 때문에 ‘끊어졌다[斷]’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일부의 경계대상에 대해서도 아직 변지(遍知)하지 못하였다면, 이러한 경계대상을 반연으로 하는 혹과, 아울러 이러한 번뇌의 힘에 의해 인기된 그 밖의 다른 경계를 반연하는 혹, [이와 같은 두 가지 혹에] 의해 인기된 과거ㆍ미래 혹의 결과가 되고 원인이 되는 ‘득’이 현재의 상속 중에 무간으로 일어나게 되지만, 만약 일부의 경계대상에 대해서라도 변지를 획득하였을 경우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혹에 의해 인기되는 ‘득’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혹(惑)은 결정코 소연에 따라 끊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이러한 상태 중에서는 비록 혹(번뇌)과 성도가 동시에 현행[俱行]하는 일이 없다고 할지라도, 도로써 고제(苦諦) 등의 경계대상을 관찰하기 때문에 온갖 혹은 바로 끊어진다. 이러한 뜻이 알기 어렵다고 한다면, 비유를 들어 밝혀보아야 할 것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쥐에게 물려 비록 열도 나지 않고 답답하거나 혼미함도 없을지라도 독으로 인해 열 등이 온몸에 퍼질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이를] 항상 병자(病者)라고 하지 병이 없는 자라고는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요컨대 독과 상위하는 아게타(阿揭陀)라는 약을 복용할 때 비로소 병자가 아니라 병이 없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아게타와 열병 등이 동시에 동일한 몸에 존재하여 현행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게타의 효력이 몸 안의 독을 멸하여 열 등이 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아게타가 능히 온갖 병을 제거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48)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는 비록 온갖 혹과 동시에 동일한 소의신 중에 존재하여 현행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성도가 효력[威德力]을 낳았기 때문에 [과거ㆍ미래세의 온갖 혹의] 결과가 되고 원인이 되는 ‘득’을 멸하여 온갖 혹이 생겨나지 않게 되며, 능히 행자(行者)의 신기(身器)를 청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더 이상] 혹(惑)이 상속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혹이] 끊어졌다’고 하는 것이다.49)
5.4. ‘멀다’고 하는 것[遠性]의 네 종류
온갖 혹이 무엇에 따라 영원히 끊어지게 되는지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원분대치(遠分對治)의 그것과 같은 일체의 원성(遠性, 먼 것)에는 모두 몇 가지의 종류가 있는 것인가?50)
게송으로 말하겠다.
원성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상(相)ㆍ치(治)ㆍ처(處)ㆍ시(時)가 바로 그것으로
예컨대 그것들은 대종과 시라(尸羅)와
다른 처소와 두 가지 시간[二世] 등의 경우이다.
遠性有四種 謂相治處時
如大種尸羅 異方二世等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원성(遠性)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상원성(相遠性)으로, 이를테면 4대종은 비록 다 같이 동일 취(聚) 중에 생겨나 있을지라도 그 상(相) 다르기 때문에 역시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둘째는 치원성(治遠性)으로, 이를테면 계를 지니거나 범하는 것이 비록 다 같이 동일한 소의신 중에서 이루어질지라도 그것들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셋째는 처원성(處遠性)으로, 바다의 양안(兩岸)이 다 같이 동일한 대해(大海) 중에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처소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역시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넷째는 시원성(時遠性)으로, 이를테면 과거와 미래의 2세(世)는 다 같이 동일한 존재[一法]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라 할지라도 시간상으로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역시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51)
[시원성은] 무엇에 근거하여 ‘먼 것’이라고 설한 것인가?
현재세에 근거하여 [‘먼 것’이라고] 설하였다.
그렇다면 무간에 이미 멸한 때[已滅時]나 막 생겨나려고 하는 때[正生時]는 현재와 서로 인접한 것인데,52) 어떻게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과거ㆍ미래세는] 모두 5식(識)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일부는 의식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시간 중에 작용을 갖는 것을 ‘가까운 것[近]’이라고 말하지만, 과거ㆍ미래세는 결정코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먼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53)
(1) 원(遠)ㆍ 근성(近性)에 대한 경주의 힐난 비판
그러나 “온갖 무위법은 작용을 영원히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마땅히 ‘먼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힐난하여 말할 수 없으니, 시원성(時遠性)이나 시근성(時近性)은 시간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세[時]에 있어 작용을 갖는 것이면, 그것을 설하여 ‘가까운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설혹 작용을 갖지 않는 것을 설하여 ‘먼 것’이라고 말하였을지라도, 온갖 무위법은 일체의 시간(즉 삼세)을 초월한 것이거늘 어떻게 시간에 근거하여 [그것도] ‘먼 것’이 되어야 한다고 힐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마치 처원성(處遠性)이나 처근성(處近性)은 처소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비처(非處, 즉 공간적 점유성을 갖지 않은 非色)의 경우에는 그렇게 설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무위는 [유위와] 상(相)이 다르기 때문에 마땅히 상원성(相遠性)을 성취해야 한다”고 힐난한다면, 이치상 [이에 대해서는] 역시 부정하지 않으니, 상원성은 일체법과 통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무위에 대해 ‘가까운 것[近]’이라고 말한 것인가?54)
바야흐로 허공(虛空) 자체는 일체의 처소에 두루 존재하지만 서로 장애함이 없기 때문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비택멸(非擇滅)은 공용(功用, 노력)에 의하지 않고서도 일체의 모든 [법]체 상에서, 일체의 모든 처소와 모든 때에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였다. 택멸무위(擇滅無爲)의 경우, 온갖 유정으로서 올바른 수행을 정진하는 자가 온갖 번뇌를 끊을 때, 일체의 [법]체 상에서 어떠한 차별 없이 신속하게 증득하기 때문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치가 이미 그러함에도 경주(經主)는 “과거ㆍ미래의 2세의 경우[例]도 역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한다.”고 설하였다.55) 즉 “과거ㆍ미래의 정려(靜慮) 등의 법도 무위법 등과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증득되기 때문에 마땅히 ‘가까운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앞서 해석한 이치에 따라 [무위법의] 예(例)로 삼을 수 없으니, 다수의 유정이 일체의 [법]체상에서 어떠한 차별 없이 함께 획득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경주가 언급한 과거ㆍ미래의 2세의] 경우도 그러한 것(가까운 것)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다. 예컨대 “일체의 법은 비록 서로가 서로에 대해 상(相)이 다르기 때문에 그 모두를 상원성(相遠性)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또 다른 이치에 근거하여 그 일부에 대해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과실이 없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ㆍ미래의 법은 비록 시간에 근거하여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 모두를 시원성(時遠性)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또 다른 이치에 근거하여 그 일부에 대해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과실이 없으니, 다른 이치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56) 즉 상(相)과 시간은 ‘멀다’는 뜻이 서로 반대되는 것이다.57)
유여사도 말하였다.
“승해(勝解)로 말미암아 증득되기 때문에 해탈을 ‘가까운 것’이라고 하였다. 즉 현재의 승해로써 해탈을 관찰할 때 눈앞에 있는 것을 대하듯이 증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현재[現世]을 설하여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시원성과 상원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58) 이를테면 현재세[의 법]은 모두 일체의 식(5식과 의식)의 경계가 될 수 있으니,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경주(經主)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정리(正理)에 의거한다면, 마땅히 ‘과거와 미래는 법의 자상(自相)을 떠났기 때문에 먼 것이라 이름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미래는 아직 법의 자상을 획득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과거는 이미 법의 자상을 버렸기 때문이다.”59)
그러나 그의 설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을뿐더러 정리(正理)와도 서로 어긋난다. 즉 온갖 자상으로서 원성(遠性) 아닌 것이 없을 뿐더러, 그 밖의 다른 원성의 경우처럼 원성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성에 포섭되는 자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60) 이를테면 그 밖의 다른 상원성 등의 예로 보건대, 바로 이러한 원성에 포섭되는 것에 자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과거ㆍ미래법은 바로 원성에 포섭되는 것(즉 시원성)이라고 인정하였으므로 필시 마땅히 그러한 [과거ㆍ미래법에도] 자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다시 말해 자상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한다.
즉 [그는 과거ㆍ미래법에는] 자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면서도, 그것을 ‘원성(먼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의 설은 한쪽(즉 시원성)으로 치우쳐 있을뿐더러 정리와도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멀리 있는] 법의 예를 아직 다 언급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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