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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의 신 헤이디스는 하늘의 신 제우스가 그러하듯 항상 앉아 있는 자세로 표현된다. 머리 3개가 달린 맹견 세르베루스(Cerberus)가 헤이디스를 지킨다. 튀르키예 히에라폴리스의 헤이디스 조각상.
“요한은 너무 신비적이고, 마가는 지나치게 저속하며, 누가는 항상 감정적이다.”
영화 ‘오이디푸스 왕’을 만든 리얼리즘의 거장 피에르 파솔리니의 신약성경 평가다. 예수의 언행을 기록한 4명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마태를 영화 주인공으로 내세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마태는 대중적이고도 현실적인 캐릭터로 평가된다.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1964년에 출시된 파솔리니의 흑백영화 ‘마태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에 대해 들어본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일생을 제자 마태의 관점에서 해석한 영화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전편에 깔리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이탈리아 감독 파솔리니는 무신론자에다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로마 바티칸은 그의 영화 ‘마태복음’을 기독교 관련 영화 중 최우수작으로 인정했다. 남성만 출연하는 일본 가부키의 전통이자 역사지만, 이 영화에서도 남자배우들이 여성보다 더 여성스러운 언행, 표정, 연기가 일품이다. 가까이서 일상화된 것보다 한발 떨어져 보면 사물이 더 잘 보이게 마련이다. 파솔리니가 무신론자이기에 기독교를 한층 더 성스럽고 아름답게 그려냈을지 모르겠다.
파솔리니가 갈파했듯이 요한은 신비 그 자체다. 일단 삶 자체가 신비롭다.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자연사한 인물로, 무려 94세까지 살았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는 자살을, 나머지 제자 10명은 처형과 순교로 생을 마쳤다. 요한의 장수는 성령(聖靈)이 함께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당연하지만, 성령은 신비롭다. 에게해의 작은 섬 파트모스(Patmos) 동굴에 혼자 살면서 평생 성전(聖典)을 기록했다.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내륙에 위치한 아크하라카 신전 유적. 지하세계를 주관하는 헤이디스를 모셨던 곳이다.
기독교 이전의 지옥과 천국
‘요한 계시록’은 요한을 신비롭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미래 예언서로 알려진 신의 메시지가 ‘요한 계시록’에 압축돼 있다. 선과 악의 끝없는 싸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예수 재림에 이르는 미래가 ‘요한 계시록’에 드리워져 있다. 난해한 상징을 앞세운 언어이기 때문에 해석이 제각각이다. 신학자들조차 성경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려운 만큼 신비함도 더해진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고통에 처해질 것이라.’(요한 계시록 20장 10절)
신비로 채워진 요한을 이해할 성경 속 한 구절이다. 요한은 ‘마귀, 불, 유황, 짐승, 거짓, 고통’에 이르는 지옥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인물이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아주 자세히 기록한 인류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 요한이다. 물론 요한은 천국’의 모습도 ‘요한 계시록’을 통해 구체화한다. 구체적인 천국 땅의 규모에서부터, 누가 천국을 지키는지에 대한 세세한 점도 기록했다. 신의 아들 예수를 믿지 않을 경우, ‘마귀, 불, 유황, 짐승’이 기다리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란 예언이 ‘요한 계시록’의 핵심 중 하나다.
요한, 아니 기독교는 지옥과 천국이란 사후세계를 확산시킨 주인공이다. 기독교 이전까지만 해도 지옥이란 개념이 아예 없었다. 천국의 개념도 인간, 동물, 자연이 하나가 된 지상에서의 낙원, 즉 파라다이스 정도로 풀이됐다.
지옥 개념이 등장하기 전, 다시 말해 기독교 등장 이전의 사후세계는 어떤 곳이었을까? 기원전 5세기부터 5세기 서로마 멸망 때까지 1000년간 서방 문명·문화를 이끈 주역은 바로 고대 그리스다. 그들이 믿었던 사후세계를 기독교와 비교해보자. 그리스인들은 사후세계가 지하세계(Underground)에 있다고 믿었다. 지상의 삶을 끝낸 뒤 저세상으로 연결되는 강(Styx)을 건너, 지하세계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죽음이라 생각했다. 불이나 유황과 무관한 ‘공간이동’ 정도가 사후에 벌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땅 밑이 그러하듯, 춥고 어둡고 배고프다는 부정적인 의미는 있었다. 죽은 뒤 지하세계에 있던 그리스 영웅 아킬레스는 “지하의 왕보다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인간의 노예로 살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따뜻한 세상이 그리워도 태양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리스 지하세계는 생전의 잘잘못을 따지는 심판의 땅은 더더욱 아니었다. ‘마귀, 불, 유황, 짐승’이 등장하는 지옥 개념이 아예 없었다.
아테네와는 다른 튀르키예의 신전
지옥이 없기에 기독교식의 천국이란 개념도 희미했다. 지상 천국인 파라다이스를 제외할 경우, 제우스와 12신들이 모여사는 올림푸스 산이 천국에 해당할 듯하다. 그러나 그리스가 본 천국의 세계는 인간의 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세의 세상과 다른 점이라면 딱 두 가지, ‘불멸불사’ ‘불로장생’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스 신화의 특징이지만, 신과 인간의 구별이 ‘거의’ 없다. 차이점이라면 신은 안 죽고 병도 안 걸리고 평생 젊음을 유지한다는 점뿐이다. 단정한 머릿결과 수염으로 멋을 부린 제우스지만, 자세히 보면 주름살 하나 없다. 올림푸스 신들은 대머리는커녕 20대에 버금갈 엄청난 머리숱을 갖고 있다. 몸도 올림픽 선수 이상의 근육으로 단련된 청춘 그 자체다. 온갖 변신술을 통해 펼쳐진 제우스의 수많은 여성편력도 불멸불사, 불로장생의 상징으로 해석됐다.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내륙에 위치한 신전 아크하라카(Akharaka)는 그리스 사후세계를 이해할 최적의 증거 중 하나다. 지하세계를 주관하는 신을 모신, 전 세계적으로 아주 희귀한 신전이기도 하다. 필자가 아는 한, 지하세계를 주관하는 신만을 위한 신전은 아테네 북쪽에 위치한 ‘플루토니온(Plutonion of Eleusis)’이 유일하다. 지하로 내려가는 어두운 동굴 하나가 전부로, 인공 신전이 아닌 자연 지형을 활용한 공간이다. 반면 아크하라카는 산중턱에 들어선 인위적 시설로, 동굴로 상징되는 플루토니온 신전의 이미지와 다르다. 흥미롭게도 아크하라카는 지하세계의 신 헤이디스(Hades·로마명 Pluto)와 함께 부인인 페르세포네(Persephone·로마명 Proserpina)도 함께 모시는 곳이다. 그리스 문화의 특징이지만, 부부나 가족 모두를 모아놓은 신전은 극히 드물다. 집단으로 묶여 사는 동양과 달리, 자유시민으로 구성된 그리스는 자신만의 개성을 중시여겼다. 신은 한층 더 자신만의 파워와 영역을 강조했다. 제우스와 헤라를 함께 기리는 신전은 없다.
마차를 탄 헤이디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장면은 그리스 예술의 주된 테마 중 하나다. 아무리 신이라도 추운 지하에서 혼자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반영하는 장면이다.
지하의 신이 선사한 성수
그리스는 물론 로마 당시의 상황이지만, 헤이디스와 페르세포네는 평소에 입에 올려서는 안 될 터부 중 하나였다. 지하세계 신을 자극할 경우 곧바로 춥고 어두운 땅으로 끌려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대인은 신의 저주나 벌에 관한 두려움을 일상적으로 느끼며 살아갔다. 전염병과 죽음이 도처에 들끓었고, 제대로 된 약이나 전문의사도 없던 시대였다. 과학이나 이성이 파고들 틈이 없었다. 자비·박애와 무관한 공포 그 자체가 신이었다. 헤이디스는 무서운 신 가운데서도 최고로 두려운 존재였다.
의도적이지만, 해가 넘어가기 직전에 아크하라카에 들렀다. 지하세계의 의미를 일몰로 연결해 살펴보고 싶었다. 신전은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올리브나무들 사이에 남아 있었다. 대리석이 아닌 주변 산에서 채굴한 큰 바위로 만든 기둥와 기반이 흩어져 있다. 산꼭대기에서 밀려든 10m 높이 토사가 신전 대부분을 잠식한 상태다. 돌기둥 일부만 발굴된 상태로, 현재 가로 20m, 세로 10m 정도의 흔적이 전부다.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간다면 훨씬 큰 규모의 신전이 드러날 듯하다. 물은 그리스 신전의 핵심이다. 제우스, 아폴로, 아테네 신전 어디에 가도 ‘반드시’ 작은 우물이 신전 한가운데 들어서 있다. 당시 물은 신이 내린 만병통치용 성수(聖水)로 통했다. 병이 들더라도 신전의 물을 마시고 몸을 씻는 것만으로도 완치된다고 믿었다. 물로 행하는 기독교 침례의식도 물에 관한 그리스 의식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당대의 신전 우물은 소수의 신관만 출입할 수 있는,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추앙됐다. 그러나 2000년 세월이 흐르면서 우물의 흔적과 신전의 중심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간단히’ 찾아내는 방법이 하나 있다. 나무다. 크든 작든 돌 사이를 비집고 자라는 키 큰 나무를 발견한다면 그 주변이 신전 최중심이자 우물이라 볼 수 있다. 물길도 사라지고 우물도 안 보이지만, 바닥 깊숙한 어딘가에 지하수가 흐른다는 의미다. 아크하라카에도 비교적 큰 나무 하나가 돌 틈 사이에 자라고 있었다. 도굴의 흔적이 심하지만, 신전의 중심으로 판단된다.
아크하라카 바로 앞은 10㎞ 정도 펼쳐진 평지로 이어져 있다. 지하세계의 인공 신전이 왜 깊은 동굴이 아닌, 산중턱에 들어섰는지 궁금했다. 아테네 근처 플루토니온 신전과의 차이점이기도 하지만, 아크하라카 주변에는 작은 동굴들이 많다. 동굴 신전이 아니라 동굴 집들이다. 2500여년 전 아나톨리아, 에게해, 지중해에 몰려든 수많은 병자와 가족들이 거주했던 공간들이다. 거의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아크하라카 주변에 아예 상주하면서 병을 치료했다고 볼 수 있다. 신전에서 나오는 물과 신관의 축복이 치료의 전부였을 것이다. 지하세계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를 통한 심신치료라 할 수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었겠지만, 매일 헤이디스와 페르세포네에게 기도하고, 심야의 의식에도 참가하면서 죽음을 피하려 했을 것이다. 추정컨대 그리스 당시 아크하라카 주변은 석관이나 묘비명 같은 죽음에 관련된 장사꾼으로 터져나갔을 듯하다. 지하세계 신이 보낸 성수를 마신 뒤 회복한 사람들의 얘기도 전설처럼 퍼져나갔을 것이다. 당시의 기억을 되살릴 겸 마실 물을 찾아봤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오렌지색 해가 넘어가면서 신전 주변도 곧바로 어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그리스인들의 희망과 절망이 넘실대는 듯하다.
헤이디스와는 다른 동양의 염라대왕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동양에서의 지옥 개념도 기독교 등장 시기에 나타난다. 인도 힌두교의 전파가 시작된 이래 힌두교 사촌 격인 불교를 통해 동양 전체로 확산된다. 한반도의 경우 불교가 국교로 정착된 7세기 이후 ‘죄=지옥=화형’이란 개념이 일반화된다. 염라대왕은 불교, 도교에 등장하는 지하세계의 신이다. 거울에 비친 현세의 행적을 보면서 지옥행 여부를 결정하는 신이다.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야마라자(Yama-rāja)’라 불리는 신이지만, 한자로 풀이하는 과정에서 염라대왕이 됐다. ‘야마(Yama)’는 지하의 신, ‘라자(Rāja)’는 대왕을 의미한다. 그리스 지하세계의 신, 헤이디스를 원조로 했다고 볼 수 있다. 인도는 바다를 통해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문화를 직수입한 곳이다. ‘염라대왕=헤이디스’란 말이다. 그러나 같은 지하세계의 신이지만, 여러 면에서 다르다. 일단 외모다. 공포는 염라대왕은 물론 힌두교의 야마라자 조각이나 그림의 공통점이다. 동양 지하세계의 신은 동물처럼 날카로운 치아에다 무서운 눈을 한 핏빛 보라색 공포의 캐릭터다. 보는 순간 압도된다.
그리스는 어떨까? 첫째 혼자가 아닌 왕비인 페르세포네와 함께 앉아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지하세계가 차갑고 외로운 만큼, 헤이디스조차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다. 둘째는 인간의 죄를 판단하는 역할이 없다는 점에서 염라대왕과 다르다. 현세의 삶을 판단할 거울도 없고 인간의 죄를 묻는 위치가 아니다. 심판관 같은 구체적인 일이 아니라, 지하세계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 존재가 헤이디스와 페르세포네 부부다. 셋째 지하세계 신의 행복관이다. 동양의 염라대왕은 혼자 살면서 하루 종일 인간들의 죄를 밝히는 일에만 매달린다. 원래 신이지만, 외모가 그러하듯 관료에 준하는 세속적 존재다.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그리스의 헤이디스와 페르세포네는 어떨까? 헤이디스는 틈만 나면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지상의 세계로 올라간다. 그리고 지상의 꽃, 나무, 공기, 경치를 즐긴다. 헤이디스가 마차로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농업의 여신 데메테르(Demeter)의 딸이 페르세포네다. 첫눈에 반해 강제로 납치한 뒤 지하로 데려가 부인으로 삼는다.
10월은 1년 전체를 통틀어 시간이 가장 빨리 흐르는 때다. 매일 기온이 떨어지면서 나뭇잎 색깔도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세월을 피부로, 눈으로 실감할 수 있는 쓸쓸한 시간이다. 10월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슬픔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딸 페르세포네가 지하로 내려가 살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페르세포네는 1년 중 8개월은 어머니가 있는 지상에 거주한다. 그러나 나머지 4개월은 지하로 돌아가 남편과 함께 살아야만 한다. 10월 말부터 시작되지만, 찬바람이 부는 시기와 일치한다. 데메테르가 딸을 그리워하면서 대지를 돌보지 않는 과정에서 불모의 겨울이 엄습한다.
파솔리니 같은 감독이 21세기에도 존재할지 의문이지만, 지하세계의 신을 다룬 영화를 만나고 싶다. 뿔이 달린 악마나 인간을 지옥에 보내는 데 열심인 염라대왕이 아니라, 스스로 지하세계에서 벗어나려는 부부 신에 관한 얘기다. 사랑하는 여인 에우리디케를 되살리기 위해 지하세계까지 찾아간 오르페우스 신화도 영화 어딘가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헤이디스와 페르세포네를 보면 추운 지하를 싫어하는 심리를 숨기지 않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이디스는 무진장 지하 광물의 보유자로, 부자를 상징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나 금보다 따뜻한 지상에서의 1분 1초를 한층 더 아꼈다. ‘불멸불사 불로장생’을 제외할 경우 그리스 신과 지상의 인간은 이심전심(以心傳心) 동일체였다. 사랑과 희생을 창조한 예수지만, 하늘의 신과 땅의 인간을 완전 분리시킨 것도 기독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