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가파 전우를 찾았던 이야기
백마 28 도깨비연대 2중대
------------------
보병 제 9사단 백마부대가 파병이 결정 됐을때,
본인이 원해서 월남을 안 갈 수 있는 자격이 정해 졌는데,
즉 - 1대독자 이상,제대가 1년 미만인자.
집안이 무쟈게 가난한자.그리고 빽이 좀 있는 者
등등...
그들을 정리해 보니 사단 전체 숫자의 5분의 2 정도가 다른 부대로 전출되고 다른 보병 사단에서 그만큼의 인원이 9사단으로 보충됐다.
장교들은 여러 보병 사단에서 차출내지..지원으로 보충 됐지만,
상사 이하 사병은 거의 28사단에서 보충됐다.내가 2중대 2소대 1분대장이 됐을때,부분대장은
좌측 사진의 김가파 였다.
김가파는 투박한 사투리를 쓰는 부산 사람으로 안성의 홍석진 하사와 입대가 같은 날자다.
28 사단에서 왔고,논산군번 1141, 나보다 입대가 5개월정도 빠르고 나이도 한살이 위다.
김가파는 덩치가 크고 고졸 출신이며 유머 감각도 뛰어났다.
내가 원주 1군 하사관학교에서 졸업 전,나의 2중대에선 입대동기인 조종학이가 1종계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그 당시 윗 사람이 다 - 떼어먹고 얼마남지 않은 부식으로 사병들의 배를 불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여서 보통의 완력을 갖지 않는한 아무나 1종계를 할 수 가 없었다.
종학이는 입대 前,아현동 일대에서 좀 놀아본 사람이니 그 자릴 꿰 찰 만한 능력이 있었다.
계급이 높거나 고참이라도 조종학일 함부로 대하거나 어쩌질 못했다.
종학이와 김가파는 서로 똥창이 맞아 친하게 지냈다고 나중에 알았다.
중대 본부에선 김가파를 본부로 데려 갈려고 애를 썼지만 내가 맞섰다. 나는 그를 뺏기기가 싫었는데 그 당시에 고졸 출신을 구하기도 어려웠을 때 였다.
그런데 나의 1분대 부분대장이 된 김가파는...나를 적대시 했다.
자신이 입대가 빠르고 나이가 한살 위라는 것도있고 내밑에 있는게 자존심이 傷한다는 얘기다.그러나 그건 군대선 어불성설.말도 안되는 소리...
나는 말 로서 그를 설득했다.그 것도 내가 잘 한 일 중에 하나다.
그 애를 다른데로 보낼 수도 있지만...지금 월남에 놀러가는게 아니고 전쟁을 하러 가는데
조금이라도 더 배운놈이 낫고..힘도 좋고 위험에 재빨리 대처할 수 있어 보이는 그를 다른 곳으로 뺏길 수 는 없는 일 이다.
월남에서 수많은 작전과 매복시에도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도 그런점이 있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준비가 철저했다.적과 싸울 때 준비를 갖추지 못한 병사는 곧 죽음이다.
가장 중요한건 우리 1분대나 2소대 아니, 중대장 포함..2중대 전체 에서도 전쟁을 해 본 사람이 없고 敵과 맞닦뜨린 상태를 겪어본 놈 없고 敵陳을 향해 총한번 쏴본 놈 이 하나도 없는...대대장급 이상은 되어야 1.4 후퇴때 입대를 했거나....
전쟁에 대해선 아무런 경험도 없는 햇병아리들만 수두룩...소꼽장난이나 할 수 있는,
그런 애들이 모여 전쟁터로 간다니...삶은 소 대가리가 웃을 일 이다.
모두가 전쟁에 대해선 거의 어린애 수준인 걸...기막힌 현실이다.
그리고 전쟁은'나 혼자서 하는게 아니란 걸...' 위기에 대처할 능력도...
다시 또 말 해서 우리가 월남에 전쟁 영화를 찍으러 가는 게 아닌 거다.죽느냐 사느냐 인데, 내부하를 하나라도, 더- 배웠고 똑똑한 놈이 있어야 되는 건 당연지사다.
허다못해 입대 前 동네에서도 패 싸움은 커녕,1대1의 싸움도 제대로 못해본 애들과 전쟁터로 같이 가는 내 마음은 뭐 하나 기댈곳이 없는데 김가파 마져 뺏길 수는 없는 일 이다.
사진은...투이호아에서
뒷줄 좌측이 김가파.
두번째가 권춘택.
앞줄 앉아 있는 좌측부터 세번째가
26 묘역에 있는 이기현..
그렇게 3명은 ...
한국 軍에서 못 먹은 탓도 있지만
c.레이션 등 느끼한 걸 참 잘 먹었다.
(그 당시 한국 군대..참 배고프고 춥고 그랬다.)
한국에서 화랑 담배만 피우다가 양담배가 지천에 깔려?
있어서 그런지.....
그 당시는
모두가 담배를
피웠다.
지금은 만나는 2소대 전우 중에 한명만 담배를 피운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에 의해 결정 될 수 있다는 '호우돈의 이야기'처럼
나의 2소대원의 운명도 마찬가지 였다.
'전우찾기(1)'에서도 썼지만,투이호아로 이동해 첫번째 작전이 '도깨비1호'인지,'마두1호' 였는지는 기억에 없으나.하여튼 첫번째 작전때,2중대에서...그것도 우리 2소대에서,
첫번째의 희생자가 생겼다.
그가 상주 사람이며 3분대 부분대장 였던
이차세 이다.
집안이 너무도 가난해 28사에서 지원해 백마부대로 온 전우로 봉급전체를 집으로 송금했고,그 돈으로 동생이 고등학교에 들어 갈 수 가 있었다.
전사 통지서가 간 후, 그 동생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저는 앞으로 어떡하면 좋으냐고...'
43년생,논산군번 1141.(김가파와 동기)
26묘역 541번에 있다.
심하게 사투리를 하는데 참으로 착한 사람이다.
(66년.12월27일 전사)
두번째 희생자.3분대 분대장 이만생,
전주 사람으로 그의 형님은 mbc 방송국의
국장였고 남동생은 제약회사엘 다니고 있었다.
매년 참석하던 그 형제들도 국군묘지에서 볼 수 가 없다.(지금 거동이 불편하다는 소식이다.)
42년생,26묘역 722번에 있다.(67년 5월10일
전사)
두명 다 - 우리 2소대원이다.
3분대는 짧은기일에 분대장 부분대장 둘이서 유고가 되어 한동안 우왕좌왕을 거듭 했었다.
그리고,1소대 향도 황음주 하사.
그는 차이산 죽음의 계곡에서 철수 하던중,
나와 나란히 내려가다가 바위가 너무 높아 뛰어 내리기를 주저하는 순간,뒤 山위에서 vc가 쏜 두발이 그의 뒤 통수를 관통..이마로 나왔다.
그의 철모는 메아리 소리를 내며 저 - 아래 와지선으로 굴러 내려가고,vc가 나란히 있던 나를 쐈다면 황하사와 나는 생사가 바뀌였을 것 이다.
그들이 차례로 죽는 걸 눈 앞에서 보고 그들의 시체가 푸대에 담겨진채 헬기로 실리고 ...정글 위로 사라질 때,마다 허무한 인생을 느꼈다.
그 좀 전에 3대대 11중대가 새볔에 vc들의 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받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 때서 부터 나의 1분대는 작전을 마치고 중대로 돌아 와서도...식사를 할 때도 끙가를 할 때도.잘 때도.탄 띠를 끌르질 않았고 총을 가슴에 앉고 잠 자기를 귀국할 때 까지 그랬다.
정글화를 3개월동안 벗어본 적 없이 계속 신고 있었었고,귀국할 때 사단 본부에서...그곳에 있는 연못에서 월남에 있던 동안에 첨으로 홀딱 벗고 목욕을 했다.
그만큼.....나는 살아 돌아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다.
나는 .. 나의 부대가 파병 결정되기 전,늦게야 원주 1군하사관학교에 지원..교육을 받았다.
원주1군 하사관학교 생도 제 7중대
4명의 선임하사.
위 두명은 42년생. 아래 두명은 나와 동갑.
네명 다 - <一當百>은 안된다 해도.
<一當 五十>의 격투사들이다.
"싸움은 ... 전쟁도 마찬가지..선제 공격이다.
死生을 걸고...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야 한다.그게 군인의 본분이다.또한 너희가 이길 수 있도록 가르치는게 우리가 하는 일 이다."
이들이 늘 - 하던 말 이다.
그런데 이사람, ...나하고 동갑.
선임하사 이관영,고향 성북구.
당시 청도관 당수7단.
그가 불알이 튀어나오게 바지를 치켜 입으면..
그를 이길자 없음.
김신조도 겜이 안됨. 한방에 중상을 입을 정도.
와이셔츠 단추구멍만한 눈에 항상 이를 악물고
말을 함, 쉬어 터진 목소리.
한밤중 ,생도들을 기상시켜 얼음구덩이에
집어 넣을 때도 반드시 팬티 차림으로
먼저 들어감.
한마디로 날고 김.
군인으로서 최고의 정신무장을 가졌음.
이관영 선임하사는 우리들에게 열번 정도 이런 말 을 했다.
"남자는...대한의 군인은...이래야 한다.
[총알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벌판에 있어도.][적의 대공포로 3만피트 상공에서 격추되는 비행기 속에서도.][태평양 바다속으로 가라앉는 배(船)속에 있었어도...] 살아서 명령받은 장소로 돌아와야 한다.살아 있어야 전쟁에서도 이길게 아닌가!군인은 전쟁에서 이긴뒤에 말 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좋다! 행군간에 군가를 한다.군가는 '멸공 돌격대' 요령은 치악산이 무너지도록.
군가시작! 아으나.뚜을.악.악...
~ 보 아라 하늘높이 휘날리는 저 깃발을...<아으나.뚜을>
조국의 흥망걸고 자유평화 위해서...<아으나 뚜을...~>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죽일려고 총을 겨누고 있었던 월남의 전쟁터가 아니라면 난,월남에서 보다 하사관학교에서의 교육이 더 힘들었다.)
(논산 훈련소도 그러하지만,1군하사관학교에선 전쟁하는 걸 가르친다.'적군을 죽이는거..'
그곳에선...敵을 죽이고 살아남는 걸 가르친다.)
(난 1군 하사관학교에서의 고된 교육으로 월남에서'살아 돌아 왔다고 믿는다.)
나의 1분대원,좌로부터 오늘의 전우찾기 주인공.부산의 김가파.
광양의 박문수.
전우찾기
(1)의 주인공 榮州의 김용수.
투이호아에 도착한지 두달쯤후, 박문수가 내셔널 라듸오를 하나 샀다.
(나의 1분대원들이 갖고있는 사진들은 대부분 내가 찍어준 것 들이다.)
모두들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기에 먹는게 우선 이었다.그런데 김가파는 덩치도 크려니와 먹는量도 대단했다.그는 뭐든지 잘 먹었다.
그에게 한명 있다는 여동생 에게서 편지가 왔다.그가 보여주는 그의 여동생이 쓴 편지 말미에...
"오빠 아직도 그렇게 많이 먹우?"
그는 평소에도 식식 거리며 숨을 몰아쉰다. 뱃속에 너무 많이 집어넣어 힘들어서 그렇다. 남들이 안먹는 깡통속에 맛없는 빵도 고기를 넣고 싹 - 먹어치운다.
(그가 먹어서 생기는 애피소드 생략.)
그러나 작전중에는 참 동작도 빠르고 침착한 사람이다.매복 시 에도 졸거나 아예 자거나 그런일 없이 부여받은 임무는 철저히 지키는 2소대 4명의 부분대장 중,최고였다.
김가파는 월남에 도착하자마자 천은구(1128)유상현(1131)등 과 함께 병장으로 진급했다.
도깨비 1호 작전 때, .. 내생각에 대대장님의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작전...
약 100 여 미터 거리의 늪 지대를 건너가는데 깊은 곳은 가슴까지.빠지는 늪지대를 ..m.1 소총을 만세 부르는 자세로 치켜 들고 건너는데...김가파가 뒤에서 중얼 거린다.
"거리가 1킬로도 안되는 앞산에서 만약에 쥐새끼들이(v.c) 80미리 박격포로 100발 정도
쏘면 우린 달아날 수도 없고 모조리 죽는다."
나도 조마조마한 마음인데 그런 소릴 들으니 긴박감이 밀려 왔다.
그 당시 v.c가 그런식으로 공격했다면 2중대는 몰살 했을 것 이다.이곳에 대해선 같이 그 장소에 있었던 석진이나 종학이 의성이와 춘균이 화웅이도 같은 말을 한다.
(생략)
나의 1분대 김용수 전우를 찾은 뒤 부터는 김가파와 이길용이를'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더욱 절실해 졌고.2소대원들과 만남의 자리에서도 그 두사람의 얘기는 여전히 우리 소대의 아쉬움으로 남았다.전라도 말씨를 썼던 이길용 전우는 많은 동명이인과 통화를 해 봤지만 모두가 허사였다.그런데 정말 흔하지 않은 이름의 김가파...보훈처 명단에 없는거다.
67년 8월에 귀국한 2소대원에 의하면 김가파는 7월 3차로 귀국했다는거다.그런데 왜?명단에 없을까..! 고향이 부산 이라고 했는데...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고,접은 종이를 가위로 이리저리 잘라서 펴 보면 근사한 작품을 만들어 냈던 김가파...귀국해서 뭐 잘못됐나?
참으로 여러가지 생각으로 답답했다.
2소대장님으로 부터1킬로 이상 떨어져 있는 나의 1분대.
분대식당..탄통에 밥해놓고
c.레이션과 함께 식사중,
엉성하기는 하지만v.c 로 부터 습격 받으면 엎드려 포복해 앞쪽으로 나오면 된다.
맨 좌측 서 있는 사람이 아직도 못찾고 있는 이길용 전우.
나의 1분대 아홉명.
식사후, 이것저것 같다놓고 後食중.
맨 좌측은 '나' 이고.
맨 우측이 김가파.
내가 1차로 귀국 할 때까지 1분대의
전사자는 없었음.
중앙에 c.레이션을 들고 있는 사람이 김가파..
찾아야 하고...보고싶고...명단엔 없고,
난 적어도 3일에 한번씩은 보훈명단을 클릭..김가파는 없다.
(아마 그동안 전부 합해서 600 번 이상은 보훈명단을 방문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던중...09년 1월10일 경에,보훈등록명단 창을 뜨게 한뒤 버릇대로 김가파 이름을 쓰고 클릭을 했다.
아 !!! 그런데 창이 바뀌어도 아무 이름이 없던 곳에'김가파'란 이름이 있잖은가?!!
이게 어쩐 일 인가? 분명 김가파 이다.
난 숨을 쉬기가 거북할 정도로 놀래고 기뻐서 눈을 의심하고..몇번을 다시 보다가...
난 얼마나 반가운지 나도 모르게 소릴 질렀다.
'에우레카 !!!! '(발견했다.찾았다.)
두군거리는 마음을 겨우겨우 진정 시키며 부산 보훈청에 전화를 했다.
'일각이 여삼추 라지만'
그래봐야 한 10분 됐나...핸폰에 전화가 온다.처음본 전화 번호다.난 조심스럽게.
"네 김영배 입니다" 흥분된 마음을 누르느라고 힘들다.
"저가요..김가판데 날 아십니까?!!".....(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67년도 6월에 헤어져 40년도 더 지났지만,그 때의 쉰 김가파 목소리가 분명한데...??
".....목소리로 봐서..분명 김가파 인데 김영배를 잘 모르겠다니오.?"
"어떤 동굴 속에서 길을 잃었던 기억 밖에는.....!!"
"그럼...김동복 소대장은...분대원 권춘택.박문수도 기억 안나?"
"난 현재 과거를 잊고 삽니다. 기억 나는게 없어요..."
도깨비 1호 작전에서 전사한 이차세와 오작교 작전에서 전사한 이만생의 얘기를 해도 잘 모르겠다고 하고 기억이 안난다고 한다.
이게 뭔 일인고...? 제 분대장도 모른다니 뭘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제가 지금 좀 바뻐서 그럽니다.이따가 저녁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나는 즉시 소대장님께 전활 했다.
"가파를 찾았더고? 야...! 영배씨 대단합니다.어떻게 찾았노? 아..그렇지 베트벳...!! 그래.. 가파는 어데 산답디까?"
나는 가파와 통화한 내용을 말 했다.
"지난일을 모른다니...?? 영배씨도 모르고?...나도 모르고...?!! 그럴리가 있나.가파가 뭐 그렇게 엉성한 사람이 아닌데...전화번호 갈켜 줘 봐요. 내가 전화를 해 볼께..."
한 30분 지났나...소대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소대장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