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중원여행 중 북송의 수도였던 카이펑(변경, 개봉)의
송도어가, 포청천 사당, 개보사터 전탑 등을 답사하였습니다.
개보사터(철탑공원)에서는 기념품으로
장택단이 그린 중국 국보 제1호로 꼽히는 <청명상하도>
복제본의 축소복사품을 기념으로 이형우 선생님이 사서 선물해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황하의 토사로 송대의 고도는 지금 모두 지하로 묻히고 말았다고 하니
황하의 황토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가 실감납니다.
함께 중국 중원여행을 한 이형우 전 회장님의 질문에 대한 저의 답입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정강의 변으로
북송의 황제 휘종과 흠종이 여진족의 금나라 포로가 되었고
금나라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휘종과 흠종의 능이 두만강 유역의 회령에 있다는 정보의 진위를
이형우 회장님이 물어 오셨습니다.
30년 전, 카투사병으로 군복무하던 시절
한미연합 정기 훈련이던 팀스피리트로
해월 선생이 체포된 원주 문막의 어느 야산에서
동기생이 들고온 문고본 <<택리지>>와 <<동의수세보원>>을
빼앗아서 원문과 해석을 대조하며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택리지>>에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숙종 정유년에 강희황제가 목극등을 시켜, 백두산에 올라 두 나라 경계를 살펴 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두만강을 따라 회령 운두산성에 왔다가 성 바깥 큰 언덕에 여러 무덤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지방 사람이 황제의 능이라 하였다. 목극등이 사람을 시켜 파헤치다가 무덤 곁에서 짧은 비석을 발견했는데,
비석 위에는 송제지묘宋帝之墓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극등은 그 봉축封築을 크게 쌓게 하고 갔다.
그리하여 금나라 사람이 말하던 오국성五國城이란 것이 곧 운두雲頭산성인 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만 송제라고만 적혀 있어서 이 무덤이 휘종의 무덤인지 흠종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다.
운두산성은 동해와 겨우 이백 리 거리이고 고려와는 바닷길로 아주 가깝다.
또 고려의 전라도와 중국 항주와는 작은 바다를 격하여서 바람만 잘 만나면 뱃길로 이레 만에 통할 수 있다.
만약 송나라 고종이 비밀리에 고려를 후하게 대접한 다음 고려를 시켜,
동해에 배를 띄우고 군사 천 명으로 운두산성을 습격하여 휘종 흠종과 형후邢后를 빼앗아,
바닷길로 오다가 고려 땅에 오르고 다시 전라도에서 배편으로 항주에 닿게 하였더라면,
이것은 천하에 기이한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하건마는 애석하게도 고종은 아비를 염려하는 마음은 없고,
서호에 놀이하는 즐거움에만 정신이 빠졌으니 그 불효한 죄는 하늘에 사무쳤다 하겠으며,
천고에 유감된 일이다.
그러나 고종은 죽은 지 백 년이 못 되어 도둑 중에게 무덤이 파헤쳐지는 화를 만났고,
휘종은 비록 타향에서 죽어 묻혔으나, 지금(1750년경)까지 무덤이 보존되고 있으니
하늘 이치의 돌아감을 알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지방 사람이 언덕 위에 밭을 갈다가 옛 제기, 술항아리, 솥, 화로 따위를 발견하게 되는 바,
이것은 선화宣化릉(휘종의 릉) 같으며 나머지는 궁인과 모시던 관원의 무덤인 듯하다.
두만강 북쪽 십여 리 지점에 또 황제릉이 있다고 지방 사람이 말하니 이것은 흠종의 능인 듯하나
분명히 알 수 없다."
-이익성 역주, 이중환 지음, <<택리지>>, <팔도총론-함경도>, 38-39쪽.
탁월한 인문지리서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이 정보를
고고학 교수인 매형에게 오래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정보를 확인해줄 북한의 고고학 발굴 보고가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청화산인 이중환의 <<택리지>>는 역사, 지리 공부는 물론이고
문화유산답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서입니다.
우리 땅의 지리와 문화, 역사에 대한 통찰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