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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산책]『신심명』⑧ 일승 얻고자 한다면 육진을 꺼리지 말라 좋아하지 않으면 정신이 피곤하나니 어찌 (도에)소원함과 친근함이 있을까? (不好勞神 何用疎親) (欲趣一乘 勿惡六塵)
친·소는 자아의 분별일 뿐 일승의 가르침을 체득하려고 한다면, 육진 즉 육경(六境)을 싫어하고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육진은 육근에 대한 객관으로써 ‘본래심’의 거울을 덮었을 때 그것은 티끌이다. 다시 말해서 육진을 싫어하여 마음을 청정히 하고자 좌선에 집착하다 보면 일종의 선에 대한 친·소가 생겨 도리어 ‘자아’의 분별이 먼지같이 일어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육진 즉 현실의 세계를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정각이다. 심안이 열린 지혜로운 자는 일체법을 그대로 수긍할 뿐이며 현실의 세계를 긍정하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은 이라는 것이다.
(法無異法 妄自愛着) (將心用心 豈非大錯)
‘법무이법’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의 사물은 모두 진여이고 이외의 다른 것은 없다는 것. 임제의 “내가 꺼려야 할 법은 없다.”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한다. 그러나 현실의 자아는 이와 반대로 육경을 육진으로 헤아려 ‘본래심’을 더럽힌다고 하여 꺼리고, 법에 대해 이견(二見)을 일으켜 분별하고 취사(取捨)한다.
종교에서조차 ‘성스러운 것’을 지향하는데 몰두하는 것이다. 실은 마음이 바로 법이고 부처이므로 일찍이 부처님은 ‘자등명 법등명’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본래심’을 지향하는 좌선의 수고를 한다는 것은 ‘크게 착각’하는 일이 된다고 신심명은 강조한다. 그것은 마치 ‘아이를 업고 아이를 찾는 격’이며 ‘눈으로 눈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돈오입도요문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씀을 대전도”라고 하였고, 황벽스님은 “마음을 헤아리면 차이가 생기고 한 생각 움직이면 바로 어긋난다.”고 하였다. 지도(至道)는 목전에 있는 것, ‘회광반조(廻光返照), 조고각하(照顧脚下)’는 모두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당대 남전스님은 ‘불의지도(不擬之道)’, 즉 ‘헤아림이 없음을 도’라고 했다. 혜원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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