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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게 진짜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이것이 나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지를 우리는 사실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알 수 있다고 착각하니까, 어떤 특정한 한 가지 미래에 대해서 집착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이런 표현도 씁니다. 굵직한 크게, 크게 원을 세우는 건 좋은데 디테일하게 세부적인 거까지 계획 세우지 마라. 이런 표현을 써요.
그러고 실제 어떤 큰 원을 세우는데 있어서 디테일한 것들을 내가 세울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그 큰 원이 있으면 그 세부적인 것들은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이 우주법계가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큰일을 해낸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정말 자잘한 거 하나하나까지 희한하게 아귀가 착착 들어맞아가지고 모든 것이 정말 이 세상이 나를 그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다 아주 그냥 작전을 짠 것처럼.
이렇게 정교하게 작전 짜기가 쉽지 않을 거 같은 정도로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걸 머릿속으로 계획한다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거든요. 머릿속으로 계획한 일이 틀어지면 막 사이렌이 울리면서 막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아, 내가 생각하는 이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대로 일이 이루어지려고 하는 것이구나.’ 언제나 일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래서 미래에 대해서 자꾸 추구하고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되면 삶이 내가 뜻하는 바대로 되거나 안 되거나 둘 중에 하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을 상대로 삶을 상대로 계속해서 긴장하면서 되면 좋아하고 안 되면 괴로워하고 이게 하루 종일 계속 반복돼요. 내 뜻하는 대로 되거나 뜻하는 대로 안 되거나 하는 둘 중에 하나의 일들이 계속 벌어집니다.
그러면 뜻하는 대로 되면 좋았다가 뜻하는 대로 안 되면 괴로워요. 지금 내가 몇 시까지 어디로 가야 되니까 신호등에 걸리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괴롭고 긴장이 되거든요. 근데 언제까지 가야 되겠다, 라는 생각 자체를 갈 수도 있고 못갈 수도 있고 못 가면 욕 얻어먹으면 되고 가면 좋은 거고. 기왕 그래 걱정이 되면 좀 일찍 출발하면 되고 그 일찍 출발을 어차피 못했으면 어쩔 수 없고.
자식이 매일매일 학교에 제때, 제때 가야 되는데 자꾸 늑장을 부린다. 그러면 맨 날 욕을 하고 막 혼을 내기 보다는 맡겨버리는 거지요, 그냥. “야 나 이제부터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라.” “욕 얻어먹는 것도 너 책임이다.” 그런데 보통 완벽주의자인 사람들이 그 꼴을 못 보는 거예요. 자식이 늦게 가서 선생한테 혼나는 것을 도저히 내가 참지를 못하는 거지요. 왜?
그러면 자식이 늦게 가서 선생님한테 상습적으로 늦게 가서 혼나는 것은 곧 내 욕이기 때문에. 그 부모가 어떤 부모이길래, 자식을 이렇게 하나? 하는 내가 욕 얻어먹을까 봐도 일부 있고, 또 욕 얻어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욕을 얻어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살다가 욕을 얻어먹기도 해야 됩니다. 욕을 얻어먹으면서 스스로 깨닫고 배우고 부딪치면서 배우고 경험하면서 깨달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럴 기회를 부모님이 박탈해버려요, 자식들이 삶속에서 직접 배우면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학교에 늦게 가가지고 선생님한테 혼나는 기회. 뭘 자꾸 먹고 가라고 그러는데 안 먹고 가서 지 혼자 굶어가지고 된통 배가 한번 고파보는 기회. 또 안 좋은 친구는 사귀면 안 될 거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는데 안 좋은 친구도 적당히 사귀면서 좋고 나쁜 모든 것을 같이 경험해 볼 줄 알아야 삶에 대한 적응력,
내성 같은 것이 생겨서 그 어떤 안 좋고 험한 상황, 조건, 경계의 사람들을 만나도 그 속에서 이겨낼 수 있고 그 속에서 일어나게 자기중심을 잡을 수 있는 지혜가 생기거든요. 그런데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내가 생각한 바대로 자식이 착 착 착 착 돼야 된다, 라고 생각하면 그 생각 때문에 자식하고 계속 싸워요. 그러니까 자식도 힘들고 부모님도 힘들고 그런 내 생각, 내가 추구하는 거거든요.
자식은 모범생, 내가 생각하는 모범생처럼 살아야 해. 라고 내가 생각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수능시험 좀 못 보면 그건 좀 심각하겠지요. 근데 수능시험이야 뭐 어쩌겠어요. 그건 본인이 보는 거니까. 근데 물론 요즘에는 뭐 내신이 중요하니까. 내신이 하나, 하나가 다 중요하다, 이렇게. 옛날이 그래서 좋았던 거 같아요. 지금은 뭐 내신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3년 내내 쪼잖아요,
애들을. 옛날에는 뭐 그냥 좀 한번 두 번 중간고사 기말고사 못 봐도 까짓 거 수능만 잘 보면 되니까 아니면 저 모의고사, 무슨 고사에요? 대학 그냥 시험만 딱 잘 보면 되니까 좀 상관이 없는데. 지금은 뭐 하니까 뭐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교 때부터 막 엄청나게 공부하느라고 스트레스 받던데, 그래서 이 제도도 좀 바뀌어야 될 거 같아요. 그래가지고 이게 좀 한번 두 번 실수할 수 있는 기회를 좀 줘야 되거든요.
제가 수학을 이제 썩 잘했었는데 어느 때 좀 안 해도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잖아요, 보통. 그래서 어느 때는 그냥 너무 힘들어서 확 안 해버렸습니다. 그냥 안 해버리고서 고등학교1학년 땐가 2학년 땐가 확 안 해버렸는데 저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당연히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나올 거라 생각해서 완전히 안 하고 시험을 딱 봤는데 제가 상상도 못했던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어요.
그때 제가 제 마음 안에서 되게 충격이었습니다. 너무 충격이었어요, 그때. 그때 제가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그때부터 수학을 정말 엄청나게 더 공부를 했었거든요. 제가 한 30대 중후반 때까지 그런 꿈을 꾼 거 같아요. 딴 사람들은 이렇게 군대 가는 꿈꾼다, 이러잖아요, 남자들이. 저는 가끔 한 번씩 한 2, 3년에 한 번씩 그런 꿈을 꿨던 거 같아요. 내가 수학 진도를 막 복습을 못해가지고 수학 진도를 못 따라가는 꿈,
그래서 수학시험을 못 보는 꿈을, 고등학교 딱 한번 있었던 경험인데 그게 되게 충격이었나 봐요. 그런 꿈을 가끔 꿨었어요. 그러다가 그런 꿈을 꿔서 스트레스 받다가 그러다가 자꾸 늦어지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딱 깨면, 내가 고등학생이 아닌 걸 보면 얼마나 안심이 되고(웃음) 꿈에서 깨면서 얼마나 행복한지. ‘야 이거 수학공부 안 해도 되는 거지’ 참.
뭔가 스스로 어떤 하나의 경계에 부딪쳐보고 또 거기서 충격을 받을 거는 받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어떤 삶의 다양함을 경험해보는. 그래서 좋은 것만 경험하는 것이 인생에 반드시 도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다양하게 스스로 이렇게 부딪쳐서 공부할 수 있는, 그래야 스스로 할 수 있는 어떤 지혜가 생기고 그럼 또 부모님하고 부딪치는 것도 적고.
사실 우리가 싸우는 많은 것들을 보면 ‘반드시 이래야 돼’ ‘이게 옳아’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마다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다 다르잖아요. 다 다른데 신기하게 거기서 또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살아가게 되고 더 옳고 더 그른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이렇게 다른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항상 뭔가 추구하고 뭔가 조작해서 ‘이렇게 돼야 돼’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생멸심이고 그게 바로 오염시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더러움에 물드는 거지요. 내가 ‘내 인생은 이렇게 돼야 돼’ 그거 더러움에 물드는 겁니다. ‘내 인생은 과거에 이걸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있어’ 하면서 자신을 원망하거나 그 옛날 누군가를 원망하는 거예요. 그때 그 놈이 나한테 이렇게만 안했어도 내가 지금 인생이 폈을 텐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놈이 나한테 잘못한 게 아니라 우주법계가 해야 될 역할을 그놈이 대신해준 겁니다.(웃음) 우주법계가 해야 될 인과응보의 역할을 그놈이 대신 한 것이지요. 대신 감당한 것일 뿐이지요. 이 인과응보는 나와 개별적인 사람 사람들 간의 일어나는 인과응보라기보다는 하나의 법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법안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 내가 계속해서 욕을 했으면 언젠가 그 사람이 나한테 욕해야지 인과응보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이 사람을 괴롭혔는데 전혀 뜬금없이 딴 사람한테서 감당하는 것으로써 인과응보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한 사람간의 이런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과응보가. 그래서 내 스스로 어떤 과거든 미래든 특정한 일이 벌어져야 된다,
라고 집착하거나 ‘왜 벌어지지 않았지’ 하고 원망하거나 이런 마음 자체가 우리 삶을 오염시키는 겁니다. 그럼 오염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지금 이대로가 얼마나 완전한지. 지금 이대로가 내 의식으로 결코 판단불과하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진짜잖아요. 진실이잖아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나는 그때 당시 그게 옳은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때 내가 잘못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 보니까 ‘아 그때 그래서 이렇게 됐었구나’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 ‘야 이런 일이 없었겠구나’ 하고 깨닫는 것도 있고. 또 내 미래에 대해서 결코 하나도 알 수 없습니다. 정확히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지만 그 일이 나를 좋게 할지 좋지 않게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내 머릿속에서 ‘내 인생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돼야 돼’ 라는 것은 내가 어리석고 오만한 착각으로 추구하는 마음, 조작하는 마음으로 만들어낸 오염된 마음일 뿐입니다. 그럼 그 오염된 마음을 하지 않으려면 ‘아 지금 이대로 완전한, 오염되지 않은 자성 청정한, 여래의 청정한 마음이 그대로 지금 이렇게 내 삶을 만들어내고 있구나’ 이것은 그대로 입처개진(立處皆眞),
‘서 있는 이 자리가 그대로 진실이구나’ 어떤 가요의 가사를 보니까 그런 내용 비슷한 게 있더라고요. 그 삶의 정답을 자꾸 찾으려고 하고 내가 자꾸 잘했다 잘못됐다고 하지만, 사실은 내가 서있는 내가 발걸음을 내딛는 그 자리가 옳은 것이 아니겠느냐. 뭐 이런 게 있던데. 내가 서있는 이 자리가 진실입니다. 내가 내딛는 한발 한발이 내가 지금 이 순간 결정내리는 하나하나가 그냥 그대로 진실입니다.
“근데 이게 진실이 아니면 어쩌지요?” “책임질 겁니까?” “진실이 아니면 어쩌지요?”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진실 아닌 결정을 내렸으면 그 진실 아닌 결정, 그것이 진실입니다. 잠깐 이 결정을 내려서 주춤거렸으면 주춤거리는 게 지금 필요했기 때문에 주춤거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두려움 없이 마음껏 선택해도 괜찮아요. 두려움 없이 머리로 많이 고민하고 많이 근심하고 많이 걱정해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가볍게 머리가 결정 내리게 하지 않고 가슴이 결정 내리게 해서 하고 싶은 건 그냥 저질러도 괜찮아요. 그게 아니면 다시 돌아가면 되고. 그거면 그대로 가면 되니까. 사실은 자식들에게 “네가 어느 고등학교를 가고 싶니?” “어느 대학을 가고 싶니?” “어디 직장을 가고 싶니?” “너는 무엇을 하고 살고 싶니?” 엄마 아빠가 그것 때문에 막 골머리를 썩는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지요,
저는 왜냐? 그∼ 본인의 삶인데. 본인 스스로 결정하도록 던져주는 겁니다. 네가 조언을 해달라고 하면 아빠 엄마는 이러 이런 조언은 해줄 수 있을 거 같다. 이렇게 얘기는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본인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네가 모르겠으면 모르겠는 그것을 스스로 화두처럼, 본인 스스로 모르는 것이 정확한 거예요. 알 필요가 사실은 없어요.
아이들에게 “야, 너는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고 말이지.” “네가 나중에 뭐하고 싶은 지도 모르고, 그래서 되겠어?” 그래야 됩니다.(웃음) 미래에 대한 뚜렷한 목표가 있어가지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나아가는 게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건 그렇게 좋은 게 아니에요. 집착하는 겁니다, 조작하는 겁니다. ‘나는 뭘 해야 돼’ 하고. 지금 군인들 만나서 제가 전역 이후에 뭘 할지 정해진 사람 물어보면요? 한 80∼ 90%는 없습니다.
한 10∼ 20%만 ‘난 이런 걸 할 거예요’ 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확실치 않다는 거지요. 다르게 될 수 있다. “야 어쩜 너희들 다 이렇게 지혜롭냐?”(웃음) 왜냐면 그게, 그게 진실이니까, 알 수 없거든요. 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하고 공부 열심히 해서 그 대학 그 과를 갔는데 3학년 4학년 때까지 그 과에서 열심히 했는데, 정작 취직은 전혀 다른 거에 취직을 하거든요.
전혀 공부를 한 번도 안 해봤던 곳에 취직할 수도 있거든요. 그럴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서 뭐 대략적인 계획을 잡고 그렇게 나아가는 건 좋습니다. 그건 내가 지금으로선 최선이니까. ‘나는 공무원 준비를 열심히 하겠다’ ‘그럼 해봐라’ 열심히 하는 거지요. 그러다가 공무원 안 하고 다른 거 하게 됐으면 공무원 떨어져서 다른 걸 하게 됐으면 ‘아 그 공부가 뭔가 필요했겠구나’
‘언젠간 도움이 되겠지’ 하고 다른 일을 그냥 하는 것이지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만 알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이 알 수 있는데 자기 자신의 머리는 모릅니다, 결코 알 수 없지요. 그런데 메시지라고 표현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어떤 메시지냐? 이∼ 가슴이, 가슴에서.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상당히 좋아요.
머리를 자꾸 굴리게 해가지고 ‘야 뭐가 네 인생에 도움이 되겠는지 한번 생각 좀 하고 살아’ 이러지 마시고 생각 없이 살아야 돼요. 막 생각해서 계산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꾸 가슴에 집중하도록 하는 질문을 던져줘야 됩니다, 애들한테. 머리를 자꾸 이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질문이 아니라 ‘너 뭐할 때 제일 행복해’ ‘뭐할 때 제일 이렇게 기쁜 거 같아’ 어떤 공부를 할 때 제일 가슴이 뛰는지,
뭘로 네가 설레는지. 아니면 이런 메시지들이 있어요. 저는 이렇게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제가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저는 책을요? 20살 이전까지 책 읽는 거를 아주 싫어했습니다.(웃음) 글 쓰는 거 아주 싫어했습니다. 제가 글을 쓰고 책을 읽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는. 글 쓰고 책 쓰고 이런 거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글을 읽는 거 자체도 안 좋아 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어느 날부터 갑자기 책에 완전 20대 때는 완전히 책에 파묻혀 살았었고, 글을 쓰게 됐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때 주제까지 기억을 해요. 세종대왕에 대한 독후감을 쓰라고 했는데. 남들은 뭐 다 이거 쓰고 저거 쓰고 했는데, 저는 그때 문득 세종대왕에 대한 전반적인 거 뭐 이렇게 해서 전체적으로 내가 생각한 걸 별 생각 없이 썼어요.
근데 그때 처음으로 글쓰기 한 거 가지고 선생님이 되게 칭찬을 좀 해주셨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기억이 있고. 또 중학교 2학년 때도 그냥 막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무슨 글을 하나 쓰라고 해서 썼는데. 그냥 어떻게 좋은 반응을 받거나 이랬던 기억이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제가 고등학교 때는 뜬금없이 시문학회를 들어 가가지고 쓸 줄도 모르는 시를 막 짜내느라고 되게 고생을 했던 기억도 나요. 그럴 때 되게 기뻤던 거 같고.
그런데 저는 세종대왕에 대해서는 되게 놀라웠던 것이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거든요. 계산하는 것도, 하나 잘 써야 된다는 생각도 아무것도 없었고. 딴 친구들은 세종대왕의 어떤 한 부분에 대해 막 주목하고 썼는데, 저는 그냥 별 생각 없이 썼어요. 그때 느낌이 어땠냐면 나는 그렇게 애쓰지 않았는데 잘 쓰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왜 이걸 칭찬을 받지? 그냥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근데 가만히 보니까 그런 어떤 삶속에서 내가 되게 기뻤던.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때 되게 힘든, 중고등학교 때 뭐 우리 때만 해도 새벽 2시 3시까지 막 자율학습하고 또 공부에 파묻혀 살았는데, 점심시간 저녁시간 자율학습시간 이럴 때에 항상 창가에 앉기를 좋아했어요. 항상 창가에 앉아서 공부하다가 바깥을 이렇게 바라보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 일기장에다가 제 마음을 막 이렇게 적고 나면 그렇게 스트레스 해소가 확 되면서 속이 후련해지는 거예요.
일기장이 이만큼 쌓여있는데, 뭔가 글을 쓰고 나면 가슴이 뻥 뚫리는 거 같은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었거든요. 그냥 글만 쓰고 나면 이렇게 행복하더라고요. 그게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그게 어찌 보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어떤 그런 느낌을 받았고. 또 말씀드린 것처럼 중학교 때 스님을 처음 만났는데 제 마음속에서 정말 이 스님에 대한 완전한 어떤 귀의의 마음? 믿음?
그 스님이 저한테 했던 말 한마디가 저를 완전 통째로 막 뒤흔들었을 만큼, 정말 너무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제가 중학교 때부터 하여간 사람들이 저보고 막 불교 불교하면서 맨 날 절에만 가서 산다고 하고 너무 불교, 불교 이랬었는데. 저를 가슴 뛰게 하는 그런 어떤 몇몇 가지가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머리로 생각하면
저는 아버님 사업을 물려받아서 아버님 말씀대로 경영학과나 경제학과를 가서 아버님 사업을 키워야 된다고 이렇게 어릴 적부터 주입받고 살아왔거든요.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살았는데. 그것 때문에 한 번도 막 가슴이 뛰었던 적은 없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이제 우리가 아이들한테 또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질문을 던질 때 자꾸 생각해서 답을 할 수 있는 질문보다 가슴을,
‘네 가슴에 무엇이 있는지’ 그래서 오늘 학교 갔다 왔으면 “뭐 시험 잘 봤어?” “뭐 친구랑 잘 사귀었어?” 뭐 이런 질문들 보다 “뭐가 제일 재밌었어?” “친구랑 뭐 할 때 제일 즐거워?” 이런 어떤 내 가슴이 어떨 때 뛰고, 이 머리보다는 가슴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그래서 머리로 막 계산하기보다는 가슴으로 느끼고 누리고 감동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게 바로 명상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이 그냥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머리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그래서 헤아리는 것은 항상 오염시키는 것이거든요. 헤아리면 자기가 알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알 수 없습니다. 근데 그냥 이 가슴으로 느끼고 살게 되면 저절로 가슴이 이끄는 대로, 가슴이 이끄는 대로 정말 내 삶이 이끄는 대로 그냥 저절로 ‘모를 뿐’ 하고 가게 되면, 그 ‘모를 뿐’이 몰라야지만 알 수 있게 돼요, 진정으로.
화두라는 게 그렇잖아요. 정말 모를 때, 모르는 마음을 확 안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 모르던 게 어느 순간 답을 탁 만나게 되는 것처럼. 모르는 것이 진실이지. 안다고 여기는 것은 조작하는 허망한 마음, 오염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뭔가 미래를 반드시 정해놓을 필요도 없고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어라. 무한한 가능성이 네 앞에 있는데, 왜 그걸 한정해서 거기 집착하고 있느냐?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 무엇도 올 수 있도록 그렇게 열어 놓으면 나에게 딱 와야 할 일들을 만나게 되고. 또 내가 가슴 뛰는 뭔가를 또 하게 될 수가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안다고 여겼을 때 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모를 뿐’ 하는 것에 뿌리 내릴 때. ‘내가 알 수 있는 게 없구나’ 라고 할 때 삶 자체가 되게 자연스러워지고 자유스러워지고 괴로움이 없어져요.
그렇게 되면 저절로 내맡기게 됩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면 내가 삶을 조작해야 되는데. 내가 어차피 모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는 모르니까 그냥 맡겨버리는 거지요, 삶에. 삶이라는 진실에 모든 것을 턱 내맡겨버리면 삶이 되게 가벼워져요. 삶은 가벼워지는데 더 귀한 진실이 우리를 저절로 이끌고 가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내 삶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부처님이 삶의 진실을, 내 삶을 스스로 알아서 끌고 가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뭔가를 막 알려고 하면 이것은 추구하고 조작하는 어떤 더럽히는 일이다.
도를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바로 도다. 무엇이 평상심인가?
(선어록과 마음공부 p178)
평상심은 조작하지 않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저렇게 살아야지 하고 조작하지 않는 것. 조작하지 않으면 평상심. 지금 이대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그 평범한 평상의 마음. 이대로 그냥 살게 되는 것이지요.
조작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선어록과 마음공부 p178)
이렇게 사는 건 옳은 거고 저렇게 사는 건 틀린 거야.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취하고 버리지 않으며, (선어록과 마음공부 p179)
좋은 건 취해야 되겠다고 집착하고 싫은 건 버려야 되겠다고 집착하지 않고 과도하게 취하지도 않고 과도하게 버리려고 애쓰지도 않고. 지금 이대로 허용해주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상견과 단견에 치우치지 않고, (선어록과 마음공부 p179)
단견은 뭔가 딱 끝난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이야’ 이런 생각은 단견이고, ‘삶은 계속 뭔가가 이어질 거야’ 하는 게 상견이고. 뭔가 ‘야 이러다가 이것이 다 금방 끝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하고. ‘야 이게 영원히 계속됐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하고. 세상에는 딱 끊어지는 뭔가가 있거나 이게 영원히 계속되는 뭔가가 있거나 하는 것은 그냥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극단의, 양 극단의 하나의 생각일 뿐이지. 삶은 그냥 계속해서 완성된 상태로 흘러가는 겁니다. 다양한 연극을 하면서 언제나 우리는 목전에서 이 삶을 바라보고 있잖아요. 그런데 삶의 내용물은 바뀔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내용물이 바뀐다고 내용물이 바뀌는 걸 가지고 단견, 아 끊어졌다. 내 인생은 끊어졌다. 내 인생의 행복은 끝났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용물을 따라가니까 특정한 것은 만날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 내용물을 좇아가지 않는다면 상견도 없고 단견도 없습니다. 항상 하는 것도 없고 딱 끊어지는 것도 없는 것이지요. 언제나 흘러가는 삶의 어떤 존재함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범부와 성인을 나누지도 않는 것이 바로 평상심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79)
아 누구는 위대하고 나는 부족하고 이런 생각 자체도 일으킬 필요가 없다. 우리는 똑같은 부처이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이를 두고 ‘범부처럼 행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인이나 현자처럼 행세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행이다’라고 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79)
범부처럼 하지도 않고 현자처럼 하지도 않는다, 라는 것은 더 위대하다 더 못하다는 생각 없이 ‘나는 더 잘 살아야 되는데, 못살고 있구나’ ‘나는 뭐 못 사는 사람에 비하면 잘살고 있구나’ 뭐 이런 생각도 할 것 없이. 내가 살고 있는 이대로 내 색깔대로 자기다운, 자기다운 내 빛깔대로 사는 것이 가장 진리다운 것이고. 부처님은 나를 나답게 사는 모습을 통해 부처님이 자신을 경험하고 싶어서 나라는 모습으로 부처가 화현(化現)한 거거든요.
이 화신불(化身佛)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한분 한분이 다 화신불(化身佛)입니다. “화신 부처님이 왜 나라는 모습으로 이렇게 태어났을까요?” “부자이고 똑똑하고 잘생기고 능력 있는 사람만이 부처님이라면, 뭐 그런 사람만 부처님으로 다 만들어놓으면 돼지.” “왜 나 같은 사람을 만들었을까요?” 나 같은 사람으로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나 같은 부처로서 내 부처의 삶을 살아야 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목적은 나로서 살아가는 삶을 완수하는 겁니다. 지금 이대로가 아닌 다른 어떤 삶을 사는 것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대로는 부족하니까 뭔가 완전한 삶을 추구해서 그 삶을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대로 나의 모습으로서 나답게 나다운 방식대로 남들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고 남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고,
그냥 나답게 지금 이대로 만족하면서 지금 이대로 온전한 삶의 아름다움인 줄 자각한 채 이 삶을 마음껏 누리면서 사는 것. 주어진 삶에 온전히 존재하면서 흡수하면서 머리로 해석하지 않고 가슴으로 느끼고 누리고 감동하고 만끽하는 삶을 사는 나답게 나다운 방식으로, 그것은 언제나 성공적이거든요. 내가 남들이 되기 위해서는 추구해야 되지만 내가, 내가 되기 위해서는 이대로가 되기 위해서는 완성이잖아요.
지금 이대로인 내가 되는 것을 희망하면 100%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살게 될 때 저절로 삶이 나를 끌고 갑니다. 내가 앞서나가서 삶을 끌고 가려고 하면, 삶을 어떻게 내가 삶을 조작할 수 있겠어요. 이 우주법계를 조작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도 통제 못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고 애쓰거든요. 내 주변 환경이 바뀌기를 애쓰고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내가, 내 마음이 주어진 이대로의 진리, 그것을 그냥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내가 삶이라는 거대한 진리에 턱 내맡기고 따라가기로 마음을 먹고 나면 이제부터는 내가 삶을 통제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삶이 나를 끌고 가니까. 삶이라는 부처님이 진리가 나를 끌고 가기 때문에 법신부처님께서 내 삶을 끌고 가니까. 나는 룰루랄라 놀이하듯이 삶을 느끼고 누리고 즐기면서
유희삼매(遊戱三昧)라고 하듯이 삶을 즐기면서 삶을 그냥 따라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산다고 해서 삶을 대충 살지 않습니다. 더 진하게 살게 돼요. 더 진하게 감동하고 누리면서 살게 되고, 그때 더 강력한 힘이 붙습니다. 내가 있어서 조작하려고 하면 힘이 붙지 않아요, 힘만 들지. 그런데 삶이라는 거대한 진실을 뒤좇아 가면 힘들 게 없습니다. 애쓸 게 없고.
그러나 삶은 언제나 완전하고 언제나 만족스럽고 우리가 추구해서 만들어내려고 하는 무언가는요? 사실은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돈을 벌고 싶어요. 진짜로 우리가 벌고 싶은 게 돈일까요? 갖고 싶은 게 돈일까요? 돈이 아닙니다. 돈을 벌었을 때 느껴지는 그 만족감? 그 든든함 같은 거? 그런 상태, 그런 감정, 그런 걸 원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돈이 어느 정도만 있어도 든든한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많이 있어도 여전히 부족감을 느끼잖아요. 그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로 우리가 추구하는 건 돈이나 어떤 특정한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자기 마음에 구족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린 그렇지 않다고 여기니까 바깥에서 물질적인 무언가를 충족시킴으로써, 이 마음 안에 진정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지요. 바깥으로 좇아가니까. 이미 있는 보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지요.
무릇 법을 구하는 이는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법을 구하는 이는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79)
내가 지금 이대로 쓰고 있는 이것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선(善)을 취하지도 말고, 악(惡)을 버리지도 말라. 깨끗함과 더러움 어느 쪽에 의지하지도 말라. 죄(罪)의 본성은 텅 비어 공(空)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죄란 본래 없으니, 죄라는 자성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79)
우리는 결코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계유심(三界唯心)이며, 삼라만상은 하나의 마음이 찍어낸 도장 자국일 뿐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79)
삼계,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이 우주법계 전체가 오로지 내가 일으킨 하나의 마음일 뿐이다. 삼라만상, 이 우주법계 삼라만상 전체는 내 마음 하나가 찍어낸 도장일 뿐이다.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삶의 이 우주법계 삼라만상의 주인이 되어서 살아야지, 이 세상에 끌려가는 종속된 존재처럼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세상에 끌려 다니면서 살 필요가 없어요.
끌려 다니면서 살면, 내가 세상을 끌고 가고 싶어서 막 안달하면서 ‘왜 세상은 이렇게 안 끌려오는 거야’ ‘내가 원하는 대로 왜 안 이루어지는 거야’ 하고 계속 세상과 다투고 싸우면서 막 힘들게 진이 빠지면서 매일매일 밤만 되면 녹초가 되어 쓰러져 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정말 좋아서 즐거워서 하게 되면 그냥 힘을 빼고 하는데도 하루 종일 해도 그렇게 힘들지가 않아요.
마치 어린 아이들이 하루 종일 뛰어 놀아도 뛰어놀다가 잠깐 자고 일어나면 또 뛰어놀고 또 뛰어놀고 신나게 뛰어놀다가 밤이 되면 시체처럼 누워 자는 것처럼. 그러면서 또 그 다음날 생생한 것처럼. 지치지를 않는 것이지요. 애써서 하는데도 열심히 하는데도. 그러니까 이 머리가 앞서가서 살게 되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슴이 그냥 지금 이대로 존재하면서
지금 있는 이것을 온전히 100% 누리고 만끽하면서 내가 살아가게 되면 삶과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 삶과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이대로 안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절로, 저절로 도(道)와 가까워지고 삶이 자연스러워지고 저절로 무위법이 돼버리고 저절로 자비스러운 삶을 살게 되고 모든 공덕이 만 가지 공덕이 일시에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로 헤아리는 대신 지금 이대로 무분별로써 분별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 허용하고 살면, 지금 이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허용하고 살게 됐을 때 만 가지 공덕이 무한한 공덕이 깃들게 된다. 그것은 결코 나약한 삶이 아니라 에너지가 떨어진 삶이 아니라 에너지가 완전히 100%로 온전히 온전하게 사는 삶입니다. 오늘 이까지 말씀을 드리고 다음에 하겠습니다.
(이어서 1시간 37분 녹취)
첫댓글 감사합니다~~
이게 하루 종일 계속 반복돼요. 내 뜻하는 대로 되거나 뜻하는 대로 안 되거나 하는 둘 중에 하나의 일들이 계속 벌어집니다.
삶은 그냥 계속해서 완성된 상태로 흘러가는 겁니다.
주어진 삶에 온전히 존재하면서 흡수하면서 머리로 해석하지 않고 가슴으로 느끼고 누리고 감동하고 만끽하는 삶을 사는 나답게 나다운 방식으로, 그것은 언제나 성공적이거든요. 내가 남들이 되기 위해서는 추구해야 되지만 내가, 내가 되기 위해서는 이대로가 되기 위해서는 완성이잖아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