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많은 특징이 있지만 크게 다음과 같이 변한다는 말이다.
첫째, 대긍정.
이 때의 대긍정은 부정의 대립 개념으로서의 긍정이 아니라, 부정까지 포함하는 긍정이다. 그래서 단순한 긍정이 아니고 ‘대긍정’이라 한다. 가령 악(惡),무명, 탐진치 3독 등도 모두 중생의 부처행에 필요한 존재로 보며 화엄 입장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옳다. 천개의 태양이 뜨면 천개가 옳고, 만개의 태양이 뜨면 만개가 옳은 것이 화엄이다.
둘째, 세상을 평등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이를 화엄경에서는 等觀이라 함). 세상 모든 것이 존엄하고 모두가 공경받고 대접 받아야 할 존재며 모두가 똑같은 가치(等價)를 지니고 모습, 기능, 가진 것에 관계없이, 모두가 자기에게 주어진 공간에서 주어진 시간만큼 이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하고 가는 존재로 보게 된다. 이걸 모르기 때문에 차별 분노 대립 갈등이 생겨 세상이 어지럽게 되는 것이니, 화엄의 평등은 이런 어리석음을 막아준다.
셋째, 분별이 소멸되고 무념이 되며 일체가 다르지 않은 것을 알게 되니, 모든 걸 하나 (一相)로 보게 된다(해인삼매). 세상에 대한 분별이 사라지고 이와 함께 생각(想) 자체가 일지를 않는다(無念). 언제나 우리가 보는 유한의 세계는 잔잔한 하나의 무한 세계로 나타나는데 이런 상태를 해인삼매라 표현했다. 담천은 ‘망시비론’에서 “시비의 속박을 벗어나려고 하는 한 그 속박을 벗어날 수는 없다. 속박을 벗어나려면 무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런 경지가 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르다’ 는 생각이 소멸된다.
우리는 전부 다른 줄 알고 산다. 찰나와 영원이 다르고 하나와 둘이 다르고 무명과 깨달음, 부처와 중생, 세간과 출세간이 다른 줄 알고 산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소멸되고 모두가 같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는 곧 용수의 팔불중도이다.
넷째. 현실을 중시하게 된다. 지금 이 자리가 중요한 것이다.
다섯째, 생명성에 눈을 뜨게 되니, 모든 것을 생명으로 보게 되는데 그것도 진리 생명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행(行, 보현행)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이고 변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엄적이 될수록 실천적으로 된다.
첫째 둘째의 결과가 무애이다. 따라서 화엄경이 불교의 최고봉이라는 것은 단지 화엄경이 기존 불교 사상을 융섭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 이치(세간, 출세간 무관)가 최고의 경지에서는 ‘화엄적’이 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가 평생 화쟁을 부르짖고 현실을 중시하며 무진, 무애를 지향한 것은 원효가 화엄을 배워서가 아니라 공부가 깊어 화엄을 배우지 않아도 이미 사상과 삶이 화엄적으로 변했기 때문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실지로 원효는 ‘여러 경전의 핵심을 하나로 꿰뚫은 것은 오직 이 기신론뿐이구나(衆典肝心 一以貫之者 其唯此論乎)’라고 할 정도로 기신론은 깊이 공부했어도 인생 후반이 되기 전까지 화엄경을 기신론만큼 깊이 공부하지는 않은 것 같다(필자가 원효의 기신론소를 처음 공부했을 때 화엄승으로 알려진 원효의 저술에 의외로 화엄경 인용이 없어서 의아했던 기억이 있음). 그러다가 공부가 완전히 익고 의상의 귀국 무렵 비로소 화엄의 진가를 안 것 같다. 그래서 마침내 마지막 주석서로 화엄경소를 집필하다가 십회향품에서 붓을 꺾고 대증 속으로 들어간 듯하다. (화엄의 특징은 본문 및 부록 한국불교와 보현행원각주 참조)
첫댓글 공부를 하든 삶을 살든 뭘 하든 경지가 깊어지면 전부 화엄적으로 변합니다.
화엄경이 불교 경전 중에 최상의 경전 위치를 차지한 것은 화엄종의 영향도 있겠지만 이런 이유에서이리라 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