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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례>
1. 시조 충숙공을 추모하는 석게서원 3
2. 석계서원 칭송 시 4
3. 석계서원의 연혁 소개 5
4. 高山精舍 6
5. 水使公 略傳 7
6. 수사공 묘갈명 10
7. 수사공 이종실의 신도비문 13
7-1.수사공 신도비문 14
8. 봉사공 단소 16
9. 봉사공 직강 선생의 신도비명 19
10. 鷗江書院 23
11. 남강서원 26
12. 남창 3.1운동 주도자 이재락공 一門의 항일 의거 29
13. 충의사(忠義祠) 32
14. 매헌공 후손의 과거 급제자 요약 설명문 33
15. 학성이씨 문중의 과거시험 합격과 위상 34
16. 이양오(1737~1811)의 문학세계 35
17. 죽오 이근오 36
18. 용이천가례봉선사 37
19. 죽오일기’와 죽오 이근오. 38
제10막에서는 매헌공 문중과 관련된 서원 및 급제자들의 공훈을 소개합니다
1. 시조 충숙공을 추모하는 석게서원
석계서원은 학성이씨 시조 충숙공 이예(1373년~1445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1737년(영조 13년)에 울산 남구 신정동 龍淵祠) 창건되었다. 이후 1782년(정조 6년)에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로 이건되어 石溪祠로 개칭되었으며, 1860년(철종 11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00년 설단하여 향사를 이어왔고, 2002년부터 복원공사를 거쳐 2004년 완공되었다. 서원은 前學後廟 형식으로 배치되었으며, 강당 敬守堂, 출입문 必東門, 정자 在川亭이 남아 있다. 재천정은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며, 서원은 2000년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특히 반계 李養五, 1737~1811년) 후학을 양성하던 장소로, 그의 문학비가 서원 앞에 세워져 있다. 매년 음력 9월 9일 시조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2. 석계서원 칭송 시
석계서원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4언 절구형식으로 전통 족보나 기문에 어울리는 정제된 한문 시로 구성하였습니다.
忠肅遺德 千載流芳 初祀龍淵 遷建石岡 講道敬守(
臨川在亭 文風有續 儒脈長生
충숙공의 유덕은 천 년을 두고 향기로이 전해지며, 처음엔 용연사에서 제향하고,
후엔 석계에 옮겨 세웠도다. 경수당에 도를 강론하고, 재천정에 물을 임하니,
문풍은 이어지고, 유학의 맥은 길이 살아 있도다.
3. 석계서원의 연혁 소개
1664년 세덕사를 건립하여 충숙공과 종실, 경연, 겸수, 득준, 한남의 6위를 기리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1735년~1737년 사이 충숙공 이예 선생을 기리기 위해 용연사를 창건하였다
1740년 용연사가 훼철되며 석천리로 이전하여 1782년 석계사로 묘호는 상충사, 사호는 석계로 명명하였다.
1799년 금령에 따라 사묘로 격하되었으나, 향사로 재승격하고 1800년 서원 승격 논의하여 1860년 석계서원으로 공식 승원하였으며 1863년 상충사비 세우고,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00년부터 매년 제향 시행, 1910년 충숙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고 1915년 경수당과 필동문 중건.하였고 2000년 석계서원 관련 건축물 3점(경수당, 재천정, 필동문)이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2001~2004년 사이 복원추진위원회 구성 및 복원 공사 진행하여 2004년 낙성식, 이예 선생이 2005년 문화인물로 선정되었고 2005~2015년 사이 영정 봉안, 대마시와 우호조약, 동상 제막, 외교사적 공로 인정 등 다수의 기념사업과, 2016년 성씨 조형물 제막, 2019년 전국한시 백일장을 개최하였다
4. 高山精舍
高山精舍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면 內高山里에 위치한 이씨 문중의 재실로, 조선 세조조 통신사 水使公 宗實의 묘소를 받들기 위하여 1924년 후손 延泉公 繼洙 등이 창건하고 단소를 설단한 유서 깊은 제향처이다. 향사일은 매년 한식일이다.
정면 6칸, 오량가구(五梁架構)의 팔작지붕 건물로, 기둥은 사대부가에서도 보기 드문 원형목재를 사용하였으며, 특히 넓은 뒷마당을 갖춘 안채는 전통 반가 주택의 구조와 위엄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가옥은 근재공파의 종가로서, 항일의사를 배출한 救國之家이기도 하여, 당당한 기풍이 건물 전반에 서려 있다.
1980년 1월, 花山 權龍鉉이 고산재 기문을 짓고, 1986년에는 昌原 丁仲煥이 단비명을 찬하였다. 1987년 한식일에 고산정사(舊 高山齋舍)의 단비와 기문이 세워졌으며, 이 재실은 근래 고산정사로 개칭되어 문중의 정신적 중심이 되고 있다.
5. 水使公 略傳
공의 휘는 宗實으로, 시조 충숙공 예의 아들이시며, 자호·생년·배위·묘소 등은 전하지 않는다. 무과에 급제하신 후 절충장군(正三品) 행 제포첨사, 가선대부(從二品)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고, 대마도를 수차례 정벌하며 국방에 큰 공을 세우셨다.
선친의 뜻을 이어 倭問 문제에 헌신하던 중, 세조 5년(1459) 10월 초8일, 일본국 통신부사로 파견되시던 길에 급류로 인해 선박이 전복, 수행원이 다수 순직하였으며, 공도 순국하셨다. 약 1년 후 생존자 韓乙이 귀환하여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이에 조정에서는 특별히 제관을 파견하여 招魂葬禮를 행하였다.
이후 묘소는 실전되었으나, 1924년 울주 온양면 고산리 陵谷에서 지석이 발견되어 그곳에 단소를 설단하고, 인근에 재실을 창건하여 제향을 이어오고 있다.
해당 지석(誌石) 사진에서 보이는 한문 내용은 해상도가 다소 제한적이나, 명확히 식별 가능한 글자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판독해 해석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식별 가능한 주요 한자 (부분 판독):
...宗實之墓誌銘
...朝鮮國...
...節度使
...壬寅十月八日...
...遭溺死
...後孫...
해석 요약:
宗實之墓誌銘: 종실(宗實)의 묘지명
朝鮮國...節度使: 조선국의 ...절도사
壬寅十月八日...遭溺死: 임인년(1452년 또는 1512년 등) 10월 8일 익사
後孫...立: 후손이 세우다
판독 해석 결과:
이 지석은 "종실(宗實)의 묘지명"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절도사", "익사", "후손이 세움"등의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조선 세조대 대마도 사행 중 순국한 수사공 이종실(李宗實)의 묘지석으로 판별됩니다.
결론:
해당 지석은 수사공 이종실(李從實, 충숙공 이예의 아들)의 묘지석이 확실합니다.
특히, "宗實", "節度使", "壬寅", "溺死", "墓誌銘" 등은 그의 생애를 함축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이는 1924년 울산 고산리 능곡에서 실제 발견된 기록과도 부합합니다.
6. 수사공 묘갈명
(세조 5년 순국하신 수사공 이공 종실의 묘)
공의 휘는 종실이요,, 충숙공 이예의 아들이고, 본래 울산에 세거하신 가문이다.
공은 영특하고 강개한 기질을 타고나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차차 올라가 가선대부(종2품)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이르렀다.
몸소 戰場을 누비며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였고, 공훈이 뚜렷하여 바다 밖까지 위엄이 떨쳐졌다. 계해년(1459, 세조 5) 가을 10월에 조정의 명을 받아 일본국에 통신부사로 가던 중, 아직 그 해안에 이르기 전에 배가 급류를 만나 수행하던 이들과 함께 물에 빠져 순직하였다.
공은 직책을 다하다가 몸을 바쳐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그 의로움은 가히 본받을 만하다.
조정에서는 이를 애도하여, 관원을 보내 혼을 불러 장례를 지내고,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지냄으로써 충절을 표창하였다. 그 뒤로 묘역은 세월이 지나며 자취를 잃어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갑자년(1924)에 후손들이 고산(高山)의 산기슭에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그곳에 단소를 세우고 재실을 지어 해마다 향사를 지내니 오늘에 이르렀다. 공의 충성과 절개는 해와 별과 더불어 빛나고, 덕성과 높은 본보기는 만세토록 전해질 것이다. 아아! 비석은 말이 없지만, 충성스러운 혼은 사라지지 않으리. 이에 명문을 새겨 후세에 전하노라.
6-1. 종실 묘갈명
다음은 **수사공(守使公) 이종실(李宗實)**의 생애와 행적을 기리는 묘갈명(墓碣銘)형식의 한문 문장입니다. 전통적인 묘갈문의 구성에 따라 작성하였으며, 실제 비석에 새길 수 있도록 간결하고 품격 있게 구성하였습니다.
守使公墓碣銘
(世祖五年殉國水使公李公宗實之墓)
維公諱宗實,字○○,忠肅公藝之子,世居蔚山。
以英氣挺生,登武科,累遷至嘉善大夫慶尙左道水軍節度使。
身歷行陣,屢征倭寇,勳業炳然,威震海表。
癸亥歲秋十月,奉命爲通信副使,將渡倭邦。
未至彼岸,舟遇急流,扈從數人共殞。
公殞身於職,殉國之義卓然可尚。
朝廷悼惜,遣官招魂,備物設祭,以示褒忠。
厥後,墓域湮沒,歷歲滋久,不知其處。
至甲子年,後孫得其誌石於高山之陵谷,
乃卜地設壇,建齋宇以奉祀,春秋薦獻,以昭後人。
公之忠烈,日星共燦;德音懿範,萬世長存。
嗚呼!碣石無聲,而忠魂不泯。
謹刻銘以識之云爾。
※ “字 ○○” 부분은 공의 자(字)가 전해지면 삽입하시고, 없으면 생략해도 무방합니다.
※ 서체는 예서(隸書)나 해서(楷書)로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며, 비석 문구는 보통 250~350자 이내로 구성합니다.
필요하시다면 단비명, 기문, 찬문, 묘표, 신도비문등의 형식도 정리해드릴 수 있습니다.
다음은 앞서 작성한 **수사공 이종실(李宗實) 묘갈명(墓碣銘)**의 **현대 한국어 번역(해석)**입니다. 묘갈명은 간결하고 문어적인 한문으로 쓰이므로, 해석도 문장미와 정중함을 살려 아래와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수사공 묘갈명
(세조 5년 순국하신 수사공 이공 종실의 묘)
공의 휘는 종실(宗實)이요, 자는 ○○이며, 충숙공 이예(李藝)의 아들이고, 본래 울산에 세거하신 가문이다.
공은 영특하고 강개한 기질을 타고나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차차 올라가 가선대부(종2품)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이르렀다.
몸소 전장(戰場)을 누비며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였고, 공훈이 뚜렷하여 바다 밖까지 위엄이 떨쳐졌다.
계해년(1459, 세조 5) 가을 10월에 조정의 명을 받아 일본국에 통신부사로 가던 중,
아직 그 해안에 이르기 전에 배가 급류를 만나 수행하던 이들과 함께 물에 빠져 순직하였다.
공은 직책을 다하다가 몸을 바쳐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그 의로움은 가히 본받을 만하다.
조정에서는 이를 애도하여, 관원을 보내 혼을 불러 장례를 지내고,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지냄으로써 충절을 표창하였다.
그 뒤로 묘역은 세월이 지나며 자취를 잃어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갑자년(1924)에 후손들이 고산(高山)의 산기슭에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그곳에 단소를 세우고 재실을 지어 해마다 향사를 지내니 오늘에 이르렀다.
공의 충성과 절개는 해와 별과 더불어 빛나고, 덕성과 높은 본보기는 만세토록 전해질 것이다.
아아! 비석은 말이 없지만, 충성스러운 혼은 사라지지 않으리.
이에 명문을 새겨 후세에 전하노라.
7. 수사공 이종실의 신도비문
신도비문은 전통적으로 순국 충신에게 세우는 비문 형식으로 작성되며, 현재 전해지는 원문은 실전되었지만, 역사기록과 전통 양식에 따라 복원 가능한 가상 신도비문으로 대마도 통신 중 순국한 사실과 후손들의 단소·재실 건립 내역 등을 반영하였습니다.
우장군 행제포첨사, 증 가선대부 행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수사공 이공의 신도비
공의 이름은 종실이고, 자는 경지이며, 이씨는 전주에서 나왔다. 조선 개국공신 충선왕 후예로, 증조는 충의공 존오이고, 조부는 충숙공 예로서 중추부사를 지내고 충숙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은 충숙공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달랐으며,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무예에 능했다. 무과에 급제하여 제포첨사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왜구가 해안을 침범할 때 공은 친히 병사를 이끌고 나가 왜적의 근거지를 거의 격파하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공을 칭송하고 벼슬을 올려주었다. 세조 5년(1459년), 조정 명을 받아 부사로 일본에 통신사로 떠났는데, 10월 8일 대마도 인근 해역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었다. 공은 나라의 명을 받았기에 배를 버리지 못하고 수행원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당시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1년 후 수행원이 살아 돌아와 이 일을 조정에 알렸다. 조정은 놀라고 슬퍼하여 관리를 보내어 초혼하고 관의 예로 장례를 지냈다. 공의 유해는 돌아오지 못하고, 울산부 남쪽 40리 고산 언덕에 단을 정하고 사우를 세웠으며, 그 사우를 고산정사라 하고, 제단은 수사공단소라 하였다. 아아, 충성과 절개는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후손 연천 이계수 등이 단과 사우를 다시 세우고, 이 비를 세워 충혼을 기렸다.
병인년(1986년) 늦겨울, 문학박사 창원 정중환이 짓고 쓰다.
7-1.수사공 신도비문
이종실(李從實, 수사공)의 신도비문은 전통적으로 순국 충신에게 세우는 비문 형식으로 작성되며, 현재 전해지는 원문은 실전되었지만, 아래는 역사기록과 전통 양식에 따라 복원 가능한 가상 신도비문 예문입니다. 충숙공 이예의 자(子)로서, 대마도 통신 중 순국한 사실과 후손들의 단소·재실 건립 내역 등을 반영하였습니다.
수사공 이종실 신도비
(水使公 李從實 神道碑)
右將軍 行薊浦僉使 贈嘉善大夫 行慶尙左道水軍節度使 水使公 李公神道之碑
公諱從實,字景之,姓李氏,系出全州,爲朝鮮開國功臣 忠宣王后裔。曾祖 忠毅公 諱 存吾,祖 忠肅公 諱 藝,官至同知中樞府事,封忠肅。公忠肅之子也。
幼穎異,及長,篤學有文。登武科,歷官薊浦僉使,屢出征倭。時倭寇擾海疆,公挺身率兵,幾破其巢穴。上嘉其功,擢爲慶尙左道水軍節度使。
歲癸卯(世祖五年, 1459),奉命副使,與通信使 奉使日本。十月初八日,舟次對馬之瀨海,遇風浪沒舟,公以國命在身,不忍棄船,遂與眾殉國。時年三十有九。後一人還朝,以狀聞。朝廷震悼,遣使招魂,葬以官禮,贈嘉善大夫。
公之遺骸不返,遂卜葬于蔚山郡南四十里高山之原,勒石建祠,以妥英靈。祠曰高山精舍,丹所曰水使公壇所。嗚呼!忠烈之氣,至今猶在。
嗣孫然泉 繼洙等重修丹祠,建此碑以旌厥忠魂。
歲在丙寅(1986)季冬,文學博士 昌原 丁仲煥 撰幷書。
해석
수사공 이종실 신도비
우장군 행제포첨사, 증 가선대부 행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수사공 이공의 신도비
공의 이름은 종실이고, 자는 경지이며, 이씨는 전주에서 나왔다. 조선 개국공신 충선왕 후예로, 증조는 충의공 존오이고, 조부는 충숙공 예로서 중추부사를 지내고 충숙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은 충숙공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달랐으며,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무예에 능했다. 무과에 급제하여 제포첨사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왜구가 해안을 침범할 때 공은 친히 병사를 이끌고 나가 왜적의 근거지를 거의 격파하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공을 칭송하고 벼슬을 올려주었다.
세조 5년(1459년), 조정 명을 받아 부사로 일본에 통신사로 떠났는데, 10월 8일 대마도 인근 해역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었다. 공은 나라의 명을 받았기에 배를 버리지 못하고 수행원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당시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1년 후 수행원이 살아 돌아와 이 일을 조정에 알렸다. 조정은 놀라고 슬퍼하여 관리를 보내어 초혼하고 관의 예로 장례를 지냈다.
공의 유해는 돌아오지 못하고, 울산부 남쪽 40리 고산 언덕에 단을 정하고 사우를 세웠으며, 그 사우를 고산정사라 하고, 제단은 수사공단소라 하였다. 아아, 충성과 절개는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후손 연천 이계수 등이 단과 사우를 다시 세우고, 이 비를 세워 충혼을 기렸다.
병인년(1986년) 늦겨울, 문학박사 창원 정중환이 짓고 쓰다.
수사공 휘 종실(宗實) 약전
공의 휘는 종실(宗實)이요, 자(字)·호(號)는 미상이며, 시조 충숙공 휘 예(藝)의 자(子)로서 2세에 해당한다.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절충장군 행 제포첨사(堤浦僉使)를 거쳐 가선대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 水軍節度使)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고, 선고의 유지를 이어 왜적 방비에 헌신하였으며, 세조 5년(1459) 10월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가던 중 해난으로 순국하였다. 조정에서는 제관을 보내 초혼장(招魂葬)을 거행하고 제사를 올렸으며, 후손들이 1924년 울산 고산리 능곡에서 지석(誌石)을 발견하여 단소(壇所)를 세우고 고산재(高山齋)를 창건하여 향사를 이어오고 있다.
8. 봉사공 단소
봉사공 직강은 서면파 파조로, 수사공의 아들이며 학성과 문중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공은 훈련원에서 봉사로 재직하였다. 공은 타고난 충성과 곧은 심성으로 백성을 다스리는데 거울이 되었고, 근면하고 진실되며 예를 다하였다. 단소는 수사공 단소와 같은 장소인 울주군 온양면 내고산리, 이른바 陵谷에 함께 설단되었으며, 후손들은 매년 정성으로 향사를 올리며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봉사공은 유년기부터 지혜롭고 효우(孝友)에 뛰어났으며,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효자이다. 훈련원 봉사로 재직하였고, 덕과 예의가 높았으며, 자손 교육에 힘셨으며, 세상을 떠난 후 후손들이 공을 추모하여 묘를 단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이 비석은 후손들의 효심과 충절 계승 의지를 잘 드러내며, 문중의 史蹟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가문은 충절을 가업으로 삼았으며, 부친과 조부 역시 문무겸비한 충신으로 이름을 떨쳤고, 대대로 나라에 공헌해온 명문가로 기록된다.
비문 내용 전사 및 해석
🧱 앞면 (제액/비석 제목)
복사편집
訓鍊院奉事
鶴城李公諱直剛之墓壇
해석:
훈련원 봉사
학성 이공 휘 직강의 묘단
훈련원 봉사라는 관직을 지낸, 학성 이씨 봉사공 이직강의 무덤임을 나타냅니다.
🧱 측면 1
父祖兩世忠節績
承功垂竹帛
緣雲仍擧魂
燔德闡世祖
風秉禮紀四千二百二十年丁
卯小滿節
十七水潤龍淵謹撰
해석 요약:
부친과 조부 두 대에 걸친 충성과 절의는 뛰어나며, 그 공적은 역사에 기록되었고,
영혼은 하늘에 이어져 덕은 세상에 퍼졌다.
조상의 공훈을 기리며, 단기 4220년(서기 1987년) 정묘년 소만절에
**십칠세손 수윤룡연(潤龍淵)**이 삼가 글을 지었다.
🧱 측면 2 (장문의 주요 본문)
내용 요약:
봉사공의 본관은 학성(鶴城)이고, 이름은 직강(直剛).
증조는 충숙공 이예, 부친은 수사공 이종실로 유명한 가문 출신.
봉사공은 유년기부터 지혜롭고 효우(孝友)에 뛰어났으며, 부모를 극진히 모심.
훈련원 봉사로 재직하였고, 덕과 예의가 높았으며, 자손 교육에 힘씀.
세상을 떠난 후 후손들이 공을 추모하여 묘를 단장하고 비석을 세움.
이 비석은 후손들의 효심과 충절 계승 의지를 잘 드러내며, 문중의 사적(史蹟)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 측면 3
내용 요약:
조선 중기 충절의 상징인 이예, 이종실의 후예로서의 위상을 강조.
묘역은 **울산 울주군 온양면 내고산리(陵谷)**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수사공의 단소와 같은 장소입니다.
후손들은 매년 정성으로 향사를 올리며 그 뜻을 계승하고 있음.
특히 봉사공은 문중의 기틀을 세운 인물로, 학문과 예절에 있어서 후손들의 모범이 되었음.
📜 결론
봉사공 이직강 선생의 묘비문은 다음과 같은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충숙공 이예 → 수사공 이종실 → 봉사공 이직강으로 이어지는 충절과 유학의 가계 전통.
학성과 문중의 터를 잡은 중요한 인물로서의 위상.
효행과 예절, 그리고 후손 교육에 헌신한 공적.
단기 4220년(1987년) 후손에 의해 묘역이 정비되고 비가 세워졌음.
9. 봉사공 직강 선생의 신도비명
선생의 이름은 직강이요, 성은 이씨로 수사공 종실의 아들이다. 집안 학문을 계승하고, 타고난 총기로 예의 바르고 겸손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경전 공부에 전념하였고, 행실은 마을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숙종 대에 문행으로 칭송을 받았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고, 도리에 즐거움을 두고 가난을 편안히 여기며, 종친에게 돈독하여 고을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부친 또한 문무를 함께 갖추어 봉사하였고, 두 세대에 걸쳐 공적을 세워 세종대에 걸쳐 충의가 빛났다. 마침내 울주군 온양면 내고산리 능곡에 장지를 정하였고, 선친 수사공과 함께 단을 세워 봉사하였으며, 후손들은 해마다 정성껏 제사를 올려 향화를 끊이지 않으니, 그 충과 효는 길이 전해질 것이다.
종손 용수 삼가 글을 짓고, 후손 15대손 동환이 정성껏 글씨를 써서 1987년 5월 20일에 세웠다
奉祀公直康先生神道碑銘(봉사공 직강선생 신도비명)
奉祀公直康先生神道碑銘
先生諱直康,字○○,李氏,爲壽使公從實之子,
承家學之傳,資稟聰慧,性情恭謹,
早歲篤志於經義,行誼著於鄕黨。
肅宗朝以文行見稱,聘不仕,
樂道安貧,篤於宗族,爲里人所敬。
遂卜葬於蔚州溫陽面內高山里之陵谷,
與先大人壽使公同所立壇,後世子孫歲時致祭,
香煙不斷,忠孝之風流芳百世矣。
曾孫某謹撰
後孫某敬書
○○年歲次○○月日立
📘 현대어 번역 요약:
봉사공 직강 선생의 신도비명
선생의 이름은 직강이요, 자는 ○○이며, 성은 이씨로 수사공 종실의 아들이다.
집안 학문을 계승하고, 타고난 총기로 예의 바르고 겸손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경전 공부에 전념하였고, 행실은 마을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숙종 대에 문행으로 칭송을 받았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고,
도리에 즐거움을 두고 가난을 편안히 여기며,
종친에게 돈독하여 고을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마침내 울주군 온양면 내고산리 능곡에 장지를 정하였고,
선친 수사공과 함께 단을 세워 봉사하였으며,
후손들은 해마다 정성껏 제사를 올려 향화를 끊이지 않으니,
그 충과 효는 길이 전해질 것이다.
증손 ○○이 삼가 글을 짓고,
후손 ○○이 정성껏 글씨를 써서
○○년 ○월 ○일에 세움.
浦朝逸直蔚 條名字剛山 約臣號妥府 忠資生靈治 莆憲卒之南 公大年所五 諱夫及也堠 藝知墓今許 為中所去高 祖福配公山 嘉院位之里 善事姓世有 大世氏己方 夫子與四正 水左一百墓 軍賓生餘壇 節客行年乃 度奉治之我 使使真久從 諱海得而先 宗外以累祖 實四詳經訓 為十之兵鍊 父餘然大院 以行以文奉 兩結世籍事 世三宗蕩誼
봉사공은 휘가 이직강으로 충심으로 백성을 다스리니 영혼이 생생하게 살았고,
공은 오래도록 장수하셨으며, 부인과 함께 돌아가셨고, 예와 지식이 있어 묘소가 지금 허락된 곳에 있으며, 중부에서 고조에 이르기까지 조상의 복과 공을 함께 받으셨다.
묘소는 산과 강의 아름다운 곳, 가원리(嘉院里)에 있으며, 선행이 있었고 그 성씨가 대대로 알려졌으며, 대대로 성씨를 이어왔고, 묘소 좌측 백보 정도 떨어진 곳에 묘역이 있다.
군빈(軍賓)으로 여생을 마쳤으며 절개 있는 손님으로 그 생애를 살았다.
행적을 받들고 다스리는 것을 우리(후손)가 맡았으며, 사신으로 오래도록 따랐고 바다에서 공을 얻었고 선조에 따라 외손을 비롯하여 조상을 누차 섬겼으며 실로 자세히 가르침을 전하고 십여 년간 훈련도감에서 무관으로 봉사하셨다. 부친 또한 문무를 함께 갖추어 봉사하였고, 두 세대에 걸쳐 공적을 세워 세종대에 걸쳐 충의가 빛났다.
핵심 요점 정리:
이직강: 이름, 자, 호 등이 나와 있고 충성과 문무 겸비한 인물로 소개됨
관직: 포헌(莆憲), 병조 소속 훈련원과 관련된 인물로 보임
묘소 위치: 가원리, 주변 지형 설명
가문: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며 대대로 존경받는 집안임
후손: 후손들이 공의 유덕을 기려 묘와 비석을 세움
세 종대에 걸친 충성: 조정에서 세 왕을 섬긴 인물임을 시사
固先設不於乃二證失之志 辞壇壇豈然勳寒八壇墓碩節 不已後不則食。袍也德之 獲碣數信吾之日年之忠顯後 略故十哉李家也丁已肅達裔 諸載子之可古数公文有 見後尚曰遍謂乃十院翰蒙 聞孫未植満富謂設年而鳴啣 之合表忠数貴失壇獨壇世公 如議碼頭鄉兼墓于於而者必 右豎者衛而全則水奉鄉間留 而碣非孫何然設使事省世念 為樹物曰公率壇公公崇挺有 之福力變之由而增無奉出 銘樹林後舊奈之追之方仁 ☆喆闊禦承德之左遠者可厚 日二也愈者以之已謂德 氏實將世篤其水地数法業 責先軍赫以此使豈百門不 余壇訓Σ忠之公不年而比 增未鍊也謂享痛水奈凡 銘碣院古仁也之哉使何祖 余之正語善鳴日始公自此 非由奇曰推呼次於得忠 其而林積可公以標誌甫以 人今處善想生祭紀石三雲 而則士餘矣長之四明世仍
父祖兩世忠節績繼承功垂竹帛 緣雲仍擧仁魂燦德閎世祖 俎豆攸欽 檀紀四千三百二十年丁酉
卯小滿節 徒後孫承洙龍洪 十七水源郡腹謹 立
父祖兩世忠節績繼承功垂竹帛
부조(父祖) 양세(兩世)의 충절과 공적이 이어져 공훈이 역사에 길이 전해지며
緣雲仍擧仁魂燦德閎世祖
구름 따라 인(仁)의 혼을 높이 들고, 덕이 빛나고 크니 세세조상에 이르기까지
俎豆攸欽
제사(俎豆)의 대상이 되어 경외함이 있음이라
檀紀四千三百二十年丁酉 卯小滿節
단기 4320년 정유년(서기 1987년) 5월 소만절에
徒後孫承洙龍洪 十七水源郡腹謹立
후손 승수와 용홍이 수원군 17세손으로서 삼가 세움
10. 鷗江書院
구강서원(鷗江書院)은 1678년(숙종 4) 울산 반구동에 건립된 울산 최초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포은 정몽주와 회재 이언적을 배향하였다. 1659년 사림의 발의로 시작되어 20여 년간의 준비 끝에 완성되었으며, 1694년 ‘구강’이란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후 여러 차례 중건과 확장을 거치며 지역의 학문과 유림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위패는 마을 뒷산에 매안되었다. 광복 후 주민들에 의해 제향이 이어졌고, 1988년 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2003년 원래 터에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충효정신을 계승하는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구강서원(鷗江書院)은 조선 숙종 4년인 1678년에 울산 지역 사림들의 발의로 반구동에 건립된 서원으로, 포은 정몽주와 회재 이언적 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던 곳이다. 창건은 1659년(효종 10) 향교 석전 후 배두첨 등 사림 11인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총 55인의 사림이 공동으로 출자하여 전답을 마련하고, 무역 등을 통해 재정을 확보한 끝에 20여 년 만에 서원이 완공되었다.
건립 이후에도 서원 명칭에 대한 사액을 받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으며, 정국의 혼란과 환국 등으로 세 차례 실패한 끝에 1694년(숙종 20)에 ‘구강(鷗江)’이라는 서원명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후 1724년에는 묘우를 중건하고, 1736년에는 부사 권상일에 의해 동서재와 문루, 강당, 대문 등이 중수되며 서원의 위상이 높아졌다. 서원에는 숭도사(사당), 지선당(강당), 선화루(문루), 유의문, 전사청(제사 준비 공간) 등 주요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전국 사액 서원 중 47개소를 제외한 나머지가 훼철될 때 구강서원도 철거되었고, 양현의 위패는 마을 뒷산에 매안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향도 중단되었으나, 광복 이후 마을 주민들이 매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제사를 이어가며 그 전통을 지켜왔다.
1988년 구강서원 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울산시와 중구청의 협조로 예산을 확보하여 2003년 3월 15일, 서원이 원래 자리인 반구2동 171-1번지 신두산 자리에 복원되었다. 대지 약 1,200평에 건물 여섯 동이 복원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17일 개원 및 봉안 고유제를 거행하였다. 현재는 지역 주민과 유림, 행정기관의 협력 아래 충효정신을 계승하는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구강서원(鷗江書院)에 대한 설명을 족보·문중자료용 요약문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 구강서원(鷗江書院) 개요
건립 연도: 1678년(숙종 4년) 울산 반구동에 향촌 사림들이 건립
배향 인물: 정몽주(포은)와 이언적(회재) 선생
사액 서원: 1694년(숙종 20년) ‘구강(鷗江)’이란 서원명으로 사액 받음
훼철: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됨
복원: 2003년 132년 만에 반구2동 171-1번지 신두산 자리에 복원
◈ 주요 연혁
1659년(효종 10): 춘기석전 후, 사림 배두첨 등 11인이 창건 발의
1678년: 지역 사림 55인의 공동 출자(벼 490석, 전 3,650량)로 건립
1679년: 포은·회재 두 선생의 위패 봉안
1694년: 4차 청액상소 끝에 사액 서원으로 지정
1736년: 권상일 부사 부임 후 묘우·강당·동서재 등 중건
1871년: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 위패는 마을 뒷산에 매안
1988년: 복원추진위원회 결성
2003년 3월: 건물 6동으로 복원 준공(사당·강당·문루·전사청 등), 사업비 21억 원
2003년 10월: 개원 및 봉안 고유제 거행
◈ 현재 현황
복원 위치: 울산광역시 중구 반구2동 171-1, 신두산 일대
건물 규모: 약 1,200평 부지, 숭도사(사당), 지선당(강당), 선화루(문루), 유의문(門) 등
향사일: 음력 2월
복원 추진 주체: 구강서원복원추진위원회(위원장 심근식) 및 지역 주민·유림(오문), 관의 협력
구강서원은 울산 최초의 사립 교육기관이자 충효정신을 계승하는 향촌 교육의 상징적 공간으로, 오늘날 지역 인문정신의 뿌리를 잇는 유서 깊은 유적지입니다.
11. 남강서원
南岡書院은 임진왜란 당시 창의의사로 활약한 정주판관 이겸수(1555~1598)를 추모하기 위해 1783년(정조 7년)에 ‘남강사’로 창건되었고, 1868년(고종 5년)에 ‘남강서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서원에서는 후학 교육과 유생의 강학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나,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습니다.
이겸수는 웅상 소주리 출생으로 임진왜란 당시 외교교섭과 군사정보 탐지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선무종공신으로 기장현감과 정주판관에 제수되었습니다. 그 공적으로 후에 유림이 서원을 세워 위패를 모셨습니다.
서원은 1946년 건물이 철거된 이후 폐허로 남았다가, 후손들의 노력으로 2008년 기공식, 2009년 준공식을 통해 138년 만에 복원되었습니다. 위치는 양산시 주남동이며, 충열사·강당·동재·서재 등 총 468평 부지에 복원되었고, 약 11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었습니다.
현재는 초등학생들의 전통예절교육 및 선비문화 체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매월 망일과 매년 봄 향례가 봉행됩니다.
12. 남강서원 묘정비문
죽재공 이겸수(1555~1598)는 본관이 학성이고, 자는 子虛, 호는 竹齋 또는 潛窩이다. 세종조 자헌대부 이예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상서원 직장을 지낸 李遇春, 어머니는 흥려박씨로 어모장군 박자공의 따님이다.
공은 성품이 단정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효성과 형제애가 깊었다. 학문에 힘쓰고 뜻을 바르게 세워 살았다. 임진왜란 때 모친의 권유를 받아 의병에 참여하였고, 권응수·곽재우·사명대사 등과 함께 활동하며 전쟁 중 정보 수집, 외교 교섭, 백성 보호에 큰 역할을 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고, 기장현감과 정주판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중 병으로 순국하였다. 향년 44세였다.
공의 충의와 공훈은 《선조실록》과 《분충서난록》 등에 기록되었으며, 고종 때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이후 사우가 남강서원으로 승격되었고, 후손과 유림의 노력으로 복원되어 공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공은 어려운 시국에 몸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충의의 인물로, 후손들의 귀감이 된다.
12-1. 남강서원 묘정비문
1. 인물 개요
이름:이겸수(李謙受)
자(字):자허(子虛), 호(號):죽재(竹齋) 또는 잠와(潛窩)
출생:1555년, 경남 양산시 학성 출신
가계:세종 때 자헌대부 이예(李藝)의 7세손
관직:기장현감, 정주판관
사망:1598년, 향년 44세
2. 임진왜란 당시 활약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시, 어머니의 권유로 의병으로 나서 나라를 위해 충의(忠義)를 다함.
유정(사명대사), 곽재우, 권응수 등과 교류하며 함께 전략을 논의.
사명대사의 추천으로 군기밀을 다루는 외교 임무를 수행, 왜장과 명나라 장수 간 외교 조율에 큰 공헌.
1594년 무과 병과 급제, 이후 북부주부, 지휘사에 임명됨.
기밀 외교문서를 열 겹으로 싸서몸에 지니고 적진을 왕래한 일은 선조실록에도 실려 있음.
국가 외교와 민심 안정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의 노력 덕분에 많은 백성이 살아남음.
3. 성품과 효행
학문이 깊고 도량이 넓었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음.
전쟁 중에도 어머니 병환 시 산막으로 찾아가 병시중을 했고, 상을 당한 후에도 예를 지켜 군진을 거절했으나, 국왕의 특별 조명으로 기복(起復)되어 다시 국사에 참여함.
4. 서원의 창건과 복원
1783년(정조 7)관민의 뜻으로 ‘남강사(南岡祠)’ 설립 → 1868년(고종 5)‘남강서원’으로 승격.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됨.
후손들이 뜻을 모아 2009년 복원, 사당, 강당, 동재·서재 등 조성됨.
묘정비는 그의 충의와 공로를 기리고, 후손과 지역민의 숭모 정신을 담은 글임.
5. 문헌 기록
그의 활약은 《선조실록》, 《분충서난록》, 《용사잡록》 등에도 자세히 실려 있음.
13. 남창 3.1운동 주도자 이재락공 一門의 항일 의거
이재락은 학성이씨 근재공 이의창의 6세손이다. 울산 웅촌 석천리에 거주하였으며, 1919년 고종황제 인산에 상경 중 3.1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은밀히 간직한 채 귀향하였다. 귀향 후 온양 신밤리에 거주하던 친척 이수일과 함께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하였고, 문중 원로들과 뜻을 모아 항일 의거를 준비하였다.
1919년 4월 9일 남창 장터에서 발생한 남창만세운동은 임진왜란 때 20여 명의 의병장을 배출한 학성이씨의 충의 전통을 계승한 민족적 항거였다. 이용락, 이수락, 이희계, 이쾌덕, 이쾌경 등이 주도하여 수백 명이 만세를 외쳤고, 이로 인해 다수의 피검자와 옥고를 치른 이들이 발생하였다.
이용락은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며 7년에 걸쳐 『삼일운동실록』(총 1,190쪽)을 집필·간행하였다. 이는 국내외 삼일운동의 경과와 민족대표들의 공판기록을 망라한 역사적 문헌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귀중한 기록이다. 출판 당시 연세는 70세였으며, 이후 생계가 빈한한 중에도 후학과 후손들에게 민족정신을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거사 전 작성된 ‘통고문’에는 이용중, 이인재, 이석관, 이석진, 이수일, 이석수, 이수만, 이진걸 등 문중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이수일은 삼일운동실록의 현재 유일한 소장자인 李增씨의 조부이다.
13. 남창 3.1운동 주도자 이재락공 一門의 항일 의거
이재락은 학성이씨 근재공 이의창의 6세손이다. 울산 웅촌 석천리에 거주하였으며, 1919년 고종황제 인산에 상경 중 3.1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은밀히 간직한 채 귀향하였다. 귀향 후 온양 신밤리에 거주하던 친척 이수일과 함께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하였고, 문중 원로들과 뜻을 모아 항일 의거를 준비하였다.
1919년 4월 9일 남창 장터에서 발생한 남창만세운동은 임진왜란 때 20여 명의 의병장을 배출한 학성이씨의 충의 전통을 계승한 민족적 항거였다. 이용락, 이수락, 이희계, 이쾌덕, 이쾌경 등이 주도하여 수백 명이 만세를 외쳤고, 이로 인해 다수의 피검자와 옥고를 치른 이들이 발생하였다.
이용락은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며 7년에 걸쳐 『삼일운동실록』(총 1,190쪽)을 집필·간행하였다. 이는 국내외 삼일운동의 경과와 민족대표들의 공판기록을 망라한 역사적 문헌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귀중한 기록이다. 출판 당시 연세는 70세였으며, 이후 생계가 빈한한 중에도 후학과 후손들에게 민족정신을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거사 전 작성된 ‘통고문’에는 이용중, 이인재, 이석관, 이석진, 이수일, 이석수, 이수만, 이진걸 등 문중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이수일은 삼일운동실록의 현재 유일한 소장자인 李增씨의 조부이다.
① 남창삼일의거 요약
鶴城李氏 李在洛公(이재락, 자: 미상)은 近齋公 李義昌의 六世孫으로, 慶尙南道 蔚山郡 熊村面 石川里居住하였다.
大韓民國 元年(1919) 上京中 京城에서 三一獨立萬歲運動을 目擊하고, 獨立宣言書를 密藏하여 鄕里로 歸鄕하였다. 그 후 親族 李樹一과 함께 거사를 計劃하고, 문중의 元老들과 協議하여 擧事를 決意하였다. 宣言書를 근거로 통고문(通告文)을 작성하여 八人發起人이 이름을 올렸으며, 主導者는 모두 鶴城李氏 同門이었다.
發起人
① 李龍中, ② 李仁載, ③ 李錫觀, ④ 李錫晉, ⑤ 李樹一, ⑥ 李錫壽, ⑦ 李樹萬, ⑧ 李振杰
거사는 1919年 4月 9日, 溫陽邑 南倉場에서 起義되었으며, 당시 李龍洛, 李壽洛, 李希季, 李快德, 李快慶등은 밤을 새워 太極旗를 製作하고, 이를 高擧하여 獨立萬歲를 외쳤다. 수百名 群衆이 이에 呼應하였으나, 日本警察의 鎭壓으로 多數가 逮捕되었다.
이 중 李在洛公은 後日 金昌淑 등 獨立運動家에게 軍資金을 提供하였으며, 1927年 3月 29日, 大邱地方法院에서 治安維持法違反으로 懲役1年 執行猶豫2年判決을 받았다.
한편, 李龍洛公은 7年간 資料를 蒐集·編纂하여 **《三一運動實錄》(총 1,190頁)**을 刊行하였으며, 이는 오늘날 民族運動史의 重要資料로 公認되고 있다. 晩年에는 窮苦한 生計 속에서도 민족의 魂을 지키고자 하였다.
② 학성이씨 남창삼일의거 관련 문중 연표
| 연대 | 인물 | 주요 활동 | 비고 |
| 조선후기 | 李義昌 | 근재공(謹齋公), 석천리 고택 건립 | 남창 3.1운동 관련 직계조 |
| 1919.03 | 李在洛 |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숨겨 귀향 | |
| 1919.03~04 | 李在洛, 李樹一 | 문중 원로에게 보고 후 통고문 작성 | 신밤리 중심으로 준비 시작 |
| 1919.04.07 | 李龍洛, 李壽洛, 李希季, 李快德, 李快慶 | 태극기 제작 | |
| 1919.04.08~09 | 위 5인 및 수백명 | 남창 장터에서 독립만세 운동 | 다수 체포, 투옥 |
| 1927.03.29 | 李在洛 | 대구지방법원 판결(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 항일 군자금 제공 혐의 |
| 1969 | 李龍洛 | 《삼일운동실록》 초간본 간행 (400권) | 당년 70세, 자비로 간행 |
| 1994 | – | 삼일운동실록 재간행 (300권) | 총 700권, 현재 국립도서관 등 소장 |
| 현재 | 李增, 李宗奐, 李東必 등 | 《삼일운동실록》 보존 | 각 후손이 소장 중 |
14. 충의사(忠義祠)
충의사는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에 위치한 사당으로,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울산에서 항왜 활동을 벌인 의사(義士)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제향 공간이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 울산 의사들은 왜군에 점령당한 병영성·언양·울산·경주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전과를 세웠고, 1597년 정유재란 때도 조명 연합군과 함께 도산성과 서생포성 전투에 참여하여 두 성을 수복하였다.
전쟁 후 조정은 이들의 공로를 인정하여 선무원종공신으로 책훈하고, 울산군과 언양현을 울산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울산시는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94년부터 충의사를 조성, 2000년에 완공하였다. 현재는 임란 의사 242위와 무명 의사 신위를 모시고 매년 4월 15일과 10월 15일에 제향을 올린다.
충의사에는 본전 사당을 중심으로 전시관, 숭모당, 전사청, 비각, 삼문 등 10여 동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울산 의병의 전투 연보, 실기(實記), 도산성 전투도, 병장기 등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충의사는 울산 문중 선조들의 충의와 항일정신을 후손들에게 전하는 역사적 성소이다.
15 매헌공 후손의 과거 급제자
매헌공(梅軒公)의 후손 가운데 조선시대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한 인물로, 이근오는 1789년 울산 최초로 문과 대과에 급제한 인물이며, 이석진은 고종 31년(1894) 대과에 급제하여 임금으로부터 紅牌와 御賜花를 하사받았다. 홍패는 붉은 바탕에 대과 급제 성적을 기록한 증서이며, 현재 그 실물이 전하고 있다.
이석진의 홍패는 손자 이동호가 소장 중이며, 소과 입격자인 이문구(숙종 21년, 1696)의 白牌는 10대손 이훤, 이규로(1882년)의 백패는 증손 이동호가 각각 소장하고 있다. 백패는 흰 바탕에 생원 또는 진사 입격 성적이 먹글씨로 기록된 증서이다.
울산 지역 조선시대 문과 대과 급제자는 총 네 명으로, 학성이씨의 이근오·이석진과 함께 밀양박씨의 박시룡(1885), 박시규(1890)가 있다. 이 가운데 이근오가 가장 이른 시기인 정조 13년(1789) 급제하여, 울산 최초의 대과 급제자로 기록된다.
매헌공 후손들의 과거 급제는 학문적 전통과 충의 정신의 결실이며, 가문의 명예와 지역의 자긍심으로 계승되고 있다.
16. 학성이씨 문중의 과거시험 합격과 위상
과거제도는 조선시대 관리 등용의 공식 경로로, 문과와 무과로 나뉘며, 그 중 문과 대과는 과거시험의 꽃이라 일컬어졌다. 문과는 初試)→ 覆試 → 殿試의 3단계로 진행되며, 3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式年試와 국가 경사 시의 別試로 나뉜다. 조선 전체에서 문과 식년시 163회, 별시 583회가 열렸으며, 누적 합격자는 14,991명에 달한다.
학성이씨 문중에서는 울산 웅촌 출신의 이근오(1789년)와 이석진(1894년)두 인물이 문과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들은 울산 지역에서 유이한 대과 급제자로, 밀양박씨의 박시룡(1885), 박시규(1890) 형제와 더불어 울산 4대 대과 합격자로 꼽힌다.
과거시험은 단순한 암기시험이 아니라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한 유학의 경전 이해력과 문장력, 시문 창작 능력을 평가하였다. 특히 초시에서 전국 700명을 선발하고, 복시에서는 100명, 마지막 전시에서는 왕 앞에서 치르는 논술시험을 통해 33명만을 최종 등용하였다. 이 중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구분되었다.
과거 응시생은 수년간 경전 45만 자에 달하는 분량을 외우며 준비하였고, 부정행위에 대한 규율도 엄격하여 시험장에서 문서를 소지하면 3~6년간 시험 자격이 박탈되고, 경우에 따라 곤장과 투옥도 있었다.
조선 후기 정조 대에만 10만 명 이상이 과거에 응시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였고, 대과 급제자는 문관의 상징이자 문중과 지역의 자랑이었다.
학성이씨 문중의 과거급제는 선조들의 학문과 충절, 노력의 결실로, 후손들에게 교육과 인내의 모범이자 가문의 영광으로 계승되고 있다.
17. 이양오(1737년부터 1811년)의 문학세계
이양오는 학성이씨 13세손으로,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쓴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림이다. 그는 퇴계학파의 전통을 이어받아 석계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요로원야화기》, 《배수집》, 《시학지남》 등 다방면의 저술을 남겼다.
특히 《세평시(世評詩)》라는 시집에서 당시 사회의 부정부패, 조세 제도, 학문과 문체의 타락 등 현실의 폐단을 날카롭게 고발하였다. ‘조세 이외의 징수에 대한 탄식’과 ‘환향의 폐단’ 등에서는 백성을 짓누르는 가혹한 세금과 탐관오리들의 부패를 비판하였다.
울산읍지에는 그를 ‘강좌시객 중 제일자’라 칭하며 뛰어난 시인으로 기록하였고, 2003년 울주군 웅촌면 석계서원 뒤편 솔숲에 그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문학비 앞면에는 그의 대표 시 ‘강촌만조가’가 새겨져 있는데, 이 시에서 그는 부귀를 버리고 소박한 삶 속에서 근심 없이 한가로움을 즐기는 마음을 노래하였다.
이양오는 올곧은 선비의 정신으로 조선 후기 사회 문제를 깊이 통찰하고 학문과 문학을 통해 후학을 길렀던 지역 유림의 큰 스승이자 문학가이다.
18. 죽오 이근오
죽오 이근오(竹塢 李覲吾, 1760~1834)는 울산 출신 최초의 문과 대과 급제자로, 울산 향내에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선비이다. 충숙공 이예의 11세손이며, 근재공 고택의 첫 주인 이의창의 차남이다.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약 15년간 관직 생활을 했으나, 실제 근무 기간은 5년 미만이고 최종 관직은 사헌부지평이다.
그는 평생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죽오 이근오 일기는 1804년부터 1832년까지 29년에 걸친 개인 일기로, 당시 선비의 생활과 사회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일기에는 가문과 조상 섬김, 후학 교육, 독서, 문서 작성, 손님 접대, 질병 등 다양한 일상이 기록되어 있으며, 일부는 그의 아들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문집 《죽오집》(1901)에는 한시, 만시, 서간, 상량문, 축문, 제문, 묘비문 등 약 270여 편이 수록되어 있고, 1981년에는 중간 영인본이 발간되어 그의 과시 답안지 등도 포함되었다.
1813년에 세운 ‘양사재’에서 후학들을 가르쳐 울산 유림의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죽오는 울산 유림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기록은 지역 역사와 선비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
19. 용이천가례봉선사
用伊川家例奉先祀는 1953년 계사보와 1972년 임자보에 수록된 문구로, 송나라 학자 정이의 집안 예를 사용하여 제사를 모신다’는 뜻이다.
이는 정태중의 두 아들인 큰아들 정명도와 둘째 정이천 가문에서, 형의 아들이 어려 제사를 모시지 못하고 동생 이천이 제사를 맡으며 종법과 재산을 이어받은 사례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작은 집에서 제사를 모실 때 이천 가례를 따르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안동 지방 양반 세도가에서도 널리 쓰였다.
우리 학성이씨 문중도 1953년과 1972년 족보에 이 문구가 포함되었으나, 최초 족보인 무신보에는 없고, 후대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화합을 위해 이 문구가 삭제되어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즉, ‘용이천가례봉선사’는 전통적인 종법 계승과 제사 모시는 방식을 뜻하는 옛 문구로, 시대 변화에 따라 점차 사라진 표현이다.
20. 죽오일기’와 죽오 이근오.
죽오 이근오(1760~1834)는 학성 이씨의 11세손이며, 조선 초기 명신 충숙공 이예의 후손이다. 1788년 향시에 입격하고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울산 최초의 문과 급제자라는 상징적 인물이다. 관직으로 승문원 부정자, 박사, 부사과, 성균관 전적, 후릉령,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죽오일기』 개요
이근오가 1804-1812년까지 약 9년간 기록한 개인 일기로 서울 관직 생활과 고향 낙향 후 시골 생활상이 상세히 담겨 있다. 2020년 울산박물관에서 국역본이 발간되어 조선 후기 지역사와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양산 용당과의 인연
용당은 지리적 근접성과 혼인·학문적 교류의 중심지였다. 이근오의 사촌 누이가 용당 박씨 집안에 시집가고, 그의 아들들은 용당 서재에서 공부하며 상호 교류가 활발했다. 용당 서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과권(과제물)을 채점하는 등 학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황산역과 밀양 사돈가
큰며느리가 밀양 내진 마을 출신으로, 황산역은 밀양으로 가는 길목이자 가족과 교류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며느리의 산통과 출산 기록, 사돈과의 잦은 서신 왕래가 일기에 담겨 있으며, 이근오는 며느리 귀향에 동행하는 등 가족 사랑이 두드러졌다.
조선통신사 행렬 기록
1811년 마지막 통신사 행렬을 목격하며 백성들의 동요를 기록했다. 통신사 정사와 부사가 용당 일대에서 숙박했고, 이근오와 지인들은 통신사 행렬 관람 및 접대를 하였다. 당시 통신사 규모 축소와 지역사회 분위기가 일기 속에 생생히 드러난다.
결론
‘죽오일기’는 조선 후기 울산과 양산, 밀양 일대의 사회·문화·인맥 교류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이근오는 지역 학맥과 혼맥을 바탕으로 한 유력 인물로, 후대 학문과 지역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울산박물관 국역본 발간으로 지역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죽오 이근오(1760~1834)는 학성이씨로, 울산 최초 문과 급제자이며 여러 관직을 역임한 조선 후기 유력 학자이다.
죽오일기1804-1832년 사이의 개인 일기로, 당시 관직 생활과 고향에서의 일상이 담겨 있으며 울산과 양산, 밀양 지역의 사회·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학문과 혼인의 중심지로, 이근오의 사촌 누이가 용당 박씨 집안과 결혼을 하여 학문적으로도 교류가 많아졌으며, 밀양 황산역에: 사돈가가 있어 가족 교류와 방문이 잦았으며, 출산과 서신 왕래 등 가족 사랑이 기록되어 있다.
통신사 방문을 기록하며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보여준다. 죽오일기’는 조선 후기 울산 일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이며, 이근오는 지역 발전과 학문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