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입성
하늘에서 보는 북경시가지의 모습은 화려한 불빛으로 아름다웠다. 저 속에 숨겨진 진짜 중국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궁금증은 자꾸 더해간다.
북경공항은 새로 지어진 듯 흰색의 현대식 건축물이 깔끔하고 멋있었다. 우리보다 못 살고 지저분한 나라일 것이라는 막연히 머릿속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는 순간이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공항 내에는 여행자들을 위해 북경시내지도가 무료로 마련되어 있고 환전기계도 곳곳에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인 광업대학 기숙사까지는 서울에서 미리 연락을 해 둔 현지가이드의 안내로 미니버스를 타고 갔다. 거리는 어두웠다. 그래서 자세한 것은 볼 수 없었지만 간혹 보이는 거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들로 웃통을 벗고 술잔을 기울이거나 삼삼오오 모여 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벌거벗은 웃통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더워도 런닝이라도 좀 입지라고 했더니 네 번째 중국을 오시는 김종남 선생님은 그게 이 나라에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앞으로 수없이 보게 될 거라며 웃으셨다. 중국여행 초보자의 티를 한껏 낸 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와 다른 중국인들의 모습이 사뭇 기대가 된다.
숙소인 광업대학 기숙사는 깨끗하고 편안하다. 방안에 깨끗한 샤워시설과 에어컨까지 있어서 찌는 듯한 북경의 더위를 식히기에는 더 없을 것 같다. 팽팽하던 긴장감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쉽게 잠이 들 것 같지 않은 중국에서의 첫 날밤은 이렇게 저문다.
2000년 7월 23일 (일) 엄청나게 더웠음, 가만히 있어도 땀이 저절로 흐름
달에서 보이는 인공건축물 만리장성과 용경협, 명13릉
중국의 모습을 보는 첫 날. 설렘으로 일찍부터 잠이 깨인다. 특히 달에서 보인다는 인공건축물인 만리장성을 본다는 마음이 나를 더 설레게 한다. 어릴 때부터 말로만 들어왔던 그 만리장성을 내가 걸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숙소를 나와 구내식당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중국음식. 대체적으로 중국사람들은 아침을 집에서 해먹지 않고 사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길거리에 간이식당이 들어선다. 우리는 첫날이라 대학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만두와 콩국, 기름에 튀긴 꽈배기, 흰죽이 나왔다. 색다른 맛이다. 그러나 거부감은 생기지 않는다. 내 입은 전천후다. 어디서나 입맛을 잃는 적이 없다. 이 번도 예외가 아니지 싶다. 아마도 여행이 끝날 적에는 불어난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괴로워 할 것 같다.
시가지를 지나 만리장성으로 향한다. 버스 속에서 보는 중국의 거리는 생기가 넘친다. 우뚝우뚝 솟아오른 건물들 사이에서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중국을 본다. 여러 차례 중국을 여행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목소리가 올 때마다 달라져서 몰라 볼 정도라는 것이다. 내가 기대했던 중국의 거리를 전혀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그리고 변화라는 이름으로 개발을 해나가는 모습이 왠지 그들의 문화가 사라져 가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 씁쓸하다. 물론 전체를 보고 판단해야 하지만 낯선 이방인의 눈에 비친 현재 중국의 모습은 그러하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쭉 뻗은 고속도로가 우리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시원하다. 달리는 버스에서 내다보는 중국의 모습은 낯설지가 않다. 우리와 너무 비슷하다. 하나라도 더 눈에 넣으려는 여행자의 집착이 시작되나 보다 하고 있는데 버스 뒷자리에 앉은 젊은이가 뒤에서 물이 솟는다고 난리다. 가만히 돌아보니 정말 그렇다. 아마도 더운 날씨와 쉬지 않고 달려서(중국은 버스 기사가 두 명이 타고 번갈아 운전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라디에이터가 터진 모양이란다. 버스기사는 문제없다며 혹시나 여행을 못 하게 될까 하고 걱정하는 우리를 달랜다. 차를 고치는 동안 우리는 멀리 산 위로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만리장성'을 볼 수 있었다. 전체 길이가 6000㎞나 돼서 달에서도 보인다고 하니 과연 거대한 성벽이다. 기대가 된다.
용경협으로 가는 길은 가로수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농부들이 갓 따온 과일들을 내다 파는 모습이 영락없이 우리의 시골풍경이다. 자그마한 바구니 하나 가득 담긴 복숭아가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한 입 배어 물련 단물이 그대로 입 속에 고일 것 같다.
용경협은 '소계림'이라 불리는 곳이다. 인공으로 댐을 막아 물위로 솟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게 한 호수다. 물빛이 초록으로 깨끗하고 아름답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한바퀴 돌아 나오는데 자연의 아름다움과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중국인의 노력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머리 위로는 가는 외줄에서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묘기가 벌어지는데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끊이지 않는다.
머리위로 내리쬐는 볕이 싫다. 양산이 없어 우산을 펴고 앉았지만 뚫고 들어오는 볕이 머리를 달구기에는 충분하다. 옆에 앉은 중국인 연인은 그런 것에 상관없는 듯 오이 먹기에 바쁘다. 더위에 지쳐 돌아오는 길에 먹은 중국 맥주의 차가운 기운은 무겁고 지친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것이 여행기간 내내 우리의 여행을 따라 다닐 줄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리장성에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내리쬐는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모두들 만리장성을 향해 오른다. 우리는 케이블카로 오르기로 했다. 50위얀(6500원)이라는 비싼 가격에도 줄은 끝이 보이지 않게 길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오른 케이블카는 네 사람이 타게 되어 있다. 한 가닥 줄에 의지한 좁은 공간에 앉아 허공을 오른다고 생각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덜컥 겁이 났다.
드디어 만리장성에 닿았다. 능선을 타고 구불구불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성벽은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장 6000㎞를 이어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을까를 생각하니까 가슴이 아팠다. 낯선 이방인에게는 어쩌면 단순히 벽돌로 쌓은 성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만 보일 수도 있으니까.(하지만 그런 민초들의 희생은 오늘에 와서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당장 우리 눈앞에 무시로 오고가는 저 서양인들, 그들은 모두 중국을 먹여 살리는 주요한 수입원이기에. - 태영 생각)
한참을 걸었지만 그곳이 그곳 같다. 멀리 보이는 성벽에 개미처럼 보이는 것은 모두 사람들이다. 바글바글하다. 케이블카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오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인종 전시장 같다. 그 사이를 비집고 내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은 두 다리를 잃고 두 팔로만 이 만리장성을 가는 이다. 사람들마다 가던 발길을 멈추고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안쓰러운 듯. 하지만 그는 너무나 당당해 보인다. 흐르는 땀을 연신 닦으며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모습이 그에게 두 다리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장애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멀쩡한 두 다리를 가진 우리가 장애인인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힘차게 두 팔로 만리장성을 돌아보고 있는 그에게 나는 마음속으로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만리장성을 내려왔다.(늘 하는 말이지만 만리장성은 케이블카아를 타고 오를 필요가 없다. 케이블카아에서 내려왔다 다시 케이불카아까지 올라가나, 팔달령 입구에서부터 걸어갔다가 내려오나 매일반이기 때문이다. - 태영 생각)
만리장성에 오르기 전에 박물관이 있다. 물론 만리장성에 관한 것들만 모아 둔 곳이다. 한 번쯤 들러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해서 아쉬웠다. 바쁜 일정에 쫓기다 보면 다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때로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돌아서기도 한다. 아마 사람들이 계속 여행을 하는 것도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이 아닐까?
위대한 인간의 힘을 보여준 만리장성을 뒤로하고 명13릉을 향했다. 명13릉은 무덤이다. 그것도 거대한 무덤이다. 우리나라의 천마총이 크다고 하나 이것에 비하면 훨씬 작다. 모두 13개의 능 중에서 한 개만을 개방해서 보여 주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 하지만 우리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루 일정의 마지막이라 지쳐서인지 그냥 다리만 움직이는 것 같다.
북경으로 돌아와서 잠깐 북경서역에 들렀다. 오늘 같이 움직였던 사람들 중에 저녁기차로 내몽고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서이다. 함께 움직이다 보니 일정보다 시간이 길어져 큰 배낭도 못 가지고 바로 떠나는 모양이다. 초원은 일교차가 커서 저녁에는 춥다고 하던데......
북경서역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한 눈에 그 모습을 다 볼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륙의 힘인가 싶다. 그만 건물 앞에 주눅이 들고 만다.
오늘 저녁에는 '만찬'이 있다. 북경에 왔으니 북경오리구이를 먹어 봐야 한다는 팀원들의 압력 아닌 압력에 못 이긴 우리 팀장님이 택한 장소는 화평문 전취덕(주로 외국인이 많이 드나들며, 본점은 천안문 광장 건너 복잡한 거리에 있음-태영). 기대가 된다. 배낭족에게는 여행 중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만찬이다. 아마 이번 여행 중에는 처음이자 마지막 만찬이 되지 싶다. 지난겨울 여행했던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우리 팀장님이 엄청난 살림꾼이라 쉽게 비싼 음식을 사 주는 법이 없다고 하니까 말이다.
북경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하는 '전취덕'은 그 명성에 어울리게 그 넓은 공간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하다. 인종의 전시장 같다. 잘 차려진 자리에 앉는다.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기대감이 시장기를 더한다. 중국은 어디를 가나 차가 나온다. 그런데 이 곳의 차는 좀 다르다. 온갖 약초와 꽃이 들어서 그 맛이 정말 좋다. 다들 감탄이다. 그래서 우리는 차 이름을 물어 보았다. '팔보차'라고 한다. 다들 잊지 않으려는 듯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되뇌인다. 그 찻맛을 더한 것은 특이한 복장을 하고 주둥이가 긴 주전자를 가지고 다니며 따뜻한 찻물을 부어주는 종업원의 모습이다. 꼭 알라딘의 마술 램프에서 나온 '지니'같다. '북경오리'요리는 통째로 구운 오리를 요리사가 직접 손님들 앞에서 잘라서 준다. 맛있게 구인 오리고기가 입안 가득 침이 고이게 한다. 얇게 부친 밀전병에 가늘게 썬 파를 얹고 그 뒤에 춘장과 오리고기를 얹어 싸서 먹는데 알싸한 파의 향기와 더불어 담백한 오리고기가 씹히는 맛은 천하일품이다. 왜 이곳을 사람들이 찾아오는지 알 것도 같다.
중국의 어느 황제도 부럽지 않을 저녁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내려서 다시 웃통을 벗은 차장이 손을 흔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로 어디를 간다고 얘기하는 버스로 갈아타서 겨우 숙소인 광업대학 초대소에 도착했다. 북경시 외곽지역이라 그런지 밤거리는 한적했다.
겨우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난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어떠한 느낌도 받을 수가 없다. 나에게 익숙한 자본주의의 냄새가 여기저기에 진하게 배어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여자들의 과감한 노출 패션, 거리마다 즐비한 유명 브랜드, 패스트푸드점 등. 그래도 중국은 제 빛깔은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작은 간판 하나에서도 알 수 있다. 제 나라 말을 사랑하는 그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들여온 말도 다 중국말로 바꾸어 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스럽게 KFC라고 하는 영어가 중국에서는 肯德基로 쓴다. 그래서 인지 중국의 거리에서 낯선 남의 나라 글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2000년 7월 24일 (월) 어제와 같이 엄청 더웠음(38도)
여걸, 서태후의 힘 (중국 황실의 여름 별장, 이화원)
드디어 텔레비전에서 보던 중국의 아침식사 풍경을 가깝게 볼 수 있는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신 김종남 선생님께서 광업대학 맞은 편 길에서 아침을 팔고 있는 것을 보시고 들어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아침을 먹기고 했다. 매일 아침 중국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한다. 만두에 우리나라의 콩국 같은 것으로 아침을 한다(豆醬, 날 콩을 갈아서 끓인 후 취향에 따라 설탕이나 소금을 넣어서 먹는데 소금을 넣은 것이 더 비쌈-태영).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근하는 길에 간단하게 사먹고 간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보다 훨씬 싸다고 한다. 우리도 그들처럼 만두, 콩국, 꽈배기를 시켰다. 만두는 우리의 맛 그대로다. 수북하던 음식이 금새 사라진다. 가끔씩 그들과 다른 말을 쓰는 우리를 이상한 듯 슬그머니 쳐다보는 중국사람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들은 씩 웃고 먼저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이 좋다.
아침부터 찐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해서 북경역에 도착했다. 오늘 일정은 짐 맡기는 일부터 시작이다. 오늘 저녁에 호화호특(내몽고)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땡볕에서 808번 버스를 기다리다가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줄 알았다. 처음 그 버스가 왔는데 시원한 물 산다고 일행 중 몇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타지를 못 했다. 당연히 자주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우리의 잘못이었다. 우리는 거의 30분을 작열하는 햇볕 속에서 기다렸다. 우산 겸용 양산으로 가렸지만 그것을 뚫고 들어오는 그 강렬하게 쏟아지는 볕은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아스팔트에서 내뿜은 열까지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런 와중에 버스가 오길래 죽어라 뛰어가서 탔는데 자리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다 용하게 자리를 차지했는데, 나만...... 제법 멀다고 하던데 서서 가야 하나 보다. 시작부터 아찔하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여행의 초보자가 표가 나나 보다. 나를 뺀 다른 사람들은 최소 두 번에서 최고 네 번까지 여행을 하신 분들이다. 어찌 감히 왕초보가 그 어르신들을 따라잡으리오!
버스는 북경 시내 곳곳을 돌아서 이화원에 도착했다. 너무 더워서 숨을 쉴 수가 없다. 더운 기운이 폐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는 느낌이다. 모두들 더위도 피하고 주린 배도 채울 수 있는 맥도날드로 가기로 했다. 지난 겨울 여행 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우리 팀장님이 너무 알뜰하셔서 되도록 지출을 줄이시려고 비싼 것은 먹지를 않았다고 한다.(중국의 다른 물가에 비하면 햄버거는 비싸다. 거의 우리나라 가격이다.) 빅맥에 밀크쉐이크까지 호사스러운 점심을 먹었다. 더위쯤이야! 문을 박차고 나왔다. 두 다리에 기운이 뻗치는 것을 느꼈다.
이화원은 중국 황실의 여름 별장으로 서태후가 지은 곳이라고 한다. 평평한 땅에 흙을 돋워서 그 위에다 여러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 들어서는 입구부터 사람을 압도했다. 먼저 소주가를 돌아보았다. 서태후가 백성들이 사는 모습과 똑같이 꾸며 놓은 이 곳을 돌면서 백성들의 삶을 느껴보기도 했다는 곳이다. 중국의 전통가옥의 형태와 인공호수(인공 호수라기 보다는 '수로'가 맞을 듯. 蘇州;쑤조우는 원래 운하가 발달한 곳으로 '上有天堂, 下有蘇杭',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고 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지만 이제는 운하에 똥물만 흐른다. 그 옛날 소주의 정취는 아마도 서쪽 깊숙한 변방 麗江;리쟝에서나 찾을 수 있을까? - 태영)가 멋있다. 그곳을 지나 불향각으로 향했다. 잠시 일행들이 흩어져서 서로 찾으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서로 만날 수가 있었다. 불향각은 인공호수인 곤명호에서 봐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화려하게 지어진 중국의 건축형태이다. 그곳에서는 멀리 북경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중국의 어디에나 넘쳐나는 것은 사람이다. 불향각을 배경으로 해서 사진 한 장 찍기도 힘이 든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거대한 인공호수인 곤명호(인공 호수로 여기서 파낸 흙으로 호수 앞에 산을 만들었는데 그 산이 바로 만수산이다. 산의 높이로 미루어 호수의 넓이나 깊이 그리고 얼마만한 인력이 필요했을지 생각해 보지만 역시 음덕이 오늘에 미치니 헛된 희생은 아니었던 듯-태영)로 향한다. 인공적으로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 위에 유람선이 다닌다. 멀리서 바라보는 불향각의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지친 몸을 잠시 호수의 바람에 달랜 후 서태후의 대리석 배로 갔다. 긴 회랑을 지나 버드나무 사이로 보이는 대리석 배는 웅장하다. 정말 떠다닌 건 아니겠지? 그래도 한 여자의 힘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목이 말랐다. 그 순간 내 손에 건네진 차가 맥주. 북경에 도착하고 난 후, 우리 팀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갈증을 해결하는 데는 이 이상은 없다. 목을 타고 내리는 서늘한 기운이 금새 온몸으로 퍼진다. 좋다라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북경역으로 돌아왔다. 찌는 듯한 더위에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에어컨이 있는 중국의 상징인 빨간 택시 속의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 더위 속에서도 잠깐씩 잠이 들었었는지 버스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볼 때마다 한 번씩 달라져 있었다.
북경역 앞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준비해온 비상식량들이 하나 둘씩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윤태영선생님 사모님이 만들어 주셨다는 고추장(멸치를 갈아넣은 것)은 그 맛이 최고다. 그것에 밥을 비벼 먹으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맛을 느낄 수 있다. 꼭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다. 게다가 더해지는 흑맥주 한 잔이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기에는 충분하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자유시간. 난 쓴 엽서를 들고 우체국으로 갔다. 여행의 재미 중의 하나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엽서를 쓰는 것이다. 다른 어떤 선물보다 좋다. 그리고 나서는 허드슨 쇼핑센타를 구경하고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길거리로 나섰다. 북경역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대로변 화단 턱에 걸터앉아 사람들도 구경하고 북경역도 본다.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역으로 끊임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일행과 약속한 시간에 맞춰 북경역으로 갔다. 역 앞에는 어디론가 가려는 중국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다. 짐 보관소 앞에 왔는데 일행들이 보이지 않아 서성거리다가 우리나라 학생들을 만났다. 중국에서 유학하는 중에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우리나라 소식을 들었는데 또 물난리가 나서 어수선하다고. 그 얘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외국에 나온 애국자? 잠시 후 일행들과 함께 짐을 찾아서 역 안에 마련된 외국인 대기실에서 내몽고행 기차를 기다린다. 말끔하게 정리된 대기실은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땀에 절었던 얼굴, 손, 발을 씻고 나니 또 다른 여행의 설레임이 시작된다.(외국인을 위한 배려 중 하나가 별도로 마련된 대합실인데, 중국인은 란워(軟臥-부드러운 침대) 차표를 소지한 사람에 한해 이용할 수 있다. 넓고 시원한 실내 공간, 별도의 화장실과 개찰구까지 마련되어 있어 휴식과 편의를 함께 누릴 수 있어서 배낭여행의 피로를 씻는데 도움이 된다-태영)
기차는 우리가 예상한 것과 너무나 다른, 깨끗하고 아늑한 실내공간으로 어느 호텔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북경이나 상해 등 국제화 되어있는 대도시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비교적 설비가 좋다고 한다.(우리나라에서도 아직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내 것이 아니면 함부로 쓰고 어지럽히며 심지어는 슬그머니 가져가기도 하는 현상은 중국에도 만연되어 있는 현상이다. 그러니 민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낙후되어 있는 지역을 오가는 노선이나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삼등차는 다른 곳에서 한참 사용하던 낡은 차량으로 운행되기 마련이다. 또 대도시일수록 외국인들이 많이 오가기 때문에 외국인용 대합실과 마찬가지로 중국 특유의 체면치레 의식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태영) 12시간의 여행이 우리를 기다린다.
2000년 7월 25일 (화) 와! 덥다
저 푸른 초원 위에
덜거덕거리는 기차소리에 간간이 잠이 깨었다 들었다 했다. 창 밖으로 스며드는 아침햇살에 눈을 비비며 본 풍경은 초록일색. 낮은 구릉에 나지막한 집, 우리의 시골을 느끼게 하는 감자밭, 해바라기밭이 펼쳐졌다. 말 그대로 그림을 보는 듯했다.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편안하고 느긋한 느낌. 북적거리는 북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라서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컵라면 아침과 한 잔의 커피, 더 이상 뭘 바랄까!
12시간의 긴 여행은 내몽고의 호화호특(Hohhot;呼和浩特, 중국식 발음으로는 후허하오터)에서 끝마쳤다. 깨끗하고 편안한 열차의 침대 칸에서 보낸 밤은 웬만한 숙소보다 좋았다. 앞으로는 이런 편안함을 느낄 수가 없을 거라는 말에 못내 아쉬움이 생겼다. 이제 더 넓은 초원의 눈부신 초록의 빛을 보러 떠난다. 역에서 우리를 맞는 사람은 전통 몽고식 의상을 입은 남녀. 방문하는 사람을 맞이하는 의식을 역에서 해야 한다며 남자는 몽고 전통악기를 연주하고 그 연주에 맞춰 두 명이 여자가 노래를 부르며 우리의 목에 파란색 스카프를 걸어주었다. 어색하고 쑥스러워 자꾸 주위를 돌아보았다.(이런 의식이 물론 몽고족의 전통인 것은 맞지만 초원도 아닌 역사에서 베풀어지는 짧은 환영행사는 세속화된, 그래서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의식처럼 느껴졌다.-태영)
드디어 대초원으로 출발했다. 여기도 북경만큼이나 더웠다. 승합차에 몸을 싣고 얼마 달리지 않아서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가 우리를 맞았다. 내리쬐는 볕과 차가 달리면서 일으키는 흙먼지는 이후 몽고식 파오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우리와 함께 했다. 차가 얼마나 심하게 흔들리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하는 바람에 몸은 금새 여기저기가 쑤셔 왔다.(얼마나 흔들리는지 새로 산 반바지가 보푸레기가 생겨서 다시 교환했어야 할 정도였다.-태영) 이렇게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그 흔들림 속에서도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떴을 때는 해발고도가 제법 높아지고 갖가지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멀리 내다보이는 초록물결은 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고. 여행의 피로함도, 나 자신도 잊은 채 마냥 발아래 펼쳐진 초록물결과 거기에 어우러진 들꽃보기에 정신을 모두 빼앗겼다. 시간도 멈춰 버린 듯.
힘들게 2시간 35분을(3시간 35분?) 달려서 우리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멀리서도 한 눈에 알 수 있는 초록의 대평원에 흰 배처럼 떠있는 몽고의 전통 가옥 '파오'가 우리의 시선을 잡았다. 원형으로 지어진 파오는 밖에서 보기보다는 실내가 넓었다. 짐을 풀고 잠시 누웠는데 금새 또 잠이 들었다. 여행을 잘 하려면 잘 먹고 잘 자야 하는데 우리는 어느 누구하나 그걸 못 지키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힘든 여행이지만 체력을 유지하고 심지어는 살이 찌기까지 하는가 보다. 설핏 든 잠을 점심 먹으라는 소리에 깼다. 삶은 양고기( 手肉;빠소우로우-손님이 왔을 때 대접한다는 양을 통째로 삶은 요리. 각자가 칼로 썰어서 쏘스에 찍어 먹는데 그 맛이 그만이다. 내게만?-태영), 양유로 섞어 만든 차, 갖은 야채, 밀가루로 찐 빵 등으로 차려졌다. 평소 양고기를 접해본 적이 없던 우리는 혹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걱정과는 달리 냄새는 전혀 나지 않고 맛있었다. 늘 그렇지만 우리의 식탁은 남긴 음식 하나 없이 깨끗하게 치워졌다. 지친 몸과 주린 배를 채운 우리는 '파오'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잤다. 배는 부르지 적당히(?) 지쳤지 두 눈이 저절로 감겼다. 눈을 뜨니 초원 위엔 여전히 태양이 빛나고.
피곤할 땐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던가? 하지만 초원을 질주하는 생각에 그 눈꺼풀도 들어올릴 수 있었다. 스카프 하나 두르고, 카우보이 모자를 목에 걸치고, 머리를 흩날리며 멋지게 말을 타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짜릿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초원에서의 승마는 두려움으로 우리들의 몸은 한껏 움츠려 들게 했다. 이놈의 말들이 한국말을 알아들어야 말이지. 안장과 발걸이도 불편하고. 지난번 인도여행에서 낙타를 타보기는 했지만 말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래 다들 마음만은 벌써 더 넓은 초원의 끝을 향해 달려나가고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현실은 말에게 제발 점잖게 굴어다오 하고 빌면서 고삐를 잡고 있을 수 밖에.(박미병 선생님과 윤인용 선생님 그런대로 고삐를 당기며 신나게(?) 달리는데, 아이고 김연실 선생님 말이 제멋대로 끌고 다니는 바람에 혼나셨다-태영) 하여튼 우리는 그 옛날 징기스칸이 달렸던 것처럼 초원을 달렸다. 내리쬐는 태양과 초원 그리고 달리는 말은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다. 뉘라서 이를 화폭에 담아낼 수 있을까? 사진 한 장에 찍어낼 수 있을까? 너무도 넓고 너무도 멀었다. 가만히 말에서 내려 등을 대고 누워도 보고 싶지만 혼자서 말에서 내리고 타기가 힘들어 그냥 꾹 참았다. 그래도 말 위에서 느끼는 바람의 맛만으로도 이미 징기스칸의 후예다.
승마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고통 그 자체였다.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다들 작은 비명을 지르기에 바빴다.(엉덩이가 까졌는데 계속되는 강행군으로 피곤하긴 하지, 매일 술 먹지, 약을 발라도 낫지 않는 상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게다가 서안에서는 샤워하고 약발라달라고 홀딱 벗고 윤인용 선생님께 엉덩이를 들이대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와 동시에 어! 할 새도 없이 문이 열리며 강윤숙 선생님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대장 체면 다 구기고 말았다. 뭐 지금도 설마 그 짧은 순간에 다 보지 않았겠지(?) 하며 자위하고 있긴 하지만. 다음부턴 반드시 문이 잠겼는지 확인하고 약도 바르고 옷도 갈아입었다. 이건 정말임-태영) 엉덩이가 아파도 볼 건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몽골 전통 씨름을 보러 다들 나갔다.(세계 각 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그것을 보기 위해 자리에 앉았는데 보여주는 것은 약식 경기라고나 할까?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엄숙한 의식과 진지한 수련이 따르고 전제되는 그런 것은 아니고 그저 예의 역사에서의 환영의식과 같은 관광객용 씨름대회였다. 하지만 100% 상대를 무릎 꿇리고야 마는 그들의 자존심은 존경할 만 했다.-태영) 푸른 초원 위에서 펼쳐지는 몽골씨름은 특별한 규칙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경기장도 따로 없다. 전통의상을 차려 입은 씨름선수가 양편으로 나눠 서서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나오더니 상대방과 인사를 나누고 곧장 경기로 들어간다. 우리네 씨름은 허리에 맨 샅바를 잡고 하지만 몽골은 양어깨를 잡고 시작한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듯 하면서도 선수의 재빠른 몸놀림으로 상대방 선수는 금새 바닥에 나뒹군다. 정말 순식간이다. 여러 명의 여행자들이 도전해 보지만 번번이 지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나라 대학생은 제법 오랫동안 버티고 서 있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많은 박수를 받았다.
몽골 전통 씨름을 보고 난 뒤 숙소 뒤의 언덕을 올랐다. 다른 곳보다 조금 높은 그곳에서는 넓게 트인 초원을 더 멀리 볼 수 있었다. 가슴이 탁 트이고. 멀리 하늘과 초원이 맞닿은 곳도 손을 내밀면 금새라도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맑은 공기와 높은 고도 덕이겠지만 얼마나 갈지-태영)
즐거운 식사시간. 몽골에서는 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대접한다고. 악사가 반주를 하고 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두 명의 몽골 아가씨가 파란색 스카프 위에 술잔을 받쳐들고 손님에게 권한다. 그러면 그 손님은 그 잔을 받아 들고 술을 손가락에 묻힌 다음 하늘, 땅, 자기 몸에 뿌린 후 한 번에 그 술을 다 마셔야만 한다. 술은 정말 독했다.(원래는 세 잔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원가 절감 차원에서인지 한 잔 밖에는 주지 않았다. 밑져야 본전인데 하는 생각에 '당신들 인심이 언제부터 이렇게 박해졌는가? 밤은 아직도 길고 병에는 술이 남았다. 그리고 나는 더 먹을 수 있다'고 했더니 주인 남자가 빙그레 웃더니 다 먹으라고 병 채 주었다. 엉덩이야 어떻게 되던 술과 안주는 좋았다. 물론 우리는 그 술을 다 먹고 맥주까지 더 먹었다. 역시 그들과 우리는 한 뿌리에서 갈라졌는가 보았다-태영)
초원의 밤은 점점 깊어지고 사람들 사이의 정도 점점 깊어진다. 타는 더위를 차가운 맥주 한 잔으로 달래며 여행의 날들을 채운다. 그 사이 하늘은 수많은 별들을 안고 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하다. 도시의 밤하늘에서는 볼 수 없는 별들의 모습에 숨이 멎는 듯 하다.(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언제 더웠냐는 듯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밤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최귀선 선생님, 강윤숙 선생님 등과 더불어 초원 위에 누웠다.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이야기로 시간은 흐르고, 별이 저만큼 이운 뒤에야 우리는 일어섰다. 내일을 위해서. 이재수 선생님이 함께 왔더라면 저 별을 얼마나 좋아했을까?)
2000년 7월 26일 (수) 진짜 덥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초원을 떠나다
지난밤에(어제 한 승마 때문에 다들 엉덩이가 벗겨져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겨우 앉으면서도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는 하루종일 이어졌다.) 잠을 설치는 바람에 일출 보러 가자는 말에도 선뜻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두 눈을 비비면서 '파오' 뒤쪽 언덕으로 따라 올라갔더니 날씨가 흐려서 선명하게 해돋이를 보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깐, 진홍으로 타오르는 커다란 태양이 초원 저편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다들 무엇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 갑자기 살 속을 파고드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는지, 이 여름에.(일출과 일몰을 보고 못보고는 정말 삼생의 인연이 닿아야 하는 모양이다. 나는 특히 일몰을 더 좋아하는데 해외 여행 중 보았던 일몰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들로 미국 뉴포트비치에서 가족과 함께 보았던 일몰과 태국 푸켓 섬의 선셋비치의 일몰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일몰을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나도 나이가 먹었는가 보다 석양은 무한히 아름답지만 잠시 후면 사라질 것을... - 서지마의 시에서. -태영)
흰죽, 꽃빵(우리의 찐빵처럼 생겼는데 안에는 팥이 없다), 치즈, 양유, 조 등으로 차려진 중국식 아침을 먹고 아쉬움이 남는 초원의 생활을 접고 다시 호화호특으로 출발했다. 어제 왔던 그 덜컹거리고 먼지 나는 길을 다시 간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아찔했다. 또 얼마나 흔들리는 차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야 하는 싶어서 말이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낫다. 한 번 겪었기 때문일까? 도로는 곳곳이 넓히거나 만드느라 성한 구석이 없이 다 파헤쳐져 있다. (수년 후 다시 오면 이곳에도 포장 도로가 생기고 문명의 때가 좀 더 많이 묻어 있을게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더 많은 길을 돌아 다른 곳으로, 소위 문명인의 때가 덜 묻은 곳을 찾으려 헤매고 다니고 있겠지.-태영) 운전을 하는 한족 '한선생'은 없는 길을 만들면서까지 앞으로 나아간다. 순간순간이 아찔아찔하는 곡예운전의 연속이었다. 결국 Hohhot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곳에서 타이어가 펑크나는 일이 생겼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동안 길 옆 동네의 모습과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소박하고 아담한 마을과 사람들. 중국어를 할 수 있다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보는 순간이다. 그런데 김연실 선생님이 마을 옆에서 무언가를 사고 있었다. 가보니까 오이며 토마토며 각 종 야채를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야채장수를 만나서 오이와 토마토를 사고 있는 것이었다. 말을 통하지 않지만 그래도 손짓, 발짓으로 토마토를 산다. 잘 익은 놈으로 골라 담는데, 어느새 마을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모이고, 아이들은 수줍은 듯 눈이 마주치면 슬그머니 피하거나 살짝 어색한 미소를 머금는다. 자기들과 비슷하게 생긴 모습을 한 사람들이 전혀 중국말을 하지 못하고 낯선 말을 하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바퀴 가는 일 도와주려다 손에 화상 입을 뻔했다. 어떻게 된 타이어 휠이 펄펄 끓는 물처럼 뜨거웠기 때문이다. 아마도 구리스나 윤활유가 없이 몰고 다니는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지만 짐작일 뿐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고, 아무튼 함부로 손댈 일은 아니다.-태영)
흔들리는 1984년형(?) 봉고버스에 실려 오느라 가볍게 먹은 아침 기운은 전혀 없다. 아이고 배고파! 오늘 점심은 몽고식 양고기 샤브샤브( 羊肉;쏸양로우)란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불이 붙여지고 육수에 갖은 향신료를 넣은 냄비가 들어온다. 그리고 얇게 썬 양고기, 각종 야채(정확한 이름은 모름), 느타리버섯, 목이버섯, 감자 등이 나온다. 육수가 끓자 양고기와 준비된 재료를 넣어 익혀 먹는다. 그 맛이 일품이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는 전혀 없고 담백한 맛만 느낄 수 있다. 배가 부르도록 먹고 챙겨 나가려는 순간 굵고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우리나라 칼국수가락처럼 생긴 면이 들어오는 것이다. 남은 국물에 넣어서 끓여 먹으면 그만이겠다. 그러나 아쉬워해도 소용이 없다. 이미 그 국물에 우리가 가져온 '햇반'을 말아서 맛있게 먹은 다음이라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를 아쉬워하며 뒤돌아 나왔다.(사천 요리의 영향인지 어느 지역엘 가든 샤브샤브 냄비는 두 칸으로 나뉘어 있어 한 군데는 담백한 육수가, 다른 한 곳에는 엄청나게 매운 육수가 담겨 있으며 손님은 취향대로 담갔다가 먹는다. 그리고 참기름이 주성분인 쏘스나 식초를 가미한 간장에 찍어 먹는데, 매운 기름 육수에 담갔다가 먹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고추 기름에다 으깬 산초(?)를 섞은 듯한데 그 맛이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혀가 다 얼얼하다.-태영)
식당앞 거리좌판에서는 차를 파는 중구 아가씬지 아줌마가 있었다. 중국사람들은 늘 '차'를 마시기 때문에 '차'는 그들 생활의 일부분이다. 늘어놓은 갖가지 중에서 하얀 꽃으로 된 '국화'가 보인다. 따뜻한 차로 먹으면 그 향과 피어나는 꽃이 아름다운 차다. 김연실 선생님은 그 차를 산다. 그 광경을 사진으로 찍으려 하자 그 아가씨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린다.(차가 건강에 좋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계속 밝혀지고 있지만 중국에 어느 곳엘 가던지 끓는 물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차 문화 때문이다. 요즘엔 커피를 마시는 신세대들이 많이 늘기는 했지만 그 가격 때문에 그런지, 그 뒷맛이 차에 비해 덜 깔끔하고 개운해서 그런지 여전히 차가 일반적이다. 참고로 84년인가 처음 대만 갔을 때 자판기 커피 한 잔의 가격이 우리 돈 600원 정도였다.
호화호특은 중국 북부 초원지대 여행의 기점이다. 규모도 크고 인구도 많으며, 서시의 무덤이 차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고 하는데 일정 상 다녀올 수가 없었다. 뒤에 나오겠지만 이곳의 철로대반점은 가격이나 시설 면에 있어서 추천할 만한 숙소이다. 넓디넓은 중국 각지를 연결하는 제일의 교통수단은 뭐니뭐니해도 기차로 웬만한 지역에는 모두 철도 종사원과 그 가족을 위한 철로대반점이 있는데 경제마인드 개발을 위해 철 밥그릇(鐵飯碗;티에판완, 일을 잘 하든 못하든, 지위가 높든 낮든, 그 단위에 소속된 모든 사람은 어쨌든 살 집과 먹을 밥이 제공되어야 하며 이는 퇴직 후에도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도록 단위 책임자에게 위임되어 있다. 그러니 말로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한다;爲人民服務'고 하지만 사실은 군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니 그보다 더 확실한 밥그릇이 있겠는가?) 제도를 없애면서 수입확대를 위해 대부분의 철로대반점을 개방했다. 이제는 중국에서도 놀아도 월급 주고 주택 제공하는 곳은 거의 없다-태영)
세상의 그 누구도 부러울 게 없는 우리는 라마교 사원인 대소사와 오탑사를 돌아본 뒤 Baotou로 향한다. 가는 길의 왼쪽의 산은 나무 하난 없는 민둥산인데, 멀리 '再造首美山'이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중국 곳곳에 서 산림에 대한 관심을 보여 나무를 심자는 문구를 자주 볼 수 있었다.(김연실 선생님과는 이곳에서 작별, 장기간 혼자 여행하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에 결국 혼자서 북경을 거쳐서 귀국하셨다. 산림 훼손에 대해서는 이제 중국도 슬슬 경각심을 높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식량 자급을 목적으로 오만 곳을 다 개간해서 계단식 논밭을 만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로 인한 사막화가 실질적인 위협으로 대두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는 속담 그대로 아직은 당장의 경제적인 논리에 밀리고 있는 실정이라 안타깝고 또 두렵다. 왜냐하면 중국의 여러 문제가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기 때문이다. 황사에 실려오는 그들의 공해물질과 해마다 문제되는 기상 문제 등이 모두 중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태영)
Baotou에 도착해서 먼저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너무 더워서 하루 종일 물만 마셨더니 보고 싶은 것은 화장실뿐. 헌데 식당 내에는 화장실이 없다고 길 건너 시장 안에 있는 공중화장실로 가라는 게 아닌가?(설마 화장실이 없었겠는가? 아마도 식당 시설에 비해 화장실이 지저분하거나 못쓰게 하려고 그런 것이지 싶다. 물론 마을 전체가 공동 화장실에 의지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을(빠오토우;包頭)의 크기로 보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태영) 중국화장실은 문도 없고 아래로 배설물이 내려가는 것까지 다 보이는 개방형이라고 다를 한 마디씩 했다. 어떤 경우에는 양편으로 마주 보게 되어 있어 일을 보면서 얘기를 하기도 한다나? 말로만 듣던 화장실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코를 찌르는 냄새가 기선을 제압한다. 그리고 역시나 안은 지저분하고 문이 없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과감하게 행동한다. 옷에다 볼 일을 볼 수는 없는 거니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마주 보게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그래도 오늘은 씻을 수 있어서 다행. 이 더운 여름에 이틀동안이나 씻지를 못 했더니 영 꼴이 말이 아니다. 그동안 먼지를 얼마나 뒤집어썼던지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머리를 감는 순간 너무 놀랐다. 시커먼 물이 줄줄 타고 내리는 것이 아닌가? 혀가 내둘러진다. 그래도 씻고 나니까 개운하다.(뭐 이틀 정도를 가지고. 한비야의 여행기를 보니까 일주일도 못 씻은 적이 있다고 하던데 거기에 비하면야 양반이지. 하긴 나도 입고 다니던 조끼를 벗어서 냄새를 맡아보니 쉰 냄새가 나긴 했다. 술과 땀에 절었으니-태영)
밤거리에 나가보자는 얘기에 밖으로 나갔다. 중국은 가로등이 제대로 된 곳이 없어 길거리는 아직 어둡다. 9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지만 거리에는 사람으로 넘쳐난다. 길에는 사람과 차가 하나가 되어 다녔다. 먼지와 소음만이 가득하고 어디 마음 편하게 앉아서 쉴 곳이 없어 그냥 돌아왔다.(밤거리에 어둠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은 것은 더위 때문이다. - 태영)
2000년 7월 27일 (목) 비오다가 갬
비 내리는 사막의 정취를 느끼며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작열하는 사막의 태양만을 상상했는데 비를 보게 되다니. 색다른 경험. 내리는 빗속에서 보이는 해바라기와 수수밭은 빗물을 머금어 더욱 노랗고 푸르게 보였다. 멀리 보이는 강 하나, 그 이름도 유명한 '황하강'이란다. 강폭이 굉장히 넓고 듣던 대로 물빛 또한 누렇다.(黃河;황허라고 불러야 옳을 듯.)
출발할 때부터 곳곳에 늘어서 있는 공안(公安)이 눈에 띄더니 점점 그 수가 늘어간다. 자신도 공안이라며 도로 통행료도 내지 않고, 무슨 일이던 대충 무시하고 지나던 기사 아저씨 결국은 좀 높은 듯한 사복 공안의 제지로 차를 길 한 켠으로 세웠다.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나 보다 하고 잔뜩 기대를 했는데, 지나간 것은 몇 대의 소형버스만 보일 뿐 다른 것은 없었다.(지역 사업과 관련된 무슨 시찰단이 탑승한 버스였다.-태영) 그것 때문에 길 가던 모든 차들이 제 갈 길을 못 하고 서 있다가 일제히 빵빵거리며 길로 쏟아져 나왔다. 특히 석탄을 실어 나르는 트럭들의 행렬은 정말 장관이었다. 이 지역은 노천광으로 유명하다는데, 특히 중국 최대의 석탄생산지대이고 아시아 최대의 화력발전소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지나는 길에 보이는 그 발전소의 모습은 과연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이곳은 북경전기공급의 6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고 한다.
누더기 같은 길을 두 시간 남짓 달리다 보니 멀리 굽이굽이 펼쳐져 있는 모래언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도 20분 여를 더 가니 넓은 주차장과 모래 협곡이 우리를 맞았다.(이 곳이 바로 빠오토우 사막 여행의 출발점이었다.-태영) 너무나 인상적이다. 건너편까지 가려면 리프트를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비가 계속해서 쏟아지니 사막의 뜨거움을 맛보기는 애시당초 그른 모양이었다. 리프트에서 내리자마자 입구에서 모래에 다니면서 신도록 만든 덧신을 신기고 5원이란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신었다가 영락없이 5원을 내야한다. 모래의 그 부드러움을 느끼고 싶었는데, 그럴 사이도 없이 이미 내 발은 내 옷 색깔과 같은 노란색 덧신이 신겨졌다.(중이 고기 맛을 보면 뭐도 남아나지 않는다던가? 돈에 맛을 들인 중국인은 누구나 다 비단장수 왕서방이다. 나야 물론 저기에 무슨 속셈이 있지 싶어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 내려왔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처 말해줄 새도 없이 당하고 말았다. 평소라면 분명히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가랑비가 내려 촉촉이 젖은 모래 위에 모래신을 신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바지 벗고 방귀뀌는 격이다.-태영)
사막의 여기저기에 놀이시설이 준비되어 있다. 우리를 눈길을 끄는 것은 급경사를 대나무로 만든 작은 탈 것에 몸을 싣고 내려가는 모래썰매와 낙타. 다들 먼저 모래썰매를 탔다. 거금 10원을 내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온몸에 짜릿함이 전해지는 듯 했다. 그러나 비가 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모래썰매의 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느린 속도에도 불구하고 일단 출발하고 나니 비명소리가 절로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비명이 그토록 애절했던 까닭은? 아직도 남아있는 승마의 후유증 때문.(정말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태영) 내려오는 것은 한순간인데 올라가는 것은 한참이다. 우리네 인생사도 이와 같지 않을까? 강윤숙 선생님과 나만 빼고 다를 낙타를 타기로 했다. 중국낙타는 인도낙타보다 훨씬 작아서인지 앙증맞기까지 한데, 열을 지어 사막을 가로 질러가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방울 소리 들으며, 부드럽게 흔들리면서 가는 사막 여행,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것과 같은 모습. 지금은 우리가 그 주인공이다. 카메라에 한 장 찰칵. 그리고 한없이 사막 끝을 쳐다보고 누워서 느껴보는 모래의 감촉. 부드럽다. 불어오는 바람, 모래 언덕 위에 물결을 남기고 그리고 내 마음에도 작은 물결이 인다.
사막여행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Baotou로 향한다. 소사천(小四川)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어제 달려왔던 그 길을 되돌아서 Hohhot으로 향한다. 한선생(직업은 중국인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공안인데 휴가기간에 아르바이트로 기사를 한다고 한다.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톨게이트를 지날 때면 그냥 지나고 붙잡으면 "나, 공안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은 고속도로로 가면 지루하다고 국도로 왔다. 그래서 갈 때는 고속도로고 가자고 하니까, 고속도로가 일방통행이라고 한다. 사연인즉 중국 총리 주룽지가 내몽고 자치구를 방문했을 때 이 고속도로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나가는 차량도 별로 없는데 고속도로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하던 공사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사는 이미 상당정도로 진행된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머지 반은 내몽고 자치구에서 돈을 대서 완성을 했지만 Baotou에서 Hohhot으로 오는 길은 없다고 한다.
역에 도착해서 윤태영선생님, 윤인용선생님, 최귀선선생님은 여행사 직원들과 함께 숙소를 정하러 간 뒤 우리는 버스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꿀맛이다. 숙소는 철로대반점. 다들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한 뒤 우육면으로 저녁을 하자고 한다. 그릇을 가득 채운 국수가 군침을 돌게 했다. 국물도 담백하고 맛이 있다. 따뜻한 국물 있는 음식을 먹더니 갑자기 강윤숙선생님이 맞은편 자리 중국인이 먹는 기포 오르는 맥주을 보고 먹고 싶다고 야단이다. 중국 와서 매일 맥주를 마셨기에 오늘 하루라도 먹지 않기로 했는데.(사실은 중국은 맥주 값이 물 값보다 싸다.) 작심 하루? 그래서 오늘은 윤인용선생님이 점심 때 몸 판 돈(마파두부에 섞인 꼭지도 따지 않은 마른 홍고추를 먹으면 5원을 준다는 강윤숙선생님의 말에 윤인용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먹고 5원을 받았다. 그 고추는 엄청 매워서 가슴속까지 얼얼했다나? 윤인용 선생님한테 내기를 걸다니 바보로군-태영) 이번에는 '물만두 1근'이 나왔다. 다들 배가 불러서 먹는 속도가 영 아니다. 그런데 못 말리는 강윤숙 선생님.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먹잔다. 당장 실시. 그런데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못 먹어서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던 강윤숙선생님 혼자서 계속 걸린다. 다를 어린애들 같다. 식당 안의 중국인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해하면서 쳐다보고 있었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쥐고 웃었다. 게임은 점점 무르익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계속하는데 마지막 남은 두 개. 그런데 글쎄 마지막 순간에 내가 걸릴 게 뭐람! 두 개의 만두는 결국 고스란히 내 입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는데. 그냥 쑤셔 넣었다. 이번 여행에 체중 늘면 강윤숙 선생님 책임져!
식당을 나와서 Hohhot거리를 걸어서 야시장까지 갔다. 중국사람들은 먹는 것을 즐긴다고 하더니 곳곳에 먹고 마실 것이 지천이었다. 게다가 길거리에 노래방기계까지 나와 있고 그 반주에 남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멋지게 노래 가락을 뽑아낸다. 그 야시장문화에 익숙한 두 분이 우리 팀에도 계시다. 바로 김종남선생님과 박미병선생님. 아마 여행을 하는 동안 모든 도시의 야시장을 두루 섭렵하실 게다.
2000년 7월 28일(금) 덥다
출근 시간, 거리를 달리는 자전거 행렬
철로반점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하고 바로 걸어서 내몽고박물관에 도착했다.(아침 식사가 제공되는 사실을 모르고 나가서 사먹는 경우도 많다. 숙박비가 다소 높다 싶으면 반드시 확인하는 것이 좋을 듯. 위생적이며 맛도 좋은 곳이 많다.-태영) 박물관 문을 열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우리는 길거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중국사람들의 아침 출근길을 구경했다. 중국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차도처럼 자전거도로가 있어 신호에 걸리면 일제히 섰다가 다시 출발하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길거리가 모두 자전거 일색이다. 짧은 치마를 입고 타는 여자, 긴 원피스를 바람에 날리며 우아하게 모자를 쓰고 타는 여자,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 나이 어린 소년 등 정말 다양했다. 역동적이다. 그냥 하루 종일 그것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듯하다.(자전거는 이제 슬슬 모터싸이클로 바뀌어가는 추세. 대도시에서는 이미 많이 대체 되었고 머지 않아 지방까지 변화의 물결을 탈듯한데 자가용만큼은 다소의 시간을 필요로 하지 싶다. 엄청난 유지비용 때문에 웬만해선 차량 소유는 꿈도 못꿀 정도이기 때문이다. 상해 한인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친구조차 적지 않은 소득을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량 운용을 포기했다고 하면 짐작이 가실지.-태영) 나와 윤태영선생님은 그 거리에 앉아서 엽서를 썼다. 역시 여행의 맛은 틈틈이 멀리 있는 친구나 가족에게 글을 쓰는 것이다. 짧은 몇 자를 적은 것이 얼마나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지. 그리고 그 엽서가 그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주는지는 느껴보지 못 한 사람은 모른다.
오전 9시 내몽고 박물관 문이 열리고 우리는 전시실을 구경한다. 내몽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이곳은 맘모스의 거대한 뼈가 원형 그대로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는 곳인데 들어서는 입구에 나 있는 맘모스의 발자국이 엄청나게 컸다.
박물관 구경을 끝내고 각자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다. 윤인용선생님, 최귀선선생님과 나는 백화점을 구경하기로 했다. 물건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비해 조잡하다. 두 선생님은 체육과라 운동용품에 관심이 많다. 기웃거리다 돌아오는 길은 멀기만 했다. 다들 어디서 무얼 하시는지.
Hohhot역에 도착해서 역 왼쪽에 있는 전신청에 가서 아까 쓴 엽서를 부쳤다. 윤태영선생님은 사모님께 보내는 엽서를 쓰셨는데 중국말로 되어 있어서 전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여보, 나 여행 잘 하고 있소. 보고 싶군. 사랑해." 정도였겠지?
붐비는 역안(중국의 모든 역은 항상 이렇다)으로 들어서면서 혹 기차가 연착될까 걱정을 했다. 그런데 이럴수가! 잠시 자유시간을 가지는 동안 윤태영선생님과 강윤숙선생님 두 분끼리 맛있는 만두와 시원한 맥주를 먹고 왔다는 것이다. 다들 배가 고픈 참에 배신을 했다며 아우성이다. 특히 윤인용선생님은 그 일을 두고두고 안주거리로 삼았다. "만두 먹고 맥주 먹은 사람끼리 지내라." 라고 하면서 기차의 자리도 따로 줬다.(자유시간은 원래 각자의 관심분야를 찾아서 움직이는 것 아닌가?-태영)
드디어 서안으로 출발하는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24시간의 긴 기차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사람들 사이를 헤쳐서 자리를 잡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중국의 들은 한없이 넓기만 했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고, 그리고 들을 가득 채운 갖가지 채소와 과일들. 인구는 많아도 땅이 워낙 넓어 생산량이 수요를 웃도니 넓은 땅에서 나오는 그 많은 수확물이 가까운 우리나라로 밀고 들어오는 게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질이 비슷하면 싼걸 찾게 마련 아닌가? 내일의 중국 어떻게 변할지 두렵기까지 하다.(인구의 도시 집중은 중국에서도 골칫거리로 등장한 지 오래다. 정주역 앞 광장에는 수도 없이 많은 유랑인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과거에는 증명서가 없으면 모두 잡아서 돌려보내는 것 같더니 이제는 그도 포기했는지 갈 때마다 늘어나는 것 같다.-태영)
기차는 생각보다 훨씬 깨끗하다. 운행 중에 차장이 쉬지도 않고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하지만 워낙 버리는 놈(?)이 많으니 다 소용 없다. 밉살스럽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계속 쓸고 있는 차장도 차장이지만 쉬지도 않고 까서 알맹이만 먹고 뱉어내는 승객들도 그 이빨 재간과 두터운 얼굴 양면에서 대단한 사람들이다. 미안한 마음도 없는지 쓸고 있는 그 순간에도 계속 뱉어내고 있다.
2000년 7월 29일 (토) 엄청 맑음
12시 20분에 서안역에 도착했다. 서안에 다 오자 기차 차장인 듯한 여자가 여관에 대해 물었다. 자기가 깨끗하고 괜찮은 여관을 소개해 주겠다나? 현지인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불쾌한 일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에 확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기차에 내리자 그 여자가 우리를 낯선 남자에게 소개 아닌 소개를 해주고 빠르게 10원을 챙겨서 사라지고 그 남자는 계속 우리를 따라 오면서 뭐라고 얘기를 했다. 아마도 자기네 여관으로 가자는 얘기 같았다. 성도행 기차표 예매 관계로 예매소에 먼저 갔더니 14:30분에 문을 연다고 하기래 우선 숙소부터 정하기로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아까부터 따라오던 그 남자가 권하는 방을 일단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한참을 지나도 방 보러 간 사람들은 오지 않고 그 남자가 와서 방을 결정했으니 가자고 했다.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잘라 말하고 우리 일행을 기다렸다. 잠시 후 돌아온 우리 일행은 역 근처 '철로반점'을 보고 왔다고 한다. 그 남자가 소개한 곳은 실내에 냄새도 나고 가격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그래서 어디가나 철로반점에서 묵고 후회해본 적이 없었으니 한 번 가보기나 하자고 갔는데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철로반점'은 서안역 오른쪽 100미터 지점에 있는데 방도 깨끗하고 에어컨도 빵빵했다. 그런데 화장실이 따로 있는데다가 그곳에 샤워실까지 딸려 있는데 샤워실 문도 허술하고 지저분하기까지 했다.(돈만 더 주면 방에 화장실에 뭐에 일습이 모두 갖춰진 방을 얻을 수 있지만 배낭여행에 그런 사치를 다 누릴 수는 없다. 씻을 수 있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태영) 다 좋을 수야 있겠느냐며 서로를 위로했다.(여자들만, 남자들은 위로고 뭐고 필요 없었다. -태영) 간단히 짐 정리를 하고 난 다음 철로반점 옆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넓은 홀에 각종 음식이 마련되어 있고 원하는 음식을 사서 먹으면 되는데 문제는 그 때마다 전표를 사서 먹어야 한다는 것. 무엇을 먹어야 할 지 망설여졌다. 여지껏 먹은 중국음식은 그 나름대로 괜찮았는데..... 뭐 입에 맞지 않을 게 뭐 있을라구? 에라 도전 365일이다!
성도행 기차표 때문에 역으로 간 일행이 한참만에 돌아왔다. 표가 없다고. 그런데 뒤에 서 있던 중국인은 성도행 표를 사 가지고 가더란다. 물어보니까 자신은 여행사에서 준 표를 가지고 왔다고 하더란다. 실제 요금보다 더 얹어주고 산 모양이라고 한다. 기가 막혀서. 그리고 마침 오늘이 토요일이라 외국인 전용창구가 휴무. 화요일 출발 표라고 구하고 싶은데 예매기간은 3일이라 그것도 힘들다. 결정의 순간, 다행히 여관에서 표를 구해 줄 수 있다는데 여섯 장밖에는 안 되는 모양이다. 나머지 한 자은 일반표를 사서 차장에게 웃돈을 주고 사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일단은 월요일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후일담이지만 서안에서의 경험은 나도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서안의 철로대반점에서는 자신들의 숙소에 2일 이상 묵는 고객에 한해서 표를 구해준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표든 6매밖에는 없다는 것. 그런데 우리 일행은 7명, 결국 월요일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지만 월요일의 외국인 전용창구 한 마디로 '메이요우(沒有, 없어!)'. 불친절하기는 이루 말할 데가 없고 계속해서 표는 빼돌리는 것 같은데, 다시 숙소에 알아보니 이미 당일표는 팔려버리고 없고. 이도 저도 안되어 결국 밤에 출발하는 연와표를 7매 샀다. 에라 열시간 앉아서 간다고 죽기야 하겠냐? 하는 비장한 마음으로. 하지만 역시 우리 나이에는 무리.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허리는 직각으로, 목은 앞으로 5도 숙인 채, 무릎은 앞사람과 마주 닿고, 결국 옆으로 어찌어찌 돌려서 새우잠을 자기는 했지만 에어콘은 어찌 그리 센지 빵빵하다못해 얼어죽을 지경이라 모두 긴 옷에 방풍 자켓을 꺼내 입고서야 겨우 잠을 이룰 수 있었다. 하긴 뭐 말로는 이렇게 해도 닥치면 또 그와 같은 선택을 하고 새우잠 자며 갈 것임을 우리는 모두 안다.-태영)
오후 첫 일정은 섬서 역사박물관이다. 여관 앞에서 처음으로 중국택시를 탔다. 빨간색 택시. 운전기사와 승객 사이에는 강도방지용 창살로 막혀 있는 -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형태다. (기본요금은 6원, 가산 요금이 1.4원짜리와 1.2원짜리가 있는데 택시 외부에 표시가 되어 있다. 시간거리 병산제.) 섬서 역사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명대까지 시대별로 구분하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각 전시실 별로 특색 있게 잘 꾸며져 있다. 사전에 미리 중국의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해가지고 보면 좀더 유익하게 관람할 수 있을 듯.
섬서 역사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서 김종남선생님(중국여행이 네 번째인 분)을 만나러 종루 앞으로 이동했다. (예전에 와본 적이 있다고 혼자 다른 곳을 보고 다니셨다.) 김선생님을 만나서 종루 근처에 있는 '세기금화'라는 쇼핑센터를 구경했다. 중국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자본주의 색깔이 짙다. 김선생님은 2년 전에 서안엘 오셨다고 하는데 그 때와 너무 달라졌다고 하셨다. 처음 오는 우리가 봐도 끊임없이 새 건물이 세워지고 있고 무언가 변화의 조짐이 뚜렷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도시 곳곳에 높다란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고 번화가 가로등은 꺼질 줄을 몰랐다.(그러니 10여년 전에 다녀온 나는 오죽 했겠는가? 동인지 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아주 애먹었다.-태영)
쇼핑센터를 빠져 나와서 회족거리와 청진사(모슬람사원)쪽을 이동했다. 저녁이라 회족 거리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거리 가득 메운 요리 냄새에 양고기꼬치구이를 하느라 피어나는 연기, 긴 수증기를 뿜어내는 대찜통 안에 탐스럽게 담겨 있는 왕만두. 천국이 따로 없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와글거리며 먹는 폼이 맛이 제법 괜찮은가 보았다. 회족 거리라 끝날 즈음에 작은 골목을 따라 들어갔더니 골동품거리가 즐비했다. 갖은 물건이 다 있어 보인다. 회족들이 운영하는 것 같다. 그 시장 중간에 중국 최대의 모슬람 사원인 청진사가 자리잡고 있다.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가 있다고 한다. 잘 다듬어 놓아서 그런지 깨끗하고 성스럽게 느껴진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 밖은 저리도 시끄러운 속세련만.(동남아나 터어키를 여행하다가 마주치는 모스크와 청진사의 모습은 전혀 별개이다. 무엇이든 수용해서 변질시키는 중국이라 그런지, 분명 종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건축물은 모두 다분히 중국적 요소가 많이 섞여 있었다. - 태영)
저녁은 만두를 먹기로 하고 지난 번 김종남선생님이 가보셨다는 '덕발장(德發長)'으로 갔다. 들어서는 입구에 만들어 놓은 만두가 갖가지 모양이다. 쳐다만 봐도 맛있어 보이는데 너무 예뻐서 먹지는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물고기모양, 오리모양, 용모양, 개구리모양 등 저걸 어떻게 만들었나 싶다. 이 집은 '강택민'이 다녀간 곳이라고 해서 벌써부터 기대를 했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중국 만두를 먹어보게 되었다는 설레임도 일고. 80원짜리 코스만두를 주문했는데 나오는 반찬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여지껏 너무도 알뜰살뜰하게 여행을 했기 때문에 그런지 진수성찬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혹시나 하는 의심이 일기는 했지만 설마 하고 먹었다. 헌데 늘 밥 때가 되면 나오는 얘기, 맥주가 또 문제다. 이제 공금에서는 그만 먹자는 말 끝에 먹고 싶은 사람은 자기 돈 내고 먹기로 했는데 결국 윤인용선생님만 빼고 모두 18원짜리 생맥주를 시켰다. 윤인용선생님은 8원짜리 맥주를 시켰는데 시원하지가 않아서 불만이다.
80원짜리 만두는 모두 19가지가 나온다고 한다. 한 번 나올 때마다 복무원 아가씨가 뭐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알아듣지를 못한다. 갖가지 모양이 나오는데 맛도 있고 모양도 예쁘다. 그냥 만두가 아니라 '예술만두'다.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진주만두'라고 한다. 아주 작게 빚어서 닭육수에다 끓여준다. 후식으로 과일까지 나온다. 괜찮은 저녁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계산서를 달라고 해서 보니까,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 엄청 다르다. 우리는 모두 80원이라고 생각하면서 먹었는데, 알고 보니 1인당 80원이었던 것이다. 며칠 밥값이 하루 저녁에 날아가 버린 순간이다. 윤태영선생님은 사색이다. 안 그래도 경비가 얼마 남지 않아서 걱정이던 판에 불에 기름을 더 끼얹은 꼴이 된 것이다. 가슴이 찢어지고 계산하는 손이 떨린다. 처음 반찬이 나왔을 때 의심을 했어야 하는데...... 씁스름한 맛으로 돌아서 내려오는 길에 보니까, 대부분 중국사람들은 아래층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만두만 시켜먹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가 원한 건 그것이었는데. 아까 먹을 때 보니까, 대부분 외국 단체 손님만이 그 윗 층에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황당한 저녁이다.(이것은 확실히 리더역을 맡았던 나의 실수였다. 복무원 아가씨의 말에는 분명히 1인당 80원이라는 말은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2층에 올라오는 외국인은 모두 그런 식으로 대해왔는지도 모르겠지만 100원이면 푸짐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돈인데 600원 돈을 모양만 좀 보기 좋을 뿐 맛은 그저 그런 별 볼일 없는 만두 값으로 날렸으니 이 실수를 어떻게 만회하리! 이 만두집을 생각하면 작년 겨울 방학때 상해 포강반점 뒤편에서 먹었던 고기만두 생각이 절로 난다. 10원이면 푸짐하게 고소한 육즙이 배어나오는 고기만두를 실컷 먹을 수 있었는데.-태영)
돌아오는 길에 윤인용선생님은 버스비 1원을 달라고 했더니 윤태영선생님은 없다며 그냥 가버리신다. 어쩌면 우리는 내일부터 하루에 두 끼나 먹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이런 분위기라면. 그러면서도 아까 새파랗게 질린 윤태영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내가 정말 그렇게까지 심한 모습을 보였었나?-태영)
2000년 7월 30일(일)
오늘도 긴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함께.
서안역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투어버스가 코스별로 운행하고 있어 서안 부근의 유적지를 방문하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물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곳을 다녀야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 가기 싫은 곳은 가지 않겠다고 미리 흥정을 해야 한다. 아니면 무조건 입장료에 뭐에 다 내야하며,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나중에 피곤할 정도로 싱강이가 벌어질 수도 있다. 물론 우리 일행은 7명이나 되기에 미리 흥정하는 것이 가능했고, 이 점에 관해서는 다른 선생님들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역한다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태영) 투어버스는 08:10 서안역을 출발해서 함양역사박물관에 도착했다. 안에는 별로 볼 것이 없을 것 같아 우리 일행은 거리를 구경하기로 했다.(사실 이곳은 진시황으로 유명한 진나라의 도읍지였다. '人生不滿白, 常懷千歲憂-삶은 백년을 채우기 힘들건만 언제나 천년의 근심을 품고 사는 것이 인생이련가!' 진시황은 3대도 못 갈 왕국을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하여튼 古都 함양은 한적한 시골의 모습으로 그렇게 우리 앞에 나타났고, 전문적 소양이 없는 우리가 모두 유사한 박물관을 들어가 보아야 외화만 낭비(?)하는 꼴이 될 것 같아서 요금을 흥정하기 전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해 두었었다. -태영) 한적한 시골(?)이라 사람들의 모습도 도시와는 다르게 느긋해 보였다. 박물관 앞에서 깨끗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올해 82세 된 중국 할머니를 보았는데 발이 너무 작다. 세상에, 말로만 듣던 '전족'을 보게 되다니! 우리 발과 비교해 보니 얼마나 작은지 더 확연하다. 신기해서 쳐다보는 우리를 보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는데 그 또한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나란히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꼭 우리 할머니와 같이 사진을 찍은 것 같이 푸근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뒤에 과일이라도 사드시라고 돈을 조금 드렸지만 결국은 받지 않으셨다.-태영)
할머니를 뒤로하고 우리는 한무제의 무릉, 황토민속촌(이곳은 우리나라 분이 1994년부터 운영하시는 곳이다. 우리가 나무 그늘에서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듣고 고국사람이라고 인사를 하셨다. 힘들게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전 가족이 이곳 중국으로 이민을 왔다고 한다. 이 곳 역시 관람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역사적인 유적지도 아니고 황토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에 돈주고 들어간다는 것은 취향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요금의 상당액은 버스 기사와 안내양의 커미션이기 때문이다.-태영), 태자묘(서안은 '사과배'와 '포도'가 맛있다. 과일이 단맛이 강하다. '사과배'는 생긴 모양은 사과인데 맛은 배다. 이 '사과배'를 사러 간 김종남선생님과 최귀선선생님이 중국인 상인과 흥정을 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긴 모양이다.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까, 중국상인은 8개에 5원을 달라고 했는데 우리 일행은 7개에 5원이 아니면 사지 않겠다고 한 모양이다.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고 서로 웃고 왔다고 한다.)는 보지 않기로 했다. 우리의 주목적지는 '건릉'. 도착하니까 13시 10분이다. 오전 내내 보지도 않을 곳을 따라 다닌다고 힘들었던지 버스에 타기만 하면 졸음이다. 점심을 먹고(건릉 입구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곳이라 메뉴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태영) '건릉'으로 향했다. '건릉'은 릉이 아니라 멀리서 보면 산이다. 그 크기가 얼마나 크던지....... 이건 측천무후라는 여걸이 이뤄놓은 거대한 힘의 흔적이다. 내리쬐는 볕을 맞으며 사진을 찌고 서둘러 법문사로 향했다.(능 입구 왼쪽에는 당시 내당했던 사절들의 비석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머리가 하나도 없다. 모두 어딜 갔는지. 또, 글자 한 자 없는 높이 약 3미터 정도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無字碑라니 명실상부한 무자비다. 중국 전역에 이와 같은 문화재가 지천인체 일부러 발굴하지 않고 그냥 놓아두고 있다. 일설에는 관광객 유치용으로 일부러 하나씩 천천히 발굴한다고도 하는데 아주 근거 없는 말은 아닐듯.-태영) 법문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버스는 희뿌옇게 먼지를 일으키면서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닫아 놓고 있는데도 먼지의 매캐함이 코와 목을 괴롭혔다. 게다가 길은 또 얼마나 울퉁불퉁 하던지 사람들이 꼭 냄비 속에 옥수수처럼 저리가라 였다. 더구나 아직도 지난 번 승마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지르는 비명 때문에 주위 사람들까지 놀랄 정도다. 겨우 법문사에 도착했다. 내리기가 무서웠다. 너무 더워서. 다를 서둘러 법문사를 돌아보고 나오는데 갑자기 나타난 '공안'이 절 주위에서 기념품을 파는 아줌마들을 뒤쫓아 잡기 시작했다. 아마 정식 허가 없이 몇 가지씩 가지고 다니면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듯 보이는데, 공안들이 쫓기 시작하자 솔개에 쫓기는 병아리 모양 우르르 흩어져 도망쳤다. 인정사정 없이 쫓아가 잡아채는데 옆에서 보는 우리가 도리어 안Tm러울 지경이었다. 결국 그 중 한 아주머니가 잡혀서 물건을 빼앗기자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 되돌려 달라고 애원하는데 안쓰럽다 못해 처절하다. 산다는 게 뭔지........ (법문사의 불탑 속의 진신사리는 지진으로 인해 기울어진 탑을 수리하는 과정 중에 발견된 것이다. 지하 석실의 크기나 아름다움으로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문화재이니 기회가 닿는다면 꼭 가보는 것이 좋다.-태영)
17시 30분 투어버스는 다시 서안을 향해 출발해서 19시 30분 서안역에 도착했다. 오는 길은 잘 만들어진 고속도로라 편하게 자면서 온다. 하루 종일 투어버스에 시달렸더니 몸이 녹초가 된다. 다들 지쳐서 간단하게 저녁(저녁 값은 1인당 10원, 만두사건 이후 한동안 밥값은 10원)을 먹고 바로 올라가서 쉬기로 했다.(법문사 가는 길 양편에는 끊임없이 펼쳐진 논과 밭인데 그 사이로 농수로가 너무도 잘 정비되어 있었고,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넘실거리며 흘러가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잠시 더위를 잊게 해주었다. 가끔씩 빨래하는 아낙네들과 물 속에 들어가 더위를 식히며 노는 아이들이 보였는데 예외 없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역시 시골 사람이 순박해.-태영)
2000년 7월 31일(월)
거대한 산과 같은 릉
중국여행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기차표 구입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그걸 경험했다. 아침을 먹고 서둘러 대장 선생님께서 먼저 역으로 먼저 가셨다. 8시 30분부터 문을 여는데 7시 30분부터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되어도 창구에 문은 열리지 않고 여기저기 중국 현지인들이 암표를 사기 시작했다. 쳐진 커튼 사이로 돈을 받고 기차표를 주고 한다. 기가 막혔다. 이쪽 창구 저쪽 창구 옮겨다니길 몇 번 더하고 나서 다시 표를 구해줄 수 있다고 하던 철로반점까지 갔었지만 워푸(臥鋪, 침대표)를 구할 수 없어 '特快 硬座(잉쭈오, 딱딱한 좌석)'를 구했다.(그것도 외국인 창구를 통해서 샀는데 침대표도 아닌데 외국인 등록 창구에서 큰 인심 쓰듯 '외국인'이라는 표딱지 하나 주고서는 외국인 창구로 가서 줄을 서란다. 표딱지 값은 1인당 5원, 하루 밥값이다. 외국인을 배려해주기 위한 창구가 언제부턴가 외국인을 봉으로 만들기 위한 창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서양인들은 군말 안하고 표를 내주는 것을 보면 우리는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인종 차별을 경험한 셈이다. 하긴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말을 쓰면서 태연히 중국인인 척 하고 이득을 본 적도 있었으니 피장파장인 셈이긴 했다. 여하튼 서안은 가이드 자격증이 먹혀들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기도 했으니 이래저래 약간의 불쾌를 경험한 셈이다.-태영) 일정을 바꿔 하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기차표 구하기 전쟁을 치르고 나니 10시 30분. 이제 서안의 핵심인 '진시황 병마용'으로 출발했다. 날씨는 어떻게나 덥던지 채 마르지 않은 빨래를 차안에 늘었더니 금새 말라버린다. 양산으로 쓴 우산은 햇볕 때문에 그 색이 바래서 원래의 빛을 알기가 어려울 정도다. 11시 20분, 진시황릉 앞에 도착했다. 안에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보기만 했는데도 그 규모가 엄청나다. '병마용'은 이 능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시황 병마용'에서 20분 정도의 거리에 진시황릉이 있다고 한다. 위대한(?) 한 사람의 괴력을 본 듯하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실제 사람 크기만 토용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표정이 다들 어두워 보이는 것은 도공들이 이 일을 마치면 진시황이 자신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그대로 표현한 때문이라나! 그리고 그 많은 토용들은 하나도 같은 표정이 없다고 한다. 도공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쓰러지고 깨어져 있는 토용들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살아나 일어서서 다가설 듯 했다.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벌일 수 있었는지? 진시황은 '죽음'을 제일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살아 있으면서 숱한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사후에도 자신을 지켜 줄 용병이 필요해서 자신의 능 앞 지하에 '토용'을 만들어 묻었다는 것이다. 훼손된 부분이 꽤 많은 것은 '위'나라가 지하갱도를 파헤쳐 무기를 가져가고 불을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도 잘 발굴해서 문화재적인 가치를 충분히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한 모습이 역력하다.
(진시황 병마용 구경하는 법)
입구에서 제일 왼쪽에서 시작한다. 극장(영사관)에서 진시황 발굴 장면, 진시황의 천하통일 전쟁 장면,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용병의 머리를 발견하는 장면, 위나라가 지하 용갱을 훼손(무기수거)하는 장면 등을 상영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제1호관, 제2호관, 제3호관 순으로 보면 된다.(진시황릉 자체는 아직 발굴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역사적 유물 훼손이 신경 쓰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능을 둘러싸고 부어져 있는 수은 때문이라고 한다. 외국의 발전된 기술이라면 모르겠으나 현재 중국의 기술로는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고 어떤 국보급 유물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인데 함부로 외국 기술을 들여올 수도 없거니와 또 유명한 중국인들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외국인들의 발굴을 허용할 수 없을게다. 역사적인 이유를 들어 이 능이 진시황릉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도 있는데 그 진위가 가려지려면 꽤 시간이 흘러야지 싶다.-태영)
13시 40분, 당 현종과 양귀비가 로맨스로 유명한 '화청지'로 향했다. 진시황 병마용으로부터 차로 약 15분 거리. 찌는 듯한 더위로 길의 아스팔트까지 녹아서 찐득찐득하다. 물을 하나씩 사서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더운 날씨지만 어디를 가나 사람들로 붐빈다. 여러 개의 목욕탕을 구경하면서 누군가가 '처음 오는데도 전혀 낮설지 않고 퍽이나 눈에 익은 걸 보니 아무래도 전생에 내가 이 자리에 있었는가봐'라고 말하니, 금방 옆에서 '맞아, 내가 목욕하고 있을 때 옆에서 수건 들고 있었잖아!'하고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지금도 옛날 양귀비가 목욕물로 썼다는 온천물을 그대로 뽑아 쓰고 있는데 세수하는데 50전씩을 받고 있다. 다들 양귀비처럼 아름다워지려나 하면서 더위도 식힐 겸 세수를 하고 발까지 씻고, 그리고 먹어도 된다고 해서 한 모금씩 먹었다. 개운하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 운전기사와 안내양이 세운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진수성찬이 펼쳐지는 순간 지난번 덕발장 만두사건이 생각나서 다들 기분이 묘해진다. 그래도 배가 고파서 일단은 먹고 보자는 식이다. 밥은 꿀맛이다. 다들 배부르게 먹고 에어컨 바람이 술술 나오는 곳으로 모였다. 웬만큼 더워야지!(어떤 관광 수단을 이용하든 자기의 신분을 이용한 돈벌이를 막을 재간은 없다.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들어가면 일단 기사들은 다만 일이십원이라도 받고 경우에 따라서는 식사도 무료로 제공받는다. 욕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 고속버스 운전기사들이 휴게소에서 하던 짓거리를 생각해보면 그들만 나무랄 것은 아니다. 따라서 흥정을 할 때는 그런 점에 관해서 미리 물어두는 것이 좋고, 또 어떤 경우에도 돈을 전액 미리 주는 것은 금물이다. 필요하다면 끝까지 약속사항을 들어 따질 것은 따지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며, 양질의 써비스를 받았을 경우에는 확실히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다음에 그들과 조우하게 될지도 모르는 다른 한국인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로, 만만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분명히 보답을 받는다는 인식을 그들에게 줄 필요가 있다. 물론 개인으로 갔을 경우에는 일반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이런 걱정이 없다. 찾기는 쉽지 않겠지만.-태영)
'화청지'를 보고 난 뒤 대안탑까지 도착했다. 우리가 하루 차를 이용하기로 한 곳이 여기 까지란다.(아마도 너무 깐깐하게 따지고 쇼핑센터를 가도 별로 이용도 안 했더니 삐졌던가 보았다. 돈을 더 주겠다는 의사를 비쳤음에도 화를 내며 내리라고 했다. 逆鱗(역린)을 건드렸던 모양이군.-태영) 그래서 차는 보내고 대안탑을 구경하고 나서는 버스로 서안 번화가까지 이동했다. 번화가까지 도착해서는 맥주팀과 KFC팀으로 나눴다. 물론 남자들은 맥주, 여자들은 KFC다. 헌데 중국 KFC에는 메뉴판이 모두 중국어로만 되어 있다. 몰론 영어를 할 줄 아는 종업원들은 극소수. 주문을 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데, 최귀선 선생님만 멋지게 주문을 하네. 아이고 부러워라. 역시 고참은 뭐가 달라도 달라.(다 짬밥이 말해주는 것 아니겠어! -태영) 여행경험의 차이가 이런 데서 나나보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시원하게 맥주도 한 잔.
배도 부르고 이제는 마지막으로 '고문화거리'를 볼 때다. 아직까지 가장 중국다운 곳을 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제서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역시, 여행을 시작한 이래 가장 중국냄새가 많이 나는 거리였다. 골동품과 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철시하고 몇몇 큰 상점만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좀더 일찍 올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20시 40분 숙소인 철로반점에 도착해서 저녁 먹고 맡겨 놓은 짐을 챙겨서 철로반점에서 역으로 바로 통하는 출구로 역에 들어갔다.(역시 철로대반점을 이용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특혜 중의 하나. 숙소 뒷문이 홈과 직통하도록 되어 있어 복잡하고 무더운 거리를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손해 본 것이 있으면 이익 보는 것도 있게 마련! 22시 19분, 드디어 성도를 향하여 출발했다. '특쾌 경좌'. 기차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미어터진다. 다행히 우리 자리를 찾아 앉는데 성공했다. 중국여행을 하면서 한 번씩 곤란을 느끼는 것이 자기 자리도 아니면서 끝가지 일어나지 않는 중국사람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저기 서서 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어떻게 그 긴 시간을 힘들게 가나 싶다. 특히 할아버지가 손자와 손녀를 데리고 여행을 하는 모양인데 자리가 없어 보인다. 아이들은 짜증을 내고 할아버지는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 나중에 보니까 의자 밑에 신문지를 펴고 어린 손자를 그곳에 들어가 자도록 한다. 앉아서 보고 있으려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이런 경우 절대로 미안해 할 필요가 없으며 미안해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경우 당당하게 비켜줄 것을 요구해야 한다. 뭐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서서 갈 생각이 있다면 별문제지만.-태영)
기차가 한참을 달린 뒤, 우리는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에어컨이 너무 잘 되는 기차라 밤이 되니까 이 추위가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다들 옷을 꺼내 입고 겨우 앉아서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여분의 긴 옷을 준비하지 못하신 김종남 선생님이 추위를 견디다 못하고 배낭을 뒤져서 우의를 꺼내 입으셨다. 그것도 모자까지 쓰고서. 우리가 쳐다봐도 우스운데, 지나가던 중국 기차 승무원이 가던 길을 되돌아오더니 김종남선생님 쪽으로 쳐다보면서 아주 정중히 합장을 하면서 절을 하는 게 아닌가. 순간 우리는 무슨 일인가 하고 멍하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발을 하고 말았다. 아마 그 모습이 꼭 부처님 같았나 보다.(하긴 내가 봐도 황색 가사를 걸친 그 모습이 미상불 중국 스님과 비슷하긴 했다. 게다가 모자를 쓰고 있어 긴 머리도 보이질 않았으니 말이다. -태영)
앉아서 가는 것은 절대로 장난이 아니다. 밤새도록 새우잠을 자느라 허리가 다 끊어지는 것 같다.
2000년 8월 1일(화)
여행은 모험이다
모두를 잠을 설치는 바람에 일찍 눈이 떴다. 기차는 아직도 열심히 달리고 있다. 창 밖으로 바라보는 기차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다. 모두 19량 정도가 달려있는 모양이다. 강을 따라 달리는 모습이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다들 넋을 잃고 그 광경만 창 밖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시장기를 이길 만한 것은 세상에 없는 모양이다. 배낭에서 미리 준비해둔 컵라면(라면과 스프만 랩으로 싸서 준비함)과 햇반을 챙겨서 아침을 먹을 준비를 했다. 중국여행을 도와주는 한 가지는 바로 뜨거운 물을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제 어디서나 차를 마셔야 하는 그들의 문화 때문에도 그렇고 지하수나 수돗물을 마음놓고 마실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하여튼 생수는 사서 마셔야 하지만 뜨거운 물은 말만 잘하면 공짜로 주는 나라가 중국이다. 이는 기차 여행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5량 정도에 한 곳씩 물 끓이는 설비가 준비되어 있고,(신형 기차는 전기 급탕기가 24시간 가동되고 있으나 대개는 석탄을 사용한다.-태영) 객실 내에는 각 좌석마다 보온물병이 놓여 있다. 그러니 컵라면 이용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느긋하게 먹고 커피도 한 잔 하면서 있는데 다음 도착할 '광운'에서도 '구채구'로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누군가가 했다. 여기서 가면 '성도'에서 다시 올라오는 시간만큼 벌 수 있다는 것이다. 다들 잔뜩 긴장한 채 그 말에 대해 생각한다. 가이드북에도 잘 나와 있지 않은 얘기라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다. 하지만 결정을 해야 하기에 일단 기차가 서면 차장에게 물어 보기로 하고 배낭을 서둘러 챙긴다. 불과 5분만에 이루어진 결정이다. 다들 빠른 손놀림으로 배낭으로 꾸려 차장에게 확인하러 간 윤태영선생님의 말만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원 세상에, 여자분들이 먼저 모험 결정! 남자들이라고 별수 있나? 따라가는 수밖에. 결국 기차가 역에 정차하고 있는 그 오분동안 문의하고, 의사타진하고, 그리고는 잽싸게 짐을 챙겨서 내렸다. 일사불란!
역을 빠져 나오자 당장에 삐끼들이 우리 뒤를 따라 붙어서 긴 행렬이 만들어졌다. 뭐라고 하는지 계속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얘기를 한다. 그래서 윤태영, 김종남, 윤인용 선생님 세 분이서 '구채구'행 차를 알아보기로 했다. 불행히도 전세 차량은 가격이 너무 세다. 시간은 흐르고 문제는 갈수록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