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식설
유식학(唯識學)을 구성하는 주요 사항 가운데 아뢰야식(阿瀨耶識)이 있습니다. 실로 유식학은 이 아뢰야식을 구심점으로 하여 집약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이 아뢰야라는 말이 불교에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일부에서는 대승불교에 들어와서 창안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사용된 말입니다. 곧 부처님이 법을 설하던 근본불교시대에 이미 이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 의미가 대승의 유식파에서 사용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지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어쨌든 아뢰야라는 말이 부처님 후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윤회하는 주체가 식(識)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부파불교(部派佛敎)와 유식파에서 특히 강한데, 이와 같은 모습도 역시 근본불교의 경전에 간결하게나마 설해져 있습니다.
그 밖에도 유식학에서는 인식의 주체인 심(心)·의(義)·식(識)을 각각 제8식, 제7식, 제6식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그 심의식이라는 말은 이미 부파불교에서 논의되었고, 그보다 앞서 근본불교에서도 설해진 것입니다. 근본불교의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에 이러한 말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유식파가 말하듯이, 그 심의식이 세 가지로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의미를 여러 가지로 부여하여 설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와같이 원시경전에는 아뢰야식 및 심의식 등 후대의 대승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개념들이 원초적인 모습으로 설해져 있습니다. 이하에서 이러한 몇 가지 주요 사항에 대하여 원시경 전의 설명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때에 세존은 조용히 앉아 묵묵한 채로 사념하였다. 내가 증득한 이 법은 매우 깊어서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적정하고 미묘하여 생각의 경계를 초월하고 지극히 미세하여 지혜로운 사람만이 능히 알 바이다. 그런데 이 중생은 아뢰야를 즐거워하고 아뢰야를 기뻐하고 아뢰야 를 좋아하는 중생으로서는 이 연의성(緣依性), 연기(緣起)인 도리는 보기 어려우며, 또 일체 제 행(諸行)의 고요히 그침, 일체 의거(依據)의 내버림, 갈애(渴愛)의 모든 소멸, 떠남(離)·소멸(滅)의 도리도 심히 보기 어렵다. 만약 내가 법을 설하여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 한다면 나는 피로하고 곤궁할 뿐이다.
[律藏3 南傳大藏經 제3권 p.8 相應部經典 1권 p.234]
부처님께서 우루빈나 마을 니련선나(尼蓮禪那) 강변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7일간 해탈의 기쁨을 누리시면서 초저녁에 연기(緣起)를 순역(順逆)으로 살펴보셨습니다. 그리고 칠일이 네 번 지난 후 자신이 깨친 법을 일체 중생에게 전하려고 생각하니 위에 인용한 말씀과 같이 중생들이 아뢰야에 장애되어 이 연기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아뢰야는 범어로 alaya로서 a는 '없다, 아니다'의 부정사(不定詞)이고, laya는 '없어진다'는 뜻이므로 아뢰야는 영원히 존재하며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역으로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인 '무몰(蕪沒)'이라고도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아뢰야가 alaya의 음을 표기한 경우에는 저장한다는 뜻인 장(藏)이라고 번역하는데, 오늘날은 대개 이 후자를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현재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 전생에도 있었고 미래 내생에도 있을 이 아뢰야는,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으로서 중생의 근본 생명입니다. 여기에 의지해서 중생세계가 벌어지는데, 이것을 근본무명이라고도 합니다. 이 근본무명이 아주 뿌리 뽑아져야만 연기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지로 연기법을 알아서 부처님 같은 정각을 이룰려면 반드시 근본 장애물인 이 아뢰야를 뿌리 뽑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 원시경전에 나오는 아뢰야라는 말은, 후대 대승불교의 유식파에서 주장하는 아뢰야식과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이 경전의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중생들이 이에 집착하여 단절하기 어렵고, 진리를 장애하여 무명의 원인을 이루는 점에서, 원초적인 형태로 아뢰야식의 연원을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어느 때 세존은 사위성에 계셨다.
"비구여, 다섯가지의 종자가 있느니라. 무엇을 다섯이라 하는가. 뿌리 종자, 줄기 종자, 가지 종자, 마디 종자, 종자(種子)의 종자이니라. 비구여, 이 다섯 가지 종자로서 썩지 않고 부패하지 않고 바람과 열에 침해받지 않고 견고한 핵(核)이 있어 잘 저장되어져도 만약 땅이 없고 물이 없다면, 비구여, 이 다섯 가지 종자는 생장하고 증광하겠느냐."
"대덕이시여, 못합니다."
"비구여, 이 다섯 가지의 종자로서 썩고 부패하고 바람과 열에 침해받아 견고한 핵이 없고 잘 저장되지 않아도 만약 땅이 있고 물이 있다면, 비구여, 이 다섯 가지 종자는 생장하고 증광하겠느냐."
" 대덕이시여, 못합니다."
"비구여, 이 다섯 가지의 종자로서 썩지 않고 내지 잘 저장되어 만약 땅이 있고 물이 있다면, 모든 비구여, 이 다섯가지 종자는 생장하고 증광하겠느냐."
"대덕이시여, 그럴 것입니다."
"비구여, 지계(地界)란 네 가지 식이 머물러 있음에 비유하여 볼 것이다. 비구여, 수계(水界)란 기쁨과 탐욕에 비유하여 볼 것이다. 비구여, 다섯 가지의 종자란 식(識)과 식(食)의 비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구여, 색(色)에 붙어 식(識)이 머문다면, 색을 소연(所緣)으로 하여 색에 머무르고 기쁨()에 가까이 의지하여 머물러 생장하고 증광할 것이다.
비구여, 수(受)에 붙어…행(行)에 붙어 식(識)이 머문다면, 행(行)을 소연(所緣)으로 하여 행에 머무르고 기쁨에 가까이 의지하여 머물러 생장하고 증광할 것이다. 비구여, (누군가) 말하되 '나는 색을 떠나고 수를 떠나고 상을 떠나고 행을 떠나서 식(識)의 내왕(來往), 사생(死生), 장익(長益), 광대(廣大)를 시설 할 것이다'라고 함은 옳지 않다.
비구여, 비구가 만약 색계(色界)에서 탐욕을 끊는다면 탐욕을 끊는 까닭에 분단이 있고, 식 (識)의 소연과 의지가 있지 않느니라.
비구여, 비구가 만약 수계(水界)에서, 상계(想界)에서, 행계(行界), 식계(識界)에서 탐욕을 끊는다면 탐욕을 끊는 까닭에 분단이 있고, 식(識)에 의지하지 않고 더 자라지 않고 현행(現行)이 없어서 해탈하고, 해탈한 까닭에 머물며, 머무는 까닭에 족한 줄 알며, 족한 줄 아는 까닭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반열반(槃涅槃)하여, 생(生)이 이미 다하고 범행(梵行)이 이미 서고 짓는 바를 이미 다해 마치니 다시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南傳大藏經 제14권 相應部經典3 p.85-87]
'다섯 가지 종자'란 식물종자를 자세하게 분류하여 다섯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종자가 어떤 조건을 갖추어 생장하거나 생장하지 못함을 설명한 것은, 중생이 자발적인 노력과 수행의 여하에 따라 해탈하거나 삶과 죽음을 얽매임을 비유합니다.
만약 땅이 있고 물이 있으면 다섯 가지의 종자가 생장하고 증광하는 것과 같이, 중생에게도 식(識)이 있어서 거기에 탐욕, 애착이라는 물을 주게 되면 그 종자 즉 식은 생장하고 증광하여 해탈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계(地界)'는 네 가지 식 즉 색(色)·수(受)·상(想)·행(行)의 사온(四蘊)을 말하며, '수계(水界)'는 기쁨과 탐욕, 즉 애착심·집착심을 말합니다. '네 가지 식이 머문다' 함은 생사(生死)의 업(業)을 짓는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식(識)이란 주관인 주체를 말하며, 식(食)이란 주관인 주체를 말하며, 식(食)이란 반연되는 객관을 말하는데, 남전정장경의 원주(原註)에는 식(食)을 연(緣)이라 하였으니 객관인 소연(所緣)입니다.
다섯 가지 종자를 식(識)과 식(食)으로 비유한다 함은 종자를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색(色)'이란 현상세계의 물질을 말하는데, 이 색을 객관 즉 소연으로 하여 식(識)이 거기에 머물러버리면 애착심이 생겨 생장하고 증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생멸의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수(受)·상(想)·행(行)도 같은 뜻으로 말합니다.
색(色)·수(受)·상(想)·행(行)을 반연하여 식(識)이 생멸하거나 오고 간다는 뜻입니다. 만약 색계(色界)에서 탐욕으로 끊으면 식(識)의 소연(所緣)과 의지(依支) 즉 식이 반연하는 상대가 없어져버립니다.
식(識)에서 모든 집착이 없어져서 증광하고 현행하지 않으면 자연히 해탈한다는 것입니다. 해탈한 까닭에 스스로 반열반에 들어갑니다. 반열반이란 근본무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무여열반(無餘涅槃)이지 유여열반(有餘涅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반(涅槃)이란 삶을 마감하는 죽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번뇌에서 해탈하여 대자재(大自在)를 얻음을 말합니다. 중생은 식(識)에 얽매여 모든 것이 부자유하여 생사윤회를 하고 있으며, 식의 탐욕과 속박을 근본적을 끊어버리면 대자재한 반열반의 해탈경계에 들어갑니다. 반열반하면 생(生)이 다하고 범행(梵行)이 서서 다시는 후유(後有), 즉 삼계(三界)에 윤회하지 아니합니다.
결국 중생이 삼계에 윤회하고 연기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근본무명인 식(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원시 경전에는 생사에 윤회하거나 삼계를 해탈하는 주체를 바로 식(識)이라고 하였는바, 후대에 생사 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이나 이숙식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어떠한 것을 사랑하고 도모하고 생각하여도 이는 식(識)이 정한 소연(所緣)이니라 소연인 까닭에 식의 머무름이 있느니라. 식의 머무름이 증장할 때 미래에 재유(再有)가 생 하기에 이르고, 미래에 재유(再有)가 생할 때 미래에 늙고 죽음·근심·슬픔·괴로움·걱정·번뇌가 생기느니라.
……
비구들이여, 만약 사랑하지 않고 도모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식이 정한 소연이 되지 않으며 소연이 없는 까닭에 식의 머무름이 없느니라. 식(識)의 머무름이 없고 증장하지 않을 때에는 미래에 재유(再有)가 생하지 않느니라. 미래에 재유가 생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태어남·늙고 죽음·근심·슬픔·괴로움·걱정·번뇌가 멸하느니라. 이와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소멸이니라. [南傳大藏經 제13권 相應部經典 2권 p.96-97]
식의 소연인 사랑과 분별이 있는 까닭에 식의 머무름이 있게되고, 식의 머무름이 증장할 때는 이에 따라서 생사에 윤회한다는 것이며, 사랑분별이 완전히 끊어져버리면 영원토록 생사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사윤회와 해탈을 일신의 주체인 식으로써 해명하는 원초적인 모습을 간결하고 소박하게 설한 점이 확인됩니다.
어느 때 세존은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 머물러 계셨다.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 들은 이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몸에서 싫어하는 뜻을 내고 싫어하여 떠나고 해탈하려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 심(心) 혹은 의(意) 혹은 식(識)이라고 부르는 것에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싫어하는 뜻을 내지 못하고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며 해탈하지 못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긴 밤에 이것은 내것[我所]이라는 집착이 있어서, 이는 내것이고, 이는 나[我]이며, 이는 나의 자아(自我)라고 취착(取着)하느니라.
그러므로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싫어하는 뜻을 내지 못하고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며 해탈하지 못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이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몸을 나[我]라고 생각함이, 심(心)을 나[我]라고 생각하기보다도 더하다.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사대로 만들어 진 몸은 나타나서 1년을 머물고 2년을 머물고 3년을 머물고 4년을 머물고 5년을 머물고 10년을 머물고 20년을 머물고 30년을 머물고 40년을 머물고 50년을 머물고 백년을 머물고 다시 오래 머물 수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렇지만 이 심(心) 혹은 의(意) 혹은 식(識)이라고 불리는 것은 낮과 밤에 전변(轉變)하여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없어지느니라. 비구들이여, 비유하면 원숭이가 수풀 속을 배회하면서 한가지를 잡았다가 그것을 버리고 다른 한 가지를 잡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같이 이 심(心) 혹은 의(意) 혹은 식(識)이라고 불리는 것도 또한 낮과 밤에 전변하여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없어지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렇지만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연기(緣起)를 잘 사유하느니라.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으며 저것이 생함으로 이것이 생하며,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없으며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하느니라.
곧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으며 행에 의하여 식이 있고…….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集] 이니라. 무명의 남음이 없고, 탐욕을 떠나고 소멸에 의해서 행의 멸이 있으며, 행의 멸에 의해서 식의 멸이 있고……. 이와 같은 것은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滅) 이니라.
비구들이여,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색(色)에서 싫어하는 뜻을 내고 수(受)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고 상(想)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고 행(行)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고 식(識)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느니라. 싫어하는 뜻을 내는 까닭에 싫어하여 떠나느니라. 탐욕을 떠나는 까닭에 해탈하느니라. [南傳大藏經 제13권 相應部經典二]
중생은 속박된 생활을 하고 있어 해탈 대자재한 생활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중생은 긴 밤에 나[我]와 나의 것[我所] 이라는 집착이 강하여 일체법과 일체 사물에 있어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라고 집착하고 매달립니다. 이렇게 집착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므로 번뇌에서 떠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긴 밤[長夜]' 이란 캄캄한 기나긴 밤중이라는 뜻인데 해가 지고 캄캄한 그때만 밤이 아닙니다. 자기의 진여자성을 보지 못할 때는 누구에게나 억천만겁이 다 캄캄한 밤중입니다. 중생이 실제로 무명의 근본을 뿌리째 뽑아 없애버리고 참으로 진여자성을 보아서 청천백일 같은 정각을 이루기 전에는 언제든지 캄캄한 밤중입니다.
이와같이 일체 사물에 집착이 강한 중생은 심, 또는 의, 또는 식이라고 불리는 정신적인 면보다,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로 구성된 이 육신을 보다 더 강하게 자기 자신[自我]의 당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수시로 변하여 이리 분별 저리 분별하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요동칩니다.
그것은 마치 수풀 속에서 원숭이가 이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다시 저 나뭇가지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비하여 육신은 태어나서 1년, 2년 혹은 10년, 20년, 또는 백년, 때로는 그보다 더 오래 존속하여, 정신적인 것보다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마음보다도 몸을 더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운 거룩한 제자들은 연기의 진리를 깊이 배우고 사유하여 무명을 깨뜨리고 모든 괴로움을 걷어버립니다. 그리하여 육신을 이루는 요소인 색(色)과 정신적인 면을 이루는 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에 집착하지 않고 싫어하는 뜻을 내어 그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집착과 탐욕을 떠나기 때문에 마침내 해탈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역설하는 바는, 중생이 탐욕을 끊지 못하여 해탈하지 못하는 보다 중요한 원인은 육신보다도 심의식(心意識)에 더 미혹하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사대로 구성된 육신에 대해서는 더러 혐오하여 떠나려고 하고 해탈하려고 하지만, 정신적인 심의식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심의식은 수풀 속에서 원숭이가 이리저리 옮겨다니듯이 아침에 변하고 저녁에 바뀌어 잠시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이 경전과 상응하는 한역 아함경에서 다시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심·의·식에서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는 싫증을 내여 떠나거나 해탈하고자 하지 못한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는 차라리 사대로 된 몸은 나와 나의 것으로서 얽매일지언정 식에는 나와 나의 것으로서 얽매이지 않느니라.
심·의·식은 밤낮으로 때를 다투어 잠깐 사이에 변하여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멸하는 것이, 마치 원숭이가 수풀 속에서 놀면서 잠깐 사이에 여러 곳에서 나뭇가지를 잡아 한 가지를 놓고 한 가지를 잡는 것과 같느니라.
그 심·의·식도 또한 이와같이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멸하느니라. 많이 들은 거룩한 제자는 연기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관찰하느니라.
而於心意識에 愚疾無聞凡夫는 不能生壓離欲解脫하니라 愚癡無聞凡夫는 寧於四大身에 擊我我所이라도 不可於識에 擊我我所니라 .....心意識은 日夜時就하여 須臾轉變하여 異生異滅하느니라 猶如 (선후)가 遊林樹間할새 須臾에 處處攀捉枝條하여 放一取一하니라 彼心意識도 亦復如是하여 異生異滅하느니라 多聞聖弟子는 於諸緣起에 善思惟觀察하느니라. [雜阿含經 제12권 ; 大正藏 제2권 p.81하]
어리석고 무지하여 불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중생들은 심·의·식을 떠나서 해탈하고자 아니하지만, 불법을 바로 아는 거룩한 제자는 연기를 잘 사유하고 관찰하여 정등각을 이루고 반열반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설명에서 밝혀지듯이 심의식(心意識)이라는 말은 오늘날 주로 유식학적으로 사용하지만, 본래는 이와같이 근본불교에서부터 설해진 것입니다. 근본불교에서는 중생의 정신적인 면을 심 또는 의 또는 식이라고 하여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였지만, 유식학에서는 심(心)을 제8식, 의(義)를 제7식, 식(識)을 제6식이라고 규정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된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