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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봉스님이 풀어 쓴 불교설화
동봉스님
머리말
이 지구상에서 가장 지고지순한 경전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민간에 살아 숨쉬는 설화일 것이다. 설화는 지고 지순할 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원한 경전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설화, 그것은 살아 숨쉬는 경전이다."
설화가 설화로서 정착하기까지에는 숱한 역사를 거쳤을 것이고,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숱한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강한 감동을 남겨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설화가 비록 짧고 허황한 듯해도 그 속에는 참으로 엄청난 힘을 지닌 메시지가 있게 마련이다.
지난 한 해 동안 목동의 법안정사 일요법회를 맡아 하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불교를 쉽게 이해시켜 주길 부탁받았다. 그만큼 내 설법은 딱딱했던 모양이다. 본디 둔재인 데다가 말주변까지 없는 사람이고 보면 그러한 부탁이 들어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여튼 나는 '아함경'을 교재로 하여 일요법회를 하면서도 그 사이사이에 옛사람들이 남긴 일화들을 삽입시키곤 했다. 그 가운데는 부처님과 제자들이 남긴 일화도 있었고, 중국의 선사들이 전법한 인연들도 있었으며, 우리나라 옛 큰스님들이나 불자들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러한 얘기들 가운데는 역사에 분명히 기록된 것도 있지만 그냥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도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불교경전의 성립이나 중국에서 이루어진 방대한 선사들의 어록들도 그 바탕은 대부분이 설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설화 가운데 어떤 것은 사실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것은 허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실적 설화보다는 허국적 설화가 더욱 진한 감동을 일으키며, 또한 그것이 보다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설화를 채록하고 수집하면서 '설화야말로 가장 훌륭한 경전'이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 왔다. 설화에는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모두가 문학성과 재미와 교훈을 함께 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설사 그것이 종교적이든 아니든 간에.
그 가운데서 나는 물론 불교의 설화만을 택했다. 그것은 내가 불승이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다. 또한 인도나 중국의 것은 잠시 미루어 두고 우선 우리나라의 불교설화만을 묶어 보았다.
불교설화, 그것도 우리나라 불교설화가 모두 채록된다면, 그것은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분량이 될 것이다. 불교설화에는 창건설화, 즉 사찰의 창건설화가 주류를 이루지만 신앙을 바탕으로 한 설화도 그에 못지않다. 또는 환생설화가 있는가 하면 깨침을 바탕으로 한 설화도 있다. 나는 이러한 설화들을 주제별로 묶기를 거부했다.
창건설화만을 모아놓는다든가 환생설화만을 따로 모아놓으면 그게 그 얘기 같아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나는 연대별로 묶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을 보면 어떤 질서가 배제되어 있다. 독자들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어떤 획일된 질서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임을 솔직히 말씀드리고 싶다.
들쭉날쭉한 것이 좋다. 큰나무와 작은 나무들이 함께 자라는 숲이 좋다. 고래와 새우가 함께 사는 바다, 높은 산과 야트막한 산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게 좋다. 그래서 설화도 섞어서 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이 수고해 주셨다. 그분들에게 진정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이러한 설화들이 채록되기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온 수많은 분들에게 감사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네의 삶도 먼 훗날 우리 후손들에게 아름답고 멋진 설화로 남기를 기대하면서.
1993년12월12일
서울 원각사에서 동봉 합장
첫째 마당
수덕사 바위 틈에 피어난 버선꽃
도갑사 창건과 며느리서까래
아롱 아씨의 소원
향기 어린 샘물
원효스님과 내원사 창건 연기
오세암에 얽힌 이야기
첫째 마당
수덕사 바위 틈에 피어난 버선꽃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이 덕숭산에 자리한 수덕사는 경허, 만공스님이 한때 주석을 했고, 견성암은 일엽스님이라는 여승이 아름다운 문필을 휘둘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엽스님은 인연으로 하여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대중가요가 나와 유행하자 수덕사은 여승들의 가람으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본디 이 절은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대사가 창건한 절로, 대웅전은 백제 무왕 1년(600)에 건축한 치밀하고도 정묘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은 현재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웅전 벽화는 고구려 영양왕11년(백제 무왕1년)에 담징이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절의 창건설화는 너무나도 슬픈 얘기를 담아 오늘에 전한다.
예산 읍내에 수덕이라는 도령이 있었다. 훌륭한 가문에다 문무를 고루 갖추었기에 그의 이름은 널리 퍼져 나갔다. 인근 지역에서는 물론 다른 지방에서조차 수덕 도령을 신랑감, 사윗감으로 점찍고 있었다. 하지만 수덕은 학문을 계속해야 한다며 혼인을 미루었다.
하루는 수덕 도령이 시종들을 데리고 덕숭산으로 사냥을 갔다.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밋밋하고 별로 볼품없어 보이는 산이 실제 산속으로 들어와 보니 그게 아니었다. 급한 여울과 완만한 계곡이 조화를 이루었고, 험한 산 바위 절벽과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곳곳마다 수억만 년을 지나오면서 역사의 아픔들을 간직한양 설해목들은 벌렁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금방이라도 원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음습함도 있었고 마냥 드러누워 뒹굴고 싶은 풀밭들도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수덕 도령이 시종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참 명산 중의 명산이로구나.'
바로 그때였다. 수덕 도령의 말소리에 놀랐는지 나무 밑에서 뭔가 후다닥 뛰어 나가는 게 있었다. 노루였다. 노루는 한참 엉덩이를 자랑하면서 뛰어가더니 활 한 바탕 되는 거리에 멈추어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이미 수덕 도령은 화살을 등 뒤에서 뽑아 활시위에 걸어 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노루 앞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수덕 도령은 눈을 씻고 보았지만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시종들은 어찌하여 화살을 쏘지 않느냐고 채근을 했다. 수덕 도령이 말했다.
"저기 저 노루 앞에 여인이 보이지 않느냐? 내 눈에는 분명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이 노루는 간 곳이 없고 여인만이 남아 있었다. 수덕 도령은 활을 거두었다. 곁에 있던 할아범이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도련님, 어찌하여 활을 거두십니까? 시위만 놓으면 노루를 잡을 수 있었는데."
수렁 도령이 말했다.
"이 산골짜기에 저토록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을까? 참 희한한 일도 다 있구나. 어찌하여 이 산중에 들어왔지?"
그제서야 할아범과 모든 시종들은 수덕 도령이 가리키는 방향에 처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미인도 미인이려니와 인가도 없는 첩첩 산중에 어찌하여 여인이 홀로 있느냐는 거였다. 그중에 누군가 말했다.
"혹시 여우가 둔갑한 것 아닐까요? 여우가 천년을 묵으면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다고 하던데. 그것도 대개 여자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다른 시종이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여우 같고 남자는 늑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련님 화살을 한 번 쏘시지요. 둔갑한 여우는 죽으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하니까요."
수덕 도령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시종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정말 시종들 말대로 여우가 둔갑한 것 아닐까?>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만약에 너희들 말대로 화살을 쏘아 놓고 그것이 실제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시종들은 그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추측이 실제로 나타날 경우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에 하나 추측이 빗나가 진짜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은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수덕 도령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
시종들은 모처럼의 흥분과 호기심으로 더 사냥을 하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수덕 도령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뛰는 가슴을 억제할 길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여인들이 구혼을 했고 만나자고 했지만 학문을 계속한다는 마음으로 모두 거절해 왔다. 그리고 아직까지 한 번도 마음을 빼앗은 여인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산중에서 만난 여인은 말 한마디 건네 보지 않았지만, 야릇하게도 수덕 도령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었다.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혹시 천생연분은 아닐까?"
천생연분을 왜 하필이면 그 첩첩 산중에서 만나겠는가. 그는 자신의 신분이 조금은 야속했다. 평민이라면 누구하고나 관계없이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하는 것이 허물이 되지 않았다. 평민들 세계에서는 자유연애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자신은 양반집 자제였다. 양반 가문에서는 부모가 정해 준 인연 외에는 설사 부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남들 앞에서 내놓고 사랑하는 감정을 보일 수 없었다.
수덕 도령은 후회했다. 양반의 자제라 하더라도 만나서 얘기나 해 볼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산을 등지고 내려온 지도 오래 되었고 집에 이르니 낮이 차지했던 공간을 밤에게 내주고 있었다.
낮과 밤은 서로 교대해 가며 자연스럽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지만, 수덕 도령의 마음속에 한 번 깊이 박힌 그 산중 미인은 교대할 줄 몰랐다.
책을 펼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여인의 모습일 뿐, 글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답답한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리움의 열뇌를 가득 안고 뒹굴었다.
수덕 도령은 할아범을 시켜 그 여인의 행방과 거처를 알아보도록 했다. 양반집 자제의 체통보다는 사랑의 열병이 더욱 무서웠던 것이다.
할아범은 여러 날 만에 그 여인이 누구이며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아냈다. 수덕 도령은 할아범이 도착하자마자 급한 대로 여인에 대해 물었다.
"할아범이 수고한 인사는 차차 하기로 하고, 그래 그 여인이 누구며 어디 산다고 하던가?"
"네, 도련님. 그 여인은 바로 건너 마을에 사는데 부모를 일찍 여의고 홀로 지내고 있다 합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녀는 예의범절이 뛰어나고 문장에 능할 뿐 아니라, 미모와 덕을 겸비하여 이웃 마을까지 혼담이 줄을 잇고 있다 하옵니다."
"그래서?"
"하지만 여인은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그래, 이름이 뭐라 하던가?"
"덕숭 낭자라고 합니다. 금년 나이 열여덟이라 하고요."
할아범의 얘기를 듣고 난 수덕 도령은 우선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무엇보다도 혼담이 줄을 잇지만 거절을 한다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아무리 좋은 구슬이라도 꿰어야 보배 아닌가.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고 모든 것을 갖춘 제일의 신부감이라 하더라고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된다.
수덕 도령은 책 읽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훈장의 눈을 피하고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덕숭 낭자의 집 주의를 서성거리곤 했다.
며칠째 문 한 번 두드려 보지 못하고 서성대던 수덕 도령은 용기를 냈다. 남자 대장부로서 애간장만 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은 떨렸고 안정이 되질 않았다.
"실례지만 안에 계시오니까?"
안에서 가냘픈 여인의 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살그머니 새어 나왔다. 분명 덕숭 낭자의 목소리였다.
"뉘신지요? 이 야심한 밤에!"
수덕 도령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주저 주저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안으로부터 소리가 있었다. 문은 열리지 않은 채였다.
"이 야심한 밤에 뉘신지요?"
'야심한 밤'이라는 말이 이상하게도 수덕도령에게는 비수처럼 날카롭게 날아와 꽂혔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저.....저, 소생은 이웃 마을에 사는 수덕이라 합니다. 야심한 밤에 실례인 줄 압니다만, 저.....꼭 만나 뵙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문이 비스듬히 열리면서 덕숭 낭자가 외씨 같은 버선발을 살짝 드러냈다. 수덕 도령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짓누르고 서 있었다. 마침 초가을 달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와 두 사람의 행동을 엿보고 있었다. 덕숭 낭자가 말했다.
"소녀는 혼자 사는 사람입니다. 하여 도령을 맞이할 수 없음을 용서하소서."
수덕 도령은 생각보다 마음이 급했다.
"낭자, 낭자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저의 구혼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초면에 구혼이라! 너무 빠르다고 생가지 않으십니까? 더욱이 지체 높으신 도련님께서 이 미천한 소녀를 선택하심에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으시고요."
수덕 도령은 아차 싶었으나 이왕 엎지른 물이 되어 버렸다. 성급한 말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않혀 여유를 갖고 생각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튀어나온 말을 달랐다.
"만약 낭자께서 저의 구혼을 거절하신다면 나는 죽음으로써 내 뜻을 표할 것이오다."
"소녀, 도련님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아직 나이가 어리옵니다. 또한 도련님과 신분도 어울리지 않고요. 그러니 좀더 여유를 주시면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낭자, 덕숭 낭자. 나는 그대를 한 번 본 뒤로는 손에서 책을 놓아 버렸습니다. 벌써 두 달이나 됩니다."
덕숭 낭자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나를 보셨다고요?"
"전에 사냥하러 산에 갔다가 거기서 처음으로 낭자를 보았습니다."
수덕 도령은 그날의 상황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모든 전개과정을 낱낱이 얘기했다. 덕숭 낭자도 다소곳이 들었다. 덕숭 낭자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만 들어 주신다면 소녀는 도련님과 혼인을 약속하겠습니다."
수덕 도령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 조건이 무엇인지요?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내 그대를 나의 아내로 맞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하오리다."
"저의 부모님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영혼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위해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주셨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집 근처라면 어디쯤이 좋겠습니까?"
"처음에 저를 보셨다는 그곳에 지으심이 적당할 줄 아옵니다만??."
이렇게 해서 절을 짓는 일이 시작되었다. 집안의 어른들도 반대했고 부모님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동네에서는 수군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덕 도령은 개의치 않았다.
예산 읍내는 물론 인근지역에도 수덕 도령의 집안은 갑부로 알려져 있었고 지체도 높았다. 수덕 도령은 많은 사람들을 사서 기둥을 다듬고 서까래와 대들보를 준비하였다. 기와를 굽고 주춧돌을 갖추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절이 완공되었다. 참으로 빨리 지은 것이었다.
절이 완공되자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덕숭 낭자, 절이 완공되었습니다. 단청까지 막 끝내고 오는 길입니다. 한 번 같이 가서 보시지요."
덕숭 낭자는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덤덤히 말했다.
"너무 쉽게 지으셨군요. 하지만 저걸 보십시오."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방금 단청을 끝내고 온 절이었다. 절에 불이나 삽시간에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다. 수덕 도령은 부처님을 원망하면서 울음을 삼켰다. 덕숭 낭자가 위로하면서 말했다.
"도련님, 절을 지으시려면 한 여인을 탐하는 마음을 초월하여 오로지 일념으로 몰입해야 합니다. 부처님만을 생각하시고 다시 지으십시오."
수덕 도령은 새로운 각오를 했다. 그는 다시 절을 짓기 시작했다.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며 일을 했다. 그러나 순간순간 일어나는 덕숭 낭자에 대한 그리운 정을 어쩔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나 절은 마침내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단청을 할 차례였다. 그때 뜻하지 않은 불이 스스로 일어나 지금까지 지어 온 대웅전을 또 홀랑 태워 버리고 말았다.
수덕 도령은 정성이 부족해서라 생각했다. 부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가끔씩 일어나는 덕숭 낭자에 대한 그리움의 정 때문에 화재가 난 것으로 알았다.
수덕 도령은 화재가 난 그날 다시 건축불사에 들어갔다. 그는 몇 번이고 완전해질 때까지 정성을 들여 다시 짓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아홉 번 화재가 나면 열 번이라도 다시 짓겠다는 그의 굳센 결의는 어느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또 한달이 지나자 이루 말할 수 없이 신비롭고 장엄한 대웅전이 형체를 드러냈다. 수덕 도령은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그 감격은 덕숭 낭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그토록 아름답고 장엄하며 예술적으로도 뛰어나게 지은 데 대한 자부심이었다.
수덕은 흡족한 마음으로 합장했다.
"오! 부처님이시여. 이제 당신의 집은 완성되었나이다. 이제 이 대웅전에서 당신의 위대한 가르침이 영원히, 영원히 이어지게 되었나이다. 아! 장엄하옵니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이 대웅전은 오로지 당신의 가호로 이룩된 것이옵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예술적인 대웅전은 전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으며, 앞으로도 이 지상에 다시 없을 것이옵니다. 부처님, 저의 소원도 이제야 이루어지게 되었나이다. 부처님..."
곁에서 보고 있던 덕숭 낭자도 합장한 채 기도를 올렸다.
"부처님, 이제 수덕 도련님의 원력으로 소녀의 소원이 이루어졌사옵니다. 앞으로 소녀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수덕 도련님을 모시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을 증명하여 주시옵소서..."
수덕 도령과 덕숭 낭자는 가족과 일가친척들의 축복 속에서 혼인의 예를 갖추었다. 새로 지은 대웅전에서 올리는 예식 또한 간소하면서도 장엄스러웠다.
예식을 마치고 내려와 신방을 꾸몄다. 촛불이 아스라히 실내를 비치고 있었다. 분위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수덕 도령이 덕숭 낭자의 옷을 풀려 하자 덕숭 낭자가 약간 뒤로 물러나 않으며 조용히, 그리고 냉정하게 말했다.
"부부간이지만 잠자리는 따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수덕은 느닷없는 덕숭 낭자의 행동과 말에 주춤했다. 그가 말했다.
"부부가 된 이상 같은 방, 같은 잠자리를 쓰는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인륜의 기본입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 혼인도 하는 것이고요."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마치자마자 덕숭 낭자의 손을 덥썩 잡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뇌성벽력이 천지를 뒤흔들 듯했다. 순간적으로 놀라며 뒤로 물러선 수덕 도령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덕숭 낭자, 즉 신부가 사라진 것이다. 대신 그의 손에는 신부의 버선 한 켤레가 쥐어져 있었다.
그가 버선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신방 안에 웬 난데없는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고 그 바위 틈새에서 마치 신부의 버선과 꼭 닮은 하얀 꽃이 돋아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신방도 없어졌고 보이는 것은 바위와 버선처럼 생긴 하얀 꽃, 그리고 울창한 숲이었다.
수덕 도령은 깨달았다. 애욕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덧없는 것인가를. 사랑의 힘이 얼마나 숭고하고 경외스러운 것인가를.
그는 덕숭 낭자를 사모하는 마음 하나로 절을 세 번이나 지었다. 바로 그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증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애욕으로 변할 경우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또한 실제로 증명한 셈이었다.
그 후 수덕은 절 이름을 '수덕사'라 부르고 수덕사가 있는 산이름을 덕숭 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덕숭 낭자는 다름아닌 관세음보살의 화현이라고 전해졌다.
지금도 수덕사 부근 바위 틈에서는 이른바 '버선꽃'이 해마다 피고 있는데 이를 '관음의 버선꽃'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도갑사 창건과 며느리서까래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에 자리한 도갑사는 신라말기의 위대한 고승 선각국사 도선(827--898)이 창건한 절이다.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도선이 어린시절을 보내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의 어머니 최씨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 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불길하다 하여 숲속에 버렸다 한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다. 나중에 이를 안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부탁하여 기르도록 했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는 문수사를 다시 신축하여 도갑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 도갑사 창건에는 당대의 제일의 국수인 목림 사보라와 그의 며느리 김씨에 대한 일화가 깃들어 있으며, 그로부터 부연, 즉 들연 끝에 덧얻는 짧고 네모진 서까래, 다시 말해서 며느리서까래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
요즈음 우리가 쓰고 있는 말 중에서 부연설명이라 할 때의 부연은 본디 부연과 음이 같은 데에서 유래했으며 나중에는 따로 독립하여 쓰게 되었다. 부연이란 한마다로 덧붙인다는 뜻이다.
신라 말기,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해 가을이었다. 월출산 산마루를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수놓을 무렵 드넓은 절터 한복판에 흰 수염을 날리며 못 박히듯 망연히 서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목림 사보라였다.
그는 서까래를 번쩍 들어 세워서는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다가 다시 바닥에 눕혀 놓았다. 그리고는 자로 쟀다. 자로 재고 나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동작까지도 서까래마다 몇 차례씩 반복했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맞는 것 같았는데 도대체 뭣 때문에 서까래마다 이렇게 짧아졌지?"
석양은 마지막 남은 불길을 어둠 속에 묻어 버렸다. 노인에게 짧은 가을 해가 못내 아쉬웠다. 땅거미가 진 지 오래였지만, 그는 여전히 서까래를 만져 보고 재 보고, 밝은 데 나와서 자의 눈금을 확인해 보곤 했다.
팔순이 넘은 사보라 노인은 이 불사를 필행의 마지막 작업으로 삼아 온 정성을 다해 나무를 깎고 다듬었다. 젊은 목수들의 도움도 마다하고 5백 개의 서까래를 혼자 준비했다. 그는 밤잠을 설쳐 가면서까지 며칠 동안 일했다.
상량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사보라는 더욱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서까래를 새로 구입할 재원도 문제였지만, 설사 새로 들여왔다 해도 다듬고 어쩌고 할 시간이 없었다. 더욱더 큰 문제는 이미 용기를 잃은 노인 자신이었다.
"분명히 설계도면대로 깎았는데,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네."
사보라는 중얼거리며 재고 또 재보았지만 한번 짧게 잘린 서까래가 다시 길어질 리 없었다.
"낭패로군, 새로 나무를 구입할 수도 없고 제날짜에 법당을 지을 수 없으니 왕명을 어긴 죄를 어이할까."
도갑사는 왕명에 의해 시작된 불사였다. 왕은 안으로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부처님의 가피력에 기대 보겠다는 마지막 희망을 안은 채 지금의 전남 영암 월출산 기슭에 아흔아홉칸의 대가람을 세우도록 영을 내렸다.
당시 신라 국법에는 왕궁 이외에는 백 칸을 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었지만 왕은 더 크게 짓고 싶었다. 그러나 왕도 국법을 어겨서는 안 되었다.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쉬움을 머금고 신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게 아흔 아홉 칸의 대웅보전을 짓도록 했던 것이다.
대웅전 같은 사찰양식의 건물을 아름답고 웅장하게 지으려면 특히 선의 우아함을 잘 살려야만 한다. 용마루의 날씬한 곡선이며, 하늘을 차고 나를 듯한 지붕의 처마는 여인들의 버선코를 본따야 한다.
그러려면 뭐니뭐니 해도 서까래를 잘 다듬어야 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신라 제일의 목수인 사보라 노인이 불사를 맡게 된 것이다.
노인은 생전 처음 맛보는 절망감으로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팔십 평생을 나무와 함께 늙어 온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실수를 하게 되다니. 그것도 왕명으로 짓는 대가람에다, 내 필생의 마지막을 건 공사에서 말이다.
그는 서 있는 나무의 겉모습만 보고도 나무의 나이를 알았고 결이 어떠하며 무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았다. 나무가 단단한가 무른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대목으로 불렸다. 국수의 명예가 공허한 수렁에 빠져 들어감을 느꼈다.
그는 집 짓는 일에서 보람을 찾았다. 보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나무를 다루는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우릴는 천직으로 알았다. 그것은 그대로 삶의 예술이었고 목수일을 떠나서는 자신의 인생관을 말할 수 없었다. 맨 처음 스승의 허락을 받고 끌을 쥐었을 때 얼마나 신났던가.
노인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인간힘을 썼다. 생명의 불꽃이 순간에 사그라짐을 느꼈다. 온 생애가 마치 땅속으로 잦아드는 것만 같았다. 몸은 물먹은 솜이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노인의 눈에는 절망만이 감돌았다. 그는 그만 자리에 누워 침식을 잊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맞지 않았다.
노인은 자리에 누워 평생 동안 지은 집들을 떠올려 보았다. 왕궁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찰, 그리고 명문 귀족들의 집이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어느 하나 실수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사보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않았다. 며느리 김씨가 갖다놓은 약그릇에 손을 대었다. 약그릇에 담긴 자신의 초췌하고 파리한 그림자를 보는 순가, 그는 자신이 없었다. 다시 자리에 눕고 말았다.
밥상을 들고 들어온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누워 있는 시아버지 사보라 곁에 않았다. 며느리가 말했다.
"약도 드시지 않고, 아버님 저녁 진지 드시지요."
"생각이 없구나. 상을 물리렴."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지요? 며칠째 누워만 계시고 약도 진지도 드시지 않으니 걱정이 되옵니다."
"아무 일도 아니다. 내가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또 네가 알 바도 아니구나."
"하오나 아버님, 제가 시집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만약 우환이 있으면, 모두 제 탓이다 싶어 송구스러워서요."
"아가, 네 탓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다, 모두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며느리 김씨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아버님,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행여 저의 미욱한 생각이나마 도움이 될지 모르잖습니까. 부디 말씀해 주세요."
"네 간청이 하도 지극하니 내 말하마. 허나 큰 도움은 되지 않을 듯싶구나."
사보라는 노인은 사실대로 얘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며느리 김씨는 눈앞이 아득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며느리 김씨는 눈앞이 아득했다. 누가 뭐래도 시아버지인 사보라만큼 뛰어난 목수는 없었다. 그 시아버지조차 해결할 수 없는 목수 일을 전혀 문외한인 며느리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며느리 김씨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고 조용히 시아버지 곁을 물러났다. 마당에 나와 심호흡을 했지만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시어머니도 신랑도 모두 침울한 근심 속에서 지냈다.
상량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사보라 노인은 아직도 자리에 누워 있었다. 공사를 감독하는 관료들은 사보라가 왜 병이 났는 줄도 모르고 병문안을 왔다.
"사보라 영감님, 이제 사흘 뒷면 상량을 합니다. 상량을 하고 서까래만 얹으면 목수 일은 거의 끝난 셈이나 다름이 없으니 부처님의 가호로 속히 쾌차하시길 빕니다."
노인은 눈으로 인사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관료들, 문병객을 전송하고 돌아서는 며느리 김씨의 눈에 이상한 것이 비쳤다.
한 줄로 가지런한 서까래가 두 줄로 보였다.
김씨는 처마 밑으로 바싹 다가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까래는 분명 한 줄이었다. 김씨는 깨달았다. 집 안의 불빛과 집 밖의 불빛이 마주치면서 일어나는 그림자의 착시현상이었다. 더욱이 며느리 김씨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던 것이다.
"아, 그래 바로 저기야."
며느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시아버지 처소에 뛰어들어갔다. 며느리 김씨가 말했다.
"아버님, 서까래가 짧게 다듬어졌다고 하셨지요?"
"그래, 아가. 그렇지만 네가 웬일로 그리 밝게 웃느냐?"
"아버님, 짧게 다듬어진 서까래에 다른 서까래를 겹쳐 대면 더 장엄하고 튼튼하지 않겠습니까?"
노인은 비록 여든 고개에 올라선 이였지만, 목수로 일생을 살아왔다. 처음에는 며느리의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마침내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구나, 그래."
"그렇지요, 아버님?"
"그렇다마다, 정말 네가 나를 일깨워 주었구나. 원 이렇게 고마울 데가."
노인의 눈앞에 날아갈 듯한 대웅전의 자엄한 모습이 나타났다. 노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구나, 아가. 부연하면 된다. 서까래를 달아 이어 놓으면 육중하면서도 날렵한 모습이 되겠구나. 부연한 그 지붕의 멋을 누가 감히 흉내낼 수 있겠느냐. 어서 채비를 해 다오."
며느리 김씨는 적이 걱정되었다.
"아버님, 아직 건강이 회복되시지 않았는데. 더욱이 지금은 야심한 밤이옵니다."
"아니다. 우선 가서 부연목을 재 봐야겠구나."
노인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활기가 넘쳤다. 온몸에 달빛을 받으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보라 노인의 모습은 한마디로 아름다움이였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재고, 대들보에서 처마 끝을 재는 사보라 노인의 흰 수염이 더욱 멋지게 보였다.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부연목을 켜기 시작했다. 노인의 표정은 엄숙하면서도 진지했다. 한마디로 예술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세원진 도갑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연식 지붕 건물이 됐다. 며느리 김씨의 지혜로 생긴 서까래라 해서 '부연'이라고 했다.
지금은 이 도갑사 대웅전이 '79년도 중창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도갑사 해탈문은 국보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롱 아씨의 소원
중앙선 철도를 따라가다 보면 원주, 제천을 지나 희방역이 있다. 이곳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면 소백산 줄기 연화봉 아래 오롯하게 자리하고 있는 절이 바로 희방사이다. 경북 영풍군 풍기읍 수철리에 해당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의 말사다. 선덕여왕12년(643)에 두운조사가 창건했으며 철종 1년(1850)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강월화상이 다시 중창하였다. 그러나 6.25때 4동 20여 칸의 당우와 사찰에 보관되어 오던 '월인석보'권1권과 권2는 판본마저 소실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주존불은 무사하여 두운조사가 기거하던 천연동굴 속에 봉안하였다가 1954년 주지 안대근화상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다시 큰 법당에 모셨다. 작자도 주인공도 알 수 없는 부도 2기가 있는데 높이는 1.5미터와 1.3미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희방사는 호랑이와의 인연에 의해 지어졌다는 매우 독특한 창건설화를 갖고 있다.
태백산 심원암에 두운조사라는 고승이 주석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운수행각이 하고 싶어진 두운스님은 바랑을 챙겨 심원암을 떠났다. 꽤 많이 걸었으리라 생각하고 닷새째되는 날 소백산으로 찾아들었다. 산세를 보아하니 줄기차게 뻗어 내린 그 중턱에 마치 연꽃봉오리를 연상할 수 있는 조그마한 산봉우리가 있었다. 둘레를 쭈뼛쭈뼛 살피던 두운스님은 마침내 천연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천연동굴 외에 초암을 하나 더 짓고 광으로 사용했다.
어느 해 추운 겨울날이었다. 소백산은 눈이 내렸다 하면 보통 장정의 키를 넘곤 했으며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그 눈이 녹았다. 밖에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두운스님은 눈오는 밖을 내다보며 감상에 젖어 있었다.
밤이었다. 눈은 멎었고 달은 한껏 밝게 비치고 있었다. 홀로 고독을 삼키며, 설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부엌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두운스님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부엌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순간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집채만한 호랑이가 고개를 빼고 쭈그려 않아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호랑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두운스님은 생각했다.
'저놈이 필시 배가 고픈 게로군.'
두운스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통을 벗어 던지고 호랑이 앞으로 성큼 나갔다.
"자, 나를 먹어라. 내 너에게 이 육신을 보시하겠다. 나는 불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일가칠척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다. 거칠게 전혀 없으니 눈물만 짓지 말고 어서 그 주린 배를 채워라."
그러나 호랑이는 오히려 한걸음 뒤로 물러설 뿐 덤비려 하지 않았다. 두운스님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호랑이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호랑이는 떡하니 입을 버리고 있었다.
'이놈이 아무래도 목에 뭐가 걸린 모양이야. 뭘까. 생선가시? 아니, 그럴 리 없지, 호랑이가 생선이나 잡아먹고 살아갈 놈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거려 봐도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팔을 걷어 부치고 입을 버릴 고 있는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입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뭔가 잡히는 게 있었다. 그는 직감으로 그것이 여인의 비녀임을 알았다. 다음 순간 그의 손에는 호랑이 침과 뒤범벅된 비녀가 잡혀 나왔다.
순간 두운스님의 입에서 벽력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놈. 이 고얀 놈.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서니 사람을 잡아먹어? 이놈 내가 당장 너를 때려죽이고 싶으나 살생을 금하는 불도를 닦는 사람으로 너와 같은 업을 짓고 싶지 않아 살려 주는 것이니 차후에 한 번 더 사람을 해치는 일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이놈."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두운스님은 자신에게 내심 놀랐다. 호랑이 앞에서 큰소리를 치고 있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당장 물러가거라. 이놈."
호랑이는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두어 번 주억대고는 어슬렁거리며 부엌을 빠져나갔다. 호랑이가 가 버리고 난 산사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두운스님은 마음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우리 부처님은 설산에서 고행하실 때 한번 자리에 않으시면 6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는데 나는 이 무슨 꼴인가. 부처님은 얼굴에 거미줄이 엉기고 머리에는 새들이 둥지를 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셨다는데 나는 이게 무슨 모양인가. 아, 벌써 서른 고개에 올라섰으니 언제 마음을 깨칠까.'
그때였다. 초암 앞마당에서 쿵하고 소리가 들렸다. 두운스님은 머리 끝이 쭈뼛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생사를 초월하려면 멀었나 보군. 이렇게 무서움을 느끼는 걸 보면.'
그는 그러면서 자신을 향해 한 번 피식 웃고 방문을 열어제쳤다. 방문 바로 앞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않아 있었다. 두운스님은 밖으로 나갔다.
"이놈, 이번에는 못된 짓을 하다가 구해 달라고 온 것이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곤두박질을 칠 뻔하였다. 뭔가 시커먼 물체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손에 잡히는 게 분명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두운스님은 등불을 준비하여 다시 밖으로 나가 보니 그것은 멧돼지였다. 호랑이 발톱과 이빨자국에서 선지피를 흘리고 있었다. 두운스님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이놈, 네가 영물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중이 고기 먹는 것을 보았더냐? 어서 너나 가지고 먹어라. 그리고 다시는 이런 물건을 절에 물고 들어와서는 안된다. 가거라."
호랑이는 고개를 다시 주억거리더니, 그 멧돼지를 물고 어둠에 묻혀 버렸다.
다음날이었다. 두운스님은 멧돼지 피를 깨끗이 씻어 내고, '오늘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부하리라'하고 정진에 들어갔다. 아침에 시작한 정진은 점심도 잊어버리고 저녁 공양조차 건너뛰었다. 그는 완전히 삼매에 몰입해 있었다. 그는 백골관을 닦고 이었다.
'이 몸이 죽고 나서 세월이 흐르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백골뿐이리라. 아, 집착할 수 없는 백골이여! 그런데 중생들은 그 쓸모 없는 백골에 집착하여 악을 저지르고 있구나. 내가 생사를 초월하지 못해 호랑이에게서 두 번씩이나 무서움증이 일었으니 이 모두는 백골에 대해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산야에 백골만이 흩어지리라. 아! 집착할만한 것이 못되는 백골이여.'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열 여드렛날 밤의 달은 이슥해서야 산머리에 교태를 드러냈다. 주위는 고요했고 산은 온통 흰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찬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나더니 뒤이어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운스님은 그 소리에 선정에서 깨어났다. 두 번이나 호랑이가 다녀간 뒤였기에 오늘밤도 분명 호랑이의 짓일 거라고 생각한 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문을 열었다. 밝은 달빛 아래 과연 호랑이가 쭈그리고 않아 있었다. 그런데 그 앞에 웬 물체가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 하고 나오던 두운스님은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주 젊은 여인을 물어다 놓은 것이었다. 달빛을 이용하여 가까이 살펴보니 20을 전후한 묘령의 여인이었다. 두운스님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호랑이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네, 이놈, 전에 그렇게 타일렀는데도 또 못된 짓을 했구나. 이놈 당장 물러가거라."
두운스님은 우선 사람을 만져 보았다. 몸은 얼음장처럼 굳어있었으나, 아직은 숨기운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망설였다. 출가사문이 여인의 몸에 손을 댈 것인가. 그렇게 되면 불계를 파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보다 대승적인 자세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여인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여인의 온몸을 찜질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살결은 아름다웠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아직 본적이 없는 두운스님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해 댔다. 그는 팔다리를 주무르고 배를 문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인이 깊은 숨을 몰아쉬면서 꿈틀댔다.
두운스님은 기뻤다. 사람을 자기 손으로 소생시켰다는 데에서 어떤 뿌듯함을 느꼈다.
"좀 정신이 드십니까?"
여인이 두운스님을 보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려다가 다시 쓰러지면서 힘없이 말했다.
"여기가 어딘가요?"
"소백산 내에 있는 토굴입니다. 소승은 수행하는 수도승입니다."
"스님이시라고요? 아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당신은 호랑이가 분명합니다."
내가 호랑이라니요. 아마 무서운 꿈을 꾸셨나 보군요. 소승은 분명 사람입니다. 소승의 이름은 두운이라 합니다."
"호랑이가 스님의 모습으로 둔갑을 잘한다고 하던데요. 제 기억으로는 호랑이의 난을 만난 게 분명합니다. 당신은 분명 호랑이입니다."
두운은 비로서 여인이 자기를 두고 호랑이라고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아가씨가 호랑이 난을 만나 너무나 놀란 나머지 소승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소승은 수도승이고 이곳은 절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가씨를 물고 온 호랑이는 지금 밖에 있을지 모릅니다. 자, 보시지요."
두운이 물을 열자 호랑이는 아직도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적이 만족한 모양인지 기지개를 늘어지게 펴더니 어슬렁거리며 사라져 갔다.
여인은 비로서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제 분명히 기억납니다.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도 모두 말입니다. 말씀드려도 되올는지..."
그녀는 두운스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운스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저는 경주 서라벌 계림에 사는 호장 유석의 딸 유아롱입니다. 호장이라면 고을 아전 중 최고 윗자리여서 저희집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입니다. 오늘 낮에 저는 혼례를 치렀습니다. 대례를 치르고 폐백이 끝나 밤이 되자 저는 신방에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때 무슨 불이 번쩍하면서 제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뒷일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아롱 아가씨의 얘기를 듣고 있는 두운스님의 손에는 땀이 고였다. 본인이야 어떻든 말들 두운스님으로서는 아찔한 이야기임에 틀림없었다.
"아, 그랬군요. 그러면 아직 초야도 치러 보지 못한 순결한 아가씨가 틀림없겠군요. 난 또."
아롱이 약간 서운한 눈빛으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스님은 저의 순결에만 관심이 있고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전혀 무심하시군요."
두운스님은 아차 싶었다.
"그렇군요.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정말 큰일날 뻔 하셨습니다.
두운스님은 어색하게 뒤통수를 만지며 말했다.
"부모님과 신랑이 걱정 많이 하시겠습니다. 그나저나 신랑은 잘 생겼습니까? 마음에는 드시던가요?"
그렇게 물으면서 두운스님은 또 한 번 실언했구나 싶었다.
공연한 것을 물었다고 생각했다. 웬지 자꾸 딴 얘기가 튀어나와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이 여인의 신랑을 두고 질투하는구나.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어디까지나 불도를 닦는 수행자가 아닌가?'
여인이 말했다.
"글쎄요. 저는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호랑이란 본디 육식동물이라서 사람을 보기가 무섭게 잡아먹어야 할텐데 어찌하여 저를 이 깊고도 험한 산중까지 업고 와 그냥 버리고 갔을까요? 의심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전생의 인연이겠지요."
"전생의 인연이라니요?"
"이 산승과 인연이 깊은 탓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나저나 잠이나 푹 주무시고 다음날 날이 밝으면 얘기합시다."
그러나 산사에는 방이 한 칸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 방에서 함께 지내야 했다.
'정말 내가 이 아롱아가씨와 인연이 깊은 것일까? 내 불쑥 말해 놓고 보니 그도 그럴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공연히 실언을 한 것 같네. 허, 그나저나 어쩐다?'
대충 여인을 덮어 주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싸아 얼굴을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먹고 방으로 들어와 가부좌를 틀고 않았지만 도저히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신경은 온통 등 뒤쪽에 누워 자는 아롱 아씨에게 쏠렸다.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하기를 몇 번. 다시 방안에 들어온 두운스님은 가만히 잠자는 아롱 아씨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려다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나는 중이다. 나는 불계를 받아 지니고 수행하는 수도자다. 나는 중이다. 나는 중이다. 중, 중, 중...'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삼매에 들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쉽사리 삼맹에 몰입할 수 없었다. 답답했다. 20여 년 동안 수행한 결과가 이 정도라는 데에 회의도 느꼈다. 그는 이제 서른 고개를 넘어선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다. 승복으로 가린 그의 가슴에서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런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그때였다. 아롱 아씨가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는 고개를 돌릴까 하다가 꾹 참아 보았다. 여인이 가녀린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음성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어서 자기도 모르게 두운은 여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그만 주무세요, 스님. 으음."
"산승은 이게 잠자는 모습입니다. 저는 누워서 잠자지 않고 않아서 잡니다."
"스님, 배가 좀 고픈데요. 뭐 먹을 만한 게 없을까요?"
두운스님이 먹을 것을 찾으러 부엌으로 나가려 하자 어느새 여인이 두운스님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예요. 그냥 않으세요. 그리고 아까 스님께서 전생의 인연이라 하셨는데 그 얘기나 들려주세요."
"글쎄요. 아롱 아가씨와 부모님의 인연도 그렇고 신랑과의 인연도 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인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의 인연은 아무래도 호랑이와의 인연이 깊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호랑이와의 인연이라고요?"
"사실 호랑이와 나와의 인연은 참으로 묘하게 맺어졌습니다."
두운스님은 그 동안 호랑이의 목에 걸린 여자의 비녀를 빼내 준 이야기며, 멧돼지를 물고 왔던 이야기 등을 자세하게 해 주었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두운스님의 얘기를 듣고 난 아롱아씨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스님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저를 데려온게 아닐까요?"
"그렇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아가씨를 데려온 것은 은혜를 갚기보다는 인연을 맺어 주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참 재미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는데 저는 호랑이를 타고 시집을 왔으니 말입니다."
"시집이오?"
두운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라 물었다.
"그렇잖습니까?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통 남자들에게 가는데 저는 산중에서 수도하는 스님에게 왔으니까요."
두운스님이 말을 잘랐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아롱 아가씨는 여기 나한테 시집을 온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인연을 맺기 위해 온 것입니다."
"스님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과 인연을 맺기 위함이라며 이 먼 곳 깊은 산중까지 오지 않더라도 서라벌에는 수많은 절들이 있고 큰스님들이 있습니다."
듣고 보니 아롱 아씨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두운스님은 할 말을 잊었다.
"스님, 저는 스님과 인연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정식으로 혼례를 치를 수도 없어도 스님은 바로 저의 낭군이십니다. 부정하지 마시고 저를 받아들이십시오."
두운은 점점 난처해졌다. 아니 아롱 아씨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더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완강하게 거부했다.
"안 됩니다.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왜 안 되옵니까?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고 또 나중에 우리가 아무리 순결을 지킨다 해도 누가 그것을 인정하겠습니까? 스님, 어서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여인이 달려들었다. 두운스님은 가만히 여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린 그럴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때 여인이 훌쩍이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여인의 두 어깨가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두운스님에게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걸려들었다 싶었다. 당장 달려들어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여인의 눈물에 강해져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두운스님은 여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남이야 믿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우리만 순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즉, 나이가 많은 여인은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한두 살 연상이면 누님처럼 여기며, 나이가 적은 여인이라면 누이동생처럼, 딸처럼 생각하며, 또는 일가친척처럼 생각하라구요. 그래서 나는 앞으로 아롱 아씨를 누이동생으로 생각하겠소. 아롱 아씨도 나를 친오빠로 여겨 주시오. 새봄이 되면 내가 아롱 아씨를 서라벌 계림의 집에 데려다 주겠소. 우리 그 동안 불도나 열심히 닦읍시다."
두운스님의 말을 듣고 나서 아롱 아씨는 고개를 들어 스님을 쳐다봤다. 참 장하고도 잘생긴 모습이었다. 장부다운 기상이 넘쳐흘러 혼례를 치루었던 신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멋진 남자였다. 그러나 스님이 워낙 완강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를 따르기로 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존심을 꺾어야 함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두 사람은 좋은 도반이 되었다. 눈이 내리면 눈을 쓸고, 밥을 지어 함께 공양을 하고, 함께 가부좌를 틀고 않아 선정에 들었다. 아롱 아씨의 마음도 이젠 많이 가라앉았고 두운스님 또한 친절하게 공부를 지도했다.
어느덧 추운 겨울이 물러가고 그 빈 자리에 봄이 들어앉았다. 눈도 다 녹았다. 이젠 어디를 떠나더라도 눈 때문에 막힐 일은 없었다.
두운스님은 아롱 아씨를 다정하게 불렀다.
"아롱, 이제 내가 할 일이 있소. 눈도 녹았고 봄도 다가왔으니 내가 처음 아롱에게 약속한 대로 서라벌의 계림에 있다는 당신 집에 아롱을 데려다 주려 하오. 그러니 행장을 꾸리시오."
아롱 아씨는 사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다정하게 지도해 주는 두운스님에게서 친오빠와 같은 정을 느꼈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이 산중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탐욕과 질투와 온갖 번뇌, 갈등으로 얽매여 사는 세속의 삶이 싫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스님에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두운스님은 그럴 수 없다며 일단 다시 오는 한이 있더라도 부모님을 찾아 뵙고 딸이 살아 있음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랑과의 관계도 이어지든 끊어지든 깨끗하게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소백산을 떠났다. 경주까지는 6백 리가 넘었으므로 거의 열흘이 지나서야 계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막 집에 들어서려는데 대문 안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니 한 하인이 문간에 서 있다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갔다. 잘 아는 하인이었는데 왜 그럴까하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당이 춤을 추고 있었다. 손에는 날이 시퍼런 칼을 들고, 다른 손에는 방울을 쥐고 있었다.
진오기굿을 하고 있었다. 불쌍하게 호환을 당해 간 딸의 넋을 건지려는 굿이었다. 아롱 아씨는 문득 자신을 생각했다.
'정말 나는 죽은 걸까. 이처럼 버젓이 살아 있다고 보는 이 몸은 오히려 죽고 난 뒤 나타난다고 하는 귀신은 아닐까. 아니야 나는 죽은 게 아니라 죽게 되었다가 소생한 거야. 나는 살아 있어. 나는 아롱이가 틀림없어.'
"나는 아롱이가 틀림없다...아."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사람들이 모두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아롱 아씨를 보자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귀신이다. 귀신이 나타났다. 죽은 아롱 아씨의 귀신이 미진한 원을 풀기 위해 나타났다."
"달아나자."
"뛰어, 빨리빨리."
아롱 아씨의 어머니가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아롱 아씨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아가, 에그 불쌍한 것, 네가 그렇게도 갑자기 갈 줄 어찌 알았겠느냐. 그래, 이제 무슨 미진한 원이 있어서 이리 왔느냐. 에그 불쌍한도 하지."
아롱 아씨가 말했다.
"저는 귀신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죽은 게 아니에요."
아롱 아씨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아롱 아씨의 어머니가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네 소원이 무엇이든 다 들어 줄 테니 산 사람들에게 해코지는 하지 말렴. 에그 에그, 불쌍한 우리 아롱아."
"어머니 저는 사람입니다. 귀신이 아니에요. 어머니의 무남독녀 아롱이입니다.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이 상황을 보다 못한 두운스님이 모녀 사이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아가씨는 바로 시주님의 딸 아롱이입니다. 제가 전후사정을 말씀드리지요."
얘기를 다 듣고 난 유석 내외는 비로소 의심이 풀리고 아롱 아씨를 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난처한 일이 아니냐고 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한 사람은 젊은 여인이고 한 사람은 젊은 남자인데 두 젊은 남녀가 그것도 하룻밤이 아니라 석 달 동안을 한방에서 지냈으니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니냐는 거였다. 유석이 결심한 듯 말했다.
"우리 아롱이와 혼례를 치른 신랑은 아롱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이미 다른 사름을 아내로 맞았소. 그러니 스님께서 내 딸 아롱이를 맡아 주시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부처님이 정해주신 배필인 듯하오. 뒤치다꺼리는 내가 알아서 해 주겠소."
"배려하심은 감사하오나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롱 아씨도 저를 좋아하고 저 역시 아롱 아씨가 마음에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오나 저는 불제자로서의 길을 걷겠습니다."
호장 유석이 말했다.
"스님의 뜻이 견고함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우리 또한 부처님을 믿는 사람으로 스님을 환속시키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방에서 석 달 동안이나 함께 지냈으니 두 사람은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부부나 마찬가지입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 제 딸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롱 아씨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훌륭한 현모양처감입니다. 그러나 저와의 관계는 따님이 소상하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아롱 아씨가 그간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오히려 아롱 아씨는 자신이 두운스님을 남편으로 맞으려 했으나 두운스님의 굳은 결심에 감복되어 함께 불도를 닦았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호장 유석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스님은 큰스님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무조건 스님에게 우리 아롱이를 맡기려 했습니다. 스님께서 이해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이해라니, 당연한 말씀이지요."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우리 집에서 며칠 더 묵다 가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마저 거절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렇게 해서 두운스님이 유석의 집에서 며칠을 묵고 떠나려 할 때 유석이 말했다.
"스님, 우리 아롱이가 소원이 있다고 합니다."
소원이라는 말에 두운스님은 지레 겁먹은 표정이 되어 물었다.
"아롱 아씨 소원이라니요?"
"예, 우리가 스님을 위하여 절을 지어 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스님께서 주석하시던 곳에 새롭게 절을 짓고 다리를 놓아 드리겠습니다. 그것마저 거절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절이 희방사다. 그리고 절 앞의 큰 개울에 무쇠로 다리를 놓았다. 그것이 수철교, 즉 '무쇠다리'다. 희방사가 속해 있는 마을을 수철리라 함도 바로 여기서 기인하였다.
향기 어린 샘물
"까악 까악."
까마귀가 스님의 머리를 맴돌면서 계속해서 울어댔다. 황금까마귀였다. 의각스님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오라! 너희가 절터를 안내하겠다는 뜻이로구나. 그렇다면 어서 앞장서거라."
얼마를 날았을까. 까마귀는 덕봉산 기슭에 내려 않았다. 의각스님은 그곳에 불상을 내려 놓고 지세를 살펴보았다.
'아! 이토록 훌륭한 절터가 있었나?'
너무나도 뜻밖의 수확에 의각스님은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의각스님은 중국에 유학을 갔었다. 그는 특히 반야사상에 심취하여 전공을 반야학으로 정하고 연구를 거듭하여 위대한 학자가 되었다.
그때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641-660 재위)이 한참 주지육림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을 시절이었다.
중국에서 반야학을 전공한 스님은 늘 경전 읽기를 즐겨해 언제나 그의 요사채 앞에 가면 반야경 읽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의각스님의 키는 6자 훨씬 넘었고 준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가사와 장삼을 수하면 그 풍채가 하도 훌륭해 많은 납자들의 귀의하고는 했다.
하루는 의각스님 맞은편 방에서 잠자리에 들려던 의혜스님이 자신도 모르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의각스님 방에서 찬란한 빛이 새어 나와 요사채 마당을 환하게 비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의각스님 방 앞으로 갔다. 안에서 경을 읽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묻어 나오는 빛이었다. 경전 한 구절 한 구절 한 자 한 자마다 계속해서 빛이 묻어 나왔다.
다음날 의각스님은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난밤 일을 얘기했다.
"어젯밤 내가 반야경을 독송했습니다. 그런데 경을 읽다가 보니 사방의 벽이 뚫린 듯 밖이 훤히 보이더군요. 웬일인가 싶어 일어나 벽을 만져 보았으나 벽을 그대로였습니다. 경을 읽으면 다시 밖이 보이곤 했습니다. 생각건대 이는 반야의 불가사의한 묘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반야의 묘용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부처님의 지혜광명입니다."
대중들은 의각스님의 말을 믿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때 의혜스님이 일어나 간밤에 의각스님 방에서 새어 나오던 빛 이야기를 해 주었다.
대중들은 비로소 반야사상이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임을 깨달았다.
그 후 의각스님은 고국으로 돌아와 중국에서 갈고 닦은 불법을 펴리라 마음먹고 불살 3,053위와 삼존불상인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16나한상과 5백 나한상을 모시고 백제로 돌아왔다.
그가 처음 당도한 곳이 충청도 예산이었다. 그는 삼존불과 삼천불과 53위의 불상을 모실 대가람 터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금까마귀를 만났고 덕봉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스님이 예산 땅에 왔다는 것은 당시 대단한 영광이었다. 예산 사람들은 의각스님을 친견하고 설법을 듣기 위해 덕봉산으로 모여들었다.
의각스님은 힘이 솟았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불자들에게 법당을 지어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많은 사람들도 크고 작은 것을 떠나 한마음으로 절을 세우는 데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정치는 믿을 수가 없었고 이제 의지할 곳이라곤 부처님밖에 없다고들 했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부처님의 가피에 의존하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이 한 사람이 새벽같이 찾아왔다.
"아직 이른 시각인데 어인 일로 이렇게 찾아오셨는가?"
"저도 스님께서 하시는 불사를 돕고 싶습니다. 하오나 저는 아직 총각인 데다가 몸져 누우신 늙은 어머님이 계십니다. 집안 형편은 말할 수도 없구요. 대신 저는 몸으로 스님의 불사를 돕고자 하오니 받아 주십시오."
"허! 기특한 생각일세."
"흙도 파고 나무도 다듬고 기와도 굽겠습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스님."
의각스님은 참된 불자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시주보다도 값진 것이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중 마음과 정성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네. 나를 만나고 싶어했던 그 마음이 이미 부처님 마음이요, 법당을 건립하는 이 불사현장에 오고자 했을 때, 이미 불국토는 자네 마음에서 완성되었네. 고맙네. 여기서 나를 도와주게나."
"스님, 제 불효가 크옵니다. 법당이 완성되면 제 어머님의 병환이 속히 쾌차하길 빌어 드리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소원을 다 이루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의각스님은 젊은이의 효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참으로 장하네. 그대의 효심이 그러할진대 어찌 기도가 성취되지 않으랴?"
의각스님은 젊은 총각에게 반야경 중에서도 가장 내용이 짧고, 또 핵심이랄 수 있는 '반야심경'을 봉독하라고 일렀다. 총각은 열심히 일했고, 또 열심히 '반야심경'을 외웠다.
낮이 가고 밤이 가도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반야심경'을 읽었다. 낮에는 밤에도 총각의 방에서는 언제나 독경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쉬는 시간에도 그는 '반야심경'을 외웠다. 나중에는 일하는 중에도 그의 입에서 '반야심경' 외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꼭 독경 끝에 그의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빼놓지 않았다.
"부처님,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제가 불사를 돕고 '반야심경'을 읽는 공덕으로 이 불사가 원만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리고 저의 늙으신 어머님 속히 쾌차하게 하옵소서.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얼마 후 법당이 완성되었다. 모든 시주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새로 지은 법당에 참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새 옷을 갈아입었다. 총각도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 절이 이제 완성되어 오늘 낙성식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속히 다녀올 테니 그 동안 편안히 계십시오."
그의 어머니가 느닷없이 아들의 옷자락을 붙들며 말했다.
"얘야 나도 가겠다. 나 좀 일으켜라."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마다. 오늘 아침은 몸이 날아갈 듯 가볍구나."
아들은 얼른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아들의 손을 잡더니 거뜬하게 일어나는 것이었다. 벌써 여러 해 동안 뒷간 출입조차 전혀 못 했었는데 아들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모습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싶었다.
"어머니, 부처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 주신 것입니다. 어머니가 이처럼 쾌차하시다니 말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자, 내 옷이나 꺼내 주고 너 좀 먼저 나가 있으련? 옷 좀 갈아입어야겠구나."
그들은 함께 낙성식에 참석했다. 삼월의 따스한 햇살은 모자의 앞길을 더욱 희망차게 했다.
모자는 걸어서 덕봉산 새 절에 올랐다.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를 하는 노파는 모든 게 새로웠다. 새롭게 피어나는 새싹들이며, 상큼한 공기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벚꽃들도 마음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갈증을 느꼈다. 안 하던 운동을 갑작스레 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법당 옆에 솟아나는 샘물을 표주박으로 떠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물을 마시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다.
"얘, 이 물맛 좀 보련. 어쩌면 이리도 향긋하드냐."
아들은 어머니의 말대로 물을 떠서 한모금 마셨다. 난생 처음 맛보는 물맛이었다. 물맛이 향기롭다고 하니까 낙성법회에 참석했던 수백 명의 대중들이 다 같이 돌아가며 물을 마셨다. 그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향기로운 샘물이다. 처음 맛보는 물맛이다."
의각스님은 낙성법회에서 대중들에게 말했다.
"이곳에 법당이 이루어지고, 샘물에서 향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우리 절과 우리 절 신도님들에게 내리신 가피입니다. 이는 또한 반야의 불가사의한 묘용입니다. 앞으로 이 절 이름을 '향천사'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절을 짓기 위해 터를 찾을 때 금까마귀가 인도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이 산을 덕봉산이라 하지 않고 '금오산'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금오산 향천사가 된 것이다. 그 뒤 이곳 사람들은 의각스님이 처음 배를 댄 곳을 '배논'이라 불렀고, 스님이 중국에서 배를 타고 와 포구에 닿았을 때가 한밤중이었지만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들렸다 하여 마을 이름을 '종성리'라 했다.
또 그 바닷가는 석주포라 하였는데 이는 스님이 타고 온 배가 돌배였던 데서 기인하였으며, 향천사 아래 고함바위는 항소가 돌부처를 실어나르며 하도 힘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향천사에는 1,516불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나머지 2천 불의 불상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지금은 모셔져 있지 않다.
원효스님과 내원사 창건연기
원효스님(617--686)은 수백여 권의 저서를 남긴 고승으로서 유명하고, 그의 화쟁사상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더 없이 소중한 지표가 되고 있다. 그는 귀족불교에서 서민불교, 민중불교로의 전환을 부르짖었고 또한 그것은 실천한 스님이기도 했다.
요석과의 관계는 세인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만들었고, 의상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중 중도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 길을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얘기도 유명하다. 그리고 숱한 일화들을 남겼는데 그 일화 하나하나가 모두 목마른 중생들의 갈증을 쉬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원효스님이 천청산에 주석하고 있을 때였다. 천성산은 지금의 양산 통도사 앞에 우뚝 선 산을 말한다. 토굴에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삼매에 들었던 원효대사가 갑자기 혀를 차면서 혼자말로 말했다.
"어허, 이것 큰일이구먼. 어쩐다. 빨리 서둘러야겠는데. 그러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겠구나. 얘, 사미야!"
원효스님을 시봉하던 사미는 이름이 학진이었다. 학진사미는 큰스님의 부르는 소리에 황급히 달려와 차수하고 섰다.
"부르셨습니까? 큰스님."
원효스님은 사미를 돌아보지도 않고 뭔가를 황급히 찾고 있었다. 학진사미는 큰스님의 부르는 소리에 황급히 달려와 차수하고 섰다.
"부르셨습니까? 큰스님."
원효스님은 사미를 돌아보지도 않고 뭔가를 황급히 찾고 있었다. 사미가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큰스님, 무엇을 찾으시옵니까?"
"으음, 사미냐? 급한 일이 생겼느니라."
사미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큰스님, 사방이 온통 고요하기만 한데 화급을 다투는 일이 무엇이옵니까?"
원효스님이 말했다.
"멀리 중국땅 태화사에 변이 일어날 조짐이 있구나."
사미는 점점 더 알 수가 없었다. 가까운 곳도 아니요, 저 멀리 중국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계시다니,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효스님은 급한 김에 앉아 있던 마루청을 뜯었다. 그리고 거기에 이렇게 적었다.
"신라의 원효가 판자를 던져 중생을 구원한다."
원효스님은 판자를 공중에 날렸다. 판자는 순식간에 천성산에서 아득히 사라졌다. 사미가 말했다.
"큰스님, 천안통을 얻으셨습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중국에서 일어난 변을 미리 보실 수 있단 말입니까?"
원효스님은 빙그레 웃고 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좌선삼매에 들었다. 시자도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한편, 중국의 태화사에서는 천여 명의 스님들이 법당에 모여 대법회를 열고 있었다. 한참 열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법당 밖에 있던 대중들이 왁자지껄했다.
"아니, 저기 저 날아오는 게 뭘까?"
"어디 어디, 그러게 말이야. 웬 널빤지 같은데 그래."
법당 안에서 법회를 하던 천여 명의 스님들이 법회를 중단하고 마당으로 몰려나왔다. 신도들도 따라 나왔다. 이제 법당안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우르르릉, 쾅."
폭음과 함께 멀쩡하던 법당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은 무너지는 법당을 바라보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하늘을 쳐다보니 공중에서 배회하던 널빤지가 빙글빙글 돌면서 마당에 사뿐히 내려 않았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판자를 들여다보니 그 판자에는 글이 씌어 있었다.
"신라의 원효가 판자를 던져 중생을 구원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놀랐다. 중국과 신라와의 거리가 그토록 먼데 그 판자가 공중을 가르고 날아왔다는 것이 불가사의했고, 원효스님이 태화사의 일을 미리 내다보았다는 것이 불가사의한 일이었으며, 또한 대중들이 몰려나오자마자 법당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 불가사의했다.
"아니, 이건 그 유명한 신라의 원효스님이 보내신 거로군요.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참으로 원효스님은 부처님과 다름없는 분입니다. 그분의 천리안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나무 원효보살마하살."
그들은 '나무 원효보살마하살'을 합송하며 동방을 향해 합장하고 무수히 절을 했다. 그들은 원효스님의 도력이 그토록 뛰어난 데 다시금 찬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정말 원효스님이야말로 도인 중에 도인입니다. 참으로 장한 어른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참다운 스승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 그분 곁에 가서 수행하도록 하십시다."
"갑시다."
"떠납시다."
법회에 나왔던 스님들이 하나 둘 신라로 갈 것을 제의하며 나서자, 모두들 서로 뒤질세라 앞장을 섰다. 스님들뿐만 아니라 재가불자들까지 나서 신라의 원효스님에게로 향하는 대중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신라로 원효스님을 찾은 천여 명의 대중들은 서로 앞다투어 원효스님의 제자가 될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그러나 원효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곳은 움막이나 다름없는 협소한 토굴이었다. 천여 명의 대중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한꺼번에 몰려온 천여 명의 제자를 한 순간에 얻은 원효스님은 대중들이 함께 수행할 절터를 찾아 나섰다.
스님이 산을 내려오고 있는데 백발노인 한 분이 나타났다. 천성산의 산신령이었다.
"큰스님, 절터를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디 마땅한 데가 없을까요? 적어도 천여 명 대중이 기거할 만한 도량이어야 하는데요."
"네, 큰스님, 이 산 중턱의 계곡에 이르면 아주 좋은 절터가 있습니다. 천여 명이 기거하더라도 협소하지 않을 것이오니 다른 데 가시지 말고 곧장 그곳으로 가 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노인장."
원효스님은 대중들을 이끌고 발걸음을 되돌려 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과연 반듯한 터가 나왔다. 원효스님은 그곳에 큰 가람을 세웠다.
그리고 멀리 중국에서 천여 명의 대중이 왔다고 하여 내원사라 이름하였다. 천성산이라 불리게 된 것도 이러한 사건이 있고 나서였다. 즉, 중국에서 원효스님의 제자로 온 천여 명의 대중들이 모두 훌륭한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어 성자가 되었다는 데서 기인하였다. 또 산신령을 만난 자리를 '중방래'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천성산에는 칡넝쿨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밤길을 가다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져 다리를 다치는 등 불상사가 일어났다. 원효스님은 산신령을 불러 당부하였다.
"산신령은 들으라. 우리 절 대중들이 밤길을 걷다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져 다리를 다치고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앞으로 그런 불상사가 없도록 산신령은 이 산에 칡넝쿨이 자라지않게 하라."
그러나 칡넝쿨을 아주 없앨 수는 없었던지 있기는 있되 옆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수직으로 자라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천성산의 칡넝쿨은 옆으로 뻗어나간 것은 볼 수 없고, 모두 수직으로 곧게 자란 것뿐이라고 하는데 이는 원효스님이 산신령에게 당부한 뒤부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원효스님이 마루청을 뽑아내어 던진 암자를 '널빤지를 날려 보냈다'하여 척판암이라 부르며, 내원사는 언제부터인가 내원사로 표기되어 왔다고 한다.
오세암에 얽힌 이야기
왕성하던 고려 왕조도 점차 황혼을 맞고 있을 무렵이었다. 관료들은 관료들대로 썩어 있었고 지주들이나 선비들도 너무나 부패해 있었다. 나라에 올바른 기강이 없어 정치인들이 썩어있을 때에는 반드시 어느 한 귀퉁이에 변고가 일게 마련이었다.
지금의 충북 제천 부근에서 얼마 전부터 알 수 없는 괴질이 온 마을을 휩쓸더니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하나하나 앗아가고 있었다.
이때 설정스님은 30여 년 만에 고향을 찾는 길이었다. 그런데 고향이란 게 어머니의 품속마냥 따스하기는커녕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스님은 이상하다 싶어 어릴 적 살던 집을 찾았다. 논둑이며 밭가에 난 길을 찾아 접어들었다. 가을걷이를 하고 난 밭에는 옥수수 그루터기만 황량하게 남아 있었고 밭 여기저기에 겨울여물용으로 세워 놓은 옥수수짚 다발만이 낟가리로 서 있었다. 옥수수짚을 보며 설정스님은 어릴 적 생각이 나 빙그레 웃었다.
"어머니, 저도 크면 수염이 나나요?"
"왜, 벌써 어른이 되고 싶은 게냐?"
"예, 저도 얼른 커서 옥수수 수염 같은 수염을 턱에 달고 싶어요."
"원, 녀석두."
어릴 때 설정스님은 옥수수 수염을 따서 콧수염으로 붙이고 뛰놀던 일이 재미있었다. 어머니는 그때 환하게 웃으시곤 했다.
금방이라도 '오근아'하고 아들 이름을 부르며 쫓아나올 것 같은 고향집이었다. 그런데 인기척이 없었다.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설정이 왔습니다. 아니, 오근이가 왔습니다."
설정스님은 대문을 세차게 흔들었다. 대문 한 쪽에는 새 봉자가 큼지막하게 씌어 있었다.
"이건 새 봉 자라는 거란다. 새 봉."
"새 봉, 새 봉."
아버지는 곧잘 외워 대는 어린 아들이 대견하기만 했다. 문위에 여덟 팔 자로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란 글씨를 비롯해 입춘부를 손수 써 붙이셨던 아버지는 꽤나 유식한 분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새 봉 자를 가리키면서 물으셨다.
"오근아, 이게 무슨 자라고 했더냐?"
"예, 새 조 자입니다."
자신 있게 대답했다가 아버지께 알밤 한 대를 맞은 기억이 새로웠다.
설정은 문을 열고 들어가 마루에 걸터앉았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마루밑과 봉당뜰 아래에 밀과 보리싹만이 푸르름을 과시하고 있었다. 스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관세음보살님은 어째서 이런 고향엘 가 보라고 하셨을까?'
설정스님은 3일 전 밤에 설악산 대청봉 아래 위치한 관음암에서 꿈꾼 일을 생각해 냈다.
"스님, 어서 일어나세요, 고향에 속히 다녀오십시오, 어서요."
"고향에는 왜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꼭 가야 합니까?"
설정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름등잔에 불을 붙였다. 꿈이었다. 너무나 선명한 꿈이었다. 오색구름을 타고 나타난 한 여인의 부름에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녀는 분명 관세음보살이었다. 관음암 법당에 모셔진 모습 그대로였다. 아직도 방안에는 향내가 그득했다.
"그런데 이처럼 황폐한 고향엘 관세음보살은 왜 가보라고 했을까?"
설정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아랫마을에 산다는 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이 말했다.
"허허, 시주를 오신 모양인데, 아무래도 잘못 오셨소이다."
"아닙니다. 시주를 온 게 아니라, 제가 자란 옛집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예, 이 마을은 얼마 전 괴질이 돌아 모조리 떼 죽음을 당하고 말았소, 다만 서너 살박이 어린애가 하나 살았을 뿐이외다. 허, 그것 참. 쯧쯧."
설정스님은 노인을 따라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거기서 아이를 만났다. 가족관계를 따져 보니 설정스님의 조카였다. 위로 큰형님이 계셨는데 늦게 취처하여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 아이가 바로 그 아들이었다.
설정스님은 조카 아이를 업고 설악산 관음암으로 돌아왔다. 잘 키워 중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속가로 내보내 가문의 대를 잇게 하려는 마음이었다. 설정스님은 그게 바로 부처님의 뜻이고 자기를 고향으로 보낸 관세음보살의 뜻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아주 야무졌고 또 영리했으며, 순진하였다.
산짐승이나 새들과 함께 얘기도 나누고 다람쥐나 원숭이들과도 잘 어울렸다. 스님이 산에 나무하러 갈 때는 말벗이 되어 주곤 했다. 아이는 잘 자랐다. 설정스님은 아이의 법명을 지어주었다. 선두라 했다. '두'자는 어조사이고 그냥 '착한 아이'란 뜻이었다. 속가의 이름이 '선돌이'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그대로 지은 것이었다.
선두는 어느새 다섯 살이 되었다. 스님을 따라 조석 예불에 참예하여 '반야심경'을 곧잘 외워 대곤 했다. 잔심부름도 너끈히 해 냈다.
스님이 밥을 짓노라면 부엌에 따라나와 부지깽이로 장작더미를 두들기며 목탁치는 흉내를 내면서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곤 했다. 스님이 대견해서 물었다.
"애, 선두야."
"예, 스님."
"관세음보살은 어떤 분이라 했지?"
"관세음보살은 어머니 같은 분이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래, 잘했다. 어이구 우리 선두 영리하기도 하지."
선두는 맑은 눈망울을 굴리면서 삼촌인 설정스님에게 와락 안겼다. 스님은 선두에게서 전해져 오는 아련한 핏줄의 정을 느꼈다. 볼이 참으로 따스했다.
'무럭무럭 자라서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텐데.'
설정스님은 선두를 내려놓고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선두가 스님의 눈물을 보고 침울해져 물었다.
"스님, 울고 계세요?"
"아니다. 울긴 내가 왜?"
설정스님은 짐짓 환한 웃음을 지여 보였다. 그러나 마음속은 쓰리고 아팠다.
'불쌍한 녀석, 아버지 어머니 얼굴도 모르고...너무 외로운 녀석이야.'
그 해 초겨울이었다. 겨우살이 준비를 하던 설정스님은 양식이 떨어진 것을 보고 시주를 해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설악산 대청봉 아래서 겨울 양식이 떨어지면 찾아오는 신도도 없고 큰일이었다. 설정스님은 시주를 하러 가기 위해 신들메를 했다. 선두를 돌아봤다. 데리고 갈 수도 없었고 그냥 놔두고 가자니 그렇고, 적어도 닷새는 혼자 있어야 하는데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은 선두를 앉혀 놓고 말했다.
"내가 양식을 구해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닷새는 걸릴 듯싶구나. 그 동안 너 혼자 있을 수 있겠느냐?"
선두의 맑은 눈망울을 바라보던 스님은 차라리 말없이 그냥 다녀올 걸 그랬다는 후회도 했다. 그런데 선두는 오히려 의젓했다.
"네, 스님. 혼자가 아니고 관세음보살님하고 둘입니다."
설정스님은 깜짝 놀랐다. 선두의 대답에서 어떤 어른보다도 엄청난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랬구나. 관세음보살님이 계시는구나. 그럼, 관세음보살님하고 절 좀 지키고 있거라. 내 속히 다녀오마."
사립문을 나서던 설정스님은 선두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다짐을 했다.
"어떤 경우라도 멀리 나가지는 말아라. 그리고 무서움이 일거든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불러야 한다."
선두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장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치켜들며 스님에게 내보였다. 설정스님이 산문 밖을 나서서 멀리 떨어졌을 때도 선두의 목탁 두드리는 소리는 아련히 들려오고 있었다. 설정스님은 걸음을 재촉하여 해질녘에 양양에 도착하였다. 양식은 넉넉히 구했다.
산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쳤다. 어린 선두 생각 때문에 급히 떠나려는 스님은 마을 사람들은 한사코 말렸다. 이 눈보라치는 밤에 어떻게 가겠느냐는 것이었다. 설정스님은 그렇게 해서 하룻밤을 양양에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밤새 눈이 내려 지붕처마 밑까지 쌓여 있었다. 양양도 그러한데 설악산은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눈이 왔다 하면 설악산은 열 자 스무 자씩 쌓이는 게 보통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설정스님은 그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 그 해 겨울 따라 유난히 추위가 심해서 좀체로 눈이 녹지 않았다. 겨울눈이 원망스러웠다.
이듬해 봄이 왔다. 그 동안 몇 번이고 길을 떠났다가는 실신해 쓰러져 있는 설정스님을 사람들이 발견해 대처로 데려오곤 했었다. 여러 번의 사고로 인해 몸은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이젠 봄이었다. 그는 동네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설악산을 향했다.
대청봉에 오르니 저 아래 골짜기에 관음암이 오롯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설정스님은 바람소리에 실려 오는 목탁소리를 들었다. 선두의 목탁소리라는 직감으로 알아챘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았다. 양식도 떨어진 데다 어린것이 몇 달 동안 살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설정스님은 미친 듯이 선두를 부르면서 달려 내려갔다. 단숨에 임자에 이른 스님은 법당 밖에서 숨을 돌렸다. 법당 안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어린 선두의 소리가 목탁소리에 겹쳐 들려 왔다.
그때였다. 웬 젊은 여인이 오색 치맛자락을 끌며 법당을 나오더니 아름다운 채색구름을 타고 멀리 날아가 버렸다. 스님은 두근거린는 가슴을 부여안고 법당문을 조용히 열었다.
"선두야."
"스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싸안았다.
"스님."
"아이구, 네가 살아 있었구나."
"아니, 그럼 제가 살아 있지요. 스님이 오시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그래, 별다른 일은 없었느냐?"
"예, 스님 말씀대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더니 관세음보살이 오셔서 같이 놀아 주고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했어요.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하고 너무나 똑같은 분이었어요."
설정스님은 너무나도 감격하여 선두를 끌어안고 한없이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그 날로 다섯 살 난 선두의 인연을 바탕으로 절 이름을 '오세암'이라 고쳤다.
그 후 오세암은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쳤으나 6.25때 전소하고 지금은 방 한 칸이 이 전설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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