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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부자가 간 음부와 나사로가 간 아브라함의 품은
부자가 간 음부외 나사로가가 아브라함의 품 - YouTube
눅 16:19-24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오늘은 두 번째 지옥으로 알려진 음부에 대하여 부자가 죽어간 음부와 나사로가 죽어간 아브라함의 품은 이라는 제목으로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음부를 불 지옥이라고 이해하고 주장하는 많은 분들이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누가 복음 16장 19절부터 있는 이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주장을 합니다.
오늘 말씀 23절에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라는 말씀이 있고요.
그 다음절 24절에는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락없이 이 장소가 어디 같습니까? 불지옥 같습니까?
지옥에 대한 성경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시는 분들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니지만 바르게 이해하시지 못하시는 분들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불지옥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지옥의 실상을 누가 복음 16장 19절을 가지고는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요?
무조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치과 원장님이신 장로교 집사님 한분이 계십니다.
어느 날 지옥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누가복음 16장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씀을 펴서 자세히 읽어보시고 이 내용이 어떤 것인지 말씀을 해 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자세히 읽으셨는지 다 읽으시고는 진짜가 아닌 비유의 이야기 이네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그 이야기를 비유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하니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 눈이 있고 손가락이 있고 그리고 혀가 있으니 그것은 영혼이 아닌 사람 자체이고요.
사람이 죽으면 몸은 무덤에 있던 화장이 되던 이 땅에 있고 영혼이 빠져 나가서 천국에 간다 하여도 그 영혼에게 손이 있고 혀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르게 보셨습니까? 예 바르게 보셨습니다.
좀 엉뚱한 모습들이 혹 한 번씩 있지만 여러 경우에 있어서 성경을 바르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일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된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직 까지 진짜로 신앙을 하여야 한다 라는 것이 확신이 덜 서서 장로교회를 다니지만 영생을 갈망하는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그런 것이 없이 부인이 다니니까 집안 조용하는 것을 원하여서 그리고 성경을 혼자 공부하는 것이 좋아서 함께 교회를 다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부르실 때 진리를 따라 살아가길 소망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마음의 문이 언제 열릴지 궁금합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좀 더 편견 없이 자세히 읽기만 하여도 그 이야기는 비유로 말씀하신 것임을 이해할 수가 있는데 왜 영원 지옥을 주장하시는 분들은 그 이야기를 실제라고 주장을 할까요?
그들이 주장할 수 있는 지옥의 상황을 설명할 내용이 성경에 그렇게 많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와 나사로 까지 비유라고 인정해 버린다면 영원한 지옥에 대한 증거들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그것은 비유라고 생각하면서도 영원한 지옥의 실상이라고 가르치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그 이야기가 마지막 때에 논란이 될 것을 아셨을 텐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을 그대로 알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전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의 이야기를 하신 이유를 그 앞에 있는 말씀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 앞서 이런 말씀이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은 무엇을 좋아하는 자라고 합니까? 돈을 좋아하는 자라.
그리고 무엇을 듣고 비웃었다고 합니까? 이 모든 것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비웃었던 이 모든 것은 무슨 내용일까요?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두 비유 중 첫 번째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어떤 내용입니까?
그 내용이 본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간단하게 이야기 식으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주인의 재물을 축낸다는 소문이 주인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를 불러서 정리하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는 다른 직업을 알아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명퇴 선고를 들은 이 청지기가 생각합니다.
무엇을 해 먹고 살꼬. 노동을 하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고 그러다가 생각난 것이 아직도 청지기로 있을 동안 좀 더 저지래를 해야 겠다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부릅니다.
자네 우리 집에 얼마 빚지고 있지 예 일억입니다. 그래 여기 증서를 5000만원으로 고치게 내가 이제 그만 두는데 자네에게 해 줄 것이라고는 이 선물 뿐이네 하고 주인의 돈을 자기 마음대로 줄여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 갑니다. 이집에는 우리에게 얼마를 빚지고 있는가“
예 1억5천입니다. 그래 여기 차용증에다가 빨리 7500이라고 쓰게나?
이렇게 비밀리에 한다고 했는데도 근데 이 소문이 누구의 귀에 들어갔다고 합니까? 주인의 귀에 들어갔다.
그런데 주인이 그 불의한 청지기의 행동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합니까?
칭찬했다고 합니까? 칭찬했다. 그것도 여러분들 궁금하죠?
어떻게 칭찬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 30대에 시계 도매상을 했댔습니다.
한집에 들어가서 사장과 예기를 나누는 중에 그 사장이 뜻밖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직원이 삥땅하는 것 알고도 눈 감아 준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삥땅 하지 않고 착하고 순진한 장사 못하는 사람보다 삥땅을 하지만 장사 잘 해 주는 사람이 더 낫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한곳에 가서 기사에게 들은 말이 있습니다.
이 가계에는 사장 금고가 있고 자기 금고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반지나 금을 팔면 대부분은 사장 금고에 넣고 십% 정도는 자기 금고에 넣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것을 누구도 안다는 말입니까? 사장도 알고 있다.
물론 모르는 사장도 있겠지만 알고 있는 사장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인의 돈을 슬쩍 슬쩍 해도 장사를 잘해 주니까 눈감아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한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누가 비웃었다는 말입니까?
눅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왜 비웃었을까요? 속으로 이런 생각들 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해 빠진 네가 어떻게 돈의 위력을 알아. 지금 세상은 돈이 최고야 그리고 하나님의 복은 재물로 증거 하는거야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재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려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한 것입니다.
돈 많은 것이 무엇이 아니라고요? 복 받은 증거가 아니다.
재물의 복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아니라는 말씀을 백성들에게 알게 하려고 하실까요?
재물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일을 지금 누가 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유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과 은혜는 그렇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부자는 세상에 살 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다는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아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거야.
그러나 저 문 턱에서 나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서러기를 주어 먹는 저 나사로는 저주를 받았고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어떤 악한 일로 인하여 저주 받은 것이 분명해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호화롭게 살았고 거지 나사로는 자신의 배 고품을 채우기 위하여 부자의 상만 바라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살면서 자기가 죽으면 지옥갈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있으니까요? 그 은혜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재물이지요.
그리고 거지 나사로는 매일 사는 것이 힘이 들어 죽어 어떻게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같이 죽었습니다.
비유로 가르치기 위함이다 보니 두 사람이 같은 날 죽은 것입니다.
부자는 장례도 거창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죽어 라는 말씀만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거적에 말려서 버려 졌던지 아무렇게나 매장 되었던지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부자는 천국에 간 것이 아니고요? 어디 갔고요? 음부에 갔고
나사로는 지옥에 간 것이 아니고 어디에 갔고요? 천국을 상징하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이것만 해도 비유이죠?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고요.
부자는 지옥이 아니라 음부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방법으로 하여도 될 텐데 왜 이렇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나온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았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요.
무엇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까? 재물 많은 것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하여야 할까요?
우리도 그 교훈을 따라 살면 되는 것입니다.
재물은 하나님의 복으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자의 재물은 오히려 저주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적용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을 가지고 주를 위하여 그리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되어 지면 그것은 엄청난 은총과 복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고요.
나에게 주어진 재물을 가지고 어렵고 힘든 사람을 외면하고 주님의 일에도 모른척 하고 나의 이기적인 만족만을 위하여 살아간다면 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작은 교회지만 성도님들이 돈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면 은혜를 받을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누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주님을 향한 그 마음들이 있기에 주님께 마음을 열어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도와 주는 손길이 바로 주님의 손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사로의 가난은 오히려 복이었다는 것이죠.
우리도 그러한 이해를 하고 살면 재물에 대한 나의 마음도 달라질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 이곳에 부자가 간 음부는 어디일까요?
지난번에 지옥으로 번역된 헬라어 타르타로스가 어떤 것이라고 들으셨죠?
타르타로스를 우리 말로 번역할 때 지옥으로 번역했습니다.
범죄한 천사를 가두어 둔 곳 어디라고 들으셨습니까?
이해가 잘 되지 않으신 분들은 장유교회 채널 말씀따라 사는 길 73.영원한 불지옥은 어디 있을까를 찾아 들어 보시면 아마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범죄한 천사를 가두어 둔 곳은 바로 이 지구성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아담이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 지구 통치권을 내어 줌으로 지구는 사탄의 거점장소가 되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른 곳으로 이동이 제한된 지옥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 지옥인 음부에 대하여 알아보려 합니다.
부자가 죽어 들어간 불타는 지옥으로 소개되고 있는 음부는 어떤 곳일까요?
음부로 번역된 헬라어는 하데스고요 히브리어는 스올입니다.
이 용어가 구약에 약 31회 신약에 약 11회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대부분 음부로 번역이 되었고요.
요즘 새로 번역된 개정 개역 성경은 구약의 원어인 스올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음부로 번역된 성경절이 얼마나 있다고요? 구약에 31회 신약에 11회 그 말씀을 다 찾아 볼 수 없고요 .가능하다면 집에서 다 찾아 보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대표적인 몇 말씀만 올립니다.
욥 17:16 “흙 속에서 쉴 때에는 소망이 음부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시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행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여기까지 대부분 음부는 무덤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나은 번역처럼 여겨지는 내용들입니다.
눅 16: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계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계 20:13-14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특히 야곱과 관련된 내용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창 42:38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창 44:29 “너희가 이도 내게서 취하여 가려한즉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창 44:31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야곱은 자기가 어디로 내려 갈 줄 알았습니까? 음부로 내려 갈줄 알았죠?
야곱의 아들들도 자신들의 아버지가 죽으면 음부로 내려 갈 줄 알았습니다.
음부가 무엇이기 때문입니까? 무덤
음부가 지옥이라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아닙니까?
히브리어 스올과.헬라어 하데스는 대부분 음부로 번역되었는데 음부는 대부분 무덤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용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이들은 돌 침대에서 또 어떤 이들은 궁전과 같은 침대에서 그리고 어떤 이들은 흙침대에서 부활의 날까지 쉬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그 곳을 히브리어로는 스올 헬라어로는 하데스 우리 말로 번역을 할 때 음부로 많이 번역하였음. 무덤이 더 나은 번역일 것임.
그런데 한 말씀이 영원한 지옥불로 오해할 수 있는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먼저 찾아본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영혼불멸을 믿고 있는 많은 분들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사람이 죽으면 몸과 분리된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를 가르쳐 영혼의 이동경로라고들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비유라고 말하면서도 그 이야기는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에게 그럼 모세와 선지자는 누굽니까 라고 했더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사건의 배경이 모세 시대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러한 무지의 말을 할 수도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드린 것처럼 시작부터 비유입니다.
우리는 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품에 들어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품에 그러니 아브라함의 품은 누구의 품에 대한 상징이고요? 아버지 하나님
모세와 선지자는요 성경에 대한 상징어이다.
오늘 부자가 간 음부와 나사로가 간 아브라함의 품은 이라는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 말씀에 대한 오해가 없이 온전히 해결되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예수께서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라는 표현을요 또는 다른 표현으로는 율법과 선지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심으로 구약성경을 언급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당시 유태인들은 모세와 선지자 혹은 율법과 선지라라고 하면 구약성경을 언급한다는 것을 다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이야기에 실제로 죽음에서 살리신 나사로의 이름을 언급하셨다는 것도 의도적이라고 이해되지 않습니까?
죽은자가 살아서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을 들을 것이라고 부자가 말을 하였죠?
그런데 유태인들은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나사로가 죽음 후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언급을 하였습니까?
성경의 기록을 통해 나타난 사실은 죽음후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을 바르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 몇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나사로이고요. 다른 한 사람은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이고요.
또 있지요. 야이로의 딸이고요. 사도바울이 살린 유두고이고요. 베드로가 살린 도르가입니다.
사후세계를 말하려면 이들만큼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하지 못하시게 하셔서 그럴까요?
만약 사후세계의 일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을 통해 기별을 주시지 않게 하실까요?
그러나 없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일은 사탄이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하시지 않습니다.
그뿐아니라 사후세계에 관하여 성경은 더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은 죽음은 잠자는 것으로 묘사하고요.
또한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으로 잠자는 침상에서 일어날 때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돈이 많이 구원받은 줄 알았던 부자처럼 살지 말길 바랍니다.
돈이 없어도 거지 나사로처럼 하늘 소망가운데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말씀으로 인한 확실한 소망중에 그날을 위해 준비하게 되길 바랍니다.
지옥에 대한 못다한 말씀은 다음에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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