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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정말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가?/ 행1: 1~11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성은
더 질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풍요한 생활을 누리면 누릴수록 더 정욕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에 과연 우리가 기대할 만한 것
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똑같은 질문이지만 말을 바꾸어서 또 한번 질문을 드립니다. 5
백 만원이 적은 돈은 아닙니다만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대학을 나온 양가집 딸이, 그
것도 임신 8개월이 된 가정 주부이자 작가 지망생인 20대 여자가 천사 같은 여덟 살 박
이 어린 소녀를 목 졸라 죽이게 하는 이런 비정하고 잔인한 세상이 우리의 마음을 쏟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목사님이 차를 타고 가는데 앞에 오토바이를 몰고 가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바짝 다가가서 보니까 그 오토바이에 스티커 하나가 붙었는데 거기에 이런 글귀가 있었
다고 합니다. "죄의식 따위는 뭉개버려라." 무엇 때문에 죄의식을 가지고 사느냐는 이야
기입니다. 이 세상을 가만히 보면 죄의식은 점점 실종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
서는 죄의식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을 약간 모자란 사람처럼 취급하는 그런 풍조가 만
연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죄의식이 생길텐데 하
나님이 두렵게 느껴지지 않으니까 죄의식도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벨트앙스트(Weltangst)라는 사람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하
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죽어버렸다. 그러나 새로운 두려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다." 연세 드신 분들을 위해서 한번 더 설명하겠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공포를 던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
님이 두렵다' 하는 생각도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편안하고 자유스럽고
모든 것이 자신만만할 것 같은데 나중에 보니 다른 것이 하나 자기 마음에 와 앉아 있습
니다.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가 자기 마음에 들어 와 있는 것입니다. '몸에 무슨 심
각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빨리 죽으면 어떻게 하나?' '애에게 이런 일이 생기기
어떻게 하나?' '우리 가정이 이런 변화가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별의별 걱정 때문에
오는 공포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동서남북을 다 둘러보아도 이 세상은 우리
를 두렵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에 과연 진정한 행복이 있
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을 계속하면 여러분은 아마 마음속으로 '아니야, 나는 이 세상에 희
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세상은 소망이 없어.'하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또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러분은
이 세상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사십니까?' 왜 일주일 내내 세상일에만 마음을 빼앗기
고 사느냐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고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 열 명중의 여덟 명은 일주일 내내 마음이 완전히 세상에 가 있습
니다. 성경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 사랑하
라."고 말씀하지만 그렇게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세상에다 온통 마음과 뜻을 쏟
고 목숨까지 바쳐가며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희망도 없고 소망도 없고 기대
할 만한 가치도 없다고 하면서 왜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느냐 그 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이미 고인이 되었습니다만 미국 예일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라토렛(Latorette) 박사
는 참 유명한 교회사 학자였습니다. 그가 기독교 1900년 사를 연구하면서 무엇을 발견했
는지 아십니까?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들이 건강해서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그런 시대도 있었지만 그 반대로 교회가 형편없이 힘을 잃어버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이렇게 힘을 잃어버리고 부패하고 어떤 면에는 교회가 있으나
마나 했던 그런 무력한 시대를 연구해 보고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교회
가 자신의 모습을 환경에 너무 순응시키려다가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는 교회의
본래의 정체성을 희생시켜버린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스스로 적응을 시켜보려고 하
던 시대와 사회와 그 분위기가 사라져버리자 교회도 함께 없어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로서 살아남아야 됩니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세
상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되는 교회만의 독특한 본질이 있습니다. 이것을 포기하면 안됩
니다. 그것을 포기하면 교회가 아니지요. '옥한흠' 이라고 하는 한 사람, 옥 목사만이
갖고 있는 어떤 본질이나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포기하면 옥한흠은 더 이상 옥한흠
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힘을 잃어버리기 시작
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세상으로 기울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요즈음 세상과 잘
조화를 맞추어서 신앙 생활을 할까?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데 교회도 좀 이렇게 변해야
되지 않겠는가? 세상과 보조를 맞추어서 세상이 원하는 대로 옷을 갈아입어야 되지 않겠
는가?'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면 결국에는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
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의 유행이 얼마나 오래 갑니까? 세상의 가치관 치고 50년이나
100년 이상 이어지는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꾸 변하고 자꾸 없어지는 것
이 세상의 가치관들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세상에 자기의 모습을 맞추려는 한 세상의 가
치관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교회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가 잘못된 때를 가만히 되짚어 보면 전부 그런 식으로 살았던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
다. 저는 오늘날에도 교회가 많이 변질되어 가지 않나 하는 우려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세상에 온통 빼앗기고 살고 있기 때문
입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를 대망 하는가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장 말씀은 우리가 진정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
를 다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 제자들과 만나며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 때 나누었던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였
습니다. 1장 3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해를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시고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
하시니라."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세상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만이 주님의 관심사였고 주님의 대화의 주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
니까?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토록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예수님
은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했지,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
습니다.
1장 1절부터 11절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그 과정과 결말이 잘 정리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시작이 되었는지는 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기록하였노라)."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하고 외치며 가르치기를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전개되어 갑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
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
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나님 나라는 주님이 지상에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이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그 전도 활동을 통해서 땅 끝까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간다고 말씀했
습니다. 그러므로 지상 교회를 왜 세우셨느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그 나라를 완성
하기 위해 그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지상 교회를 세웠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언제 완성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는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
는 제자들을 보고 천사 두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시는 그 날 하
나님 나라는 완성되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관심, 예수님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
밖에 없습니다. 성경 전체를 여러분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보십시오. 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성경
안에 세상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경 안에
는 세상 나라에 대한 청사진이 없습니다. 세상 나라에 대한 어떤 목표가 없습니다. 성경
의 유일한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뿐입니다. 세상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다면 한가
지 이유 때문입니다. 왜 대한 민국이 존재합니까? 왜 오늘날 우리가 사는 20세기, 21세
기가 있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렇습
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백성들이 전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올 때까지는 세상 나라가 존재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세
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터전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다면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타락한 죄악의 소굴,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보면 그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룩한 백성들을 보면 똑같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처음에 한 120명
의 그런 사람이 나왔지 않습니까? 120명을 통해서 나중에 3,000명 5,000명 10,000명 이
상이 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는 자꾸 늘어났습니다. 나중
에는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까지 합세해서 제자들의 수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
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위해 생명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
나라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인생 목표도 하나님 나라에 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가
많아지니까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뛰어 넘어 사마리아와 유대와 저 수리아 지역으로
퍼져 나갔지 않습니까? 그들이 퍼져 나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
니다. "그 수가 더 많아지니라." 나중에는 국경을 넘어서 안디옥에까지, 그 다음에 터키
가 있는 이고니온까지, 그리고 나중에는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까지 바울이 가서 하
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보세요. 바울이
감옥에 앉아 있지만 그를 면회 오는 사람들, 군인이든 귀족이든 천인이든 노예든 헬라
사람이든 로마 사람이든 유대인이든 상관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담대
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마음은 온통 하나님 나라에 가
있었습니다. 세상 나라에 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 우리처럼 눈만 뜨면 건강이 어
떻게 될까 걱정하고 벌벌 떠는 그런 사람이 있나 한번 찾아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돈을
좀더 많이 벌어 가지고 떵떵거리며 살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
아이고 내 자식, 아이고 내 딸, 내 아들 저 놈들 어떻게 잘 되야 될텐데'라며 밤낮으로
아들, 딸 생각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한번 찾아보십시오. 베드로는 자기 아내를 데리
고 다녔고 자식도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베드로가 자기 아내를 걱정했다
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을 걱정하느라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가정을 알뜰히 돌봤습니다. 남편으로서 자기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업에 충실했습니다. 비록 그렇게 살았지만 그들에게 다른 점 하나가 있
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온통 마음이 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그들은 종종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실제로
생명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끌려가서 돌멩이에 맞아 죽었지 않습
니까? 그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일어나니까 집도 빼앗기고, 생업도
잃어버리고 온 가족이 온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지 않습니까? 그래도 좋다는 것입
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을 살았던 사람이지, 세상 나라를 위해 하나님 나
라를 이용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하고 그들을 한번 비교해 봅시다. 똑같습니까? 할렐루야! "주님.
나도 밤낮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비록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
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느라고 정신없이 몰입하지만, 나는 왜 내가 그 일을 하며 사는지
압니다. 하나님 나라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래야 정상입니다. 만일 스스로 생각하기
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과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된다면 이단이든지 아니면 사이비
기독교인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대각성 전도 집회를 한다고 해도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
각성 전도 집회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자. 그래서 주님이 재
림하시고 그 나라가 완성될 때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자가 되자.'라는 의미에서 복음
전하려고 하는 것이 대각성 전도 집회 아닙니까? 혼자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 교회가 이
렇게 하자고 할 때 거기에 묻혀서라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해야 되고 마음을 쓰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년이 다 가도록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하나
님 나라를 대망하고 있다고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산다고요? 어떤 멍청한 사
람이 그 말을 곧이 듣겠습니까? 사람도 곧이 듣기 어려운 말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겠습니
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수십 만 명되는 제자들하고 우리 사랑의교회 교인들하고 비교
할 때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단이지요. 똑같아야 됩니
다. 똑같아야 돼요. 대각성 전도 집회를 한다고 할 때 "이렇게 좋은 기회 하나님이 주셨
으니 감사합니다. 주여 누구를 전도할까요? 이번 기회에 누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까
요?" 라는 자세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전도할 사람도 주시고 만나게 하시고 접촉하게 하
시고 또 그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기쁨도 맛보게 하실 텐데 마음이 온통 세상에 가 있
으니까 대각성을 하는지 소각성을 하는지 중각성을 하는지 알 수가 없지요. 여러분, 양
심적으로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세상 나라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
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시기 때문에
사랑의교회를 비롯한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에 세 가지 중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라고 세 가지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예수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의 이름! 이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
인지 아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
작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누구의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까? '내'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
다. 여기서 '내'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
다. 할렐루야! '내'가 누구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십
니다. 할렐루야! '내'가 누구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손에 쥐고 계시는 만왕의
왕, 만유의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에베소서 1장 21절을 보면 '모
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
름 위에 뛰어난 그 이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온 만물
을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오직 그 이름만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권세가 있었는지 베드로가 이 이름을 가지고 한 30
분 설교를 하자 예수를 십자가 앞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던 폭도들이 가슴을 치면서 회개
하고 돌아왔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
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리니 기록되었으되 너희가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하신
말씀처럼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자 그 말씀 앞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수많은 사
람들이 "형제여, 우리가 어떻게 할꼬, 어떻게 할꼬."하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죄 사함
을 얻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해 보지만 한사람을 전도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쏘아보면서 '어디 한번 지껄여봐라' 하고 쳐다보는 사람, 그 런 사람을 우리 힘으
로 전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 말 하면 이렇게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저 말 하면
저렇게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하면서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똑똑한 사은이 없는 것처럼
거만을 피우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떻게 우리 힘으로 예수 믿게 합니까? 더욱이 예수님
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르던 그런 폭도들을 무슨 재주로 예수 믿게 만듭니까? 그
러나 예수의 이름의 권세는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권세가 얼마
나 대단한 지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증거를 하자 전부 다 거꾸러지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명령하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걷고 뛰
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신기해 가지고 베드로 주변에 몰려들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
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10). 예수의 이름은 그만큼 권세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인도 선교사로서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스탠리 존스라고 하는 선교
사인데요, 평생을 인도에 가서 복음 전하느라고 생을 바친 분입니다. 그분이 89세에 뇌
일혈을 일으켜 가지고 반신불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제로 보스턴에 있는 병원
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89세 나이에 그런 병이 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분이
병원에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으면서 의사가 들어오면 들어오는 의사마다 "닥터,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세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스탠리 걸으라. 나에게 그렇게
좀 이야기 해 주세요."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하도 부탁을 하니까 의사가 그분에게 왕진
을 올 때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걸으라" 이렇게 말했
다고 합니다. 그러면 스탠리 선교사는 "아멘" 하고 대답했습니다. 간호원이 들어오면 간
호원보고도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간호원이 치료
를 하다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 걸으라" 하고 말하면 또
다시 "아멘" 하고 대답했습니다. 약간 노망이 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분은 6개월만에 병상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90살의 나이에 또 다시 인도에
선교하러 갔다고 합니다.
예수 이름의 권능과 권세와 영광을 믿으니까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의 권
능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도 한번 해봅시다.
병든 사람이 있으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딸아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하고 명령하고, "아멘"으로 화답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나을 수 있습니
다. 우리가 예수 이름의 권세를 안 믿으니까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믿어보십시오. 왜
못합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 만큼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보고 가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라고 할
때 "네 이름을 가지고 가라"거나 "사랑의교회 담임목사 옥 목사 이름을 가지고 가라"거
나 "사랑의교회 이름을 가지고 가서 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내' 이름, 곧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가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지
고 있으면서도 그 이름을 수건에 싸서 땅속에 묻어 놓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국 교
회의 어떤 통계를 보니까 일년 내내 가도 전도 한마디 못하는 사람이 98퍼센트라고 합니
다.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이름으로 도무지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 예수의 이름은 나만 알고있기에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은 너무 존귀하여 나 혼자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은
너무나 능력이 커서 숨겨 놓고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
다. 대각성 전도집회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이름을 가지고 이 더럽고 냄새나는 서초동
을 위시해서 여러분이 살고 있는 모든 지역을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각성 전도집회를 아직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혹 계십니까? 그러고도 무슨 낯으로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 놓고 어
떻게 감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십니까? 그래 놓고 급하면 하나님을 찾습니까?
성령의 권능
둘째로, 성령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
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여러분, 우리 분명히 합시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습니까?
안 오셨습니까? 오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성령은 분명히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권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전도 못해요. 나는 은
사가 없어 전도 못해요. 다른 사람 앞에 가면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도무지 말을 못해
요."라는 따위의 변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도 능력이 안 나타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 안 믿는 이웃 아주머
니하고 같이 서서 내려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못 듣습니까? '예수 믿자고 한마디만 해. 한 마디만 해봐.'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니야, 괜히 말을 꺼냈다가 무안만 당할 거야.' 그렇게 갈등하는
사이 1층 문이 열립니다. 그러면 속으로 쾌재를 부릅니다. '아이고, 잘 가세요. 시원하
다.' 성령께서 안 믿는 사람을 만나거나 필요한 사람을 볼 때마다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
마음속에 속삭여 주시는데 우리는 자꾸 거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능력이 안 나타나
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백만 킬로와트의 전력을 만들어내는 원자력발전소에서 우리 집에까지 전선
이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발전소가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가 스위치를 올
리지 않으면 밥도 못하고 전등도 못 켭니다. 아무리 발전소에서 엄청난 전기를 보낸다고
해도 마지막으로 그것을 작동하는 스위치를 틀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교회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의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성령은 결코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엄청난 일을 하십니다. 베드
로만 잘났습니까? 우리도 잘 났습니다. 베드로만 3천명을 전도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
까? 우리도 3천명을 전도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만 만 명 전도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의교회도 만 명 이상, 십만 명, 백만 명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
가대가 찬송을 얼마나 은혜롭게 잘 불러주셨습니까? "전능왕 오셔서..." 전능왕 오시라
고 소리만 지르지 말고 전도하십시오. 백성이 있어야 왕이 있지 백성이 없는데 혼자 무
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왕이 영광을 받도록 하려면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가지고
나가서 전도해야 됩니다. 순종하면 능력이 흘러 나갑니다. 믿습니까? 능력이 나로부터
흘러 나갑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환상
셋째로, 하나님 나라의 꿈, 곧 환상을 주셨습니다. 2장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
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 여기서 꿈이나
환상, 예언은 하나님 나라의 꿈이요 환상이요 예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잘 믿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꾸 늘어나고 그 다음에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
워오면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환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환상과 꿈을 가지고 세상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매일마다 반복해
서 외우고 기도하도록 주기도문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
까? 나라가 임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
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과 권세, 이 모든 것을 소
유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다스려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가장 중심 사상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날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면서 그
꿈을 먹고살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여러분의 꿈과 환상이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까? 밤낮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환상은 무엇입니까? 수지 지역의 60평 짜리 아파트입니까? 그래도
마음에 조금 가책이 되면 이렇게 묘하게 둘러대지 않습니까? "주여, 60평 짜리 주시면
거기에서 우리 다락방 할거예요. 주여 60평 주시옵소서." 참으로 웃기는 소리입니다. 여
러분 마음속에 있는 꿈이 무엇입니까? 환상이 무엇입니까? 밤낮 없이 생각하는 것이 무
엇이냐 그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양심적으로 깊이 생각해 봅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
신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영의 일이란 하나님 나라
의 환상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환상이 있습니까? 있으면 성령의 사람입니다. 이
환상은 없고 세상 환상만 가득합니까?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
랍니다. "성령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에 마음을 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수준에
만 머물면 안됩니다. 관심이라는 것은 분위기가 바뀌면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일에 관심을 기울일 뿐 아니라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헌
신하는 사람은 분위기가 바뀐다고 중단하지 않습니다. 헌신하는 사람은 변명하지 않습니
다. 결과를 볼 때까지 그는 쉬지 않습니다. 이게 헌신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은 주님이 시간을 내 놓으라고 하면
시간을 내놓고,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돈도 내놓고, 몸바쳐 헌신하라고 하면 몸바쳐 헌
신하고, 주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든 주저 없이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느 목사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부럽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미국의 어느 신학교를 방문했는데 그 신학교가 요즘 재정적으로 조금 어려운가 봅니다.
좋은 교수를 영입하고 싶어도 재정 확보가 어려워 못하고 있던 터에 한국에서 온 이 목
사님을 붙들고 사정을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신학교에 한국 학생만 해도 천명이 넘습
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가 도와줄 만 하지 않습니까? 석좌 교수를 모실 수 있는 재정
을 지원해 주세요." 석좌 교수란 어떤 자금을 준비해 놓고 그 자금에서 나오는 돈을 가
지고 교수를 쓰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석좌 교수 하나를 쓰려고 하면 적어도
백만 불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백만 불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사정
을 들으니까 하도 딱해서 그만 "어디 한번 해봅시다."하고 말을 하고 왔다고 합니다. 그
런데 이 목사님으로서는 그 일이 여간 고민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교회도 지금
수백 억 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터라 교회에다 그 돈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
다고 자기가 약속한 일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 난처한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고민하며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이상하게 중소기업 하는 사장 집
사님이 자꾸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 목사님은 점심을 같이 하자고 그 집사님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눈치를 봐가면서 "집사님, 요즘 사업이 어떠세요?"하고 물었대요. 그
랬더니 집사님이 "요즘 참 형편이 안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회사도 규모를 많이
줄였습니다. 그래도 규모를 줄인 뒤로는 지난 한해 동안 하나님이 어렵지 않을 정도의
은혜를 주셔서 조금 벌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액수를 이야기하더랍니다. 참 재미있지
요. 아무리 집사라고 해도 자기 사업에서 번 순수익 액수까지 목사에게 다 고해 바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듣고 보니까 그 액수가 중소기업이 1년 동안 번 돈으로는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불경기에 그 정도 벌었다는 게 얼마나 대단
합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그랬답니다. "나에게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지도자가 될 사람을 키우는데 참 필요한 돈이니 날 좀 도와주십시오." 그 집사님은 사정
을 듣고 나서는 "주님이 쓰시겠다면 드려야지요."하면서 대뜸 9억을 내놓았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그랬습니다. '나한테는 1억도 안 가져오는데 이 사람
은 복도 많네.' 돈 번다고 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씁니까? 9억이 적은 돈입니까? 그럼에
도 불구하고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는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써야겠다."하는 확신이
서니까 조금도 아낌없이 내 놓지 않습니까? 이게 헌신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헌신
자요,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벌어 가지고 결국은 가져가지도
못할 것, 자식들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기 십상인 그 돈을 날마다 쌓아놓고 있으려고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중세기의 유명한 철학자 루소는 예수 믿는 사람을 향해서 빈정거리
면서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도대체 교회라는 것을 보면 이상해. 교회 가서 보면 해결
이 불가능해 보이는 충성 딜레마에 빠져 있어. 모두가 충성 딜레마에 빠져 있어. 하나님
나라만 찾고 있어. 하나님 나라만 저렇게 찾고 충성하다가 어떻게 그들이 세상 나라의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겠는가? 세상 국가에 훌륭한 시민이 되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
만 날마다 찾아서 되겠는가?'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그럴 때 캠브리지대학의 C.S. 루이스
교수가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늘을 겨냥하라. 그러면 땅은 덤으로 얻
게 될 것이다. 땅을 겨냥하라. 그러면 어느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진리입니
다. 하나님 나라를 얻는 사람은 세상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잃는 사람은 세
상도 다 잃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우선 순위를 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먼저 구하면 땅의 것은 덤으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
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세상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18:2). 바벨론은 세상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세상은 반드시 없어집
니다.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운명입니다. 이런 세상 나라에
우리가 마음을 빼앗겨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다시는 저주가 없으며, 하나
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
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계
22:3-5). 할렐루야! 예수님과 더불어 세세토록 왕노릇 할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
습니다. 여러분, 어느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마음을 쓰고 헌신하고 충성해야 되겠습니
까? 성령께서 이 자리에 임하셔서 다시 한번 우리의 생각을 교정해 주시고 성령께서 우
리 마음에 임하셔서 우리 마음에 있는 세상의 바벨론 신상을 다 깨트려 주시기를 바랍니
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환상이 있게 하시고,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나가면 우리 앞에 있는 모든 불쌍한 영혼들이 두손들고 주님 앞으로 돌아
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예루살렘이 어디입니까? 우리 가정에 있는 믿지 않는 식구일 것입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마리아가 어디입니까? 아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라든지
동네가 될 것입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유대 나라가 어디입니까? 아마 대한민국
일 것입니다. 우리의 땅 끝이 어디입니까? 아마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열방이 될 것입니
다. 주님께서 사랑의교회를 향해, 한국 교회를 향해, 세계 교회를 향해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하늘의 환상을 가지고 이 나라를 완성하라고 명령하십니
다. 우리 모두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하늘을 겨냥하십시오. 그러면 이 땅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땅을 생각하고 땅을 겨낭하고 계십니까? 결국 다 잃어버릴 것입니다. 어
리석은 짓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우리의 생을 아름답게 헌신하는 삶이 되기
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여러분의 직장도, 여러분의 재물도, 여러분의 젊음도,
여러분의 건강도 하나님의 영광, 그 나라를 위해서, 영원한 것을 위해서 바치는 아름다
운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