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의심하십니까? /마11:1-6 /20211003낮
오늘 말씀 제목이 “의심”입니다.
누가 의심한다는 겁니까?
무얼 의심한다는 겁니까?
침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의심이 생겼다는 겁니다.
‘과연 저분이 메시아일까?’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먼저 의심을 가진 사람은 놀랍게도 다름 아닌 침례 요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가? 여쭙고 오라.”고 합니다.
2~3절에,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나아와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소문만 듣고도, 믿고 고침과 구원을 얻었는데, 요한이 누굽니까?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입니다.
자신은 광야의 소리요, 손수 침례를 베풀었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던 사람인데 그런 침례 요한이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의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함을 보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런 요한이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가 맞는가?’에 대한 갈등이 일어난 것입니다.
침례요한이 이렇다면 우리 또한 살다가 얼마든지 갈등과 의심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의심은 마귀가 주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뱀이 여자를 넘어지게 할 때에도 유혹하고 의심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한 게 아닙니다.
“참으로 먹지 말라고 하더냐?”고 의심을 심어준 것입니다.
창3:1, “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러자 여자가 대답합니다.
창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여자가 의심하는 순간 자기 해석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창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의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그 심판을 약화시켜 죄 가운데 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죽을까 하노라”는 자기 해석을 낳게 된 것입니다.
이게 의심에서 시작된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심의 덫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은 침례 요한이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의심이 생겼다는 말입니까?
첫째로 환경이 문제였습니다.
2절에 “요한이 옥에서” 라고 기록합니다.
지금 요한이 옥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요한이 죄를 지었습니까?
못된 짓을 했습니까?
다만 천국을 외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감옥이라는 겁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살아날 소망도 없습니다.
결국 목이 베임을 당하고 죽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회의가 생기고, 좌절이 생긴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내가 증거 한 복음이 사실이라면, 그 예수가 정녕 메시아라면, 어떻게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하는 의심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지금 처한 환경이 너무 나빠지다보니 회의가 생기고, 의심이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열심히 외쳤습니다.
살기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옷도 약대 털옷이나 입고, 먹는 것도 메뚜기와 석청으로 의식주를 해결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복음만을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런 요한이지만 처한 환경이 최악이 되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약을 가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살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 날 불치의 병으로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말씀대로 살고, 법도 지켰는데, 사건 사고에 휘말릴 때가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인해 평생의 사업을 하루아침에 포기하게 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일들은 당해보지 않고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기도하라’고요?
기도를 하는 것도 어느 정도일 때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사방팔방이 다 막혀 버린 듯한 환경에 빠지고, 그 고난이 길게 이어지면, 주님을 부를 힘도 없는 겁니다.
그럴 때 쉽게 찾아오는 의심이 ‘주님이 계시기는 계실까?’
‘주님이 나를 아시기는 아실까?’
‘교회를 다녀서 뭐하나?’
그 순간 좌절하고, 포기하고,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럴 때 필요한 게 옆에 사람인 것입니다.
이럴 때는 목사의 말은 들리지도 않습니다.
‘목사니까 그런 말을 하지........’
‘목사가 우리 사정을 알어?’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10장 24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는 겁니다.
이것이 침례 요한의 의심의 모습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옆을 돌아보라는 겁니다.
그걸 하라고 권사님들을 세우셨다는 겁니다.
그걸 하라고 회장님들을 세우셨다는 겁니다.
그걸 하라고 선생님들을 세우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이 의심을 품게 된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침례를 베풀 때 요단강에서 직접 만나고, 먼발치에서 바라본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멀찌감치 따라가면 넘어진다는 사실을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주님과 따로 만났다거나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과 갖가지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문으로만 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체험한 경험이 없는 겁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설교로만 들어서는 힘이 없습니다.
남의 얘기만 들어서는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만나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듣고, 아는 지식으로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넘어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성령을 받으라는 겁니다.
받기 위해서 기다리라는 겁니다.
그렇게 의심하는 침례 요한에 대하여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주님이 행하신 이 모든 기적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즉 이런 기적과 이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메시아이심을 증거 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을 들으면 침례 요한의 믿음이 회복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사실을 들은 대로, 본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적과 기적을 행하는 것은 이미 이사야 35장 5~6절에서 오실 메시아가 행하실 일들을 예언해 놓은 그대로 라는 겁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마지막으로 주시는 말씀이 6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했습니다.
실족이라는 말은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잃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다가 실족하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예) 어떤 이들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싸움질 하는 것을 보고 실족합니다.
어떤 이들은 목사나 성도들의 비리를 보고 실족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믿어도 소용없다’고 하면서 실족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실족하여 불교나 타종교로 개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취미생활이나,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심심풀이나 소일거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살고, 믿지 않으면 영원히 죽는 일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영생과 영벌이,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로 갈라지는 일입니다.
그러니,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일이 아닌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 반드시 한 번 죽습니다.
그리고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길인 줄 믿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이 땅에서 잘사느냐 못사느냐 정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영원한 운명이 달린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설사 초대교인들이 당했던 것처럼 회당에서 쫓겨나고, 출교당하고, 목숨을 잃을지라도 믿음만은 포기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목숨을 버리고 순교를 할지언정 믿음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죽을 지언정 믿음을 포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나 환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로 인하여 의심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일로 인하여 실족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마지막 때에는 환난과 핍박이 닥쳐 올 수 있다고 하십니다.
‘회당에서 출교당하고, 세상에서 왕 따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는 순교를 당하는 시련이 찾아 올 것이라’는 겁니다.
그럴 때 절대로 실족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침례요한의 믿음이 흔들렸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다 말아야지 실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실족하는 것은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실족만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사전에 실족은 결코 없다(There is never going astray in my dictionary.)’라는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앞에서 드린 말씀을 꼭 기억해야합니다.
요한의 믿음이 흔들린 것은 그가 옥에 갇혔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살다가 옥에 갇힌 것 같을 때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물질의 옥, 사업의 옥, 자녀 문제의 옥, 그런 옥에 갇혀 많은 이들이 실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 믿음이라면 그 옥에 갇혔을 때가 기도할 때이고, 그때가 주님을 찾을 때이고, 주님을 만날 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다 여기서 만납니다.
여기서 기도하고
여기서 부르짖고
이때가 기도할 때이고
이때가 금식할 때이고
이때가 철야할 때이고
누군들 좋은 때 감사를 못하겠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옥에 갇혔을 때에도 감사하라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아까 요한이 의심이 생긴 두 번째 이유가 체험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만이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알고 믿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불도장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침례요한처럼 어려움이 닥히면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3년간이나 주님과 함께 살고도 주님이 고난을 당하시자 다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다가 오순절 때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에 모두가 능력 있는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겁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성령이 오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할렐루야~
그렇게 성령만 받고 충만함만 얻으면, 표적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요14:12,
말씀대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요14:26절에,
주님을 증거하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요15:16
여러분, 힘드십니까?
어려우십니까?
이때가 기도할 때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실라처럼 옥에 갇힌 것 같은 때가 바로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할 때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코로나로 인하여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떤 이들은 그럽니다.
이렇게 살바엔 차라리 감옥이 더 편할 것 같다고요.
예, 그러기에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성령님을 사모하고, 도우심을 사모하고, 사모할 때인 줄 믿습니다.
2059장 성령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