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이 울려 퍼지는 번잡한 거리, 저마다 개성을 드러낸 트리, 쉴 새 없이 반짝이는 조명,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그 모든 풍경을 우리는 크리스마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벌써 10년째, 도심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크리스마스를 맞는 마을이 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시골길을 소박하게 단장하고 주민들과 타지 관광객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나주 이슬촌이 그 주인공. 2007년 겨울 '이슬촌의 해피크리스마스'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이후 국내 최초 크리스마스 마을로 발돋움한 이슬촌으로 지금 떠나보자.
축제가 시작된 이슬촌의 저녁 풍경
국내 최초 크리스마스 마을, 이슬촌의 이유 있는 변신
이슬촌은 나주의 북쪽, 병풍산자락에 위치한 작은 시골마을이다. 정식 명칭은 노안면 양천리 계량마을이지만 일교차가 심해 아침마다 풀잎에 이슬이 잘 맺힌다고 해서 이슬촌이라 불린다. 요새는 이슬촌이라는 이름보다 크리스마스 마을이라는 수식어가 더 유명하다. 마을 입구 담벼락에 그려진 산타 벽화도 마을의 정체성을 엿보게 한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카페'와 '산타 우체국'도 있다. 2007년 농가소득 증대와 차별화된 마을축제 개발을 목적으로 크리스마스 축제를 열었던 것이 해마다 규모가 커진 덕분이다. 작년에는 축제 기간 동안 8천명 이상 인파가 몰렸다. 오로지 마을 주민들의 힘으로 썰렁하기 그지없는 농한기 농촌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 놓은 셈이다.
[왼쪽/오른쪽]정겨운 크리스마스 카페 / 아기자기한 산타 우체국
산타로 변신한 이슬촌 주민들<사진제공·이슬촌>
이슬촌의 크리스마스 축제는 환경적 여건과 주민들의 특성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물이다. 마을 한복판에 나주 지역 최초의 천주교회인 노안성당이 있는데, 주민들이 크리스마스 때마다 이곳에서 트리를 만들고 성당 주변을 꾸미던 것이 지금의 축제로 발전했다. 주민의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기에 이러한 지지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안성당은 지금까지도 마을의 상징이자 크리스마스 축제의 중심지로 자리를 우뚝 지키고 서 있다.
이슬촌의 중심이자 나주 최초의 천주교회, 노안성당
이쯤 되면 노안성당의 프로필이 궁금해진다. 1894년 박해를 피해 서울에서 피신 온 정락이 이곳에서 약방을 운영하며 주민들을 하나 둘 씩 전도하다 계량 공소를 세운 것이 노안성당의 시초다. 이후 여러 신부의 손길을 거쳐 본당이 세워지고 확장과 신축을 거듭하여 1957년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2002년 등록문화재 44호로 지정됐다. 웅장하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이슬촌을 닮아 소박하고 아늑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아기예수가 탄생하던 그 날의 분위기도 이러했으리라.
노안성당 맞은편에 전시된 작품. 동방박사와 천사가 아기예수 앞에 경배하고 있다.
성당에 얽힌 믿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한국전쟁 중 나주를 점령한 인민군이 이 성당을 눈엣가시로 여겨 불태울 것을 지시했으나 병사들이 성당이 붉게 타오르는 모습을 보고 이미 불 질러진 것으로 착각하여 되돌아가길 세 차례나 반복했다는 내용이다. 성당의 훼손을 막은 환상에 대한 이야기는 잡지에도 소개돼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노안성당의 모습이 처음과는 다르게 보인다. 어쩌면 이곳은 성스러운 기운이 깃든, 최적의 크리스마스 마을인지도 모른다.
복잡하고 뻔한 크리스마스는 NO! 미리 보는 이슬촌 겨울풍경
올해 해피크리스마스 축제는 '크리스마스 빛축제'라는 이름으로 12월 21일부터 25일까지 5일간 이슬촌 일대에서 열린다. 마을 입구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면 이슬촌 표 크리스마스 축제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다. 주요 프로그램은 산타 트랙터 타기, 양초 만들기, 소망엽서 쓰기, 볏짚 미끄럼틀 타기 등이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부녀회 노인회 가릴 것 없이 주민 모두가 한 마음으로 차근차근 손수 준비한 것들이다. 아이들이 다칠까봐 굳이 미끄럼틀에 볏짚을 엮어 깔아놓은 것만 봐도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축제를 준비해왔는지 알 수 있다.
미끄럼틀에 깔 볏짚을 손수 엮는 마을 어르신들<사진제공·이슬촌>
[왼쪽/오른쪽]어린이 전용 짚풀 썰매장 / 출동 준비를 마친 산타 트랙터
오후 6시부터는 나주 시민들의 재능기부로 진행되는 소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난타, 장구, 국악, 오카리나, 우크렐레, 통기타, 마술 등 장르도 다양하다. 포토존을 만들어 줄 빛 조형물들은 오후 5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불을 밝힌다. 장미정원, 빛의 정원 등 다양한 테마로 나뉜 공간을 둘러보거나 소박하게 조성된 사진전, LED 작품전시관을 구경할 수도 있다.
[왼쪽/오른쪽]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먹거리장터 내부 / 두루치기를 시키면 두툼한 두부도 함께 나온다.
둘러보다 출출하면 이슬촌 향토음식 먹거리장터에서 배를 채우면 된다. 먹거리 장터는 무대가 설치된 운동장의 오른쪽 끝에 위치해 있다. 비닐하우스 안에 장작난로를 설치해 온기를 더했다. 메뉴는 사골 곰탕, 사골 떡국, 파전, 돼지주물럭, 순대 등이다. 식사류는 6~7천원, 요리는 1만 원 안쪽에서 해결 가능하다. 주문을 하면 당번을 맡은 어르신들이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어 낸다. 기교는 없지만 투박하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맛이다. 음식을 먹다 보면 무대에서 들려오는 공연 소리에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통기타를 치며 부르는 캐럴이 이렇게나 좋았던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군고구마 익어가는 밤
마을 단위 축제가 이토록 정교한 모양새를 갖추기까지 주민들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지 쉬이 헤아리기 어렵다. 프로그램 기획 및 섭외부터 전구달기, 무대설치, 먹거리 장터 운영, 각종 시설물 관리까지, 주민 개개인이 뜻을 하나로 모아 온전히 제 몫을 다 해야만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슬촌은 그 어려운 걸 자꾸만 해낸다. 누구 한 사람쯤은 축제를 귀찮게 여길 수도 있고 특별한 날 가족들과 타지로 여행을 갈 법도 한데, 모두가 1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축제 준비에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투자했다. 이러한 마음이 모여 지금의 이슬촌이 만들어졌다. 주민들은 '국내 최초 마을 단위 크리스마스 축제 개최지'라는 자부심을 갖고 10회를 맞는 2017년부터 이 축제를 나주시 대표 겨울축제로 발전시키겠다는 계획이다.
하얀 꽃송이가 만발한 장미정원
[왼쪽/오른쪽]두둥실 떠오른 풍등 / 얼어붙은 손발을 녹이는 따뜻한 군불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이슬촌 시설 이용료 대부분이 현금결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입장권은 초등생부터 성인까지 5천원이며 유치원생 이하는 무료다. 트랙터나 짚풀 썰매를 타는 것도 입장권과 별개로 이용료가 발생하니 참고하도록 하자.
컬러볼로 아름답게 꾸민 수영장
이슬촌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 농촌체험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을 넘겨 이슬촌에 방문하더라도 즐길거리는 충분히 많다. 이슬촌은 크리스마스 마을이 되기 이전부터 각종 농촌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체험마을이었다. 2004년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된 후로는 방문객이 크게 늘었다. 봄에는 모종심기, 여름에는 대나무 물총놀이, 감자 캐기, 옥수수 수확하기, 고추 따기, 손모심기, 가을에는 벼 탈곡하기, 고구마 캐기 등 계절별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깻잎김치담기, 인절미 떡매치기, 짚풀 계란꾸러미 만들기, 천연염색 등 상시 가능한 체험도 있다. 마을 내 야영장과 민박집도 있어 숙박 걱정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들리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