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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순교기념관 - 영남지역 순교자의 피가 정자를 적시다 |
주소는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245번지. 도로명주소는 대구시 중구 관덕정길 11.
무과(武科) 과거장에서 처형장으로
예로부터 활쏘기는 단순히 무예 중의 하나를 넘어서 덕을 기르는, 곧 인격을 연마하는 수단을 뜻했다. 이는 예기(禮記) 사의(射儀)편에 ‘활을 쏘는 사람으로부터 높은 덕을 보게 된다는 있다.(射者所以觀盛德也)’ 말에서 유래한다.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기 위해서는 먼저 올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이 필요하고, 설령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것이다. 이를 유학에서는 이를 반구저기(反求諸己)라고 한다.
이로 인해관덕(觀德)은 활쏘기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고, 관덕정은 궁도장, 더 나아가 무예를 익히는 장소를 이르게 된 것이다. 전국에 관덕정이라는 이름이 많은 것도 이에 근거한다. 앞산공원 ‘관덕정’도 나중에 알아보니 그 역시 국궁 궁도장이었다.
대구에 관덕정이 세워진 것은 조선 영조 25년이었는데, 무과(武科)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기 위한 관청, 곧 도시청(都試廳, 과거장)으로 지은 것이다. 건물 크기는 약 백 명 정도가 들어앉을 넓이였고 전형적인 정자 건축 양식으로 단청까지 있었으며, 관덕정의 앞뜰은 수백 명이 들어설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앞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고 한다. 대구 관덕정의 남쪽에는 여인의 아름다운 눈썹 같다는 아미산(娥眉山)이라는 이름의 나지막한 산이 있었는데 그 산밑 일대가 관덕정의 앞마당이었다. 지금의 위치로는 적십자병원과 동아쇼핑센터, 반월당 네거리 일대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관덕정의 앞마당은 무과 과거장이나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하는 연병장 구실뿐만 아니라 세시 행사의 하나인 줄다리기도 행해졌다고 한다.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였다. 1593년 달성에 감영이 처음 설치된 후 안동부로 옮겼다가 선조 34년(1601년)에 감영을 대구에 영구 설치키로 확정함에 따라서 포정동(현 경상감영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대구는 영남지방 행정의 중심이 되었다. 이에 따라 사법권을 가진 관찰사(감사)가 주재했기에 자연히 각종 죄를 지은 이들을 잡아 가두는 감옥이 감영 부근 서내동(西內洞)에 설치됐으며 또한 가까운 곳에 처형장들이 생겨났다.
관덕정(觀德亭,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245번지, 도로명 주소 중구 관덕정길 11) 앞마당은 아미산에서 내려오는 산자락이 냇물과 맞닿는 곳에 자리잡은 넓은 공터여서 일찌감치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이용되었다. 이곳과 함께 또 다른 대구의 형장으로는 군사훈련장이었던 장대벌 터(현 봉덕동)와 날뫼(현 비산동)가 있어서 이를 3대 처형장이라고 불렀다.
관덕정의 순교자
조선 후기 천주교가 보급되면서부터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처형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는데, 을해박해(1815)와 정해박해(1827)부터 기해박해(1839)와 병인박해(1866)에 이르기까지 경상도 지역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는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감영 감옥에서 옥사하거나, 관덕정 등지의 형장에서 처형되었다.
▲을해박해
1815년 4월, 청송의 노래산(老萊山)에서 고성운(高聖云)·고성대(高聖大) 형제 등 35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경주진영로 압송되어, 이 중 19명은 배교, 2명은 옥사하고 14명이 다시 대구의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같은 시기 진보의 머루산(지금의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 138)에서는 김시우(金時佑)를 포함한 33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안동진영에서 20명이 배교하고 나머지 13명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영양의 우련전과 봉화 곧은정 등에서 체포된 김종한(金宗漢), 김희성(金稀成) 등 6명의 교우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렇게 대구감영에 이송된 33명의 교우는 경상감사가 처형할 것을 상주하여 약 1년 6개월 후에야 조정의 허락을 받았는데 그 기간 동안 33명의 교우 중에 14명이 옥사하고 고성운, 고성대, 김종한, 김희성, 김화춘, 최성열(崔性悅), 이시임(李時任) 등 7명의 교우들만 남아 1816년 12월 19일(음 11월 1일)에 관덕정에서 참형이 집행되었다.
▲정해박해 기해박해
1827년의 정해박해 때 경상도의 교우촌은 다시 한 번 도륙 당했다. 상주 멍에목(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과 앵무당(상주군 화남면 평온리) 교우촌에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상주와 안동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도중에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보록(바오로) 등 6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대구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다른 박해 때와는 달리 그들은 조정의 형 집행 허가를 받지 못하여 약 12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박보록(바오로), 안군심(리카르도), 김세박(암브로시오) 3명은 옥사하고 바오로의 아들 박사의(안드레아), 김사건(안드레아), 이재행(안드레아) 등 3명만이 기해박해가 진행 중이던 1839년 5월 26일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 동안 옥살이의 고통이 어떠했겠는가?
▲병인박해 무진박해
이로부터 27년이 지난 1866년의 병인박해 때 경상도 여러 곳에서 또 다른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1967년 1월 20일, 이윤일 요한, 김예기(金禮己), 김인기(金仁己)와 1868년 10월 12일(무진박해)에는 박대식 빅토리노, 박요셉, 박수연, 송 마태오가 참수 순교했다.
이들 가운데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를 당한 성 이윤일(요한)의 순교 행적이 돋보인다.
이윤일은 충청도 홍주 출신의 유명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난 요한은 혼인한 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과 함께 문경 여우목(경상북도 문경읍 중평리)으로 이사를 와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던 중 여우목 교우촌에도 박해 소식이 들려왔지만, 이윤일의 가족은 순교할 원의를 품은 채 체포될 날만 기다렸다.
드디어 1866년 10월, 문경 관아에서 여우목 교우촌의 실상을 알아내고는 포졸들을 보내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포졸들이 마을 어구로 들어서자 이윤일은 태연하게 자신이 교우촌 회장임을 밝히면서 그들을 맞이하였고,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문경을 거쳐 상부 관아가 있는 상주목으로 압송되었다. 거기서 그는 수차례 혹독한 문초를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그의 마음은 오히려 더욱 굳어져만 갔다. 이에 상주 목사는 그를 천주교의 두목으로 지목하여 대구 감영에 보고하고 그곳으로 압송시켰다. 이때 그는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성실하게 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런 다음 나의 뒤를 따라오너라." 하고 당부하였다.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사형을 언도 받고 관덕정 형장으로 이송되어 1866년 12월 26일(양력 1867년 1월 21일)에 휘광이의 칼날을 받고 순교했다.
위와 같이 관덕정에서 처형된 조선인 천주교인의 수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을해박해 때의 7명, 정해 · 기해박해 때의 3명, 병인박해 때의 7명이며, 감영 감옥에서 옥사한 순교자는 을해박해 때의 14명, 정해박해 때의 3명, 병인박해 때의 2명 등으로 19명에 달한다. 이들 중에서 1위(이윤일)가 1984년 시성되고, 20위(울산 장대 순교자 3위 포함)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한편 이곳은 동학(천도교)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처형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최제우가 처형된 곳은 지금의 대구시 중구 종로동(덕산동) 약령시(藥令市) 앞 덕산시장(염매시장)의 한복판에 해당하는 곳(현재 계산아파트)이었다.
최제우의 처형장이였기에, 천주교 성지 조성에 앞서 천도교에서 이곳을 성지로 기념하였다. 천도교 신자였던 구암(龜菴) 김연국(金演國)이 백방으로 고증한 뒤에 이 관덕정을 성지로 조성하기 위해 건물을 사들였으며, 김연국의 아들인 김덕경 · 김도경이 ‘상제교(上帝敎)’라는 간판까지 여기에 달았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시천교의 대구지부 사무실로도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뒤에는 관덕정이라는 건물 자체가 완전히 헐려 버렸다.
관덕정, 순교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나다
관덕정이 도시청(都試廳)으로서의 용도가 필요 없게 된 1906년, 대구 유지들이 모금을 하여 관덕정을 수리하고 교원 양성학교를 개설했으나 폐교되어 헐렸고 마당에 동문 시장의 일부가 옮겨와 ‘새 장터’ 또는 ‘남문 시장’으로 불리다가 1937년 남문 시장이 옮겨 간 후 현재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관덕정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 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방치돼 왔다가 1984년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아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순교한 이윤일(요한)이 시성(諡聖)되면서 비로소 순교성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박해시대 관덕정 처형장으로 고증된 대한적십자병원 옆 부지 155평을 확보한 뒤 관덕정을 복원을 하기로 하고 1985년에 기공식을 하고 1991년 1월 20일 지하경당 축복식과 성 이윤일 유해 이전 봉안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해 5월 31일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식 누각으로 지금의 관덕정 순교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순교 기념관에는 성 이윤일 요한 및 다른 성인들의 유해와 함께 영남 지역의 천주교회사를 살펴볼 수 있는 갖가지 귀한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2002년 1월 21일에는 기념관 입구에 대구대교구 제2주보 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의 동상을 세웠고, 2007년 1월 21일 기념관 바로 옆에 신관을 신축하여 회의실과 강당 등 순교신앙 학습의 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
2016년 9월 3일에는 개관 25주년을 맞아 2014년 시복된 124위 중 이곳에서 순교한 11위 순교 복자 기념비를 제막하였다.
관덕정 기념관에 도착했으나 주차장이 따로 없어 헤매다가 간신히 서설 주차장을 찾아 주차를 하고 기념관에 들어서니 오후 1시, 예상보다 1시간이 빗나갔다. 그러나 일단 기념관을 돌아보고 식사를 하기로 했다.
건물은 성벽에 올린 단청 누각의 형태다. 측면 누벽 외곽엔 순교 부조(돋을 새김)가 새겨져 있고 누벽 맨 위에는 돌아가며 성곽의 총안(銃眼) 같은 방형(사각형) 구멍이 뚫렸다. 어떤 탄압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겠다는 의지와도 같다.
계단 따라 올라가면 출입문 바로 앞에는 척화비와 이윤일 요한 동상과 관덕정 순교복자비가 가지런히 서 있다.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이 전국 곳곳에 세운 척화비는 서양 세력을 악마화하여 이를 물리치자는 의도로 세운 비이다. 결국 이 비가 천주교 박해의 동력이 되어 무자비한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양산했다. 성 이윤일 요한 동상은 최홍록 스테파노의 작품으로 높이 2.2m 폭 0.7m의 규모로 소재는 청동이다.
전시관 안에 들어서면 층별 전시실 안내가 붙어 있다. 1층에는 사무실과 순례자 쉼터가 있고 2층에는 제1전시실, 제2 전시실이, 3층에는 제3전시실이 있다. 그리고 지하에는 기념관 경당과 유해 현시실, 메모리얼 홀, 고해소가 있다.
- 지하1층 -
먼저 지하에 내려가니 성모님 모자상이 있고 현시실 앞에는 순례지향 봉헌대가 있는데 순례지향 봉헌대란 순례자들이 구멍 뚫린 카드에 각자가 가장 절실하게 지향하는 바를 적어 이를 여기에 걸어두면 매년 평신도 주일에 카드를 모아 관덕정 순교자 들에게 봉헌하고 자료실에 보관한다고 한다. 우리 역시 각자의 지향하는 바를 적어 봉헌하고 순교자 현시실로 갔다.
순교자 현시실
▲ 베트남 성인 유해 -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베트남에서 선교하다 순교한 장 루이 보나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피에르 뒤물랭 보리, 후앙 닷, 파울로 콴 등이다.
▲여러 성인 유해 - 좌로부터 성 이윤일 요한, 성 모방·앵베르·샤스탕, 성 유스티노, 성 비오 10세 교황의 유해
▲ 성인의 옷자락과 유해 - 윗단의 액자 속은 좌로부터 베트남과 중국 성인의 옷자락과 인증서이고 아랫단은 성인 유해로 성 요한보스코, 성 푸덴스·성 만수에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 루페르토 비르질리오의 유해이다.
▲십자가 못 모양의 열쇠 - 로마에 있는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의 유해보관소에서 시토회 수도자들이 사용한 열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의 못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성당 내부에 들어가니 전면에 성 이윤일 요한의 유해가 안치된 돌 제대가 있고 그 뒤에는 통상의 경우와 같이 십자고상이 모셔졌다. 제대 후면 왼쪽에는 감실이 있고 오른편에는 이윤일 성인상 액자가 있고 그 앞에 성모상이 있다. 성모상 대좌에는 프랑스 파리 뤼드박 성모 발현지 의자 조각이 봉헌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벽은 벽돌조로 되어 있으며 양쪽 벽면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나누어져 있다.
고해소를 마지막으로 지하에서 2층으로 올라와 전시실을 관람했다.
전시실은 제1, 제2전시실 둘로 나뉘어져 있다. 제1전시실은 주로 경상도 지역 교우촌의 분포를 패널을 통해 보여주고, 제2전시실은 관덕정의 변모와 이에 따른 순교자들의 삶과 그들의 신앙을 보여준다.
제1전시실
제1전시실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에 숨어 살던 신자들이 경상도 산골로 숨어 들어오면서 경상도 지역 교우촌이 크게 늘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경상도 교우촌의 형성에 관한 자료는 신유박해 때 문초와 형벌을 받은 신자의 진술과 판결을 기록한 사학징의, 황사영의 백서, 다뷜리 주교의 조선순교자역사 비망기 등이 대표적이고, 이밖에 리델 주교, 뵈르뇌 주교, 최양업 신부 등의 서간문에도 경상도 지역 교우촌이 상세히 나와 있다.
수덕자 홍유한은 서울에서 태어나 이익(李瀷)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서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는데 가족의 반대에 부딪쳐 1775년 경북 영주땅으로 내려와 칠극의 덕을 실천하며 죽을 때까지 수계생활을 하였다.
칠극(七克)은 예수회 선교사 판토하가 지은 수덕서로, 죄악의 뿌리 7가지 오만, 질투, 탐욕, 분노, 식탐, 음욕, 나태를 극복하는 것이 7극인데, 곧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이다.
뮈텔주교의 일기는 8대 교구장 뮈텔 주교가 1890년 8월4일부터 선종 직전인 1933년 1월4일까지 42년간 매일 쓴 일기이다. 총 분량이 6,000여 쪽이나 되며 지금은 파리 외방외방전교회에 보존되고 있다. 한국교회사 연구소가 사료적 가치를 인식하고 마이크로필름에 담아와 14년 동안이나 번역하여 8권의 책을 내었다. 이를 요약하여 패널로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
제1전시실은 관덕정의 변모와 이에 따른 순교자들의 삶과 그들의 신앙을 보여준다.
염락풍아(廉洛風雅)는 성리학자 염계의 주돈이와 낙양의 정호 등의 시를 모은 책이다.
제3전시실 - 성인의 방 영광의 방
3층 제3전시실에서는 이윤일 순교성인의 삶과 신앙의 여정을 소개한다. 그는 고향 충청도 홍주를 떠나 상주 갈골을 거쳐 문경 여우목에 정착한 후 여러 가정을 방문하며 전교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박해 상황에서도 용감히 신앙을 전파하다가 체포되어 문경 관아에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후, 병인박해 때 관덕당에서 순교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했던 이윤일 성인은 대구대교구 주보인 루르드의 성모에 이어서 제2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유해는 기념관 성당의 제대에 안치되었다.
▲이윤일 성인의 목관
1976년 이윤일 성인의 유해를 용인 먹방이에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할 때 사용한 관이다.
▲이윤일 성인의 생과 사, 그 여정
①충청도 홍주 (출생) ②상주 갈골 ③문경 여우목 ④문경 관아 ⑤상주 감옥 ⑥상주 관아 ⑦관덕정(1967.1 순교) ⑧아미산(1967.3 가매장) ⑨대구 날뫼(이장) ⑩용인 먹방이(1912 이장) ⑪안성 미리내(1976 이장) ⑫대구대교구 성모당(1987 최종안치)
▲김봉삼 가밀로가 옮겨 적은 허인백 야고보의 치명사적
이 기록물은 1961년 김봉삼 가밀로가 진목정 순교자 허인백 야고보 딸 골롬바로부터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해 출신 허 야고보가 이양등 베드로와 김종륜 루카와 만나 언양 살티에 거주하다가 세 가족이 함께 경주 산내 소태동 단수골 범굴에 이르러 성모덕서도문(聖母德敍禱文, 성모님께 바치는 탄원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이굴에 사는 주인이 있거든 난처한 우리 입장을 생각하여 좀 비켜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조금 후 범이 나타나 기지개를 켜면서 둘러본 후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 세 분 순교자의 사적이 울산지역에서는 세 분이 울주 죽림공소에서 체포되어 경주로 호송되어 왔다고 하며 산내 범굴 이야기는 없다. 이 편지가 순교자 사적을 바로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김종륜 루카 수택본
복자 김종륜 루카가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하지 전에 지녔던 책을 그의 손자 김병옥 요한이 가보로 보관해 온 것들이다.
▲ 순교자 행적 스테인드 글라스
관덕정 순교자의 순교사적 을 내용으로 조성한 유리화이다.
▲옥상 전망대
관덕정 순교기념관 옥상 전망대는 기념관의 지붕이다. 망루 형태의 옥상전망대는 화려한 단청이 장식되어 순례자들의 눈길을 끈다. 이곳 단청에서는 사찰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문양들이 있다. 예수님과 십자가, 비둘기와 물고기, 포도나무와 백합, 초와 구름 알파요 오메가, XP십자가 등 성경과 관련된 상징물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오후 2시 관덕정 관람을 마치고 근처에 있는 전통 한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고 계산 주교좌성당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