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4. 금탑사 석굴과 5호16국시기 불교
중국불교 초석 다진 5호16국 군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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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탑사 석굴> |
사진설명: 마제사 석굴에서 5㎞ 떨어진 곳에 있는 금탑사 석굴. 동·서 2개로 입구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
중국에서 하(河)라면 황하, 강(江)이라면 양자강(장강)을 가리킨다. 하서주랑(감숙주랑)은 황하 서쪽에 위치하며, 남으로는 만년설과 빙하를 머리에 인 동서 800km에 이르는 기련산맥, 북으로는 북산(北山)산맥·합려산·용수산 사이에 낀, 긴 띠 모양의 지대다. 일본은 하서회랑, 중국은 하서주랑으로 부르는데, 둘 다 ‘복도처럼 긴 지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하서주랑은 감숙성에 속해 있는데, 감숙이란 감주(장액)와 숙주(주천)에서 따온 이름. 동남에서 서북까지 1655km나 되는 감숙성은 남북으로 가장 넓은 곳이 530km, 제일 좁은 곳이 25km에 불과할 정도로 좁고 길다.
특히 1000km 정도 길게 뻗은 3000~4500m 높이의 기련산맥 위엔 한여름에도 백설이 덮여 있다. 기련산맥에서 흘러내린 눈 녹은 물은 관개수로가 돼 하서주랑 곳곳을 적셔주는데, 눈 녹은 물이 만든 오아시스 도시를 연결한 것이 바로 하서주랑이다. 석양하(石羊河) 유역의 무위, 흑하(黑河) 근방의 장액·주천, 소륵하(疏勒河) 부근의 옥문·돈황이 동남에서 서북으로 길게 연결돼 있다. 오아시스를 이은 이 길이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말한 ‘비단길’(絲綢之路)이며, 이 길을 통해 캐러밴이 운반한 비단은 저 멀리 로마 궁정까지 실려 갔다.
하서주랑을 답사하던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이 기련산맥 속의 마제사 석굴에 간 것이 2002년 9월30일. 오전 11시 도착해 마제사 석굴을 보고, 동남쪽 5km 정도 떨어진 금탑사(金塔寺) 석굴로 발길을 돌렸다. 거리는 5km에 불과하지만 산길이라 상당히 멀게만 느껴졌다. 산허리를 끼고 돌기를 몇 번, 마침내 금탑사 석굴에 도착했다. 참으로 외진,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곳에 석굴이 있었다. 여기까지 온 취재팀은 우리가 처음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산중턱 바위 면에 개착된 금탑사 석굴은 동·서 2개. 헉헉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입구에 도착했다. 문을 여니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관리상 그렇게 한 것 같았다. 동·서 석굴 모두 잠겨 있었다. 석굴 내부는 보지 못했으나, 문 앞에서 내려다 본 계곡 풍광은 일품이었다. 단풍 든 나무들이 상록수 사이에 서있고, 들판엔 푸른 풀들이 틈도 없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아쉬움만 남긴 채, 금탑사 동북쪽 3km 지점에 있는 상·중·하 관음동 석굴로 달려갔다. 도로 주변은 온통 풀밭이었고, 풀밭엔 양떼들이 줄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 천연스레 풀을 뜯는 양들의 평화로운 얼굴, 양치는 목동의 한가한 모습, 이곳이 바로 극락(極樂)이 아닌가 여겨졌다. 관음동 석굴은 상중하 3굴이 서로 인접해 있었지만, 훼손이 심해 지금은 20여 개의 감실만 남아 있었다. 상중하 관음동 석굴이 정확하게 언제 조성됐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마제사 석굴과 비슷한 시기에 개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중턱 바위에 개착된 금탑사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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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마제사 석굴 계곡에 있는 관음동 석굴. |
마제사 계곡엔 이처럼 모두 7개의 석굴들이 존재한다. 마제사 북사·남사 석굴, 금탑사 동·서 석굴, 상·중·하 관음동 석굴. 계곡에 많은 석굴이 있다는 것은 한 때 이 지역이 하서주랑 최대의 불교센터 중 한 곳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가 ‘누가 불교를 후원했느냐’다. 하서주랑은 흉노족들의 거주처였지만, 전한 무제 이래 흉노들은 고비사막 이북으로 쫓겨 가고, 한족이 관리하는 땅으로 변했다. 후한, 삼국시대, 서진 시기 하서주랑 일대엔 특별한 혼란이 없었고, 양주(凉州)에 속했다. 한나라 때 양주는 하서4군(장액 주천 무위 돈황)을 말하는데, 서진 시대 양주엔 8군이 있었다. 그러나 290년대부터 시작된 ‘진의 내란’(팔왕의 난. 291~306)을 계기로, 중국 내지와 주변 지역은 전대미문의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른바 오호십육국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오호(五胡)란 한족(漢族) 입장에서 본 국외 다섯 오랑캐를 가리키는 데, 흉노·갈·선비·저·강족을 말한다. ‘팔왕의 난’ 당시 각 왕들의 용병으로 채용된 ‘다섯 민족’은 중국 내지 이 곳 저 곳에 터전을 잡았다. 물론 팔왕의 난 이전에 오호족들은 이미 중국 내지에 정착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이래 흉노·저·강족들은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끌려나와 중국 내로 강제로 옮겨졌다. 흉노는 지금의 태원에, 저족과 강족은 관중(關中)에 이주 당했다. 중국에 들어온 그들은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그러다 팔왕의 난이 일어났다. 각 왕들은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모았고, 이 와중에 흉노 등 오호(五胡) 세력들이 결집되기 시작했다.
성도왕 사마영 휘하 흉노들은 유연(劉淵)을 중심으로 뭉쳤다. 사마영이 그에게 흉노 부락의 병사를 징발하는 임무를 맡겼던 것. 유연은 본래 흉노 우두머리 선우의 자손으로 그의 조상이 한나라 왕실과 통혼한 사실을 이유로 성을 ‘유(劉)’라 했다. 혼란이 격렬해짐에 따라 유연은 산서 지역을 근거로 흉노의 자립을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결국 304년 10월 일찍이 남선우의 근거지였던 이석(離石. 현재 산서성 이석시)을 수도로 ‘한왕(漢王)’이라 칭하고 ‘원희(元熙)’라 건원해 독립국을 세웠다. 오호십육국 시대가 본격 개막된 것이다. 팔왕의 난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국세는 급속히 신장됐다. 유연은 서진이 파견한 사마등을 격파해 하동 지역을 접수하고 308년 10월 포자(蒲子)에서 황제에 올랐다. 309년 1월 평양으로 천도했다, 310년 7월 그곳에서 병사했다.
유연이 죽은 뒤 약간의 혼란이 있었지만 311년 그의 아들 유총(劉聰)이 즉위했다. 유총은 일족인 유요(劉曜)와 갈족인 석륵(石勒)을 시켜 서진의 군현을 공격·함락하기 시작했다. 311년(영가 5) 5월 흉노군은 마침내 서진의 수도 낙양을 점령했다. 회제(284~313)와 황후 양씨는 생포돼 평양으로 압송됐다. 회제는 313년 1월 베풀어진 연회에 참석, 앞치마를 두르고 흉노 황제에게 술을 따랐다. 이를 본 서진의 신하들이 방성대곡(放聲大哭)했음은 물론이다. 흉노는 그간 한족에게 당한 설움을 이런 식으로 되갚았다. ‘술 따르던 회제’를 희롱하는 데 치친 유총은 회제를 독살했다. 일련의 사건을 학자들은 ‘영가연간(永嘉年間)의 상란(喪亂)’(307~312년에 일어난 슬픈 난리)으로 부른다.
양자강 남북에 골고루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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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장액 시내에 있는 목탑. |
가까스로 낙양에서 도망친 사마업이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愍帝. 270~317)로 312년 4월27일 등극했지만, 316년 장안으로 들이닥친 유요의 군대에 항복하고, 그 해 11월18일 민제는 한(漢) 황제 유총에게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렸다. 결국 민제도 회제 못지않은 치욕을 받고 317년 12월20일 18세의 나이로 살해되고 말았다. 삼국지에 나오는 사마의 중달(仲達)의 후손들이 세운 서진(265~316)이 역사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오호는 이후 중국 각 지에 독립 왕국을 건설했다. 유연이 세운 성한(成漢), 320년대의 전조(유요)와 후조(석륵), 350~360년대의 전연과 전진, 380년대 중기~390년대 중기의 후연과 후진, 410년대 말~420년대 중기의 북위와 하(夏)가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오호십육국은 304년 10월 이웅(李雄)과 유연이 각각 사천과 산서 일대에서 성도왕과 한왕을 칭한 해부터 선비족 탁발씨의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의 135년에 걸친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비난받고 부정되어야 할 시기”는 결코 아니다. 특히 중국불교 발전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불교가 중국 사회에 골고루 전파됐던 때였고,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회가 창조된 시기였다. 새로운 중국이 형성된 시기였다”고 서울대 박한제 교수는 분석한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이 급속하게 불교로 기운 것이다.
사실 이 시기 불교는 양자강 남북에 골고루 전파됐다. 특히 화북 지역을 통치한 오호의 군주들은 불교를 열렬하게 숭상했다. 이민족들이 불교를 신봉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후조(後趙. 328~352) 무제 석호(石虎)와 왕도(王度)의 대화다. 불교도 수가 증가하자 재상 왕도가 335년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려, “불타는 외국의 신이기에 왕과 백성들에게 알맞은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후조의 백성들이 불타를 숭배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이를 어긴 사람들을 벌하며 출가한 사람들을 환속시킬 것”을 요구했다. 무제 석호는 이에 대해 “짐과 짐의 백성들은 본래 이민족이기에 외국의 신인 불타야말로 숭배해야할 대상”이라며 “불타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불교에 귀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4세기와 5세기 초 북방에 건립됐던 왕조들 가운데 불교와 관련해 언급될 가치가 있는 왕조는 여럿이다. 흉노족인 석(石)씨의 후조(後趙. 328~352), 티베트 계열인 부(符)씨의 전진(前秦. 351~394), 같은 티베트 계열인 요(姚)씨의 후진(後秦. 384~417), 흉노족인 저거(沮渠)씨의 북량(北凉. 397~439). 이 가운데 북량은 하서주랑에 있었던 나라. 북량은〈대반열반경〉등 경전 역경에 막대한 후원을 했는데, 이것이 후일 중국불교 발전에 토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마제사 석굴을 출발한 차는 어느 새 무위(武威)에 도착해 있었다. 2002년 9월30일 밤 10시45분이었다. 천마빈관 722호에 투숙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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