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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박씨(咸陽朴氏)대문중(大門中)의 필요성(必要性)
함양박씨(咸陽朴氏)전종인(全宗人)들에게 호소(呼訴)를 합니다.
13만(萬)종친(宗親) 여러분!! 지금 우리 전종인(全宗人)들은 밀양박씨(密陽朴氏)들이 처놓은 올가미 덧에 걸려서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事實)도 모르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더 늣기전에 정신(精神)을 똑바로 차리시고 가슴에다가 두손을 얹어놓고 지긋이 눈을 깜으며 현재(現在) 우리모두가 어디를 가고있는지 신중(愼重)한 마음으로 반성(反省)을 한번 해 봅시다.
우리의 선조(先祖)들과 유적(遺蹟)들은 개성(開城)에 버려두고 800여년(餘年)을 말 없이 살아오다가 밀양(密陽)박세욱(朴世旭)이100년전(年前)에 밀양박씨(密陽朴氏)규정공파(糾正公派)에서 만들어진 임인(壬寅)족보(族譜)에 올려진 족보(族譜)를 근거(根據)로 해서 신라소원록(新羅溯源錄)을 발표(發表)하면서 고증(考證)을 할수도 없는 경명왕자(景明王子)의 8대군(大君)의 분봉설(分封說)로 세상(世上)을 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우리 대종회(大宗會)는 선조(先祖)들의 뿌리도 모른체 800여년(餘年)을 고요히 살아오다가 경명왕자(景明王子)8대군(大君)의 분봉사실(分封事實)에 현옥되어서 고증(考證)도 해 보지않고 영명재(永明齋)후등(後墱)에 속함대군(速咸大君)의 단비(壇碑)를 새우고 제단(祭壇)을 설치(設置)를 해 놓고 실전(失傳)된 우리 선조(先祖)들의 설단(設壇)과 함깨 시제(時祭)를 올리니 대전(大田)의 성종(聖鐘)대종회장(大宗會長)이 밀양박씨(密陽朴氏)들이 조작(造作)한 박씨선원세보(朴氏璿源世譜)에 미지(未知)의 5대(代)설단(設壇)을 추가(追加)하고 시조공(始祖公)의 묘소(墓所)에 가지않고 속함대군(速咸大君)단비(單婢)뒤꾸석에 초라한 상석(床石)에다가 시조공(始祖公)의 시제(時祭)를 올리는 웃지못할 촌극(寸劇)이 벌어진 시조공(始祖公)의 학대(虐待)가 벌어지기도 한 성종(聖鐘)회장(會長)의 표성비(表誠碑)까지 새워준 대종회(大宗會)의 행동(行動)을 이제는 더 이상(以上)방관(傍觀)할 수가 없는 속함대군(速咸大君)의 훼철(毁撤)을 건의(建議)하오니 추향제전(秋享祭前)의 임원(任員), 이사회(理事會)에서 가결(可決)을 시켜서 금년(今年)시제(時祭)에는 우리들의 선조(先祖)들 만을 시제(時祭)를 올리고 대문중(大門中)창설(創設)을 해서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운영(運營)체계(體系)를 바꾸어서 대문중(大門中)은 종사(宗事)운영관리(運營管理)를하고 대종회(大宗會)는 집행관리(執行管理)로 분담(分擔)을 해서 허물어진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위신(委信)을 바로새워야 합니다.
위와같은 속함대군(速咸大君)의 추방(追放)없이는 함양박씨(咸陽朴氏)라는 존재(存在)는 이 세상(世上)에 살아 남을수가 없으니 각자(各自)가 마음단단이 먹고서 종친행사(宗親行事)에 자발적(自發的)으로 참여(參與)해서 대문중(大門中)부터 창설(創設)을 하고 우리들의 역사(歷史)와 시조공(始祖公)의 묘당(廟堂)과 대동보(大同譜) 대종회(大宗會)의 홈페이지 개설(開設)과 잘못기록(記錄)들의 수정(修正)등등(等等)을 새마을운동(運動)으로 종친(宗親)여러분들의 적극적(積極的)인 참여(參與)를 호소(呼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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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박씨 임원. 이사회 귀중.
함양박씨의 대종회장을 탄핵소추 합니다.
함양박씨의 대종회는 대종회장에게 전권을 맛기고 있으니 현재와 같은 안하무인이다. 속함대군 이하 5世들에 미쳐서 문중(門中)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임기만 체우면 그만이다. 이름뿐인 함양박씨의 대종회는 조상도 역사도 문중도 아무것도 없는 함양박씨들의 현 상태를 누구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우리나라의 역사기록(歷史記錄)에서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수가 없는 경명왕자(景明王子)의 8대군(大君)분봉설(分封說)을 받아들인 함양박씨(咸陽朴氏)의 대종회(大宗會)는 영명제(永明齋)후등(後嶝)에 단비(壇碑)와 설단(設壇)을 하고 미지(未知)의 5代설단(設壇)까지 해 놓고 시제(時祭)를 지내기에 울화가 치밀어 함양박씨소원록(咸陽朴氏遡源錄)을 찾아내고 다음은 신라소원록(新羅溯源錄)을 찾고 마지막으로 경명왕자(景明王子)분봉설(分封說)의 뿌리까지를 찾아서 2011년에 대종회(大宗會)에 올렸으나 아직까지도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니 대종회장(大宗會長)들에게 경명왕자(景明王子)의 8대군(大君)의 분봉설(分封說)을 탄핵소추(彈劾訴追)하오니 받아주시기를 앙망(仰望)하옵나이다.
2017. 9. 11.
자문위원(諮問委員) 만오(晩悟) 박노용(朴魯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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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박씨(咸陽朴氏)의 특보(特報)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유래(由來)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시조(始祖)
함양박씨(咸陽朴氏)는 신라(新羅)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후손(後孫)으로고려조(高麗朝)인종(仁宗1123~1147)때 문과(文科)조청대부(朝請大夫)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증(贈)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와 함양(咸陽)에 살았기 때문에 함양군(咸陽君)으로 봉작(封爵)이 되었기 때문에 박선(朴善)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함양(咸陽)으로 해서 세계(世系)가 시작(始作)이 되었다.
咸陽朴氏는 始祖公 朴善이 가문(家門)을 연 이후 많은 人物을 輩出하였는데, 그중 박신유(朴臣蕤)는 고려고종(高麗高宗24年(1237년)약관(弱冠)25세에 김경손(金慶孫)과 함께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하여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고 증금자광록대부 판삼사사(贈金紫光祿大夫判三司事)이고 시호(諡號)는 충질(忠質)이다. 그리고 박신유(朴臣蕤)는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후손이 6개 之派로 갈라졌다.
즉, 검교군기소감(檢校軍器少監)을 지낸 박지문(朴之文)의 후손이 군기소감공파를, 위위윤(尉衛尹)을 지내고 문원공의 문원공의 시호(諡號)를 받은 박지빈(朴之彬)의 후손이 문원공파를, 1∼2차에 걸쳐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의 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의 휘하에서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使)로 출전하여 일본 대마도와 규슈지방을 공략한 박지량(朴之亮)의 후손이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를,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박지수(朴之秀)의 후손이 부사공파를,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낸 박지온(朴之溫)의 후손이 감찰어사공파를, 금오위중랑장(金吾衛中郞將)을 역임한 박지영(朴之穎)의 후손이 중랑장공파를 이루고 있다. 그중 문원공파와 부사공파에서 가장 많은 후손과 인물을 배출하였다.
함양박씨(咸陽朴氏)에서는 고려조(高麗朝)에서 9명의 문과급제(文科及第)를 냈고 조선조(朝鮮朝)에서 문과(文科) 73명, 무과(武科) 74명을 배출(輩出)했으며, 청백리(淸白吏) 1명에 호당2명 공신(功臣) 3명이 나왔다.
★다른곳에서는 조선조(朝鮮朝)문과 69명은 군위박씨(軍威朴氏)4명을 뺀 수치인데 군위군(軍威郡)에 거주(居住)하고 있는 헌(軒)의 3子 興陽의 자손(子孫)들 4명은 현제까지도 군위군에서 군위군파로 살고 있는데 뺀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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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속함대군
속함대군(速咸大君)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해서 전파가 되었는지도 모르게 구전(口傳)으로 전파되어 속함대군(速咸大君)을 함양박씨 시조(始祖)라는 것은 대종회(大宗會)의 기록(記錄)이 아니고 각 파보(派譜)에서 중시조 선(善)이라고 기록(記錄)되어있는 것은 허위(虛僞)사실(事實)의 기록(記錄)으로 무효(無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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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위(虛僞)사실(事實)의 유포(流布)
신라가 망하고 800여년동안 말없이 지나온 1760년에 밀양(密陽) 박세욱(朴世旭)이 편집한 신라소원록(新羅溯源錄)을 처음으로 공개한 사실을 2005년도에서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배비정의 해제(解題)로 신라소원록의 근거로 공개가 됨으로서 8대군분봉사실의 허구성을 밝혀낸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사실규명을 했더니 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있는 것을 해제(解題)를 했을뿐 전거(典據)는 알수가 없고 신라소원록에서 8대군분봉사실을 박세욱(朴世旭)이 편집발표한것을 알아낸 첫번째로 기록된다고 하었다.
함양박씨는 1100년대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데 기록으로 확인은 1200년대에 충질공부터 문원공의 아들 4형제급제를 할 때 모두가 부(父) 지빈(之彬) 조부(祖父) 신유(臣蕤) 증조부 4세 윤정(允禎)으로 기록을 했고 4파 세옹공(世蓊公) 묘비(墓碑)에서 3세 신청(信淸)이 함양(咸陽)에 살았다고 기록(記錄)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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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소원록(溯源錄)이란?.
신라가 망하고 800여년이지나간 1760년에 밀양(密陽) 박세욱(朴世旭)이 작성한 신라(新羅)소원록(溯源錄)에는 경명왕(景明王)의 8대군 분봉사실이 처음으로 발표가 되었으나 어디에서 흘러 나왔는지 근거도 모른체 구전으로 전파가 되었고 선조들이 족보를 하면서도 부인을 해 왔는데 1979년에 서울의 대종회장(大宗會長) 남순(南淳),부회장(副會長)시언(始彦)은 전거확인(典據確認)도 없이 성금(誠金)을 수합(收合)하여 영명재(永明齋) 후등에 속함대군(速咸大君)설단(設壇)과 속함대군(速咸大君)의 단비(壇碑)를 세우고 해마다 시제(時祭)를 올리고 있는데 2004년에는 대전(大田)의 대종회장(大宗會長)성종(聖鐘)이 그줄에 미지(未知)의 5대설단(代設壇)을 추가해서 제사(祭祀)를 올리고 있다. 신라(新羅)소원록(溯源錄)이 유포되어 여러박씨들의 시조가 생기니 대종회(大宗會)에서는 영명재(永明齋)후등에 속함대군(速咸大君)의 설단에서 시조(始祖)라는 소리가 나니 4파종중(派宗中)에서는 때가 왔구나하고 1985년에 만들어놓은 함양박씨소원록(咸陽朴氏溯源錄)을 2009년도(年度)부사공파(副使公派)카페에다가 시조(始祖)는 속함대군(速咸大君) 언신(彦信)이시다.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시조(始祖)라는 기록(紀錄)은 여기뿐이다. 함양박씨소원록(咸陽朴氏溯源錄)을 홈페이지에 올려놓은것을 보고서 수정을 요구하면서 재지를 해 놓은후에 본격적으로 탐색(探索)을해서 속함대군(速咸大君)의 뿌리를 찾아낸 과정(過程)을 소개(紹介)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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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올리는 이유
이글을 대종회홈페이지에 올리는 목적은 종사일을 보시는데 꼭 알고 있어야만 될 기본자료들 입니다. 함양박씨(咸陽朴氏)는 아직까지도 기본적(基本的)인 기초자료(基礎資料)가 없습니다.
대종회(大宗會)에 수차례 건의를 해 왔으나 앞장을 서야할 회장님의 반응이 없으시니 이 사실(事實)은 모든 자손들이 기본적으로 알고 계셔야만 잘못된 사실을 꼭 바로 잡고 나가야 하겠기에 여러가지 자료들을 올렸습니다.
8대군을 봉제사 하는문중은 밀양문중과 함양문중 뿐이고 미지의 5대설단(代設壇)까지 해 놓은곳은 함양박씨문중(咸陽朴氏門中) 뿐이다. 설단(設壇)을 주장(主張)하는데 그누구도 반대(反對)한 사람이 없었던 대종회(大宗會) 임원(任員)이사(理事)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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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4088 [기타의견] 몇가지 의견 개진합니다
이름 : 이재옥 - 등록일 : 2011-01-11 조회수 : 4
경명왕이 후사가 없었다는 근거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동생에게 양위했다고 후사가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은 추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려나 조선에서도 후사가 있으면서 동생에게 양위한 경우가 있습니다. 중국의 송나라 태조 조광윤도 동생에게 양위해서 조광의가 태종이 됩니다. 고려에서는 2대, 3대, 4대인 혜종, 정종, 광종이 모두 형제간입니다.
조선에서는 2대, 3대인 정종, 태종이 형제 사이입니다. 이런 이유로 윗대 왕의 후사가 없다고 단정 할 수는 없습니다.
조선 정종은 적장자는 없었지만, 아들이 15명이나 됩니다.
그래서 경명왕에게 후사가 없었다고 단정하기는 힘듭니다.
삼국사기 본기 경명왕조에 후사가 없어서 동생에게 양위했다고 하는 기사가 없습니다. 이는 그간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자식이 어려서 왕 노릇하기 힘들거나 아니면 동생의 세력이 강하면 후사가 바뀌기도 합니다. 신라 경명왕 때는 후삼국의 난립 시기로 정치가 매우 어려운 때입니다. 그리고 경명왕 즉위 때 동생 경애왕[위응]이 2인자인 "상대등"을 맡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서지학자가 아니기 때문에『신라박씨소원록』의 진위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책을 저술할 때 어떤 근거로 8대군 분봉을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구전을 기록했는지, 아니면 어떤 문헌을 참고했는지.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8대군 분봉을 부정한다면 밀양·고령·함양·죽산·상주·전주·순천·경주박씨 등 8개 성씨에서 시조 연원이 모두 바뀌어버립니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족보의 시조들은 대체적으로 신라의 왕실이나 고려 왕실 아니면 고려 때 탁월한 벼슬을 지낸 사람들을 시조로 여깁니다. 그래서 족보를 보면 시조로부터 몇 대 후손까지는 단 한사람으로 내려옵니다. 누가 아들을 1명만 두었다고 생각하겠습니까?(물론 1명만 둘 수도 있지만) 이는 역사적 기록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기술을 하게 된 겁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런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건 묵시적으로 인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고려 중기부터 조선조에는 고려사 또는 조선왕조실록, 방목 등등의 역사적 기록이 있기 때문에 족보에서 역부환조(易父換祖)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위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의견을 드렸습니다.
재옥 선생님의 말슴 잘 읽어 보았습니다 역시 사학가들의 견해와 저와의 차이는 현저 합니다. 그렇지만 경명왕의 사후 83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는 고려조를 거처서 이조 영조36년 까지는 경명왕의 왕자가 있었다는 기록을 본적도 들은적도 없었을때 여러사람들에 의해서 전거없이 만들어진 신라소원록이란 간행물을 검증도없이 사실화 시킨것을 지금에 와서 그 실체를 알았기 때문에 근거를 알고저 하는것입니다.
해명을 하신바와 같이 박씨들의 피해는 말을 할 여지도 없지만 소원록 자체를 공식적으로 인정을 해서 사용을 한다면 보다 더큰 피해가 온다는사실도 고려하지 않을수는 없는 일입니다. 각자가 사실을 인용해서 사용하는것은 자유겠지만 사용할수도 있다고 권장해서는 않될것입니다.
No. 4090 [수정요청] 기타의견 의 답변
이름 : 박노용 등록일 : 2011-01-11 조회수 : 17
이재옥 선생님의 말슴 잘 읽어 보았습니다
역시 사학가들의 견해와 저와의 차이는 현저 합니다. 그렇지만 경명왕의 사후 83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는 고려조를 거처서 이조 영조36년 까지는 경명왕의 왕자가 있었다는 기록을 본적도 들은적도 없었을때 여러사람들에 의해서 전거없이 만들어진 신라소원록이란 간행물을 검증도없이 사실화 시킨것을 지금에 와서 그 실체를 알았기 때문에 근거를 알고저 하는것입니다.
해명을 하신바와 같이 박씨들의 피해는 말을 할 여지도 없지만 소원록 자체를 공식적으로 인정을 해서 사용을 한다면 보다 더큰 피해가 온다는사실도 고려하지 않을수는 없는 일입니다.
각자가 사실을 인용해서 사용하는것은 자유이 겠지만 사용할수도 있다고 권장해서는 않될것입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현명한 파단을 기대 합니다
No. 4091 [기타의견] 답변드립니다.
이름 : 이재옥 등록일 : 2011-01-11 조회수 : 8
저희 연구원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절대 문중(종친회) 일에는 개입하지 않습니다.
저희 성씨본관에서는기존에 알려진 성씨 본관에 대한 소개만 하는 곳입니다. 즉, 성씨의 고향이나 한국의 성보에 소개된 글을 인용해서 서비스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의견이 맞고 틀리고 그런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 연구원에서 8개 박씨분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8개 박씨들이 경명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라 8공자에 연원을 두게 된 시점을 먼저 조사해보시죠?
신라박씨소원록이 1700년대에 쓰여졌으니, 8개 박씨들의 족보를 살펴보고 1700년 이전에 쓰여진 족보에도 8대군 분봉 사실이 적혀 있으면 신라박씨소원록이 8대군 분봉에 대해서 언급한 최초의 문헌이 아닐 것이고 1700년 신라박씨소원록 저술 이후에 간행한 박씨 족보에 8대군 분봉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면 이 책을 근거로 8개 박씨들이 시조를 신라 경명왕까지 소급한 것이라고 추정이 됩니다. 밀양박씨 박세욱이란 분이 구전으로 가문에 내려오는 전설을 기록한 것이지, 어떤문헌을 참고했는지 현재 알수 없습니다.
여하튼 저희 연구원은 성씨들에 대해서 소개하는 곳이지 이런 책(신라박씨소원록의 8대군 분봉)이 맞고 틀리다는 것을 판단하는 곳은 아닙니다.
그리고 함양박씨에서도 함양 남산에 중시조 박선 무덤 옆에
속함대군 단비를 세웠다고 알고 있는데, 함양박씨 종중에서도 팔대군 분봉을 부인하고 있는지요?
신라박씨소원록 원본이미지
아래 <신라박씨소원록 원본이매지> 주소가 잘못되어서 열리지 않으니 다시 확인을 부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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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희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공지사항
만오 | 등급변경▼
| 조회 11 |추천 0 |2011.03.05. 08:29
4파 무희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
1. 관습과 구전도 역사입니다.
······세대연계를 고증할 만한 문적이 없으니 구보에 속함대군 아래 실렸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삼가 기록한다.·····
·····지금 가히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또한 가히 원래 이러한 이치가 없었다고도 말할 수 없나니라·····
선조께서 족보의 서를 기록하매, 검증과 고증이 안된 관습과 구전을 옮겨 적을때, 그 일을 저으기 걱정하며 위와 같이 적었습니다.
처음 족보를 편찬한 시대가 1678년 숙종조 임을 감안 한다면 신라 종성의 정통성과 종실의 뿌리를 어떤 기록을 근거로 삼아 편찬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8대군의 변증으로 적통을 세우고 그 후 미확인 세대를 건너뛰어 1세로 삼아 계대를 계승하여 대 내외에 천명하는 절차를 거쳐 지금의 족보가 완성되었다고 봅니다.
4파 무희의 질문
1,700년이 넘는 기록의 터널을 고육지책이지만 슬기롭게 개척한 또 하나의 기록입니다.
이 일은 함양박씨만의 일이 아닌 8대군 후손들이 동참하여 온 범박씨의 역사입니다.
8대군의 변증은 8대군의 봉군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여러 가지 설과, 잘못된 기록을 나열한 뒤 그 기록이 잘못된 것임을 증명하면서 봉군이 사실임을 변증하는 역설입니다.
족장께서 속함대군을 부정하려면 8대군의 변증을 부정하는 기록을 제시 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理由
경명왕의 재임기간시에 8대군봉군사실의 기록이 없었고 왕이 죽은후 750년동안(신리망~무오대동보)은 없었는대 1760년에 밀양박세욱이 처음으로 발표가 확인되었으니 8대봉군사실은 갑술대동보이후가 분명함으로 속함대군은 후순위가 됨으로 우리의 시조는 휘 선 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갑술보에 그대로 옮겨적은 휘 념(諱 恬)께서 쓰신 무오보 서에서도 속함대군의 분봉 사실을 먼저 적고 휘 선을 1세로 삼고 있습니다. 이때는 이미 범박씨들의 중론이 있었기 때문에 봉군설이 있었다고 본다
족장께서 말하듯 속함대군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오보, 갑술보에서 묘가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는채 휘(諱)선(善)을 1세(世)로 모신 이유는 계대(繼代)가 확실히 고증(考證)할만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휘선(諱善)의 묘는 족보 편찬 뒤 함양에서 발견하였다.
세옹(世蓊)공 묘갈명(墓碣銘)에 함양에 기록이 분명하게 나와 있는대 무슨소리를 속함대군(速咸大君)도 계대(繼代)가 확실 하다면 1세(世)로 모셨을 테지만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후라서 그렇지 못하고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다고 생각 됩니다. 속함대군(速咸大君)을 부정하면 종실의 혼란과 정통성의 마비를 초래 합니다.
2. 신라박씨 소원록의 편찬연대
제가 저의 홈페이지에 옮겨 올린 소원록은 1985년 구,소,명종중에서 발행한 소책자입니다.
종중에 한학자와 보학에 깊은 종인이 계셨던 시절 19지파의 연원과 19지파 인물들을 그야말로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서 속함대군 까지 밝힌 책 이었습니다.
우리 4파 종중의 전통을 이어주신 종인들이 선조의 역사를 적어 계보를 밝힌 책이었습니다. 족장께서 거론한 신라소원록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족장께서 쓰신 글을 보면 “1760년대에 박세욱이 쓴 소원록에서 근거와 전거도 없이 8대군 분봉 사실을 공개하였다”고 하면서 8대군 분봉사실을 부인 하셨는데, 그 때는 이미 함양박씨 족보가 편찬된 후의 일이니 8대군 분봉사실을 부인하는 전거로 “신라박씨소원록”을 삼으면 안될 것입니다. 위에서 말 하였다
3. 젊은 세대를 위한 결단
기록(記錄)과 전거(典據)도 없이 8대군을 시조로 삼은 박씨들의 고민이야 말로 어떻게 다 할수 있었겠습니까?
변증(辨證)이라는 나름의 논리(論理)를 세워 박씨후손들의 동의를 받아 전통(傳統)을 세워 이어오는 작금의 현실(現實)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8대군을 부정(否定)하는 단정적 전거 없이는 족장께서 올리신 글을 삭제하여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물어물어 찾아온 아련한 젊은 세대에 부정적(否定的)인 인식(認識)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여물지 않은 가치관(價値觀)을 갖고 찾아온 종친들에게 종실 전체(全體)를 부정(否定)하게 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뿌리에 대하여 혼란의 세대를 사는 함양박씨에게 자부심을 주어야 합니다.
페이지 곳곳에 시조를 부인하고, 공론화 되지 않은 글을 전면에 내세워 감성을 자극하는 글은 삭제되어야 한다고 생각 됩니다.
종실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글들이 아무런 의견수렴 없이 함양박씨 관계 페이지에 노출되는 것은 족장님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전체 함양박씨의 생각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종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종실의 화합을 위하여 족장께서 올리신 글은 족장님께서 모두 거두어 주시는 것이 맞다고 생각 됩니다.
4. 이어져야할 전통
함양에 본관을 둔 선조께서 신도비와 족보에 자랑스럽게 먼저 내세워온 “속함대군”은 족장께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모실만한 분이라고 생각 합니다.
속함대군은 가상인물이고 善은 실존인물이다.
속함대군을 받아드리는것은 연결고리 역활뿐이다.
수 백년 내려온 전통이 하루, 한사람과 생각이 다르다고 바뀌지는 않습니다.
2000여년을 이어져온 종실의 전통과 관습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피에 섞여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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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제지(制止)를 받으면서도 끝내 속함대군(速咸大君)의 뿌리를 찾아내었다!! 내가 찾은 밀양박씨(密陽朴氏)임인보(壬寅譜)(1662)를 부정(否定)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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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명왕 8왕자분봉설>의 출처
밀양박씨(密陽朴氏) 壬寅譜 國譯文
박승건(朴承健) 1662년발행
신라팔대군 형제분봉(新羅八大君兄弟分封)
밀성군 밀양(密城君 密陽) 사벌군 상주(沙伐君 尙州)
완산군 전주(完山君 全州) 죽성군 죽산(竹城君 竹山)
속함군 함양(速咸君 咸陽) 강남군 순천(江南君 順天)
고양군 고령(高陽君 高靈) 월성군 경주(月城君 慶州)
신라시조혁거세의 성은 박(朴)씨이니 한선제(漢宣帝) 오봉원년(B.C 56년) 갑자 하(夏) 4월 병진에 계림에서 즉위하여 무진년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맞이하여 자손들이 점차 번창하여 옛날에도 보기 드물 만큼 수가 많아졌으며 동방의 박씨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에 전(傳)하기를 8대군(大君)을 분봉(分封)하였다는 설(說)이 있으나 고증(考證)할만한 문헌(文獻)이나 증거(證據)가 없어서 어느 시대에 분봉(分封)하였는지 어느 왕(王)의 아들인지 알 수가 없다.
동사를 살펴보면 석탈해(昔脫解)를 남해왕의 사위로 올바른 유명(遺命)을 받을지 아니하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 종척(宗戚)인 박씨들을 내보내서 주(州)와 군(郡)을 다스리게 하니 대개 경원(敬遠)하는 뜻이다.
그 시대의 사람이 주군(州郡) 군주(郡主)의 말이 있었으니 대군(大君)을 분봉(分封)했다는 것도 이때 일인지 알 수 없다. 8대군의 후손이 비록 성쇠(盛衰)함은 같지 않으나 지금 모두 세족으로 칭하고 그 외의 박씨도 모두 신라를 근본하여 대대로 관면(冠冕)이 이어진 집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석(昔)씨만은 나타남이 없으니 천도(天道)가 어긋나지 않음이 이와 같다.
그리고 분봉한 차례는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여 위와 같이 기록한다.
(出處: 密陽氏族譜 1662년 壬寅譜)
新羅八大君兄弟分封
密城君 密陽 沙伐君 尙州 完山君 全州 竹城君 竹山
速咸君 咸陽 江南君 順天 高陽君 高靈 月城君 慶州
新羅始祖赫居世姓朴氏漢宣帝五鳳元年甲子夏四月丙辰卽位于鷄林戊辰納閼英爲妃爪瓞之綿古所罕有東方朴此其始也 世傳有八大君分封之說而文獻無徵未知分封在於何代而大君是何王之子也
按東史昔脫解以南解王女婿因亂命而立出遣宗戚朴氏分里州郡盖遠之也時人有州主郡主之語八大君分封或在於是時歟八家之後雖有盛衰之不同皆以世族稱之其他姓朴氏皆本於新羅奕世官冕之家指不少屈而昔氏無聞焉天道之不爽有如是夫分封次序謹依世所傳者列錄如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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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명왕의 8공자분봉 사실인정이 않되고있는데 1662년 밀양박씨임인보에 8대군조작이 되었고 1760년에 박세욱이 이를 추가미화하고 박치화가 협력발표한것이 확인되었는데 경명왕의 8대군분봉사실은 밀양박씨들의 조작극으로 확인이 되었는데 공식적으로 인정할수 없는 투쟁을 합동으로 전개 할것을 제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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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2년(현종 3) 박승건(朴承健)이 간행한 밀양박씨의 족보. 분량은 1책이며, 호남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표제는
“밀양박씨족보”, 판심제는 “밀양세보(密陽世譜)”이다. 크기는 반곽 가로 19.5cm, 세로 24cm이며,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선장(線裝), 저지(楮紙)이다.
박승건의 발문에 따르면, 밀양박씨는 구보가 있었으나 임란을 거치면서 전해지지 않자
박승건의 아버지 박안성(朴安性)이 동종의 합의와 충청감사 박계현(朴啓賢)의 도움을 바탕으로 1621년(광해군 13) 에 족보를 간행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신유보(辛酉譜)이다.
그러나 이 신유보는 상당수의 후손들이 누락되는 등 미비점이 많아 박안성은 보유 작업에 착수하여 원고를 정리하였으나 간행하지는 못했다.
이에 그 아들인 박승건이 전라도 판관으로 부임하여 밀양박씨 외손이던 감사 이태연(李泰淵)의 전적인 협조를 받아 간행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족보는 사실상 신유보의 개간본이며, 편찬자는 박안성이다.
체제는 표지(表紙), 신라팔대군형제분봉연혁(新羅八大君分封沿革), 보도(譜圖) 상·중·하, 발문(跋文)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의 우측에는 묵서(墨書)로 “강희 원년 임인에 간행했다(康熙元年壬寅刊)”라는 간기가 표기되어 있다.
신라팔대군 형제분봉연혁은 신라 경명왕의 8대군의 분봉 사실과 이를 바탕으로 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을 약기한 것이다.
장자 밀성군(密城君)은 밀양박씨의 시조, 2자 사벌군(沙伐君)은 상주박씨의 시조, 3자 완산군(完山君)은 전주박씨의 시조, 4자 죽성군(竹城君)은 죽산박씨의 시조, 5자 속함군(速咸君)은 함양박씨의 시조, 6자 강남군(江南君)은 순천박씨의 시조, 7자 고양군(高陽君)은 고령박씨의 시조, 8자 월성군(月城君)은 경주박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견해인 바 박씨의 분파연혁이라 할 수 있다.
보도는 6층 횡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 면은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표(字標)가 매겨져 있다. 총 수록 대수는 16대로서 상에는
1대 박현(朴鉉: 司憲糾正)에서 6대까지, 중에는 6대에서 11대까지, 하에는 11대에서 16대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 족보는 1대 박현의 후손들을 최대한 수렴하고 있지만 박현의 현손 박강생(朴剛生)의 3자 의문(疑問)·절문(切問)·심문(審問) 계열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중에서도 절문→중손(仲孫:默齋)계열, 심문→원충(원충:判官) 계열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시기 다른 족보류와 마찬가지로 본손은 물론 외손·서자녀들까지도 수록되어 있다. 외손은 수록 대수에 있어 본손과 동일한 비중을 보이고 있으나 서자녀는 대체로 당대 또는 자녀대에 한정되고 있다.
다만 자녀의 등록 순서는 출생순이 아닌 철저히 선남후녀(先南後女)의 방식을 취하고 있어 이 시기 다른 족보와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각 인물의 주기는 개인에 따라 상략(詳略)이 심한 편이다. 12대 이전 대수에는 크게 현달한 인물이면 자(字), 호(號), 생년(生年), 과거(科擧), 관직(官職), 졸년(卒年), 시호(諡號), 묘소 위치, 배위(配位)의 성관(姓貫)과 처부의 이름 등이 기재되었다.
그러나 그 이하 대수로는 비록 문과를 거쳐 고관을 지냈더라도 과거와 관직만 간단하게 기록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박계현(朴啓賢)·박안세(朴安世)·박승종(朴承宗)·박자흥(朴自興) 등 극소수 인물에 한하여 졸년, 향년(享年), 묘소위치, 배위관계 등이 부기되어 있는 정도이다. 사위와 외손은 거의 대부분 본관(本貫)조차 표기하지 않았다.
이 족보는 신유보의 미비점을 수정·보완한 개간본이라는 점에서 일차적인 의의를 발견할 수 있고, 자녀 등록에 있어 선남후녀의 형태가 비교적 빨리 나타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신유보와의 상호 대비를 통해 차이점을 검토해 보는 것도 중요한 작업의 하나로 생각된다.
◇선대의 전통을 후대에 이어 주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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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재연혁(永明齋沿革)
신라 景明王때 팔공자 중 세째인 諱 彦信을 速含大君에 封하다(速含은 지금의 咸陽). 速咸大君의 後孫 尙書公 諱 善(1世)이 이곳 咸陽 賜琴洞 花粧山下 掛燈穴에 묻히다. 그 뒤 王朝가 바뀌고 數次의 喪亂으로 尙書公 墳墓를 失傳했다가
◈1697년(丁丑) 後孫 汝賢(僧名 思屹)이 荒原 宿草 사이에 短碣이 누워 있는 것을 發見, 尙書公의 墓임을 確認하고 僉知中樞府事 尙郁,義興縣監 起祖,玄風縣監 尙淳 등 諸宗이 달려와 다시 墳墓를 封하고 享祀를 올리다.
◈1746년(丙寅) 18代孫 良藎이 咸陽郡守로 赴任하여 齋舍를 마련하고 位畓을 작만하다.
◈1828년(戊子) 22代孫 義和가 以前의 閔鎭厚撰 神道碑文에다 金鼎均의 글을 補完하여 神道碑를 세우다.
◈1841년(辛丑) 25代孫 性燁이 神道碑를 마을 入口 바위 위에서 現位置로 移建하다.
◈1854년(甲寅) 陽秀가 墳墓의 莎草를 하고 墓前 崩缺된 곳을 補完하다.
◈1859년(己未) 神道碑閣을 創建하다.上樑文 文奎撰
◈1897년(丁酉) 26代孫 承旨 始淳이 任實郡守로 赴任하여 大規模 山訟을 일으켜 咸陽郡과 慶尙道와 京司에 까지 提訴하여 四山局內의 他塚을 모두 파내고 他人 占有 山麓을 還元시키다.
◈1913년(癸丑) 永明齋에서 大同譜를 發刊하다.
◈1929년(己巳) 任實 容万이 出財하여 永明齋를 重建하다.
◈1930년(庚午) 應勸이 出財하여 神道碑閣을 重修하다.
◈1945년(乙酉) 始會,暻根 등이 賣松하여 神道碑閣을 重修하다.
◈1969년(己酉) 靈巖 東周가 宗財를 收合하여 2世 仁挺,3世 信淸,4世 允禎,5世 臣유, 6世 之文 之彬 之亮 之秀 之溫 之穎의 5世10位를 영명재 後嶝에 設壇하고 守護人舍를 改築,祭位畓 四斗落을 買入 奉納하다.
◈1972년(壬子) 仁川 祺煥이 出財하여 신도비각 보수 및 丹粧을 하다.
◈1975년(乙卯) 釜山 泰述이 성금을 收合하여 영명재 보수 및 翻瓦를 하다.
◈1979년(己未) 서울 南淳,始彦이 성금을 수합하여 영명재 後嶝에 속함대군 設壇을 하고 상서공 墓庭碑를 復元하고 十位設壇을 改壇을 하고 기타 영명재 보수,宿舍 新築等 대규모 宗事를 수행하다.
◈1987년(丁卯) 大邱 在乙이 버스 노선에서 재실까지 진입로를 독단으로 擴鋪裝하다.
◈1987년(丁卯) 사금동 宗土收入으로 향사가 불가능하여 대종회장 在乙의 발의로 各道에서 二百萬원씩 수합하여 千四百萬원의 향사기금을 造成하다.
◈1990년(庚午) 11월 20일 在乙이 영명재 重建에 着工, 東植(대구)이 계승하여 성금을 수합하여 1992년(壬申) 1월 15일 竣役하니 永明齋와 門閣과 會議舍와 守護舍까지 全建物을 改新하여 面貌를 새로이 하다.
◈1993년(癸酉) 全州 春植이 永明齋誌 製作費 全額(千五百萬원)을 宗財로 奉呈하다.
2016.7.11.
<자문위원 박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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